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진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비파차를 쭉 들이켰다.“향이 참 좋소.”“왕야 입맛에 맞으시면 제가 비파차를 항시 준비해두겠습니다.”“그래.”핏기가 조금씩 돌고 있는 이육진을 보며 소우연이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왕야, 외람된 말이지만…”이육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머뭇거렸고 이육진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왕야, 제가 의술을 많이 익히긴 했지만 신의는 아닙니다. 그리고 신의라고 해도 환자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왕야를 치료하는 동안은 제 당부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그 말은 나에게 부인의 명에 따르라는 뜻인가?”이육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소우연이 연신 손을 내저었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치료에 관한 일에서만 제 당부를 들어주셨으면 해서 얘기하는 겁니다.”이육진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소우연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동의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일단은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그래, 치료에 있어서는 내 부인의 말을 듣겠소.”고개를 번쩍 든 소우연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너무 감사드립니다, 왕야.”감사하다고?이육진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이 들고 있던 잔을 받아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뒤, 휠체어를 밀고 마당으로 나갔다.“왕야께서 동의하셨으니 오늘 첫 당부를 드리겠습니다. 마당에서 햇빛 쪼임을 해주십시오.”이육진은 예상치 못한 당부에 흠칫하다가 바로 거절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정연은 소우연이 이육진을 모시고 마당으로 나오자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고 그녀뿐만 아니라 마당에 서있던 시녀와 하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소우연이 방에서 양산 하나를 챙겨 이육진을 가려주었고 위로 쓱 쳐다보던 이육진이 말했다.“오늘 햇빛도 따스하고 풍경도 좋은 것 같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자리에서 일어난 소우연은 이육진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 주었으나, 이육진은 휠체어에 몸을 기대고 갑자기 눈을 지그시 감았다.“국물을 마시고 싶소.”소우연은 이육진의 요구대로 국물을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한 모금 삼키던 이육진은 갑자기 사레에 걸린 듯 기침을 하더니, 결국 국물을 사방으로 뿜어버렸다.화들짝 놀란 소우연이 얼른 말했다.“왕야,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사레에 걸려서 국물이 폐에 흘러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소우연의 말에 흠칫하던 이육진은 남강에서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소녀가 이육진에게 탕약을 먹일 때 앞을 볼 수 없었던 이육진은 급하게 마시다가 사레에 걸렸었다.그때 소녀가 해준 말이 있었다.“도련님, 천천히 마셔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마시면 사레에 걸려 국물이 폐에 흘러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생각에 잠겨 있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보며 말했다.“눈을 감고 있어서 몰랐소.”“괜찮습니다. 제가 조금 더 천천히 드리겠습니다.”남강에 있을 때, 소녀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괜찮습니다. 천천히 마셔도 됩니다.”목소리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같은 말투에 같은 약초 향이었다.눈을 천천히 뜬 이육진은 한층 부드러운 눈빛으로 소우연을 쳐다보았고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의 시선이 왠지 낯설었다.“왕야?”이육진이 그릇을 손에 들며 말했다.“이젠 나 스스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소.”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이육진은 책을 보고 있었고 소우연은 그 곁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의서를 공부하고 있었다.이때, 진규가 방으로 들어와 이육진에게 아뢰어야 할 말이 있다고 하였다.이육진은 별채 곁에 있는 곁방을 가리키더니, 문득 소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부인이 이 별채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그럼 옆에 있는 곁방을 나와 함께 쓰는 서재로 만드는 게 좋겠소.”“네?”이육진은 이미 따로 서재가 있지 않나? “부인은 날 치료해줄 약을 만들어야 해서 약방에
몇 대가 큰 복을 받는다…도대체 어떤 신분을 소유하면 몇 대나 큰 복을 받을 수 있을까?그건 바로 만인지상에 있는 황후이다.때문에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은 소우희에게 심혈을 기울였다. 만약 이육진이 지금 이 꼴이 되지 않았다면 그는 현재 황태자의 신분일 것이고 소씨 가문 사람들은 소우희를 회남왕 관저에 시집 보내려고 갖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하지만 몸과 얼굴이 망가진 이육진은 절대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소씨 가문에서는 소우희를 회남왕에게 시집 보내지 않으려고 했고 소우희 대신 소우연을 보낸 것이다.그리고 소우희는 자연스럽게 소우연을 대신하여 평서왕 세자와 혼인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훗날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 소씨 가문의 부귀영화를 영원히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정신 나간 사람들! 그자들은 소우희가 황후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확신한 건가?”이육진은 결코 소씨 가문이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빨래방 시녀는 전에 왕비님 곁을 지키던 시녀라고 합니다. 마침 그 시녀가 소씨 저택 하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 목격해서 소인이 물어봤습니다.”턱을 괸 채로 한참동안 침묵하던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왕비는 이 저택에 시집올 때 시녀 한 명도 데리고 오지 못했어. 소씨 가문에서는 내가 왕비를 죽일 거라고 확신한 건가?”진규가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이육진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이육진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차별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지만 그게 얼마나 슬프고 외로운 일일지 알 것만 같았다.이육진은 지금 그런 상황을 겪고 있었다. 아바마마는 황위를 황족 다른 자제들에게 물려주려고 하고 있으며 더 이상 이육진을 고려하지 않았다.몸과 얼굴이 망가졌다는 이유로 황족들에게 있어서 이육진은 괴물이나 다름없었고 심지어 난폭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괴물이었다.“왕야, 지금까지 이 저택에 시집온 여인들이 전부 살해됐으니 소씨 가문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진규의 말에
“십중팔구이옵니다.”“소우희는 참으로 대담하도다. 의술 같은 것조차 감히 남을 사칭하다니!”진규가 말하자 이육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대담함 때문이 아니오.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자를 지나치게 애지중지하는 반면에 우연이에게 소홀히 대하니, 그자의 기세가 점점 커져 우연을 그리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라오.”진규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연이라니? 왕야께서 왕비를 부르는 호칭이 어찌 이리 크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이육진은 진규의 놀란 표정을 전혀 보지 못한 듯하였다. 진규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은 듯했다.다행히 왕야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로서, 목숨은 안전할 것 같았다! 진규는 이 순간의 왕야가 예전보다 한층 더 인간적이라 좋았다.왕비도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시다!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니, 무빈이 다가왔다.“폐하, 왕비께서 사람을 보내어 왕야께서 이락원으로 돌아가시는지 여쭈셨습니다.”그러자 이육진이 답했다.“이후로는 쭉 그리할 것이니라.”쭉 그리할 것이라고?무빈은 깜짝 놀라 진규를 바라보았지만 진규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왕부에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 같았다.천지개벽?어떤?이락원으로 돌아가니, 샤워를 마친 소우연이 한창 의학 서적을 보고 있었다.하인들이 예를 올리는 소리에 그녀는 책을 덮고 곧바로 나와 맞이하였다. “오늘 밤 제가 첫 번째 치료 과정의 연고를 시험해 보겠나이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좋다.” 곧이어 무빈과 정연이 하인들과 함께 들어와 큰 목침대 근처의 욕조를 가득 채웠다.그리고 이육진은 스스로 상의를 벗고 몸을 풀었다. 이락원은 본채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저 욕실 한편에 병풍으로 구획을 나눈 정도였다. 욕조는 침대 가까이에 놓여있었고, 위에는 하나의 가로 막대가 있어 이육진이 갈아입을 옷이 걸려 있었다. 소우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가갔다.“제가 모시겠나이다.”이육진은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맞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라…….이건 연인들 사이에서나 하는 서약이 아니던가?이육진의 심장은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씨앗이 그의 가슴속에 뿌리내려,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나도 그대에게 약조하노니, 내가 살아있는 한 평생을 다해 그대를 지켜주겠노라.”“왕야…….”소우연의 두 눈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것이 욕조의 따뜻한 김 때문인지, 아니면 감동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소우연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있었다. “저에게 그리 말씀해 주신 이가 처음이라 실례를 범하였나이다.”이육진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렇게 가까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대가 내 모습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 그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럴 리 없사옵니다.” 소우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민수는 훌륭한 미모를 지녔다. 그런데 그와 소우희는 왜 그녀를 기만한 건일까? 분명 이미 눈이 맞고 남았을 텐데 이민수는 가족과 함께 이를 그녀에게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면...”그 순간 이육진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물속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소우연의 손에는 여전히 목욕 천이 들려 있었다. 소우연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랬다. 부부라면, 평생 함께할 뜻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다만 이육진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더니 그녀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우연은 그저 빨리 끝내려다 한 순간의 부주의로… 순간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고 마치 잘 삶아진 새우 같았다. “제, 제가… 왕야의 의복을 가져오겠나이다!”놀란 그녀는 말이 꼬이기 시작했고 그가 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육진: “…….”그의 얼굴 또한 그리 나을 바 없었으니, 조금 전 그녀가 그
이육진이 말하길, “그대는…… 평서왕 세자를 정말로 내려놓았는가?”소우연은 그가 갑자기 이민수를 언급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육진의 능력으로 보아, 그녀가 무엇을 숨기려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을 것이다.결국, 이육진과 혼인하기 전까지 그녀의 마음은 이민수에게 온전히 쏠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으니.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소우연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제가 이미 왕야의 사람이 되었사옵나니, 살아서는 제 왕부의 사람이고 죽어서는 왕부의 혼이 될 것이옵니다.” 그녀는 한편으로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혹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그러자 이육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불편하지 않다. 아주 편안하구나.”그녀는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다만 지난번에는 “살아서는 왕야의 사람이고 죽어서는 왕야의 혼”이라 말했을 뿐이었다. “제가 미덥지 않으십니까?”소우연이 문득 되묻자, 이육진이 대답했다. “믿는다.”그녀의 결심은 믿었다.하지만 이민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는 것은 믿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대화 중에서 아직까지도 이민수를 사랑하고 있냐는 말을 부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육진은 마음 한켠이 여전히 불쾌했다.소우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이 주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육진이 아직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그녀도 그의 표정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민수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행동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그날 밤, 소우연이 먼저 침상에 올랐다. 이육진도 그 뒤를 따라 침상에 올랐지만, 촛대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것을 보고 소우연이 “앗!” 하고 소리를 냈다. 그녀가 촛대를 끄러 내려가려 하자, 이육진이 손을 한번 휘저었다. 그러자 촛대들이 모두 꺼지고 방안은 삽시에 어둠이 내려앉았다.세상에...방금전 그의 행동은 너무 멋졌다.두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이육진이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며 그녀를
“미안하오. 내가 깊이 헤아리지 못했소. 왕비가 준비가 되었을 때, 주공지례를 행하도록 하지.”오랜 침묵 끝에 이육진은 약간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자, 그리워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억지로 그녀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깊은 밤, 이육진은 소우연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소리 없이 스며드는 빗물처럼 그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그의 마음이 편치 않은 반면에 또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그녀가 분명 평생 자신과 함께하겠노라 맹세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여전히 이름 모를 억울함과 거부감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와 함께할 생각에 모든 준비를 마쳤건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 없게 되자, 삽시에 밀려오는 공허함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왕비는 먼저 쉬게. 나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 가봐야겠다.”이 말만 남기고 그는 옷을 챙겨 입고 휠체어를 밀어 방을 나섰다. 소우연이 일어나 배웅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왜 이리되었는가? 그가 먼저 합방을 언급했건만, 어째서 갑자기 피하는 것인가? 소우연은 문득 소우희의 말이 떠올랐다. “몸에선 약초 냄새가 진동하는 너를 누가 좋아하겠어?”정말 그런 것일까?그녀는 내려온 머리카락의 냄새를 살짝 맡아보았다. 오늘은 머리를 감지 않았던 탓에, 정말로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다.“왕비마마, 괜찮으신지요?”정연이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야가 밤중에 방을 나서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붉게 물든 소우연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듯했다. 그녀는 촛불을 밝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괜찮다. 어서 쉬도록 하거라.” “예.”정연은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물러갔다.이락원을 나선 이육진은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몸에 남아 있던 열기를 식혔다. 무빈은 물을 준비하라는 지시인 줄 알고 달려왔지만, 이육진이 이락원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뒤를 따랐다
미치도록 매혹적이라 떨쳐버릴 수 없었다.다음 날. 소우연은 정연과 호위무사, 마부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들이 떠난 뒤, 명심이 서둘러 서재로 가 이를 보고하였다. “이후로 왕비의 외출은 보고할 필요 없다.”명심은 약간 의아했으나, 왕야의 말에는 분명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했다. 왕야께서 왕비를 믿으시는 것이라 생각하니, 명심도 기분이 괜히 좋아졌다. 왕부에 주모가 자리하였으니, 자신과 정연같이 어릴 적부터 통방으로 길러진 여종들이라면 이젠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명심은 무의식적으로 이육진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왕야는 풍채가 빼어나고 절세의 풍류를 자랑했으나, 그 용모가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주인은 주인이니, 그녀와 정연은 왕야의 사람이었다.“알겠사옵니다, 왕야. 소인 명심하겠나이다.”물러나려는 명심에 이육진이 덧붙였다.“왕비가 돌아오면 나에게 알리도록 하거라.”“예.”한편, 소우연은 거리에 나가 약재를 몇 가지 사는 중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언니…….”소우희였다! 소우연이 고개를 돌리자, 하얀 옷차림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소우희가 보였다. 소우희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쉬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여기서 그녀를 마주치다니, 소우연은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소우희는 가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어찌 나를 이리 대할 수 있어? 우리 자매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지 않았아? 자매는 영광도 슬픔도 함께 나눠야 한다는 걸 언니는 모르는 거야?”소우연은 기가 차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혼 준비는 하지 않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언니가 준 진정향이 얼마 남지 않았어, 할머니께서 이미 다 쓰신 모양이야.”소우희는 왕부 밖에서 며칠 동안 소우연이 외출하기만은 기다렸던 것이다.소우연은 그녀가 진정향 때문에 이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우희는 마음이 급했다.“언니,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잠깐 이
“왕비가 말해보시오.”이육진은 손에 낀 청옥 반지를 굴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그는 방금 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소우연을 바라보던 그 경고의 눈빛, 그 모든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진규에게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소우연이 친정에 갔던 날 이들의 태도가 심히 불손했다 하였으나, 그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가슴속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이 타올랐다. 화로 속 은탄이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조용한 실내에서는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왕야, 저는...”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육진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태도이기도 했다.“왕야께서는 제가 누구인지가 그리도 중요하십니까?”이육진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왕비는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그대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그 말이 떨어지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식 진행자가 소리 높이 외쳤다.소홍범은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온 가족은 서둘러 평서왕부를 맞으러 나갔다. 이민수는 붉은빛 예복에 담비 털망토를 걸치고, 뒤에는 중매인과 예물을 운반하는 하인들이 있었다.수십 대에 걸친 화려한 예물 행렬은 매우 화려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혼약식 예물일 뿐. 진정한 혼례가 치러지는 날, 그가 준비할 채단과 예물은 경성 여인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게다가 소씨 가문이 소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 역시 십 리를 채울 정도로 화려했으니. 하지만 소우연은? 소우연은 한때 소씨 가문의 적녀였음에도 정작 혼인할 때 받은 것은 변방에 있는 두 채의 가게뿐이었다.그마저도 아직까지 임진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만약 이민수와 소우희가 결국 혼인한다면, 내 운명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왕야……”소
이육진은 혹여나 소우연이 진원장군 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여, 진우 한 명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진규도 보내는 것인가? 소우연은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이 마차가 이육진의 전용 교자였음을 깨달았다. 보통 마차보다 크기가 두 배는 넉넉했다.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가면을 쓰고 검은색 예복을 걸친 이육진이었다.마차 내부는 충분히 넓어서 그의 휠체어도 있었다.“왕야?”소우연은 그가 마차에 타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번 친정에 갈 때도,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우희의 혼약식에 가려는 것인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육진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하는 수없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왕야께서도 소씨 가문을 방문하시려는 겁니까?”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은색 가면을 쓴 남자에게 향했다.흉터들은 가려져 있었고 오직 깊고 서늘한 눈동자와 뚜렷한 턱선만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본래의 얼굴을 되찾으면, 분명 절세의 미남일 터였다. 이육진은 가볍게 “그래.” 하고 답했다. 정연이 마차에 올라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진우가 마차를 몰아 진원장군부로 향했다. 진원장군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우연은 직접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열여섯 해를 살아온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하인들과 오라버니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일 것이다.소홍범은 임진숙과 아들들을 대동하여 이육진을 맞이했다. 비록 그가 지금은 흉측한 얼굴에 불구가 되었어도 황제의 유일한 친자인 만큼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이육진이 상석에 앉고 소우연은 그의 우측에 자리했다. 모두가 혼약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 “소 장군,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소.”소홍범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한참 후, 이육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소우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우연, 너는… 알고 있느냐?”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소우연의 고운 눈썹이 찌푸러졌다.“무엇을 말이옵니까?”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그녀의 온기는 실로 매혹적이었다.“소녀 궁금하오니 말해 보시옵소서.”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그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은 마치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이육진은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모두가 내 얼굴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그토록 울며불며 나와의 혼인을 거부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변한 것이냐? 모든 것이 거짓이냐?”소우연은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눈앞의 이 사내는 한때 황태자였고 전장을 누비던 무패의 전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그저 소설 속 배경에 불과한 인물들,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줄 뿐인데 말이다.“위엄이 넘치시는 왕야를 제가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사옵니까?”이육진의 심장이 단단히 죄어왔다.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며칠 사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경성을 뒤흔들고 배후를 처단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이민수는 어쩔 셈인가?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한때는 네 약혼자이기도 하였는데, 이리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이냐?”“이미 잊었사옵니다. 여인은 남편을 하늘로 섬기는 법. 다른 이의 남편은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왕야께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다시 태어난 그녀는 그저 소설 속 희생될 조연에 불과했다. 설령 이 모든 사실을 이육진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그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전생에,
“만약 내 상처가 낫지 않고 내 다리 또한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왕비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인가?”그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이라도 스치는 아주 미세한 후회나 거짓마저 놓칠까 두려우면서도 그는 조용히, 또 간절히 그녀를 응시했다. 몇 번의 숨결이 흐르고, 소우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조용히 감쌌다.“왕야께서는 제가 도망갈까 두려우신 것이옵니까?”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과거, 자신이 믿던 가족들에게 버려졌던 그날의 공포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 서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육진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언젠가 이육진마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하지만 소우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생을 이육진에게 걸어보기로 했다.하늘이 그녀를 다시 살게 한 이유가 다시금 비극을 되풀이하라는 것은 아닐 테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의 짙은 외로움을 보았다.이육진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우연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왕야께서 저를 내치지 않는 한 저는 평생 왕야 곁에 있을 것이옵니다.”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끝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와 온전히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 터. 그럼에도… 그녀가 그의 곁에 남아준다면... “저 또한 그러하옵니다.”소우연은 그의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볼에 살며시 가져갔다. 이육진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깊이 빠져 들것이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우연은
소우연은 태연한 듯 보였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재가 있는 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청색과 백색 차림의 두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심소균과 용강한? 그들이 방금 일부러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들에, 소우연은 다시 발길을 돌려 서재에 들어섰다.“매화가 너무 아름다워 꽃병에 꽂아 왕야의 책상 위에 두려 하옵니다. 그러면 왕야께서 감상하시기에 좋을 듯하옵니다.”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방금 용강한이 했던 ‘왕비는 그대의 복성이오.’란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있는 노란 매화로 향했다. “참으로 어여쁘게 피었구나.”“왕야께서는 늘 본채에 계셨으면서도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지 못하셨사옵니까?” 이육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멎쩍은 미소를 지었다.“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왕야께서는 꽃을 즐기지 않으십니까?”그녀는 꽃병을 이육진에게 건넸다. “나는 매화는 좋더구나.”“저도 역시 매화가 가장 좋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 밀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육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지나간 두 사람 중 흰옷은 흠천감 용강한이고 푸른 옷은 진국 공부 심소균이다.”소우연은 깜짝 놀랐다. 무빈과 정연은 그녀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다.“왜 그러는 것이냐?”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육진이 살짝 몸을 돌렸다.“저들을 알고 있었느냐?” 소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다.”그녀의 도움으로 이육진은 어느새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방 한켠, 온돌 위는 아직도 바둑판과 찻잔이 놓여 있어, 방금 전까지 셋이서 차를 마치며 바둑을 두면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꺾어 온 매화가 이미 시들어있었다. 소우연은 새 꽃병으로 바꿨다. 그러다 문득 그곳에 놓인, 오래된 거울
정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이육진이 화상을 입은 이후, 왕부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적어도 더 이상 웃음소리는 감히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부에서 이유 없이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매화를 꺾었고 정연은 그 꽃들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연의 손은 더 이상 꽃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왕비 마마, 본채로 가서 꽃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어차피 본채는 매일 사람들이 청소하고 있으니 이참에 시든 매화도 새것으로 갈아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소우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본채로 향해 발을 옮겼다. 소우연은 문득 서재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마침 무빈과 눈이 마주쳤다. 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왕야께서는 진국공부의 심소균 장군과 매우 가까운 사이겠지?”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손에 든 가위로 매화 가지를 정리했다. 꽃병을 가져와 꽃꽂이를 하려던 정연이 그녀의 말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왕비 마마께서… 이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소우연은 태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출정하셨을 때, 진국 공부의 공작 어르신과 함께하셨고, 심소균 역시 그때 참전하였으니, 그들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는 사실을 경성에서 모른 이가 없단다.”사실 이야기 속에 이육진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언급된 바 있었다. 하여 진국공부와 심소균, 심장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정연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진국 공부의 심 장군과 소 장군, 모두 예전에 왕야와 함께 전장에 나섰기에 각별한 사이입니다.”소우연은 이들이 그녀와 이육진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의 운명은 이미 이육진과 하나로 묶여 있었다.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준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정연은 소우연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여러 해 동안 왕야께서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무빈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우연에게 곧바로 밝힐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인 알아챌 길이 없사옵니다.”‘심장군께서는 평소에 활달한 성격이시나 왕야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결코 왕부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는데...’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그녀는 이미 본채의 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찬바람이 옷깃을 스미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무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정중히 권했다. “왕비마마, 차라리 본채로 돌아가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정연 역시 이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그러나, 소우연은 정원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화가 아름답게 피었구나. 몇 가지를 꺾어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야겠다.”정연: “……”무빈: “……”항상 왕야를 생각하고 계시는 왕비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사옵니다.”정연이 소우연의 뒤를 따랐다. 정연은 왕비께서 혹여 사고를 당하기 전의 왕야를 은밀히 사모하신 적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왕야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그러나 왕비께는 본래 정인이 있었으나 강제로 대신 시집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왕비는 아주 현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야에게 시집온 이상, 왕야만을 바라보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으니까.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왕비의 미래는 더욱 창창할 터, 어쩌면 머지않아 황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정연은 말없이 가위를 가지러 갔다.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서재 쪽 한 모퉁이가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무빈이 서재로 들자, 곧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때,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
‘그런데 왕비마마께서 과연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내 얼굴에 난 상처… 자세히 보거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 같으냐?”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내심 회복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소우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무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은 전처럼 창백하지 않사옵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셨기에 좀 더 건강해 보이는 것 같사옵니다.”“본왕이 묻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흉터가… 옅어졌느냐?”“저는… 그것이…”“거짓말은 하지 말거라!”그러자 무빈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소인 감히 거짓말은 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에 왕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사오니, 잘 알지 못하겠사옵니다.”잘 알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이육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빈에게 퇴거를 명했다.“물러가거라.”“오래된 상처이오니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나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너무 조급해하지 마옵소서..”무빈은 조심스레 이육진을 위로했다.차라리 왕야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는 그저 내시일 뿐이니 얼굴이 흉해지든, 몸이 불편하든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이육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무빈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책상 위에는 무빈이 남겨둔 거울이 놓여 있었다.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거울을 집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칼자국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화상 자국은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어 마치 팔순 노인의 주름진 피부
“저는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럽니다.”소우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마치 한 송이 탐스러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필요 없느니라.”이육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예.”소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어차피, 얼굴과 다리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겠지.’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육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다.“왕비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이육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우연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손끝이 닿는 순간, 소우연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손을 홱 빼내고는 이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이육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그녀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온몸을 이불 속에 꼭꼭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그러다 숨 막혀 쓰러질 것 같구나.”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빈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아침 식사 후.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바르며 물었다. “요 며칠 피부가 가려우시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으셨사옵니까?”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더구나.”“그렇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옵니다. 왕야의 피부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증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참말로… 회복되고 있단 말이냐?”“그러하옵니다.” 이육진은 이 가려움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이라 여겼었다. 약을 바른 후, 이육진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무빈아.”무빈은 급히 차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있사옵니다.”“거울을 가져오거라.”“거울 말이옵니까?”왕부에서 거울을 찾다니… 얼굴에 화상을 입은 뒤, 그는 왕부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수어버렸고 한 점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야, 지금은 거울이 없사옵니다. 즉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