하예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윤미라는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예진은 스쿠터를 세우고 헬멧을 벗은 후 윤미라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사모님.”윤미라는 아들과 대판 싸우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지만 하예진의 앞에서는 여전히 교양있게 온화한 미소를 선보였다.“그래요, 우리 얼른 안으로 들어가요.”윤미라는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하예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윤미라가 먼저 걸음을 옮긴 후에야 뒤따라갔다.노진규는 함께 나오지 않았다. 아내가 잠자코 차에 있으라고, 절대 내리지 말라고 명령했으니 말이다.윤미라는 구석진 테이블에 착석했다. 이곳은 다른 손님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라 한적하게 하예진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딴사람들이 엿들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하예진이 자리에 앉은 후 그녀는 종업원을 불러와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야심한 밤이라 커피는 삼갔다.“예진 씨 뭐 마실래요?”윤미라가 물었다.“온수 한 잔이면 돼요.”다이어트를 위해 하예진은 이미 오랫동안 저녁 6시 이후에 음식섭취를 하지 않는다. 이젠 다이어트에 성공했지만 몸에 밴 습관이라 쉽게 고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요요가 오면 안 되니까.윤미라는 종업원에게 말했다.“온수 한 잔 주세요.”종업원이 떠난 후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 돈 아껴주시는 거예요? 음료수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고작 온수를 시켰네요.”“사모님, 그게 실은 애초에 다이어트하면서 저녁에 온수만 마셨어요. 그것도 아주 목마를 때만 마시고 다른 건 일절 입에도 안 댔어요. 살 빠지지 않을까 봐서요. 이제 힘겹게 살을 다 뺐으니 요요가 오지 않게 입단속 잘해야죠.”하예진은 무려 반년이란 시간을 공들여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실로 대단한 일이다.다이어트도 결국 견지가 답이다.윤미라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칭찬을 남발했다.“예진 씨 지금 가서 다이어트 광고 찍어도 되겠어요. 처음 볼 때랑 아예 딴 사람 같아요.”하예진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무려 100킬로
“편하게 말씀하세요, 사모님.”윤미라는 다이어트에 성공해 화려한 미모로 컴백한 하예진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예진 씨는 젊은 시절 경혜 씨랑 조금 닮은 것 같네요. 경혜 씨도 젊었을 땐 예쁜 여강자 스타일이었거든요. 얼마나 많은 어르신들이 경혜 씨를 욕심냈는지 몰라요. 다들 며느리로 삼고 싶었으니까요.”“그러다 결국 성씨 일가 어르신이 선공해서 경혜 씨도 지금 성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되신 거죠. 성씨 일가는 이젠 경혜 씨가 좌지우지하고 있잖아요.”성소현의 할머니도 애초에 성문철과 이경혜의 혼사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분에겐 주도권이 없었고 남편과 아들이 전부 좋다고 하니 마지못해 동의했다.그 뒤로 고부사이가 줄곧 좋지 못했다.그러다가 성씨 그룹에 문제가 생겨 이경혜가 제 실력으로 그룹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야 시어머니도 그녀의 마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성소현도 엄마가 금방 시집왔을 때 할머니께 갖은 시달림을 당했다고 했다.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이모랑 저희 엄마가 친자매이다 보니 서로 닮은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한 거죠. 저 또한 엄마 딸이라 이모랑도 조금 닮았을 겁니다.”그녀가 엄마를 언급하자 윤미라는 또다시 하예진의 사망한 부모가 떠오르고 고향에 있는 인간쓰레기 같은 친척들이 떠올랐다.“예진 씨 지금은 동명이한테 호감이 있나요?”윤미라가 불쑥 물었다.하예진은 윤미라가 오늘 그녀를 보자고 한 용의를 진작 알아챘다.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사모님, 저는 늘 동명 씨를 가게 건물주로, 친구로 생각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동명 씨가 싫지는 않지만 그건 절대 사랑은 아닙니다.”윤미라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재벌가에서 지낸 수십 년 동안 윤미라는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하예진이 지금 한 말은 전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그녀의 눈빛은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잡티 하나 없었다.만약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감히 이토록 따가운 윤미라의 시선을 견딜 수 있을까? 하예진은 아마 그 정도로
손은경이 노동명을 포기한 이유는 그가 하예진을 좋아하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그녀는 거의 몸부림치지도 않은 채 바로 노동명을 단념했다.노동명의 독특한 취향을 그녀는 만족해줄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괜히 질질 끌었다가 미움만 사면 앞으로 두 사람의 비즈니스 협력에도 영향을 주니까.“사모님, 저도 대신 동명 씨를 많이 설득해보았어요. 은경 씨가 참 좋은 분이라고, 두 분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거든요.”하예진이 설득한 건 맞지만 효과가 없었을 뿐이다.윤미라의 말로는 노동명이 독립적이고 고집이 세서 본인이 정한 일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마음이 바뀌기 전까지 아무도 개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예진 씨, 이건 예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문제는 예진 씨가 아니라 동명이한테 있어요.”만약 하예진이 노동명에게 집착했다면 윤미라는 일찌감치 강압적으로 나오며 하예진을 내쫓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하지만 하예진은 노동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니 윤미라도 딱히 그녀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다만 예진 씨, 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요?”“무슨 부탁인데요? 말씀하세요.”윤미라는 이미 여기까지 말한 이상 더는 에돌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지금 있는 가게를 빼고 그 거리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장사하는 건 어때요? 노씨 그룹을 멀리 떠나면 더 좋고요. 가게 이사로 인해 발생한 모든 손해배상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예진 씨 새 가게는 어디로 정하든 다 돼요. 노씨 그룹만 멀리 떨어지면 돼요. 가게 인테리어 비용도 제가 다 책임질게요. 예진 씨는 일전 한 푼 쓸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금방 알았을 때 하예진도 가게를 빼고 멀리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결국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노동명이 그녀에게 구애하는 이상 제아무리 가게를 빼고 딴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결국 끈질기게 따라올 사람이니까. 만약 안 그런다면 하예진은 하룻밤 사이에 짐을 챙
이게 과연 피한다고 될 일일까?근본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겉치레도 변할 건 없을 듯싶다.“사모님께서 동명 씨를 설득하시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좀 더 분발하셔서 동명 씨를 설득해보세요.”“...”하예진의 말을 들은 윤미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하예진더러 노동명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더니 그녀는 되레 윤미라가 제 아들을 설득하여 더는 본인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본인은 그저 잠잠하게 살아가고 싶으니까.한참 후 윤미라가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 씨, 제가 조금이라도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동명이 그 불효자식이 고집불통이라 제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진 씨를 찾아온 거예요.”“절대 예진 씨를 깔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혼은 서로 조건이 대등해야 해요. 예진 씨도 현명한 사람이니 이 점은 잘 알고 있겠죠. 아무리 지금 예진 씨가 안일한 삶을 살고 싶고, 재혼을 고려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설사 재혼을 고려한다고 해도 동명이랑은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계급이 다르고 함께 어울리는 환경이 달라서 연애할 때에는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 열정이 다 식으면 갈등이 서서히 생겨날 거예요. 게다가 저는 예진 씨를 며느리로 들일 수가 없어요. 예진 씨가 정말 동명이랑 함께하겠다고 하면 그땐 제가 시어머니로서 예진 씨한테 무슨 짓을 벌일지 감히 장담할 수가 없네요.”윤미라가 말을 마친 후 하예진이 대답했다.“알고 있어요.”“그럼 이 아들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여운 어미를 봐서라도 관성을 떠나줄 순 없나요? 보상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부르는 대로 다 만족해줄 수 있어요. 동생네랑 그리고 이모네랑 연락을 유지해도 돼요. 그분들이 예진 씨 행방을 비밀로만 해주면 돼요. 동명이가 절대 찾지 못하게요.”윤미라는 하예진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예진 씨, 가여운 저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 여길 떠나만 주신다면 다른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빈이가 키즈 카페에 있어서 애 데리고 집에 가야 해서요.”하예진은 심기가 약간 불편했다.노동명을 넘본 적도 없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요구를 당해야 하니 누군들 심기가 편할까?그녀는 고작 노동명의 상가를 임대했을 뿐이고 노동명과 제부가 절친한 사이이며 평소에 노동명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좀 더 열정적으로 대했을 뿐인데, 절대 그를 넘볼 생각 따위 없었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식으로 협박을 당할 줄이야.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녀가 왜 관성을 떠나야 하는 걸까?“가봐요. 스쿠터 조심해서 몰아요. 길에 차가 많을 거예요.”윤미라는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하예진은 스쿠터 열쇠를 챙기고 윤미라에게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나간 후 노진규가 곧장 들어와 구석에 앉은 아내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어떻게 됐어?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거야?”노진규는 하예진이 나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차분한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두 여자가 얘기가 잘 된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얘기도 끝났어요. 내 소원대로 되진 못했어요. 예진이도 당신 아들이랑 똑같아. 절대 머리 숙이지 않네요. 본인 문제가 아니래요...”윤미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확실히 예진의 문제가 아니죠.”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방금 하예진과 나눴던 대화를 전부 남편에게 알렸다.그리고 말미에 이 한마디를 보탰다.“예진이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우리 집안에 시집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여보, 예진이 너무 교활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에 발을 들이지 않겠대요. 그건 동명이랑 내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잖아요? 우리 모자 사이의 감정만 상한다고요.”“당신은 원래 반대했잖아. 당신이랑 동명이는 원래 사이가 틀어졌어. 예진의 잘못 아니야.”윤미라는 말문이 막혔다.하긴, 그녀는 아들과 하예진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하예진이 그런 맹세를 한 이후로
윤미라가 말했다.“대체 무슨 안목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이 얼마나 우수한데. 왜 마다해? 대체 얼마나 더 훌륭한 집안에 시집가려고?”“이혼한 여자는 반드시 재혼해야 해? 내가 볼 때 예진이는 이미 마음이 철저히 식었어. 그리 쉽게 새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동명이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구애하는 데 몇 년은 걸릴 거야. 몇 년이라도 예진의 마음이 열려야 말이지. 그때 되면 당신은 두 사람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얼른 동명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예진이한테 애원할지도 몰라.”윤미라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난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차라리 지구 종말이 더 빠르겠어요.”노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무슨 말이나 섣불리 내뱉지 말아야 할 거야. 나중에 대가를 치를 거거든. 그때 가서 예진이한테 제발 우리 아들 받아달라고 애원하지나 마. 지구 종말이나 기다려.’...노동명은 키즈 카페에서 우빈이를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다.엄마와 예진이에게 찾아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예진이가 이 때문에 그를 더 거부하는 건 아닌지 너무 알고 싶었다.하지만 갈 수가 없다.우빈을 지켜야 하니까.하예진이 우빈을 그에게 맡겼으니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의 부탁을 저버리는 거나 다름없다.노동명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키즈 카페 입구를 서성이며 하예진이 돌아오는지 두리번거렸다.“아저씨, 아저씨.”우빈이가 놀다 지쳐 집에 가려고 했다.나오고 싶은데 키즈 카페 직원이 아이 홀로 내보내지 않았다.“꼬마야, 엄마, 아빠 있는지 한번 봐봐. 없으면 안에서 좀 더 놀래? 이따가 부모님 오시거든 다시 나오자.”우빈은 엄마는 안 보이고 입구에 서 있는 노동명을 발견한 채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노동명은 아이가 뒷전이고 머릿속에 온통 하예진이라 우빈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못했다. 키즈 카페 주변이 또 워낙 시끌벅적하다 보니 아이의 목소리가 더욱 안 들렸다.이때 직원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노동명은 그제야 고개 돌
“너희 엄마 볼일 보러 가셨어. 금방 돌아올 거야.”노동명은 거짓말을 둘러댔다.“우리 밖에서 너희 엄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우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노동명은 아이를 안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재차 물었다.“우빈아, 간식 뭐 먹고 싶어? 아저씨가 사줄게.”“고마워요 아저씨. 우리 이모 집에 맛있는 간식이 너무 많아서 더는 살 필요 없어요.”우빈은 지금 대부분 이모네 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강일구 아저씨가 학원까지 바래다준다. 수업이 없는 날에만 엄마와 함께 지낸다.이모네 부부는 그를 살뜰히 보살피며 수많은 간식거리를 사준다.“이모네 집에 것은 이모네 집에 것이고 아저씨가 사주는 건 아저씨 마음이야. 우빈이 아저씨한테 표현할 기회를 줘야지.”아이는 노동명을 쳐다보며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더 해명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아저씨를 아빠로 생각해본 적 있어?”“저는 아빠가 있어요.”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알아, 아저씨도. 누구나 다 아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빠가 두 명이야. 우빈이도 아빠가 둘이면 안 될까? 아저씨가 우빈의 아빠 하면 안 될까?”우빈은 고개를 내저었다.“아저씨는 아저씨고 아빠는 아빠예요. 어떻게 아저씨가 아빠를 해요?”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아빠 한 명이면 돼요. 둘은 싫어요. 엄마가 늘 말씀하셨거든요.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다른 사람 몫도 남겨줘야 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딴사람 아빠 해요.”“...”어린 녀석이 총명한 건 알겠는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도통 설명할 수가 없었다.“우빈아,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아저씨가 너희 엄마를 무척 좋아해. 너희 엄마랑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루고 싶어. 그럼 우린 한 가족 세 식구가 되는 거야. 우빈이도 그땐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그렇지만 저는 아빠가 있잖아요. 아저씨 우리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요?”노동명이 웃으며 답했다.“맞아. 아저씨가 너희 엄마랑 함께하는 걸 허락해줄
노동명은 할 말을 잃었다.“...”‘녀석 참,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우빈아.”하예진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이리로 다가왔다.노동명은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 듯 다시 한번 아이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만 아이는 그의 당부를 듣는 척도 않고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려오더니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엄마.”하예진은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우빈이 다 놀았어?”“네, 이젠 집에 갈래요.”“그래, 그럼 집에 가자.”노동명이 다가오자 하예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동명 씨, 우빈이 돌봐줘서 고마워요.”“괜찮아, 우빈이 돌보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노동명은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빈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야.”하예진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동명 씨, 아이가 집에 가겠다네요. 우린 먼저 가볼게요.”노동명이 재빨리 대답했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하예진은 우빈을 안으며 노동명에게 인사하라고 했다.“예진아.”노동명은 엄마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하예진은 고개 돌려 가볍게 웃을 뿐 아이를 안고 떠나가려 했다.이에 노동명이 두 모자를 따라왔다.“엄마, 저 뭐 하나만 물을게요.”우빈이 입을 열자 노동명은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갈 심정이었다. 이 녀석이, 몇 번을 말했는데 왜 한사코 안 듣는 걸까?굳이 제 엄마랑 말하려나 보다.“그래.”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이에게 뭐라 말한 지 전혀 모른 채 아이의 물음에 호기심을 느꼈다.“엄마, 아저씨가 우리 가족에 합류하고 싶대요. 저한테 동의하냐고 묻는데 저는 아직 어린애라 결정권이 없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물으라고 했어요. 엄마만 허락하면 저도 동의한다고요.”말을 마친 아이는 노동명을 향해 외쳤다.“아저씨, 빨리 와요. 제가 지금 대신 엄마한테 묻잖아요.”“...”쥐구멍은 어디에?대체 어디 있냐고,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가야 할 텐데.아니면 하늘에서 천둥이 쳐서 두 동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