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경이 노동명을 포기한 이유는 그가 하예진을 좋아하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그녀는 거의 몸부림치지도 않은 채 바로 노동명을 단념했다.노동명의 독특한 취향을 그녀는 만족해줄 수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괜히 질질 끌었다가 미움만 사면 앞으로 두 사람의 비즈니스 협력에도 영향을 주니까.“사모님, 저도 대신 동명 씨를 많이 설득해보았어요. 은경 씨가 참 좋은 분이라고, 두 분 너무 잘 어울린다고 했거든요.”하예진이 설득한 건 맞지만 효과가 없었을 뿐이다.윤미라의 말로는 노동명이 독립적이고 고집이 세서 본인이 정한 일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마음이 바뀌기 전까지 아무도 개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예진 씨, 이건 예진 씨 잘못이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문제는 예진 씨가 아니라 동명이한테 있어요.”만약 하예진이 노동명에게 집착했다면 윤미라는 일찌감치 강압적으로 나오며 하예진을 내쫓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하지만 하예진은 노동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니 윤미라도 딱히 그녀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다만 예진 씨, 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요?”“무슨 부탁인데요? 말씀하세요.”윤미라는 이미 여기까지 말한 이상 더는 에돌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지금 있는 가게를 빼고 그 거리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장사하는 건 어때요? 노씨 그룹을 멀리 떠나면 더 좋고요. 가게 이사로 인해 발생한 모든 손해배상은 제가 책임질게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예진 씨 새 가게는 어디로 정하든 다 돼요. 노씨 그룹만 멀리 떨어지면 돼요. 가게 인테리어 비용도 제가 다 책임질게요. 예진 씨는 일전 한 푼 쓸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금방 알았을 때 하예진도 가게를 빼고 멀리 이사 갈 생각을 했지만 결국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노동명이 그녀에게 구애하는 이상 제아무리 가게를 빼고 딴 곳으로 이사한다고 해도 결국 끈질기게 따라올 사람이니까. 만약 안 그런다면 하예진은 하룻밤 사이에 짐을 챙
이게 과연 피한다고 될 일일까?근본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겉치레도 변할 건 없을 듯싶다.“사모님께서 동명 씨를 설득하시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좀 더 분발하셔서 동명 씨를 설득해보세요.”“...”하예진의 말을 들은 윤미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하예진더러 노동명의 곁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더니 그녀는 되레 윤미라가 제 아들을 설득하여 더는 본인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본인은 그저 잠잠하게 살아가고 싶으니까.한참 후 윤미라가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하예진에게 말했다.“예진 씨, 제가 조금이라도 방법이 있었다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죠. 동명이 그 불효자식이 고집불통이라 제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진 씨를 찾아온 거예요.”“절대 예진 씨를 깔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결혼은 서로 조건이 대등해야 해요. 예진 씨도 현명한 사람이니 이 점은 잘 알고 있겠죠. 아무리 지금 예진 씨가 안일한 삶을 살고 싶고, 재혼을 고려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설사 재혼을 고려한다고 해도 동명이랑은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두 사람은 계급이 다르고 함께 어울리는 환경이 달라서 연애할 때에는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 열정이 다 식으면 갈등이 서서히 생겨날 거예요. 게다가 저는 예진 씨를 며느리로 들일 수가 없어요. 예진 씨가 정말 동명이랑 함께하겠다고 하면 그땐 제가 시어머니로서 예진 씨한테 무슨 짓을 벌일지 감히 장담할 수가 없네요.”윤미라가 말을 마친 후 하예진이 대답했다.“알고 있어요.”“그럼 이 아들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가여운 어미를 봐서라도 관성을 떠나줄 순 없나요? 보상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부르는 대로 다 만족해줄 수 있어요. 동생네랑 그리고 이모네랑 연락을 유지해도 돼요. 그분들이 예진 씨 행방을 비밀로만 해주면 돼요. 동명이가 절대 찾지 못하게요.”윤미라는 하예진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예진 씨, 가여운 저를 위해서라도 한 번만 봐주세요. 여길 떠나만 주신다면 다른
“또 다른 용건 있으세요?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빈이가 키즈 카페에 있어서 애 데리고 집에 가야 해서요.”하예진은 심기가 약간 불편했다.노동명을 넘본 적도 없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요구를 당해야 하니 누군들 심기가 편할까?그녀는 고작 노동명의 상가를 임대했을 뿐이고 노동명과 제부가 절친한 사이이며 평소에 노동명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좀 더 열정적으로 대했을 뿐인데, 절대 그를 넘볼 생각 따위 없었는데 윤미라에게 이런 식으로 협박을 당할 줄이야.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녀가 왜 관성을 떠나야 하는 걸까?“가봐요. 스쿠터 조심해서 몰아요. 길에 차가 많을 거예요.”윤미라는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하예진은 스쿠터 열쇠를 챙기고 윤미라에게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나간 후 노진규가 곧장 들어와 구석에 앉은 아내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어떻게 됐어?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거야?”노진규는 하예진이 나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차분한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두 여자가 얘기가 잘 된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하고 싶은 말도 다 했고 얘기도 끝났어요. 내 소원대로 되진 못했어요. 예진이도 당신 아들이랑 똑같아. 절대 머리 숙이지 않네요. 본인 문제가 아니래요...”윤미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확실히 예진의 문제가 아니죠.”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방금 하예진과 나눴던 대화를 전부 남편에게 알렸다.그리고 말미에 이 한마디를 보탰다.“예진이는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절대 우리 집안에 시집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여보, 예진이 너무 교활한 것 같지 않아요?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집안에 발을 들이지 않겠대요. 그건 동명이랑 내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잖아요? 우리 모자 사이의 감정만 상한다고요.”“당신은 원래 반대했잖아. 당신이랑 동명이는 원래 사이가 틀어졌어. 예진의 잘못 아니야.”윤미라는 말문이 막혔다.하긴, 그녀는 아들과 하예진을 허락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하예진이 그런 맹세를 한 이후로
윤미라가 말했다.“대체 무슨 안목인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이 얼마나 우수한데. 왜 마다해? 대체 얼마나 더 훌륭한 집안에 시집가려고?”“이혼한 여자는 반드시 재혼해야 해? 내가 볼 때 예진이는 이미 마음이 철저히 식었어. 그리 쉽게 새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동명이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구애하는 데 몇 년은 걸릴 거야. 몇 년이라도 예진의 마음이 열려야 말이지. 그때 되면 당신은 두 사람 반대하는 게 아니라 얼른 동명의 마음을 받아주라고 예진이한테 애원할지도 몰라.”윤미라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난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차라리 지구 종말이 더 빠르겠어요.”노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무슨 말이나 섣불리 내뱉지 말아야 할 거야. 나중에 대가를 치를 거거든. 그때 가서 예진이한테 제발 우리 아들 받아달라고 애원하지나 마. 지구 종말이나 기다려.’...노동명은 키즈 카페에서 우빈이를 지키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었다.엄마와 예진이에게 찾아가 대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예진이가 이 때문에 그를 더 거부하는 건 아닌지 너무 알고 싶었다.하지만 갈 수가 없다.우빈을 지켜야 하니까.하예진이 우빈을 그에게 맡겼으니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의 부탁을 저버리는 거나 다름없다.노동명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키즈 카페 입구를 서성이며 하예진이 돌아오는지 두리번거렸다.“아저씨, 아저씨.”우빈이가 놀다 지쳐 집에 가려고 했다.나오고 싶은데 키즈 카페 직원이 아이 홀로 내보내지 않았다.“꼬마야, 엄마, 아빠 있는지 한번 봐봐. 없으면 안에서 좀 더 놀래? 이따가 부모님 오시거든 다시 나오자.”우빈은 엄마는 안 보이고 입구에 서 있는 노동명을 발견한 채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노동명은 아이가 뒷전이고 머릿속에 온통 하예진이라 우빈의 목소리를 아예 듣지 못했다. 키즈 카페 주변이 또 워낙 시끌벅적하다 보니 아이의 목소리가 더욱 안 들렸다.이때 직원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노동명은 그제야 고개 돌
“너희 엄마 볼일 보러 가셨어. 금방 돌아올 거야.”노동명은 거짓말을 둘러댔다.“우리 밖에서 너희 엄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우빈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노동명은 아이를 안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재차 물었다.“우빈아, 간식 뭐 먹고 싶어? 아저씨가 사줄게.”“고마워요 아저씨. 우리 이모 집에 맛있는 간식이 너무 많아서 더는 살 필요 없어요.”우빈은 지금 대부분 이모네 집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강일구 아저씨가 학원까지 바래다준다. 수업이 없는 날에만 엄마와 함께 지낸다.이모네 부부는 그를 살뜰히 보살피며 수많은 간식거리를 사준다.“이모네 집에 것은 이모네 집에 것이고 아저씨가 사주는 건 아저씨 마음이야. 우빈이 아저씨한테 표현할 기회를 줘야지.”아이는 노동명을 쳐다보며 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더 해명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우빈이는 아저씨를 아빠로 생각해본 적 있어?”“저는 아빠가 있어요.”노동명은 말문이 막혔다.“알아, 아저씨도. 누구나 다 아빠는 있지만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빠가 두 명이야. 우빈이도 아빠가 둘이면 안 될까? 아저씨가 우빈의 아빠 하면 안 될까?”우빈은 고개를 내저었다.“아저씨는 아저씨고 아빠는 아빠예요. 어떻게 아저씨가 아빠를 해요?”아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저는 아빠 한 명이면 돼요. 둘은 싫어요. 엄마가 늘 말씀하셨거든요.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안 돼요. 다른 사람 몫도 남겨줘야 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딴사람 아빠 해요.”“...”어린 녀석이 총명한 건 알겠는데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려 도통 설명할 수가 없었다.“우빈아,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아저씨가 너희 엄마를 무척 좋아해. 너희 엄마랑 결혼해서 새 가정을 이루고 싶어. 그럼 우린 한 가족 세 식구가 되는 거야. 우빈이도 그땐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그렇지만 저는 아빠가 있잖아요. 아저씨 우리 엄마랑 결혼하고 싶어요?”노동명이 웃으며 답했다.“맞아. 아저씨가 너희 엄마랑 함께하는 걸 허락해줄
노동명은 할 말을 잃었다.“...”‘녀석 참,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우빈아.”하예진도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이리로 다가왔다.노동명은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 듯 다시 한번 아이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만 아이는 그의 당부를 듣는 척도 않고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내려오더니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엄마.”하예진은 아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우빈이 다 놀았어?”“네, 이젠 집에 갈래요.”“그래, 그럼 집에 가자.”노동명이 다가오자 하예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동명 씨, 우빈이 돌봐줘서 고마워요.”“괜찮아, 우빈이 돌보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노동명은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빈이는 아주 얌전한 아이야.”하예진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동명 씨, 아이가 집에 가겠다네요. 우린 먼저 가볼게요.”노동명이 재빨리 대답했다.“내가 데려다줄게.”“아니에요.”하예진은 우빈을 안으며 노동명에게 인사하라고 했다.“예진아.”노동명은 엄마가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지만 하예진은 고개 돌려 가볍게 웃을 뿐 아이를 안고 떠나가려 했다.이에 노동명이 두 모자를 따라왔다.“엄마, 저 뭐 하나만 물을게요.”우빈이 입을 열자 노동명은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갈 심정이었다. 이 녀석이, 몇 번을 말했는데 왜 한사코 안 듣는 걸까?굳이 제 엄마랑 말하려나 보다.“그래.”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이에게 뭐라 말한 지 전혀 모른 채 아이의 물음에 호기심을 느꼈다.“엄마, 아저씨가 우리 가족에 합류하고 싶대요. 저한테 동의하냐고 묻는데 저는 아직 어린애라 결정권이 없잖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물으라고 했어요. 엄마만 허락하면 저도 동의한다고요.”말을 마친 아이는 노동명을 향해 외쳤다.“아저씨, 빨리 와요. 제가 지금 대신 엄마한테 묻잖아요.”“...”쥐구멍은 어디에?대체 어디 있냐고, 당장이라도 파고 들어가야 할 텐데.아니면 하늘에서 천둥이 쳐서 두 동
우빈의 말로 노동명과 하예진 모두 난감할 따름이었다.그녀가 바라보자 노동명은 활짝 미소 지었다.하예진은 어이가 없어 침묵하며 아들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엄마.”우빈의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엄마 동의 안 하는 거예요?”“우빈아.”하예진이 다정하게 말했다.“우빈이는 아빠가 있어. 동명 아저씨는 아저씨야, 우빈이한테 영원히 아저씨일 거야.”“예진아.”노동명이 불렀다.“동명 씨, 우빈이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요. 애한테 이런 말 삼가세요. 제 인생은 우빈이가 대신 결정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하예진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이에 노동명이 미안함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예진아, 내가 잘못했어. 아이한테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너한테만은 진심이야. 우빈이도 너무 사랑스럽고. 이 아이를 꼭 친자식처럼 대할 거야.”“동명 씨, 제가 분명 말했죠. 새로운 감정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고요.”하예진은 그의 앞에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동명 씨가 이해해주시고 그 마음을 접으셨으면 좋겠어요. 우린 안 어울려요.”윤미라의 말처럼 아무리 엄마가 아들의 고집을 못 꺾어 결혼을 승낙한다고 해도 며느리가 싫은 건 변치 않는다. 나중에 시집가게 되면 고부갈등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하예진은 자신의 출신을 개변할 수가 없다.게다가 그녀는 진짜 재혼 생각이 없다.전씨 할머니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결혼은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 상처와 고통만 안겨주고 헌신과 희생 뒤엔 배신이라는 큰 ‘선물’만 남겨졌다.첫 결혼에서 큰코다치고 이제 겨우 벗어났는데 또다시 뛰어들 리가 있을까?지금의 그녀는 남자 없이도 충분히 잘살고 있다.“왜 안 어울려? 엄마가 대체 뭐라고 했는데? 너더러 멀리 떠나라고 다그쳤지?”“아무 말씀도 안 했어요. 제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 거예요. 동명 씨가 제게 잘해주는 건 매우 감격스럽게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동명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명 씨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요
우빈은 매우 고집스럽다.애초에 주형인이 아이 앞에서 노동명의 험담을 할 때도 아이는 동명 아저씨가 아주 무섭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 아빠가 어떻게 말하든 아저씨에 대한 인상이 바뀌지 않았다.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인 거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을 좋게 말할 수 없고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엄마 기분 안 나빠. 방금 뭐 좀 생각한 거야.”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봐, 엄마 지금 웃고 있잖아.”아이는 똑똑하면서도 예민했다.엄마가 웃으니 방금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화난 게 아니라고 믿었다.“엄마, 동명 아저씨가 엄마랑 결혼하고 싶다는데 진짜예요?”아이는 마음이 놓이자 선뜻 이런 질문을 해댔다.“...”하예진은 어이가 없었다.노동명도 참, 애한테 못하는 말이 없지. 우빈이가 고작 몇 살인데 이런 말을 알아들을 리가 있을까?아무리 아이가 노동명을 아빠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이의 결정이 그녀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그건 아저씨가 우빈이한테 장난친 거야. 마음에 새겨두지 마.”아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아저씨가 장난친 거구나.”“가자. 엄마가 이모네 집으로 바래다줄게.”하예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하예정의 집으로 향했다.“네.”우빈은 이젠 매일 이모네 댁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에 적응됐다.전태윤의 피크 별장으로 가야 하니 그녀는 스쿠터를 타지 않았다. 배터리가 부족해 가는 도중에 멈춰서면 골치 아프니까.그녀는 아예 새 차를 타고 아들을 피크 별장으로 실어갔다.하예정은 이제 막 심효진과 통화를 마쳤다.심효진은 당연히 투자를 확대하고 땅을 사서 회사를 건축하는 일을 찬성했다.“예정아, 난 너랑 소현 언니 완전히 믿으니까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고 나한테 얘기만 해주면 돼. 난 전부 찬성이야.”하예정과 그녀는 십여 년의 우정을 쌓아와 지피지기와 같은 존재이다.성소현은 성씨 일가의 따님이고 성품도 좋은 데다가 하예정의 사촌 언니이니 그녀가 파트너인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