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배나무 별채에서.소우연은 시녀들과 하인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약재를 말리고 있었다.이육진의 눈에, 밝은 햇빛 아래 비친 소우연은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하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조차 그녀의 미소는 고왔고, 말투는 한없이 온화했다.행동 하나하나가 겨울에 피어난 동백꽃처럼 상대방을 기분 좋고 편하게 해주었다.‘그녀가 맞을까? 그녀가 맞을 거야.’이때, 멀리 서있던 이육진을 제일 먼저 발견한 명심이 큰소리로 말했다.“왕야께서 오셨습니다.”마당에 있던 하인들과 소우연은 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고 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이내 표정을 숨겼다.소우연은 이육진의 그런 미소를 발견했지만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이육진이 그렇게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왕야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소우연이 다가가 휠체어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왕야가 평소에 외출을 거의 안 하시고 서재에만 계신다고 했던 정연의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이육진의 피부는 핏기 없이 창백할 정도로 하얬고, 본래 흉터가 짙은 얼굴은 오랜 시간 햇빛을 받지 못해 더욱 초췌해 보였다. 앙상한 손가락마저 뼈가 도드라져 보일 만큼 야위어 있었다.“부인이 무엇을 하느라 이리도 바쁜지, 그리고 내 얼굴을 어떻게 치료해 줄 생각인지 확인하러 왔소.”흠칫하던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 앞으로 다가가더니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왕야, 제가 왕야를 고쳐드릴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당황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육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부인이 정말 내 얼굴에 난 흉터들을 티가 안 나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그녀에게 다리도 맡길 수 있다는 이육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뜻을 바로 알아차린 소우연은 맹세하듯 말했다.“제가 왕야를 반드시 고쳐드릴 겁니다.”피식 웃던 이육진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그럼 내 다리
”향이 참 좋소. 이 차는 어디서 산 것이오?”이육진이 소우연을 빤히 쳐다보며 묻자 소우연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보였다.“이 차는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환절기에 몸이 으스스하고 기침이 날 때 이 차를 마시면 많이 나아집니다.”“부인이 직접 만들었다고?”“네.”“소문에 의하면 소씨 가문 둘째 따님도 의술이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자도 이 차를 만들 줄 아시오?”순간, 표정이 확 굳어진 소우연이 대답했다.“의술이 뛰어나다… 혹 왕야께서 군영에서 쓰는 약들도 전부 소우희가 만든 걸로 알고 계십니까?”이육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소우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소우희는 의술을 전혀 모릅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만 언젠가 그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날 겁니다.”“그럼 부인의 뜻은 그자가 의술을 전혀 못한다는 말인가? 약을 만들 줄도 모르고?”“당연히 모릅니다!”소우연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육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왜…”“소씨 가문의 일은 한두 마디로 설명 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결국 거짓말은 들통날 겁니다.”소우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소우희는 언젠가 다시 진정향을 구하러 소우연에게 찾아올 것이고 소우연에게 부탁하는 것 외에 소우희는 별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좋소.”이육진이 갑자기 피식 웃자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처음보는 희망찬 눈빛에 조금 놀라웠다.‘지금도 눈빛이 저렇게 반짝이는데 다치기 전에는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멋있는 사내였을까?’“왕야, 저를 믿으십니까?”소우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이육진이 대답했다.“이곳 별채에 약초 향이 이렇게 가득한데 나도 시도는 해보고 싶네.”완전한 믿음이 아니라 그저 시도라는 말에 소우연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찌 됐든 소우연은 이육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매일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절대 왕야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그래.”이육진을 보고 있으면 소우연은 자신이 어렸을 때 남강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다가 진 나인과 함께 열 살
이육진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비파차를 쭉 들이켰다.“향이 참 좋소.”“왕야 입맛에 맞으시면 제가 비파차를 항시 준비해두겠습니다.”“그래.”핏기가 조금씩 돌고 있는 이육진을 보며 소우연이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왕야, 외람된 말이지만…”이육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머뭇거렸고 이육진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왕야, 제가 의술을 많이 익히긴 했지만 신의는 아닙니다. 그리고 신의라고 해도 환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왕야를 치료하는 동안은 제 당부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은 나에게 부인의 명에 따르라는 뜻인가?”이육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우연이 연신 손을 내저었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치료에 관한 일에서만 제 당부를 들어주셨으면 해서 얘기하는 겁니다.”이육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소우연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동의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일단은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래, 치료에 있어서는 내 부인의 말을 듣겠소.”고개를 번쩍 든 소우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너무 감사드립니다, 왕야.”감사하다고?이육진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이 들고 있던 잔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뒤, 휠체어를 밀고 마당으로 나갔다.“왕야께서 동의하셨으니 오늘 첫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마당에서 햇빛 쪼임을 해주십시오.”이육진은 예상치 못한 당부에 흠칫하다가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정연은 소우연이 이육진을 모시고 마당으로 나오자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고 그녀뿐만 아니라 마당에 서있던 시녀와 하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소우연이 방에서 양산 하나를 챙겨 이육진을 가려주었고 위로 쓱 쳐다보던 이육진이 말했다.“오늘 햇빛도 따스하고 풍경도 좋은 것 같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자리에서 일어난 소우연은 이육진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었으나, 이육진은 휠체어에 몸을 기대고 갑자기 눈을 지그시 감았다.“국물을 마시고 싶소.”소우연은 이육진의 요구대로 국물을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한 모금 삼키던 이육진은 갑자기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을 하더니, 결국 국물을 사방으로 뿜어버렸다.화들짝 놀란 소우연이 얼른 말했다.“왕야,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사레에 걸려서 국물이 폐에 흘러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소우연의 말에 흠칫하던 이육진은 남강에서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소녀가 이육진에게 탕약을 먹일 때 앞을 볼 수 없었던 이육진은 급하게 마시다가 사레에 걸렸었다.그때 소녀가 해준 말이 있었다.“도련님,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사레에 걸려 국물이 폐에 흘러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생각에 잠겨 있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보며 말했다.“눈을 감고 있어서 몰랐소.”“괜찮습니다. 제가 조금 더 천천히 드리겠습니다.”남강에 있을 때, 소녀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괜찮습니다. 천천히 마셔도 됩니다.”목소리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투에 같은 약초 향이었다.눈을 천천히 뜬 이육진은 한층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의 시선이 왠지 낯설었다.“왕야?”이육진이 그릇을 손에 들며 말했다.“이젠 나 스스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소.”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육진은 책을 보고 있었고 소우연은 그 곁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의서를 공부하고 있었다.이때, 진규가 방으로 들어와 이육진에게 아뢰어야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이육진은 별채 곁에 있는 곁방을 가리키더니, 문득 소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부인이 이 별채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옆에 있는 곁방을 나와 함께 쓰는 서재로 만드는 게 좋겠소.”“네?”이육진은 이미 따로 서재가 있지 않나? “부인은 날 치료해줄 약을 만들어야 해서 약방에
몇 대가 큰 복을 받는다…도대체 어떤 신분을 소유하면 몇 대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을까?그건 바로 만인지상에 있는 황후이다.때문에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은 소우희에게 심혈을 기울였다. 만약 이육진이 지금 이 꼴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현재 황태자의 신분일 것이고 소씨 가문 사람들은 소우희를 회남왕 관저에 시집 보내려고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하지만 몸과 얼굴이 망가진 이육진은 절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소씨 가문에서는 소우희를 회남왕에게 시집 보내지 않으려고 했고 소우희 대신 소우연을 보낸 것이다.그리고 소우희는 자연스럽게 소우연을 대신하여 평서왕 세자와 혼인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훗날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 소씨 가문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정신 나간 사람들! 그자들은 소우희가 황후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확신한 건가?”이육진은 결코 소씨 가문이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빨래방 시녀는 전에 왕비님 곁을 지키던 시녀라고 합니다. 마침 그 시녀가 소씨 저택 하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 목격해서 소인이 물어봤습니다.”턱을 괸 채로 한참동안 침묵하던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왕비는 이 저택에 시집올 때 시녀 한 명도 데리고 오지 못했어. 소씨 가문에서는 내가 왕비를 죽일 거라고 확신한 건가?”진규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이육진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이육진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차별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그게 얼마나 슬프고 외로운 일일지 알 것만 같았다.이육진은 지금 그런 상황을 겪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황위를 황족 다른 자제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으며 더 이상 이육진을 고려하지 않았다.몸과 얼굴이 망가졌다는 이유로 황족들에게 있어서 이육진은 괴물이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난폭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괴물이었다.“왕야, 지금까지 이 저택에 시집온 여인들이 전부 살해됐으니 소씨 가문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진규의 말에
“십중팔구이옵니다.”“소우희는 참으로 대담하도다. 의술 같은 것조차 감히 남을 사칭하다니!”진규가 말하자 이육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담함 때문이 아니오.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자를 지나치게 애지중지하는 반면에 우연이에게 소홀히 대하니, 그자의 기세가 점점 커져 우연을 그리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오.”진규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연이라니? 왕야께서 왕비를 부르는 호칭이 어찌 이리 크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이육진은 진규의 놀란 표정을 전혀 보지 못한 듯하였다. 진규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은 듯했다.다행히 왕야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로서, 목숨은 안전할 것 같았다! 진규는 이 순간의 왕야가 예전보다 한층 더 인간적이라 좋았다.왕비도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다!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니, 무빈이 다가왔다.“폐하, 왕비께서 사람을 보내어 왕야께서 이락원으로 돌아가시는지 여쭈셨습니다.”그러자 이육진이 답했다.“이후로는 쭉 그리할 것이니라.”쭉 그리할 것이라고?무빈은 깜짝 놀라 진규를 바라보았지만 진규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왕부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 같았다.천지개벽?어떤?이락원으로 돌아가니, 샤워를 마친 소우연이 한창 의학 서적을 보고 있었다.하인들이 예를 올리는 소리에 그녀는 책을 덮고 곧바로 나와 맞이하였다. “오늘 밤 제가 첫 번째 치료 과정의 연고를 시험해 보겠나이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다.” 곧이어 무빈과 정연이 하인들과 함께 들어와 큰 목침대 근처의 욕조를 가득 채웠다.그리고 이육진은 스스로 상의를 벗고 몸을 풀었다. 이락원은 본채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저 욕실 한편에 병풍으로 구획을 나눈 정도였다. 욕조는 침대 가까이에 놓여있었고, 위에는 하나의 가로 막대가 있어 이육진이 갈아입을 옷이 걸려 있었다. 소우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가갔다.“제가 모시겠나이다.”이육진은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라…….이건 연인들 사이에서나 하는 서약이 아니던가?이육진의 심장은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씨앗이 그의 가슴속에 뿌리내려,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도 그대에게 약조하노니, 내가 살아있는 한 평생을 다해 그대를 지켜주겠노라.”“왕야…….”소우연의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것이 욕조의 따뜻한 김 때문인지, 아니면 감동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소우연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있었다. “저에게 그리 말씀해 주신 이가 처음이라 실례를 범하였나이다.”이육진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가까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대가 내 모습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그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럴 리 없사옵니다.” 소우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민수는 훌륭한 미모를 지녔다. 그런데 그와 소우희는 왜 그녀를 기만한 건일까? 분명 이미 눈이 맞고 남았을 텐데 이민수는 가족과 함께 이를 그녀에게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면...”그 순간 이육진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물속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소우연의 손에는 여전히 목욕 천이 들려 있었다. 소우연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랬다. 부부라면, 평생 함께할 뜻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다만 이육진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더니 그녀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우연은 그저 빨리 끝내려다 한 순간의 부주의로… 순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마치 잘 삶아진 새우 같았다. “제, 제가… 왕야의 의복을 가져오겠나이다!”놀란 그녀는 말이 꼬이기 시작했고 그가 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육진: “…….”그의 얼굴 또한 그리 나을 바 없었으니, 조금 전 그녀가 그
이육진이 말하길, “그대는…… 평서왕 세자를 정말로 내려놓았는가?”소우연은 그가 갑자기 이민수를 언급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육진의 능력으로 보아, 그녀가 무엇을 숨기려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다.결국, 이육진과 혼인하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은 이민수에게 온전히 쏠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소우연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왕야의 사람이 되었사옵나니, 살아서는 제 왕부의 사람이고 죽어서는 왕부의 혼이 될 것이옵니다.” 그녀는 한편으로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혹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그러자 이육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 아주 편안하구나.”그녀는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다만 지난번에는 “살아서는 왕야의 사람이고 죽어서는 왕야의 혼”이라 말했을 뿐이었다. “제가 미덥지 않으십니까?”소우연이 문득 되묻자, 이육진이 대답했다. “믿는다.”그녀의 결심은 믿었다.하지만 이민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는 것은 믿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대화 중에서 아직까지도 이민수를 사랑하고 있냐는 말을 부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육진은 마음 한켠이 여전히 불쾌했다.소우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이 주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육진이 아직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그녀도 그의 표정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민수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행동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그날 밤, 소우연이 먼저 침상에 올랐다. 이육진도 그 뒤를 따라 침상에 올랐지만, 촛대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소우연이 “앗!” 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가 촛대를 끄러 내려가려 하자, 이육진이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촛대들이 모두 꺼지고 방안은 삽시에 어둠이 내려앉았다.세상에...방금전 그의 행동은 너무 멋졌다.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이육진이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며 그녀를
“이제보니 소우희의 외출 목적이 소현우와 소한준 두 사람을 경성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였네.”소우연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때, 정자에 앉아있던 이육진이 말했다.“소우희 그 여자는 경성의 천재 소녀가 아니라 완전 멍청이였어.”“예전에 덕빈 마마께서 소우희의 어여쁘고 천재적인 모습을 보고 폐하께 왕야와 소우희를 위해 혼인을 하사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육진은 그녀를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그러고보니 소우희 그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니구나. 그자가 아니었으면 나와 연이 너의 인연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이육진은 그동안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단서를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특히 용강한은 전에 이육진에게 소우희 대신 시집온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하면서 어쩌면 소우연이 그의 고달픈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때 당시 이육진은 용강한에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점을 봐 달라고 했고 용강한은 그런 이육진에게 급할 것 없다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만 얘기했다.이육진은 용강한의 말투와 태도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그러다가 혼사를 치른 뒤, 소우연의 몸에서 생명의 은인과 똑같은 약초향이 나자 이육진은 그제야 용강한은 사기꾼이 아니라 실력이 뛰어난 점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한편, 소우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나와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그 말은 마치 이육진이 두 사람이 언젠가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내 지운 소우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왕야 말씀이 맞습니다.”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소우연이 잘못된 선택을 하나라도 했더라면 오늘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육진 이 남자만 봤을 때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며
소현우는 아버지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대 당시 최전방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후방을 책임지던 회남왕이 습격을 당한 탓에 지원군들이 제때에 나타나지 못했다.결국 삼천 명이 넘었던 병사들은 몇백 명 밖에 남지 않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소현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부하는 곧바로 소현우를 조청강에 위치한 그의 외갓집으로 데려갔지만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그러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이 소우희였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소우희가 매일 소현우 곁을 지켰고 하인을 시켜 약을 달이고 직접 소현우에게 먹여 주기까지 했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외출하느라 바빴다.자세하게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소우연은 매일 소우희에게 소현우가 아직도 고열을 앓고 있는지,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지는 않는지 확인하라고 얘기한 것 같았다.“이제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겁니까?”의자에 앉아있던 소현준이 소현우를 빤히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소현우는 소우희에게 의심이 생긴 게 확실하다.소홍번도 소현우를 보며 말했다.“진실이 무엇인지 너도 이제 다 알았을 거야. 의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너를 살려주었겠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소현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홍범의 말에 대꾸를 했다.“아버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우리 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미안한 게 많아. 하지만 근래에 네 어머니와 현준이가 회남왕에 찾아가 소우연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그 아이가 그렇게 냉정하단 말입니까?”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쳐다보았고 소현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소현우의 머릿속에 소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도대체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 소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라버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소우연은 지금 회남왕비입니다.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던 예전의 소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 소한준은 너무 안쓰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소우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그래도 우린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가족인데 소우연이 너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소우연은 지금 저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보십시오. 소우연은 얼굴도 비추지 않을 겁니다.”소우희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씨 가문의 나머지 사람들은 속이기 쉽지 않지만 소한준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가장 예뻐하고 아껴줬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기에 이번에도 무조건 그녀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난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복덩이야.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한편, 소한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자 소우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와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소우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갔는데 소우연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솔직히 전 소우연이 제 모든 걸 빼앗아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소우연의 행동을 보면 저희 소씨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깊어 보입니다. 만에 하나,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겠다는 소우연의 말이 그냥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떡합니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는 제 입에서 소우연이야말로 의술을 할 줄 아는 딸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소우연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 걸고 금주까지 와서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는 겁니다!”“다들 미쳤구나!”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말하다가 너무도 가여운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두 눈은 너무
소현우와 소한준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소한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우희야,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하지 말아라. 큰형과 난 언제든 네 편이다.”소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걱정하지 말 거라. 내일 내가 일단 아침 일찍 경성으로 출발하마! 우희 넌 한준이와 함께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소우연은 아마도 소우희를 도와서 약을 제조할 때 의술을 조금 익혔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가문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회남왕은 왜 갑자기 자비를 베풀어 소우연을 살려둔 걸까?예전에 소현우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소우희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곁에서 소현우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밖으로 싸돌아 다니느라 바빴다.친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쓴 소우연만 생각하면 소현우는 너무 실망스웠다.“고마워요, 큰 오라버니.”소우희가 가까스로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소현우가 곁에 있던 혜주에게 말했다.“넌 일단 우희가 푹 쉴 수 있게 모시고 나가거라.”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혜주는 소우희를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가자 소한준이 씩씩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소우연 걔는 미친 게 분명해요.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다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입니다.”“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 이 일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소우연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이야.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고 우희의 억울함을 풀어줘야지.”“아버지와 둘째 형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우연의 말만 듣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우희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소우연이 할머니로 우희를 협박했다고. 우희에게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소우연이라고 인정하라고. 심지어 본인이 소씨 가문 복덩이로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지 않았느냐? 소우연 걔가 참…”한편, 방을 나선 소우희와 혜주는 멀리
“혜주 얘는 왜 이래?”그제야 평소와 다른 혜주를 눈치챈 소현우가 묻자 소우희가 대답했다.“소우연이 절 협박했다는 사실을 혜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우연이 일부러 이런 수를 쓴 겁니다.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화를 버럭 내시더니 혜주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혜주의 혓바닥은 결국 소우연이 자른 겁니다.”“아버지가?”소현우와 소한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하긴, 아버지께서 사실을 왜곡한 소우연의 말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불과 몇 달 사이에 집에 이렇게 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소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현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가고 이 때문에 황제가 평춘왕와 소우희 두사람의 혼사를 하사했을 때부터 소현우는 소씨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소우연까지 이렇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이건 단순한 변고가 아닙니다! 소우연이 회남왕을 부추겨 덕빈 마마와 폐하게 평춘왕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고 한 게 분명해요. 소우연이 우리 우희를 철저하게 망가트리려고 한 겁니다.”소우희는 감동한 눈빛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말로는 다들 소우희를 예뻐하고 아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앞에 나서서 소우희를 지키는 사람은 소한준밖에 없었다.이런 생각에 소우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셋째 오라버니, 소우연이 절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할머니의 병으로 장난치는 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소우연이 어떤 태도인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소우연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이 없습니다. 심지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소현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급하게 제지하자 소우희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오라버니, 제가 어렸을
예상에 없던 폭우 때문에 노정이 지체된 소현우와 소한준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금주에 도착했다.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우희는 뒷돈을 챙겨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금주 역참에 들어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게 되었다.“우희야, 네가 금주엔 어쩐 일로 온 것이냐?”소현우는 자신과 소한준 앞에 무릎을 꿇은 소우희를 재빨리 부축하며 물었지만 소우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혜주에게 말했다.“얼른 우희를 일으키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혜주가 얼른 소우희를 부축했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혜주도 소우희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냐?”성격이 급한 소한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애절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때, 소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큰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이제 저에겐 돌아갈 친정집이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할머니를 위해 조제할 진정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약재를 소우연이 전부 싹쓸이했습니다. 제가 세자께 부탁을 해서 금주와 영주 약방을 다 돌아봤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도무지 가만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 소우연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소우연이 글쎄… 글쎄…”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우희가 한참동안 훌쩍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소우연이 저를 도와 약재를 달였을 때 전 처방전을 조금도 숨김없이 다 보여줬었습니다. 그런데 소우연이 갑자기 돌변하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소우희의 말에 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난 산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부터 네가 마음에 걸렸다!”소현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소현우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소우희는 못 이기는 척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들, 소우연은 분명 진정향
마음속에 큰 파도가 출렁거렸지만 소우연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ㅇ르 유지한 채 다정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 왕야를 믿습니다.”이렇게 좋은 왕야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막연하다고 했던 용강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리고 용강한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상하기도 했다. 용강한은 소우연이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혹 용강한 그자가 너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도 한 것이냐?”이육진은 이제 용강한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용강한은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점괘를 보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아닙니다.”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소우연은 왠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용강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한편, 금주 성문 부근에서.“왕비님, 소인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 장군님 일행은 오늘 내로 금주에 도착하여 역참에 묵을 예정이라고 합니다.”검은 복장을 차려입은 호위무사가 소우희에게 보고를 올렸고 소우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곁에 있던 시녀 춘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서 혜주를 데려오거라.”벙어리가 된 혜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참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혜주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네.”밖으로 나간 춘화는 이내 혜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낡은 마의를 입은 혜주는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우희는 그런 혜주를 재빨리 일으켰다.“얼른 일어나거라.”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말했다.“너희들은 이만 물러나거라.”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우희는 혜주를 안아주더니 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혜주야, 너와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일 줄
한편, 정연은 명심에게 왕비와 왕야를 위해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왕비님이 나오셨습니다.”소우연을 발견한 명심이 말했다.정연과 명심은 가까이 다가가다가 휘청거리는 소우연의 모습에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왕비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화들짝 놀란 정연이 다급하게 물으며 대청마루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괜찮다.”소우연이 대답했다.‘괜찮다고? 얼굴이 이렇게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다니?’정연과 명심은 양쪽에서 소우연을 부축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던 이육진과 마주치게 되었다.핏기를 잃은 소우연의 모습에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찌된 일이냐?”겨우 진정한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일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잠시 휘청거렸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핑계를 당연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에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가 없다.“그럼 얼른 가서 간식 좀 준비하거라.”“네, 알겠습니다.”정연과 명심이 소우연을 부축한 채 떠났다.이때, 대청에서 나온 용강한은 문턱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 왕비가 뭘 물어본 것이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묻자 용강한은 조금 전에 소우연이 했던 질문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만 용강한과 소우연이 어렸을 때의 인연과 그가 소우연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소우연의 화들짝 놀란 반응에서 용강한은 그녀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그저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왕비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놀란 걸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왕야, 왕비님이 겉으로 보기엔 씩씩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상처가 많은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네.”“나도 왕비가 또래 소녀들처럼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걱정 없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이육진은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강한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