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물었다.“우리 언니한테 닭과 오리를 가져다주려면 지금 가요.”너무 늦게 가면 쉬는 데 방해할까 봐 걱정됐다.하예정은 서점의 문을 닫고 전태윤의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차는 경호원이 몰고 가기로 했다.차에서 그녀는 전태윤에게 물었다.“동물원 사건은 결론이 났어요? 정말 여씨 가문의 짓이 아니에요?”전태윤은 잠자코 있다가 대답했다.“적어도 여 대표가 한 짓은 아니야.”“그럼 여 대표가 아니라 여 사모님이?”그는 여씨 사모님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소정남이 조사 중이야. 아직 증거는 없지만 우리 모두 여씨 사모님을 의심하고 있어."전태윤은 처음엔 그를 노리고 온 줄로 알았다.하지만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가 아니라 하예정이 타깃이었다.하예정은 여씨 모녀와만 원한을 맺었었다. 그 때문에 자연히 여씨 사모님을 의심하게 되었다.“여 대표 부부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꽤 많은 것 같아. 그들 부부는 신중한 데다 일 처리에 무척 조심스러워서 무슨 일을 하든 꼬투리를 남기지 않아. 소지훈마저도 그 부부에게 관심이 많아졌어.”조사가 어려울수록 소지훈은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일정한 정도로 관심을 가지게 되면 직접 나설 것이다.“그때 가서 여운초와 힘을 합쳐 잘 조사하기만 하면 그들 부부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 거야.”하예정은 여운초의 담담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을 듯한 성미를 떠올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운초 씨는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협조해요? 그리로 여씨 사모님은 아무래도 친어머니잖아요.”여운초와 여씨 사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녀가 친어머니인 건 사실이다.전태윤은 잠시 침묵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일단 이진이랑 여운초 씨 상황을 지켜보고. 이진이는 일단 신의의 유능한 제자에게 부탁해 여운초 씨 눈을 치료해 주려 해.”“신의요?”하예정은 이런 호칭을 들을 때면 뭔가 미스테리한 느낌이 났다.그녀는 전태윤의 세계에 발을 들인 후 여태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많은 사람과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역시, 그녀의
전태윤은 팔을 뻗어 그녀를 꼭 끌어안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말했다.“나중에 내가 급한 업무를 다 처리하거든 며칠 시간 빼내서 함께 A시로 가자. 예씨 가문 예준성 부부랑 한번 만나. 예준성 씨는 어머님 성을 따라 예 씨야.”그는 또 하예정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여보도 소설 속 여주인공이야. 남들이 여보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아?”하예정은 그를 가볍게 밀쳤다. 매번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며 뜨거운 입김을 불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간질거려 당장이라도 확 덮쳐버릴 것만 같았다.전태윤 부부는 계란과 닭, 오리를 하예진에게 보낸 후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왔다.집에 와보니 숙희 아주머니가 와 계셨다.아주머니는 전태윤이 애초에 하예정에게 준 반려견도 데려왔다. 반려동물들은 줄곧 아주머니가 돌보고 있어 발렌시아 아파트로 함께 돌아왔다.문을 열자 봄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하예정은 봄이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서 한참 넋 놓고 있다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녀는 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태윤에게 물었다.“봄이 왜 이렇게 살쪘어요?”전태윤은 반려동물을 싫어하는데 하예정을 너무 사랑한 탓에 집에 몇 마리 키우고 있다. 하예정이 강아지와 고양이를 기르고 싶다고 하니 그는 봄이와 고양이 두 마리를 곧장 선물해줬다.하예정이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봄이는 신나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전태윤은 개털이 몸에 묻을까 봐 얼른 저 멀리 피했다.“숙희 아주머니가 얘네들 너무 잘 돌보셔서 개자식이 점점 더 살찐 거지. 고양이 두 마리도 살찐 것 좀 봐. 저렇게 세 마리가 한데 있으니 꼭 새끼돼지 같아.”하예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쏘아붙였다.“봄이라고 불러요. 개자식이 뭐예요, 우리 봄이 욕하는 거예요?”전태윤은 입을 삐죽거렸다.“그래, 알았어. 개자식 아니고 봄이지.”숙희 아주머니가 웃으며 부부에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이 물건들 냉장고에 넣어두시면 돼요.”전태윤은 엄마가 챙겨주신 닭을 아주머니께 건넸다.비닐봉지를 받은 아주머니가 그에게 물었
“손자들만 해치는 할머니야.”하예정이 할머니를 옹호해 나섰다.“할머니가 당신 뭘 해쳤는데요? 할머니가 하신 모든 일은 다 당신들 잘 되라고 그런 거예요. 말해봐요, 할머니가 대체 태윤 씨를 어떻게 해쳤냐고요?”그녀는 전태윤을 밀치려 했고 이에 전태윤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예정아, 너 방금 뚱땡이 봄이 만진 손도 안 씻었는데 얼른 가서 씻어. 개털 묻은 손으로 날 밀치지 말고. 나 이런 개털들 딱 질색이야.”“...”숙희 아주머니가 웃으며 답했다.“예정 씨, 얼른 가서 손 씻으세요. 제가 야식 준비했으니까 손 씻고 바로 와서 드세요.”야식 먹으란 말에 하예정은 더이상 남편과 개털 문제로 따져 묻지 않고 손 씻으러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는 손 씻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야식 뭐 했는데요?”“아무튼 다 사모님 좋아하시는 거로 만들었어요.”숙희 아주머니는 봄이더러 얼른 개집에 들어가 자라고 눈치를 줬다.똑똑한 봄이는 전태윤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알고 감히 집안에서 뛰어다니지 않은 채 얌전히 개집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전태윤은 야식을 먹지 않고 TV를 보려 했는데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아 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마치곤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부부가 집에 돌아온 뒤 일상이 곧 이러했다.그렇게 어두운 밤이 흘러갔다.오늘은 하예진 자매가 고향 마을에 돌아가 하 영감 일행과 다시 계약서를 체결하는 날이라 하루 토스트는 문을 닫았다.엄마의 끈질긴 다그침에도 꿋꿋이 전태윤의 집에 들러붙어 있는 노동명은 하루 토스트로 가서 아침을 먹으려고 늦잠을 자다가 허겁지겁 일어나 세안을 마치고 운전해 나갔다.결국 가게 문 앞에 도착해서야 문이 닫힌 걸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그 사람은 노동명도 아주 눈에 익은 바로 서현주였다.하예진을 찾아온 듯싶었는데 아마도 그녀한테서 소식을 캐내고 싶은 모양이다.이름 모를 여자가 서현주에게 내린 미션이었으니.상대는 전태윤과 성기현이 대체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알고 싶었다.요
노동명은 서현주를 내쫓은 후 굳게 닫힌 가게 문을 보면서 하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예진아, 오늘 왜 가게 문 안 열어?”노동명이 살짝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예정이랑 함께 고향 마을에 일 보러 내려왔어요. 부모님 집 문제도 해결했겠다, 오늘 하루 휴식하느라고요. 왜요?”노동명이 알겠다며 대답한 후 질문을 이어갔다.“부모님 집 문제가 해결됐다고? 더이상 소송 안 걸어도 돼?”그는 하예진을 도와 소송문제도 해결해주려 했다.“협상으로 해결했어요. 대표님, 저 일 봐야 해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그래.”노동명은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고향 마을의 일을 다 해결했는데 노동명은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다. 그녀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하긴, 말해줄 이유도 없잖아!노동명이 뭐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하예진이 사사건건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생각을 마친 노동명은 왠지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했다.하루 토스트가 문을 안 여니 노동명은 어쩔 수 없이 허기진 배를 안고 회의하러 회사로 가야만 했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은경이 하루 토스트 문 앞에 나타났다.물론 가게 문을 안 열었으니 손은경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하루 토스트가 하예진 가게라는 것도 몰랐다.그녀는 단지 노동명에게 사랑의 도시락을 보내주려고 왔을 뿐이다.저 멀리서 노동명의 차가 이 가게 앞에 세워진 걸 보고 손은경도 차를 세우고는 그의 행동을 빤히 쳐다봤다.그가 서현주를 놀라게 하고 줄행랑치게 한 것도 똑똑히 지켜보았고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윤미라에게 보여주며 그 여자가 대체 누군지 여쭐 생각이었다.서현주가 허겁지겁 떠나긴 했지만 노동명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눈 터라 두 사람은 지인임이 분명했다. 손은경은 원래 마음만 먹으면 노동명을 바로 낚아챌 거라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윤미라의 조언을 들은 후에도 자신감을 잃진 않았지만 노동명의 곁에 나타난 어떠한 여자도 경계를 늦출 순 없었다.그와 아는 사이이고 대화도 나누는 여자라면 철저하게 뒷조사하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노동명은 손은경을 내쫓을 수가 없다.“오빠 아직 아침 못 드셨죠?”손은경이 웃으며 걸어와 도시락 두 개를 노동명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아줌마가 오빠 주라고 싸주신 거예요. 아줌마가 그러는데 오빠는 저녁에 늦게 자고 아침에도 늦게 깨나서 아침을 거르기가 일쑤라면서 나더러 꼭 이 도시락 챙겨주라고 하셨어요. 방금 내 차가 오빠 차 바로 뒤에 있었는데 하루 토스트 앞에서 멈춰 서데요. 오빠 평소에 거기서 아침 드시나 봐요?”나중에 그녀도 그 가게 토스트가 맛있는지 친히 맛볼 생각이었다.만약 음식이 특별하게 맛있는 게 아니라면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오빠 마음을 사로잡은 거니까.“손은경 씨, 나 오늘 스케줄이 꽉 차서 은경 씨랑 프로젝트 상의할 시간이 없어요. 이제 곧 회의하러 들어가야 해요.”“그럼 이따가 비서한테 약속 시간 정하라고 할게요. 오빠 언제 시간 되시면 그때 다시 프로젝트 상의해요. 회의는 몇 시에 하는데요?”“아홉 시요.”손은경이 시계를 들여다보니 십 분만 남겨둔 상태였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도시락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음식을 하나씩 꺼내 노동명 앞에 내려놓았다.“십 분이면 충족해요. 아줌마가 정성껏 만드신 음식이니 얼른 드세요. 아줌마 속상해하실라.”이 음식들은 손은경이 직접 만들었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윤미라가 만든 걸 대신 갖고 왔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그녀가 말끝마다 아줌마를 내세우며 다그치자 노동명도 배가 고파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손은경이 건넨 수저를 들자마자 몇 분 만에 도시락을 말끔히 비웠다.“집에 요리사가 바뀌었나?”노동명이 수저를 내려놓고 티슈 두 장 꺼내 입을 닦았다.손은경은 그에게 온수 한 잔 따랐다.노동명은 고맙다고 말한 후 온수를 두어 모금 마셨다.“그새 눈치 챘어요 오빠?”손은경이 웃으며 물었다.“새 요리사 솜씨가 어떤 것 같아요?”“꽤 잘하는 것 같네요.”다만 그는 여전히 하예진이 해준 아침이 더 맛있었다. 아주 평범한 야채 토스트
손은경은 노동명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오빠, 이건 아줌마가 특별히 오빠랑 가고 싶으시다고 한 거라 나도 대체할 순 없어요. 난 어디까지나 아줌마 친구 딸이지 가족은 아니잖아요. 연회는 사실 나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참가해야 하잖아요.”노동명은 비즈니스 때문에 상업적인 연회에 많이 참가했었다. 노씨 그룹이 자리 잡기 전까지 그는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연회란 연회는 전부 참가했다.인제 노씨 그룹은 관성의 유명한 대기업으로 거듭났고 빅 보스 노동명도 그와 급이 비슷한 회장님들과만 사업을 논의하지 소소한 것들은 임원 층에 맡긴다.그 뒤로 노동명은 각종 연회에 참석하는 횟수가 확 줄었고 두 절친이 다 참가하는 곳만 골라서 다녔다.친구가 있어야 그도 얼굴을 내비치는데 전태윤이 거의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없어서 세 남자를 연회에서 보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호스트는 누구예요? 어디서 열리는데요?”노동명이 물었다.“아줌마 말로는 도씨 가문 어르신이 관성 호텔에서 연회를 여신대요.”도씨 가문 어르신이란 말에 노동명은 아무 말도 없었다.도씨 일가의 자산은 전씨 일가보단 못하지만 관성에서 나름대로 상위권을 차지한다. 특히 도씨 일가 어르신은 인맥이 아주 넓고 그 집안 사람들은 매우 겸손하다.도형욱이 주최하는 연회라면 관성 상업계의 모든 거물들이 어르신을 뵙기 위해 다 참석한다. 전태윤도 얼굴을 내비칠 정도이다.도씨 일가와 전씨 일가는 친분이 두터워 작년에 도형욱이 주최한 비즈니스 리셉션에도 전태윤이 참석했다. 때는 바야흐로 그와 하예정이 금방 혼인신고를 마쳤고 그 당시 하예정은 심효진과 심미란을 따라 관성 호텔에 갔었다.전태윤이 연회장에 나타나자 장내가 떠들썩해졌고 심효진도 구경하러 달려갔지만 인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때 하예정은 구석에 숨어서 실컷 음식을 먹었다.“오빠 일단 회의하러 가요. 난 도시락 깨끗이 씻고 집에 돌아갈 거예요.”손은경이 노동명에게 얼른 회의하러 가라고 일깨워주었다.노동명은 알겠다고 대
윤미라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그녀가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녀가 들고 나간 아침 도시락을 노동명이 다 먹었는지 몹시 궁금했다.자동차 소리가 들리자 윤미라는 재빨리 방에서 나왔다.“아줌마.”손은경이 차에서 내린 후 텅 빈 도시락통을 들고 윤미라를 향해 걸어왔다.활짝 웃는 손은경의 모습에 아들이 도시락을 깨끗이 비운 걸 바로 알아채곤 함께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손은경은 도우미에게 도시락통을 건넨 후 윤미라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았다.“동명이랑 좀 더 있지 그랬어?”“오빠가 회의가 있다고 해서 방해될까 봐 바로 왔어요. 아줌마, 내가 이 도시락 아줌마가 해준 거라고 했더니 오빠가 바로 먹는 거 있죠. 게다가 요리사가 바뀐 거 아니냐고 묻더라니까요. 내 요리 솜씨가 괜찮은가 봐요.”윤미라는 활짝 웃으며 손은경이 마치 진짜 며느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앞으로 동명이한테 아침 도시락 자주 만들어서 보내줘. 걔가 평소에 뭐가 부족하면 바로 챙겨주고. 그 녀석 얼음 같은 마음도 천천히 녹아내릴 거야. 은경이 화이팅. 아줌마는 너희 둘 좋은 소식만 기다린다.”이때 손은경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 속 서현주를 가리키며 윤미라에게 물었다.“아줌마, 이 여자 누구예요? 아시는 분이에요? 동명 오빠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더라고요. 두 사람 대화 나누는 걸 봤어요. 그리고 이 하루 토스트는 하예진 씨 가게래요. 오빠가 원래 여기서 아침 먹으려다가 하예진 씨가 오늘 마침 고향 마을에 볼일이 있어 내려간 바람에 가게 문을 닫았대요. 그래서 오빠도 배고픈 김에 회사에서 내가 준 도시락을 다 먹었어요.”안 그러면 노동명은 한 입도 안 먹었을 것이다.손은경은 원래 자신만만하여 하예진을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 윤미라가 그녀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바로 하예진이라고 했다. 이혼녀에 뚱뚱하지 게다가 애까지 딸린 여자를 노동명이 눈이 멀었다고 좋아할까, 손은경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인제 보니 아줌마의 조언이 나름대로 일리 있어 보였다.노동명은 하예진의 가
손은경이 계속 말을 이었다.“이것들도 다 아줌마가 나한테 알려준 거잖아요. 예정 씨랑 예진 씨는 친자매이고 예정 씨가 열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여읜 채 언니가 소녀 가장이 되어 힘겹게 동생을 키웠어요. 예정 씨는 보고 배운 게 언니뿐이라 예정 씨 성품을 보면 예진 씨 성품도 알 수 있어요. 난 예진 씨가 그런 여자가 아닐 거라고 믿어요. 어쩌면 나랑 라이벌이 될 수도 있겠죠. 다만 그건 절대 예진 씨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오롯이 동명 오빠한테 달렸어요.”손은경은 종일 궁궐에만 박혀있는 재벌 집 따님이 아니다. 그녀는 손정 그룹 임원이라 박학다식하고 많은 곳을 돌아다녀 윤미라보다 그릇이 좀 더 크다.“뭐 그래도 이런 일들을 미리 알아서 경계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손은경은 노동명과 하예진이 시작하기 전에 재빨리 노동명을 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만약...하예진에게 진다면...손은경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여러모로 하예진보다 몇 배는 더 훌륭하니 노동명이 눈이 멀지 않는 한 그녀를 내버려 두고 이혼녀 하예진을 선택할 리는 없으니까.동생과 함께 고향 마을로 내려온 하예진은 고향 친척들과 계약서를 다시 체결하는 내내 재채기를 해댔다.“언니 감기 걸렸어? 이따가 갈 때 성균 삼촌한테 들러서 한번 보여.”성균 삼촌은 근처의 몇몇 마을에서 용하기로 소문난 의사이다. 의원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인근 마을 사람들은 두통이나 발열 증상이 있으면 전부 그를 찾아간다.하예진 자매도 어릴 때 성균 삼촌네 의원에서 적잖게 약을 처방받았다.“감기 기운은 아니야.”하예진이 귀를 어루만지며 동생에게 물었다.“예정아, 내 귀 좀 봐. 빨갛지 않아? 누가 내 욕하는지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하예정은 언니의 귀를 힐긋 봤는데 정말 빨갛게 달아올랐다.“언니가 오늘 가게 문을 닫아서 단골손님들이 헛걸음했다고 구시렁대는 거겠지.”진짜 언니 험담을 하는 사람이라면 서현주 말곤 더는 생각나는 자가 없었다.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