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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7화

작가: 박혜은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09-07 19:00:00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신유리의 눈과 서준혁의 눈이 딱 마주쳤다.

“할아버지한테서 전화 왔어. 자두가 엄마를 찾는대.”

서준혁이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서준혁은 계약서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신유리를 더는 밀어붙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오담윤에게 납치를 당했던 얼굴이 떠올라 무엇이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신유리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녀를 대신해 잘못된 모든 일들을 다잡아주고 싶었다.

신유리도 마음속이 복잡한지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가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 멀리서부터 자두의 웃음소리와 유씨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천천히 움직이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아버지는 자두를 안고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고 나이가 있던 터라 속도는 느렸지만 자두는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신나했다.

자두는 곧 1살이 될 나이라 몸무게도 눈이 띄게 증가해 신유리는 할아버지가 행여 다칠까 얼른 자두를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예뻐하시는거 아니에요? 무리하셨죠?”

할아버지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예뻐해야지! 내 핏줄이고 내 손녀잖아.”

자두도 순한 아이라 할아버지와 있는 내내 애를 먹인 적이 없었고 신유리가 돌아온 것을 발견하자마자 얼른 달려가 푹 안겼다.

옆에 있던 서준혁이 자신에게 오라고 한참을 달랬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신유리도 낯선 환경 속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낸 자두가 안쓰러워 할아버지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 하였다.

“정말 딱 맞춰 돌아왔구나, 마침 점심을 준비하라고 시켰는데 먹고 가렴.”

그러자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신유리에게 말했다.

준비한 점심은 아주 풍성했는데 할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준비를 마친 듯 했다.

“마음에 드니? 네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시 만들어오라고 할 테니 편히 말하 거라.”

“아니요.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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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리가 자신을 딱히 보고싶지 않아하는 것 같기에 서준혁도 조용히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 순간, 뒤에서는 자두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두는 차에서 잠을 자다가 이제야 눈을 떴고 일어나자마자 아빠인 서준혁에게 매달렸다.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 자두는 신유리에게만 달라 붙어있었지만 옆에 있는 남자가 서준혁이라는 것을 지금 알아차렸는지 그에게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준혁도 자두의 생활습관에 익숙해진 터라 헛기침을 하다가 주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애랑 같이 안 놀아주니까 이젠 또 떼쓰려고 하네, 내가 가서 분유 준비해 올게.” 자두는 매번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분유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준비한 분유를 다 마신 아이는 서준혁의 손을 잡으며 놀아달라고 옹알이를 했지만 두 사람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서준혁이 물어봐서야 자두가 원하는 놀이가 바로 “꼬리 따기”라는 유희였다. 할아버지는 수화기 너머로 유희 규칙을 알려주며 말했다. “자두가 병아리 역할을 하고 준혁이 네가 독수리 역할을 맡으면 된다. 유리는 옆에서 애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면 되고.” “오전에 텔레비전에서 나온 그 게임을 자두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랑 유 씨가 아이랑 놀아줬다.” 할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신유리는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옷을 잡고 놓지 않는 “바보” 같은 딸 자두를 보며 물었다 “말 잘 듣고 있으라고 했잖아.” 서준혁은 어느새 셔츠 단추와 소매를 풀며 신유리를 쳐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비 됐어?” 신유리는 서준혁의 장난 섞인 눈빛에 빠르게 자두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겨놓고는 당부했다. “잘 숨어있어! 독수리가 올 거야.”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는건 오직 자두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자두는 신유리의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고개를 내밀어 서준혁을 살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일부로 아이를 깜짝 놀래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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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말고 다   제509화

    서준혁은 김건우를 따라 산부인과로 들어섰고 복도에는 배가 잔뜩 나온 임산부들이 즐비했지만 다들 옆에 보호자가 서있었다. 가족일 수도 남편일 수도 있는 보호자들이 다들 옆에서 임산부를 보호하고 있는 듯 했다. 서준혁은 그곳에 혼자 앉아 신유리가 검사를 받으러 올 때마다 혼자 큰 배를 감싸 쥐고 사람들 틈에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유리는 아마 아주 천천히 걸었겠지?] 다른 사람이 행여나 자신과 부딪힐까 조심조심 했고 앉을 때도 부은 다리 때문에 몹시 불편한 신유리였다. 무릎도 시리고 허리와 등도 쑤시고 어디가 아프더라도 옆에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견뎌야 한 신유리다. 서준혁은 공허한 눈으로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오늘은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찾은 날이었다.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그는 지나간 날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서준혁은 감히 신유리가 낯선 환경에서 혼자 아이를 낳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못했다. 이런 비통한 감정은 김건우가 그를 데리고 수술실밖으로 향했을 순간부터 더 심해졌다. 비록 수술실 밖이었지만 안에서는 여자가 뼈가 갈리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한없이 절망스러운 것 같았다. 이런 일에 익숙한 김건우마저 임산부의 소리를 들을 때면 귀를 막고 벌벌 떨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의사들은 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비명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준혁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너무 무섭다.” “여자가 애를 낳으면 다 이래?” 서준혁은 여자의 울음 섞인 비명소리를 듣고 있자니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빨개진 두 눈을 감추려고 지그시 눈을 감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순간 서준혁은 도대체 왜 신유리가 자신을 그렇게 피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자신과 선을 딱 그어버리는지도 전부 다 알았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이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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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사자리가 끝이 날 때까지 탕후루를 결국 못 얻어낸 자두는 입이 잔뜩 나와 뾰로통해 있었다. 아이는 삐친 건지 신유리의 말로 안 들으려 하며 옆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놀겠다고 떼를 써댔다. 이제는 좀 컸다고 남한테 안겨있기 보다는 스스로 걷기를 더 좋아하는 자두라 신유리는 허리를 숙여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야만 했다. 백화점 쪽에는 작은 광장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세 사람의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다른 세 가족은 중간에 아이를 세워 놓고는 그네를 태우듯 아이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자두는 자신과 덩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서준혁의 손을 막 잡아 끌었다. 아이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린 신유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아직 어린 나이라 뼈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에 그런 행동은 꽤나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두가 어찌 그런 것을 알겠는가? 신유리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자두는 아까의 탕후루가 또 생각이 나 속상해졌는지 바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음을 터뜨렸다. 서준혁은 딸이 우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쭈그려 앉아 아이를 달래려 하다 문득 반응을 했는지 신유리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머리가 아파난 신유리는 혹시 방금 자신의 말투가 너무 엄격했는지를 반성했다. 자두는 원래 하얗고 두부같이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다른 아이보다 더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또 속이 상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마저 얼른 달래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만들었다. 서준혁은 자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줬다. 그러자 더 슬프고 속상해진 자두는 신유리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준혁에게 안기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사탕 안 줘, 안 놀아줘.” 서준혁이 고개를 들자 신유리는 이미 입술을 꽉 깨물고 망설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우는 아이를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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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유리가 마침 저녁을 먹으려던 참에 어르신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노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자두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자두의 생일은 8월이고 반달 정도 남았다. 신유리의 생각으로는 굳이 성대하게 보낼 필요 없이 친한 친구들과 밥 먹고 추억으로 사진을 남기면 충분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먼저 말을 꺼냈으니 생일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신유리는 무척이나 고민이 됐다.신유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어르신은 서준혁을 바라봤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유리랑 우리 귀여운 손녀를 데려오지 못하면 앞으로 집에 돌아올 생각하지 마!“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르신에게 상기시켰다. “할아버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신하율은 할아버지의 손녀가 아니에요.”“네가 신하율이라고 했잖아. 유리랑 화해할 능력이 없으니, 내가 유리를 딸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 그럼 자두는 내 손녀고.”어르신의 투정에 옆에 있던 유 아저씨마저 마른기침을 하며 지나치지 말라고 눈치 줬다.서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재수 없는 말 좀 하지 마세요.”‘신유리를 자신의 양딸로 인정하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서준혁은 어르신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순간 어르신께서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려고? 유리가 곧 자두를 데리고 올 텐데,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봤어?”“유리 성격상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때 가서 또 일을 그르치지 말고, 자존심 좀 내려놔.”서준혁의 얼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유리한테 말할 생각 없어요.”“뭐?”“화인 그룹 지사를 그녀 명의로 넘긴 걸 말할 생각이 없다고요. 할아버지도 유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유리한테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자두랑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서준혁은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 “나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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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혁은 자두를 안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유리는 핸드폰을 내리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서준혁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다 입술을 오므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신유리는 다가가 자두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놀다 지쳤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신유리는 주먹을 움켜쥐더니 이내 다시 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신유리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신... 만나러 가?”신유리는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같이 밥 먹기로 했어.”문을 닫으려는 순간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서준혁을 보며 물었다. “뭔 일이 있어?”사실 서준혁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런 요구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는 문틀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속한 모임은 저녁이었다. 임아중은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이신이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우리 먼저 가자. 자두야, 예쁜 언니 보고 싶었어?”자두는 임아중을 향해 메롱 했다. 임아중은 당황해하며 신유리에게 고발했다. “봤어? 얘가 지금 무슨 표정 짓는지?”신유리는 뒤돌아 자두를 보며 문을 열려는 순간 서준혁이 문 앞에 선 채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서준혁은 뒤에 있는 임아중을 보더니 물었다. “지금 가려고?”“그럼?”신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아중이 먼저 대답했다. “비켜줄래? 길 막고 있잖아.”서준혁은 문 앞에 선 채 시선은 줄곧 신유리에게 머물러 있었다. 신유리는 오늘 옅게 화장하고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었으며 목걸이와 귀걸이도 착용했다. 분명 신경 써서 꾸민 모습이었다. 서준혁은 마음이 쓰렸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생얼이었는데 이신을 만나러 가면서는 이렇게 신경 써서 꾸몄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아. 데려다줄게, 끝나면 다시 데리러 오고.”신유리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임아중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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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말고 다   제5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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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 나 말고 다   제636화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 나 말고 다   제635화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 나 말고 다   제634화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 나 말고 다   제633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 나 말고 다   제632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 나 말고 다   제631화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 나 말고 다   제630화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 나 말고 다   제629화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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