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30분이 되자 전태윤은 하예정을 직접 가게까지 배웅했다.“나 저녁에 미팅 있어.”하예정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전태윤이 온화하게 말했다.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전태윤을 바라보았다.“오후 몇 시에 회사를 떠나는데요? 술을 적게 마시고 빈속에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돼요. 금방 취하고 몸에도 해로워요.”“약을 사흘 먹었더니 이젠 위도 아프지 않아.”“위는 아프지 않아도 조심해야 해요. 내가 당신이 퇴근하기 전에 음식을 보내드릴 테니 좀 요기하시고 가요.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요. 마시지 않는 게 제일 좋고요.”“알았어, 당신 말 잘 들을게, 그럼 내가 퇴근하기 전에 밥 갖다줘, 기다릴게.”전태윤이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하예정을 바라보았다.전태윤의 뜻을 알아차린 하예정이 몸을 돌려 그의 얼굴에 키스한 후 다시 장난스럽게 그의 얼굴을 꼬집고는 그가 손 내밀어 자신을 잡기 전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전태윤이 하예정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하지만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하예정이 이미 이틀 후에 전태윤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하예정이 웃으며 서점으로 들어갔다.가게에서 소설을 보고 있던 심효진과, 하예정이 절반 짜다 만 공예품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성소현은 하예정이 웃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성소현이 먼저 말했다.“효진아, 예정이가 점점 예뻐지는 것 같지 않니? 점점 달콤해지는 웃음이며,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얼굴 좀 봐.”“사랑으로 촉촉이 적셔주는데 당연히 이뻐지겠죠.”심효진이 읽던 소설을 덮으며 맞장구쳤다.성소현과 하예정은 심효진이 왜 소설을 그렇게 즐겨 읽는지 이해가 안 갔다.하예정이 웃으며 친구에게 반박했다.“넌 마치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구나.”하예정과 전태윤처럼 우여곡절을 겪거나 갈등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인이 된 소정남과 심효진 커플은 편안하고 달콤한 사랑을 하고 있다.성격이 매우 좋은 소정남과 허영심과 가식이 없는 심
덕분에 하예정의 온라인 스토어 장사는 점점 더 좋아졌다.“계획서 다 작성했어. 아까 효진이와 상의했는데 좀 봐봐.”성소현이 가방에서 그녀가 하룻밤을 들여서 완성한 계획서를 꺼내 하예정에게 보여주었다.“나도 초보야. 하지만 구두장이 셋이 모이면 제갈량보다 낫다고, 우리 셋이 같이 노력하면 꼭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예정아, 너 먼저 손을 멈추고 계획서를 봐, 또 손 다치면 어쩌려고.”지난번에 하예정이 손을 다쳤을 때, 성소현이 하예정을 병원에 데려갔었는데,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는 성씨 가문의 공주님이 피를 보더니 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었다.“지난번은 의외의 사고였어요.”하예정은 자신이 전태윤 때문에 상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공예품을 짜던 손을 바로 멈추고 성소현이 작성한 계획서를 꼼꼼히 훑어보며 때때로 성소현과 심효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우리 스스로 경험해 봐야지, 매사를 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 큰 오빠한테 계획서를 보여주지 않았어.”“내가 보기엔 계획서가 아주 훌륭한 것 같아요.”심효진이 칭찬하듯 말했다.이어서 하예정도 말을 이었다.“누구의 경험이나 모두 조금씩 쌓인 거예요. 태윤 씨와 얘기했더니, 나더러 대담하게 밀고 나가라고 했어요, 전적으로 밀어주겠다고요. 하지만, 나는 태윤 씨에게 모든 걸 기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성소현이 웃었다.“난 너희 둘만 믿으면 되겠어,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하예정과 심효진이 동시에 성소현을 반박하자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심효진이 관성중학교를 가리키며 야심 차게 말했다.“관성의 많은 초등학교, 고등학교에는 교직원 식당과 학생 식당이 있어요. 이건 매우 좋은 비즈니스 기회예요. 다만 우리가 이 비곗덩이를 삼킬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관건이에요.”처음에 심효진과 하예정이 이곳에 책 가게를 개점할 때도 피타는 노력을 들여 곤경을뚫고 나왔었다.하예정이 들뜬 기분으
하예정이 자신과 전태윤 사이를 떠올려 보니, 자기가 전태윤을 달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았다.심효진이 손쉽게 소정남의 마음을 달래는 것을 보고, 하예정은 나중에 전태윤에게 밥을 가져다줄 때 선물을 사주면, 전태윤이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다.“효진아, 저녁 먹을 거 뭐 있어?”하예정이 물었다.“점심에 예진 언니가 밥을 사주는 바람에 장 보러 가지 않았어. 저녁에 뭐 먹고 싶어? 내가 지금 사러 갈게.”“넌 저녁에 밥 먹으러 나가는데, 그만둬. 태윤 씨에게 저녁을 가져다줘야 해. 위가 금방 나아졌는데, 또 빈속에 술을 마셔서 위가 더 상할까 봐 걱정이야. 둘이 얘기해, 내가 장 좀 보고 올게.”하예정이 떠난 후, 성소현이 부러운 듯 말했다.“예정이가 부러워요. 예정이와 제부가 평범한 부부로 지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안하무인이고 교만한 제부가 예정이를 위해서 정말 많은 걸 바꿨어요. 전에 태윤 씨가 가게 일을 도와준다고 가게에 왔을 때 학생들이 모두 얼음처럼 차가운 태윤 씨를 무서워했던 게 기억나요. 제부는 지금도 변함없지만 예정이 앞에서만 얼굴이 달라져요. 앞으로 나를 위해 많은 걸 바꾸려고 하는 남자를 만나면, 난 꼭 죽을힘을 다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가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을 거예요.”“언니가 이렇게 훌륭한데, 꼭 언니를 위해 모든 걸 바꾸려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 남자가 이미 언니 곁에 있는데 언니가 아직 알아채지 못한 것일지도 몰라요. 사랑이 문을 두드리면 망설이지 말고 문을 열어주세요.”성소현이 자신 있게 말했다.“나도 예정이만 못지않으니,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성소현이 전태윤을 포기했다고 해서 행복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사랑이 문을 두드리기만 기다리고 있다.음식 재료를 사서 돌아온 하예정은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하기 시작했다. 일이 바빠지기 전에 먼저 사랑의 도시락을 남편에게 가져다준 다음, 친구가 안심하고
“집에 있을 때 제부가 너를 돌봐준다니 우리도 안심했어. 난 정말 네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가 옛날의 예진 언니처럼 살게 될까 봐 걱정했어.”잠시 동작을 멈추던 하예정이 다시 일을 계속했다.“언니의 교훈이 있으니, 나는 절대 언니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항상 정신 차리는 게 좋아. 사랑에 빠져서 자신을 잃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성소현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가 하예정을 만나기 전 유일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예정아, 내 친구가 실연당해서 보러 가야겠어.”“네, 운전 조심하세요.”“내일 너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서 이장님과 밭 도급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어, 겸사겸사 너 고향의 망나니 친척들이 요 며칠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알아봐 줄게.”“좋아요.”투자 문제에서 하예정과 심효진은 성소현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성장한 환경과 신분이 하예정과 심효진보다 훨씬 우월한 성소현이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다음날, 내 친구를 불러서 같이 커피를 마시자. 내 친구가 실연당해서 기분이 안 좋으니, 너희들과 같은 성격 밝은 친구를 사귀는 게 좋을거라 생각해.”성소현의 절친도 재벌 집 아가씨지만, 워낙 겸손한지라 아무도 그녀가 재벌 집 아가씨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성소현은 그녀의 절친이 하예정 등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좋아요. 언니가 먼저 가서 친구를 위로해 주세요. 실연이 별거예요? 이 세상에 좋은 남자가 많고 많은데.”“그들은 결혼 얘기가 오갈 정도였어. 몇 년 동안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는데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나 가희 보러 갈게.”실연당한 절친 문가희가 걱정된 성소현이 재빨리 가게를 떠났다.전태윤에게 가져다줄 사랑의 저녁을 보온 도시락에 담은 하예정이 심효진에게 말했다. “효진아, 내가 도시락 가져다주고 바로 올게.”“괜찮아, 어서 가, 내가 가게 보고 있을게.”심효진이 흔쾌히 승낙했다.몇 분 후 차를 몰고 관성 중학교를 떠난 하예정은 다른 선물을 살 시간이
“여기가 그쪽이 산 주차 자리예요? 그쪽 차만 여기에 주차할 수 있어요?”하예정은 여운별에게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다.하예정는 이 여씨 가문 막내 아가씨에게 조금도 호감이 없었다.여운별이 건 가래를 떼면서 억지를 부렸다.“여기는 여운초의 꽃가게 입구예요. 난 여운초의 동생이니 당연히 내가 차를 세워야 해요.”“여씨 가문 막내 아가씨께서 여운초가 언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요. 그런데 그날 밤, 동씨 가족 연회에서 언니에게 무슨 짓을 했어요?”부모의 총애를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라 줄곧 여운초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것을 낙으로 삼는 여운별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언니는 무슨, 저 소경은 내 장난감이야!”하예정은 여운별을 호되게 혼내주고 싶었다.어떻게 이런 여동생이 있을 수 있을까?여씨 사모님은 부모로서 아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구나.여운초는 선천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열여섯 살에 큰 병을 앓았었는데 마음 독한 여씨 사모님은 그녀를 그대로 놔뒀고, 여 대표는 장사하느라 집에 거의 없었다. 멀리 시집갔던 시고모가 친정으로 돌아와 여운초가 아픈 것을 보고 급히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여운초는 그렇게 앓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당시 십여 시간의 응급처치 끝에 겨우 여운초의 목숨을 되살렸지만, 시력을 잃고 말았다. 여운초의 눈은 겉보기엔 정상인 같아도 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하예정 부부는 여운초가 소경인 척하거나, 이미 시력을 회복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는 것으로 추측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하예정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동서에 대한 동정이 가득했다.전씨 할머니는 하예정이 이제부터 전씨 가문의 안주인이자 맏동서이니 아래 동서들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맏동서의 책임이자, 전씨 가문 안주인의 책임이니까.“시골뜨기 같으니라고, 경고하는데요, 주차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 낡은 차를 날려버린다고 탓하지 마요.”여운별은 하예정이 몰고 온 5백만 정도의 국산 차를 보고 야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전씨
“여운별!”가게에서 일을 보던 여운초가 말다툼 소리를 듣고 시각장애인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여운초는 여전히 그날 밤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여운초의 눈이 어떤지 볼 수 없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운초의 표정도 그날 밤처럼 담담했다.“무슨 소란을 피우는 거지?”자신의 가게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여운초는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위치를 알아내고 자연스럽게 하예정의 앞에 멈춰 서서 그녀를 향해 온화하게 물었다.“혹시 전씨 가문 큰 사모님이세요?”“큰 사모님은 무슨, 시골뜨기지. 두고 바, 이 시골뜨기는 곧 전씨 가문에서 쫓겨날 거야, 난 전씨 도련님이 이런 시골뜨기를 정말 좋아할 거라고 믿지 않아.”여운별은 다른 사람이 하예정을 전씨 큰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야망이 있는 여운별은 얼음처럼 차갑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은 전태윤의 짝이 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전씨 가문에 시집가서 전씨 가문 사모님이 되고 싶었다.전씨 가문에는 아홉 명의 도련님이 있으니.여씨 사모님은 여운별보다 두세 살 위인 가장 온화한 성격의 전씨 가문 일곱째 도련님을 여운별의 짝으로 점찍고 남자가 나이가 더 많으면 여운별을 아끼고 보듬어줄 것이라고 말했다.여운별은 제멋대로이고 성격이 더러워서 일곱째 도련님처럼 너그러운 성격으로 포용해야 한다면서.여운별은 만약 자신이 전씨 가문에 시집가서 일곱째 사모님이 된다면, 하예정 같은 시골뜨기와 동서지간이 되고 싶지 않았고, 하예정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그래서 여운별은 다른 사람이 하예정을 큰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입 다물지 못해!”여운별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여운초는 여운별을 차갑게 꾸짖고는 미안한 마음으로 하예정에게 말했다.“사모님, 미안해요. 운별이는 우리 엄마가 응석받이로 키워 하늘 높은 줄도 모르는 무법천지예요, 개의치 마세요.”“소경 주제에, 감히 나를 꾸짖어? 이번에 아빠가 내가 너를 혼내지 못하게 말렸다고 내 앞에
여운별이 아무리 어리고 경박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동씨 가문 연회에서 여운초를 해치려 했지만 오지랖 넓은 하예정 때문에 일을 그르쳤다. 그때 여운별은 하예정에게 붙잡혔고 성소현이 그녀에게 약을 탄 술을 강제로 들이부었다. 약효가 발작한 여운별은 연회장에서 바로 옷을 벗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그녀의 엄마가 서둘러 그녀를 집에 데려와 얼음물에 반나절이나 몸을 담게 해서야 약발이 겨우 떨어지고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나절이나 얼음물에 몸을 담근 이유로 고열이 났고 부모님은 속상해 미칠 지경이었다.그럼에도 부모님은 그녀를 위해 앞장서주지 않았다.왜냐하면 시골뜨기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전태윤 대표님이니까.부모님은 그녀에게 여씨 일가의 사업이 관성에 있는 건 아니지만 전씨 도련님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다. 전씨 그룹의 산업은 여러 도시에 널리 분포되어 있어 전씨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전씨 그룹에서 여씨 그룹의 장사를 가로챌 것이고 여씨 일가는 큰코다칠 게 뻔하다.부모님은 그녀가 그날 밤 너무 지나쳤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여운초에게 약을 탄 건 치명적인 잘못이라면서, 아무리 여운초를 망신 주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하고 싶어도 많고 많은 방법 중에 왜 굳이 연회장에서 꼼수를 부리느냐고 가차 없이 질책했다.그렇게 하면 그녀 자신의 이미지도 망칠뿐더러 자리에 참석한 사모님들이 그녀가 심성이 악하다고 생각해 앞으로 좋은 시댁을 만나기도 힘들다.여운별은 그때 처음 전태윤의 강대함을 깨달았다. 자신을 제일 사랑하는 부모님조차 이토록 괴롭힘을 당했는데 대신 나서줄 수 없다니, 전태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하예정은 그녀를 차갑게 째려보며 더 기고만장하게 말을 내뱉었고 이에 여운별은 살짝 위축됐다.“야 이 촌년아, 너 딱 기다려!”여운별은 하예정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는데 갈 때 일부러 꽃가게 문 앞에 놓인 화분 몇 개를 발로 차버렸다.하예정은 그녀의 두 다리를 확 분질러버리고 싶었다.전에
여운초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정 씨가 이렇게 믿으시니 그럼 제가 한번 예쁘게 만들어볼게요.”그녀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하예정을 위해 예쁜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하예정은 숙련된 그녀의 솜씨에 참지 못하고 물었다.“운초 씨, 꽃 종류마다 위치를 숙지하고 있죠?”여운초는 꽃꽂이를 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저는 앞이 안 보이다 보니 외울 수밖에 없어요. 점원에게 부탁해 매번 물건을 들여올 때마다 종류대로 꽃을 나누고 저에게 일일이 위치를 알려주고 있어요. 가게 연지도 몇 년이 돼서 위치를 거의 다 숙지하고 있으니 오차가 없을 거예요.”하예정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운초 씨 눈 치료 가능한가요?”여운초의 미소가 살짝 가라앉았다.“저는 큰 병을 앓아서 실명하게 됐어요. 그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실명이 뭐가 대수겠어요,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죠.”갑작스러운 실명에 그녀는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하지만 마음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보니 인심이 더 잘 보였다. 가끔 보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 마음이었다.하예정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여건이 허락한다면 기회를 봐서 눈을 치료하세요. 시력을 되찾을 수도 있잖아요.”“저희 고모는 줄곧 제 눈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수년간 저를 데리고 많은 안과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이대로예요.”그녀에겐 다행히 걱정해 주는 고모가 있다.고모가 셋인데 막내 고모랑 아빠가 사이가 제일 좋아서 여운초도 예뻐해 주고 있다. 나머지 두 고모는 새아빠와 친하게 지낸다. 여씨 그룹의 실세라 돈도 있고 세력도 있어서 당연히 그에게 매달리는 거겠지.하예정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걱정 안 하셔도 돼요, 예정 씨. 저는 인제 실명한 지 십 년째라 어둠에 진작 적응됐어요. 익숙한 환경 속에선 지팡이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여운초가 되레 하예정을 위로했다.그녀는 하예정을 위해 꽃을 다 고른 후 숙련된 솜씨로 예쁘게 포장해서 하예정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