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자들이 저에게 미안한 마음은 조금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소우희를 더욱 걱정하고 있습니다. 소우희에게 작은 벌조차 하나도 내리지 않았거든요.”“소우희가 너보다 먼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러 갔으니 두 사람은 아마 너를 오해하게 될 것이다.”“왕야, 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자들은 저를 소씨 가문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 저를 소씨 가문 딸로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오해하든 전 상관없습니다.”이런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마음이 아팠다.그의 연이는 이제 소씨 가문에게 완전히 실망한 것이다!이때, 간석이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왕야, 왕비님, 이 어의가 오셨습니다.”소우연은 재빨리 이육진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며 물었다.“벌써 온 것이냐?”며칠 전에 진맥을 했던 것 같은데 왜 벌써 왔지?“네, 왕비님. 이 어의께서 마당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소우연은 이육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간석에게 이 어의를 들게 하라고 말했다.이 어의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행동거지가 차분했다.이육진과 소우연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뒤 소우연을 위해 진맥을 진행했다.15분 뒤, 이 어의가 소우연을 쳐다보며 말했다.“왕비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왕야, 소인이 왕야께도 진맥을 해드릴까요?”고개를 돌린 이 어의가 이육진에게 묻자 이육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필요 없다. 내 몸은 아주 튼튼하다.”이 어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몇 달 동안이나 소우연을 위해 진맥을 했지만 아직도 회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태의원에 남은 이육진의 검사 기록에 의하면 이육진은 지금 회임이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왕비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혼사를 치른지 몇 달이나 넘었는데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이 어의는 이육진의 몸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이번에도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면 덕빈 마마가 크게 노할 수도 있을
이육진은 볼에 바람을 살짝 넣은 소우연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내 몸은 아무 문제가 없는 거겠지?”소우연은 이육진의 물음에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그녀는 한동안 남성 의학에 대해 연구를 해보았는데 이육진의 진맥을 짚었을 때, 오랫동안의 금욕생활로 살짝 들떠 있는 상태로 보였다.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얘기했다가 그녀에게 대신 해결해 달라고 하면 어떡할까 겁이 나기도 했다.두 사람은 진정한 합방 경험이 없지만 이육진은 너무도 당당하게 소우연에게 부끄러운 요구를 자주 했다.소우연은 그 요구들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한편, 날이 어두워지자 이육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우연의 손을 잡고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소우연은 이육진의 기다란 다리와 건장한 몸매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왕야, 저택에 저희를 지켜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걱정하지 말 거라.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은 진작 없어졌다.”“그렇군요.”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던 소우연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럼 감시자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정자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소우연은 걸음을 갑자기 멈추었고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가까이에 놓여있던 휠체어를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아악! 내 다리…”소우연의 손을 놓은 이육진이 앞으로 다가가 휠체어에 앉자 소우연이 얼른 뒤따라갔다.“왕야, 저택 안에 있던 감시자가 언제부터 없어진 거예요?”“아, 그게…”우물쭈물하는 이육진의 모습에 소우연은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연아, 그러니까 나는…”“왕야께서는 어젯밤에도 저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소우연은 화가 조금 났다.저택 안에 그들을 지켜보는 감시자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줄 알고 이육진의 제안에 협조하였고 자신의 몸을 만지게 허락하기도 했다. 그리고 심지어 주체할 수 없는 야릇한 신음소리까지 냈다.그런 과거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럴 때마다 소우연은
결국 보다 못한 간석이 이육진에게 춘궁도 몇 권을 건넸고 이를 대충 펼쳐보다가 흥취를 전혀 느끼지 못한 이육진은 이를 곁에 툭 던지고는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소우연과 부부의 낙을 행했을 때에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거나 그 방면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게 아니라 본능이었다.소우연의 곁에 있으면 이육진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았다.이육진이 이내 소우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간석은 소우연이 이육진을 버리고 떠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왕비님이 왕야를 버리고 혼자 떠난 건 처음이었다.“왕야…”한걸음에 달려온 간석은 재빨리 이육진의 휠체어를 끌고는 감히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그러다가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상대방은 되레 웃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왕야의 얼굴에 웃음이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몰래 웃고 있는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왕야, 왕비님께서 화나서 가신 것 같은데 왜 웃으시는 겁니까?”간석의 말에 이육진이 간석을 힐끗 흘겨보았다.소우연이 오늘 보여준 삐침이 얼마나 귀한 건지 이육진만 알고 있다.예전에 소우연은 이육진 앞에서 늘 깍듯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으며 그를 남편이 아닌 왕야만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신분에 눌려 예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소우연의 토라진 모습으로 보았을 때, 소우연은 마음속으로 이육진을 점점 더 신임하고 있는 듯했다.이육진은 생각만해도 너무 좋았다.한편, 기분이 좋아 보이는 왕야를 보며 간석도 어느새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왕야와 왕비님이 행복하고 즐거워야 노비들도 따라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으니까.저녁 식사 때. 정연은 살짝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확실하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평소대로라면 왕야와 왕비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장기를 두어 판 두거나 일상적인 담소를 나눠야 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짚고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이 발그레해진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육진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소우연 곁에 털썩 앉았다.소우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왕야의 다리는 이제 조금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무모한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이제 겨우 열댓 걸음밖에 못 걸으시는데 왕야는 무섭지도 않습니까?”“난 연이 네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섭다.”말문이 턱 막힌 소우연은 이육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육진이 이런 남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한편, 소우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육진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정말이에요. 제 말은 진심이에요.”4년 전, 이육진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소우연이었다. 그리고 4년 뒤,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리도 치료해주었고 심지어 얼굴의 흉터도 점점 연해지고 있다.이육진은 소우연 덕분에 긍정적으로 살아갈 목표가 생겼다.어여쁜 소우연의 얼굴을 보며 이육진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소우연에게 단순한 고마운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소우연이 자신의 아내여서 너무 기쁜 나머지 꿈속에서도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소우연도 이육진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이육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웠다.사실 소우연은 이제 남녀 사이의 감정에 대해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이육진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설레었다.“정말이에요.”이육진이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소우연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조심스럽게 벗겼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서로의 숨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소우연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하게 훑어보았다.얼굴 흉터가 거의 다 사라졌으며 뚜렷한 이목구비에 카리스마가 넘쳤다.하지만 소우연을 쳐다볼 땐,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표정이었
소우연은 곁에서 박수를 치며 이육진을 응원했다.“왕야, 회복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본채 앞마당에는 간석과 정연 그리고 나무 위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는 진규밖에 없었다. 나머지 하인들은 배나무 별채로 보내져 약재를 빻고 있었다.소우연의 응원에 간석과 정연도 한 마디씩 보태며 이육진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나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했고 이육진은 발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부인 말에 따르겠네.”간석이 휠체어를 끌고 오자 이육진은 바로 휠체어에 앉았고 이내 본채로 돌아가 목욕을 했다.결국 소우연은 오늘도 직접 이육진을 위해 고약을 발라주었다.매일 이 시간이 되면 이육진은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우연의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쥐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어느새 숨이 거칠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얼굴이 빨개진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을 챙기러 갔다.이틀 뒤.만안당에 무보수로 백성들을 치료해주러 간 소우연은 그곳에서 소한준을 보게 되었다.“잠깐 나오십시오. 제가 왕비께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뒷짐을 지고 서있던 소한준이 명령하듯 말하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소 장군님께서 지금 저에게 명령하신 겁니까?”“너…”한없이 냉랭한 소우연의 태도에 소한준은 소우희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소우연은 소씨 가문을 원망하고 소씨 가문을 철저하게 망가트리겠다고 했던 말들 말이다.소한준은 소우희를 경성까지 안전하게 호송했지만 소우희는 겁이 나서 평춘왕 저택에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했기에 두 남매는 어쩔 수 없이 객줏집에 묵었다.경성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며칠동안 매일 눈물을 흘린 소우희는 몸이 심각하게 말라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한준은 마음속에 화가 치밀었다.그래서 소우연과 소우희 자매를 화해시키기 위해 이렇게 만안당까지 찾아온 것이다.“소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요? 지금 모든 게 우리 소씨 가문 탓이라는 겁니까?”소한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우연을 쳐다보며 물었다.“아닙니까?”“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있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택은 소씨 가문의 미래를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소우연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뻔뻔한 소한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녀를 제외한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수익자인데 그들이 어찌 소우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소우연은 말이 안 통하는 소한준과 더 이상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게 지금 무슨 표정입니까?”원망 가득한 소우연의 눈빛을 보며 소한준은 기분이 언짢았다. 눈이 퉁퉁 부은 소우희에게 소한준은 어떻게든 소우연을 데리고 가서 삼자 대면으로 오해를 풀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소우연은 지금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소한준은 어쩔 수 없이 한발짝 양보했다.“좋습니다. 다른 문제는 일단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저와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왕비께 할 말이 있거든요.”“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서 하십시오.”“아니…”소우연은 당황한 듯한 소한준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전 당신들과 조금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데 설마 눈치를 못 채셨습니까?”소우연의 한 마디에 소한준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무도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소우연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뱉은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낯설었다.이 여인이 정말 소우연이 맞단 말인가?“좋습니다. 아주 대단하시네요.”소한준은 불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우연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노려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만안당을 떠났다.한편,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정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파렴치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자들은 단 한번도 왕비님을 진심으로 걱정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물론 왕야와 왕비가 천생연분이라고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면 가려움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고약은 드릴 수 있습니다.”소우연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가려움만 완화되고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네, 그렇습니다.”여인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평생 이 흉터를 달고 살아야 하겠네요.”소우연은 마음이 살짝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모험할 수는 없었다.이제 경성의 모든 사람들이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그녀가 여인의 화상 흉터를 낫게 해준다면 사람들은 소우연이 이육진의 얼굴도 낫게 해주지 않았을까 의심할 게 뻔하다.“저도 많이 안타깝습니다.”소우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중에 이육진이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고 나면 소우연은 흉터를 치료할 수 있는 고약을 백성들에게 판매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여인 손에 있는 흉터도 쉽게 치료될 수 있다.“감사합니다, 왕비님.”울적한 표정으로 일어선 여인은 이내 돌아서서 떠났다.“다음 분을 모시거라.”정연에게 말을 하던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흉터가 많이 간지러울 텐데 왜 가려움을 완화할 수 있는 고약을 달라고 하지 않는 거지?’한편, 고개를 끄덕인 정연은 여인을 밖으로 모신 뒤, 다음 환자를 불렀다.그 여인은 만안당을 나서자마자 몇 걸음 밖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이와 동시에, 품에 안고 있는 들고양이를 어루만지던 이민수는 마차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보자마자 바로 물었다.“뭐라고 얘기하더냐?”갓을 벗은 아령은 이민수 곁에 앉아 화상을 입은 손을 보여주며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흉터를 지울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소우연과 많이 닮은 아령의 얼굴을 보며 이민수는 몇 번이나 넋을 잃었다.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이민수는 여전히 들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앞으로 이런 화장은 하지 말거라.”그 말에 아령은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소인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복문 객줏집에서.창가에 서있던 소우희는 평서왕 저택 팻말이 걸려 있지도 않는 마차를 보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저 마차에 몇 번이나 탄 적이 있기에 저 안에 누가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러다가 이민수에게 미인 한 명을 보내줬다는 이지윤의 말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욱 씁쓸했다.질투가 점점 차오르자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소우희는 이내 말을 타고 나타난 소한준을 보게 되었다.곁에 서있던 혜주가 소우희에게 손수건을 건넸고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소우희가 말했다.“혜주야, 네가 이렇게 말도 못하게 되니 내 고민과 고충을 함께 대화로 풀어줄 사람도 없구나.”혜주가 입을 뻥긋거리며 손짓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소우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됐다. 셋째 오라버니가 돌아오셨구나. 역시 소우연 그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복문 객줏집에는 옆방에 묵고 있는 손님 외에 이지윤이 소우희를 암암리에서 지켜주라고 보낸 호위무사 여섯 명도 있었다.이 호위무사들은 전적으로 소우희의 명령에 따랐다.이내 소한준의 발걸음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렸다.똑똑똑!“우희야, 문을 열어보거라.”소한준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고 혜주는 이내 방문을 열어주었다.소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조금 전, 소우연을 만나러 가기 전에 평춘왕 저택에 먼저 찾아갔지만 안타깝게도 그 저택 문지기에 이어 평춘왕 세자마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그저 평춘왕이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는 말만 전해 듣게 되었다.“오라버니, 왜 그러시는 겁니까?”소우희가 가여운 표정으로 걱정하듯 묻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혜주를 쳐다보았다.“혜주야, 얼른 오라버니께 차 한 잔 따라 드리거라.”고개를 끄덕인 혜주가 재빨리 차를 따랐다.소한준과 소우희는 탁자 앞에 앉았고 이내 소한준은 오늘 소우연을 만난 사실을 소우희에게 얘기해주었다.조용하게 듣고 있던 소우희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소우연은 절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