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단순히 와서 저를 돕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서준 씨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기도 하죠. 그래야 저도 수아와 함께할 시간이 많아지니까요.”“네. 내일 출근하는 대로 사무실에 들를게요.”“그나저나 아이는 좀 어때요?”아빠가 된 육문주는 아이의 생사를 걱정하는 연성빈과 동질감을 느꼈다.연성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세리가 검사를 받았는데 문제가 있으면 의사가 바로 알아챌 수 있대요. 운이 좋으면 아이가 32주까지 버틸 수 있다네요.”태아는 보통 37주 차가 지난 뒤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다. 32주 차가 되기
혹시 아이한테 피해가 갈까 봐 연성빈은 키스하는 내내 감정을 억제했다.연성빈은 세리의 턱을 들고 그녀의 얼굴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출 뿐이었다.다시 세리와 스킨십을 하니 순간 3년 전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 올랐다.그때의 세리는 항상 미소를 띤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연성빈을 보면 잔뜩 신나서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갔다.세리는 연성빈의 품에 와락 안겨 환하게 웃어 보였다.“성빈 씨, 제가 수업 시간에 성빈 씨 생각한 걸 어떻게 알았어요?”연성빈은 피식 웃고는 세리의 코를 꼬집으며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유
해가 동쪽에서 뜨고 나서야 세리는 기진맥진해서 연성빈의 품에 안겨 잠을 청했다.두 사람은 그날 처음으로 서로의 입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그 뒤로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과거를 되돌아본 연성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둘의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가슴이 시렸다.세리에 대해 좀 더 알고 그녀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생각했더라면 연성빈은 이별 통보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랬다면 세리가 이토록 상처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연성빈은 그들이 처음 입 맞췄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입술을 세리한테 맞댔다.그러고는 입이 닿도록 사과
기대에 부풀어 있는 민우를 보고 세리는 차마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세리는 몸을 숙여 민우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엄마, 아빠가 같이 자줄게.”민우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짜예요? 민우도 드디어 아빠, 엄마랑 자는 거예요? 와, 저 너무 신나요.”민우는 세리의 볼에 뽀뽀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연성빈을 바라보았다.“엄마가 같이 자는 것을 허락했는데 아빠는 안 기뻐요?”연성빈은 민우의 통통한 볼살을 꼬집으며 미소를 지었다.“나도 기뻐.”“기쁜데 왜 무뚝뚝해 있어요? 이렇게 철이 없으니
“응. 걱정하지 말고 출근해. 지혜가 오늘 나와 함께 있어 준댔어. 그리고 아이한테 줄 선물을 가득 사놨대. 역시 내 친구라 스케일이 달라. 문주 씨 친구들은 언제쯤 삼촌 노릇을 제대로 할지 모르겠네.”육문주는 환하게 웃으며 조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연후가 아직 지혜와 사귀지는 못했어. 연후가 지혜한테 약점을 잡혔거든.”조수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육문주를 올려다보았다.“문주 씨 나한테 뭔가 숨기게 있지? 왜 두 사람 얘기만 나오면 다 알고 있는듯한 표정이야? 설마 연후 씨가 지혜 몰래 나쁜 일을 저지른 건 아니지?”
허연후는 곧바로 뒤따라가 큰 손으로 한지혜의 등을 쓰다듬었다.가늘게 뜬 눈으로 순간 밝은 빛이 반짝였다.“지혜 씨, 혹시 이번 달 생리가 안 왔나요?”한지혜는 순간 어리벙벙해졌다.여태까지 생리가 매우 규칙적으로 찾아왔었다.하지만 매달 월초에 오던 생리가 월말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최근에 촬영하느라 바빠서 한지혜는 이 일을 아예 잊고 있었다.좋지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지난번 한지혜가 술에 잔뜩 취하고 허연후와 미친 듯이 관계를 나눈 밤, 그리고 그 뒤로 욕실에서 허연후는 단 한 번도 콘돔을 끼지 않았다.혹
허연후는 생각도 하지 않고 한지혜의 뜻을 반대했다.“왜 임신한 몸으로 일하려 하는 거예요? 전 지혜 씨와 아이를 못 먹여 살릴 만큼 무능하지 않아요. 임신한 게 확인되면 일할 생각은 접어두고 모든 일정을 취소해요.”“싫어요. 제가 무명으로부터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요. 저 절대로 이렇게 쉽게 포기 못 해요. 제가 애초에 결혼을 안 하려고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는지 알아요? 수아가 저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 거예요.”“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혜 씨한테 약혼자가 있었
의사는 실험 보고서를 허연후에게 보여주며 호탕하게 웃었다.“연후야, 아무래도 네가 결혼하는 것을 보긴 힘들 것 같아. 더 노력해 봐. 여자분은 내분비 불균형에 위장이 좋지 않았을 뿐이야.”허연후는 실험 보고서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모든 수치가 정상인 것을 보고 김빠진 공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허연후는 한지혜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한지혜와 뜨거운 밤을 보냈던 그날, 허연후는 열심히 허리를 흔들었고 한지혜는 눈물까지 보였다. 심지어 관계를 오래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지혜의 배란일이었는데도 임신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