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가 다가가 문을 열자 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혁이었다. 그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는 듯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신유리의 얼굴에 조금 넋이 나가있던 서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 두드렸는데 아무도 안 열어주고 전화도 안 받아서 호텔 카운터에 전화 하려고 했어.” 신유리는 서준혁의 눈빛에 가득 담겨있는 걱정과 근심을 알아차렸다. 전에 오담윤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해외에 있을 때 서준혁은 신유리 혼자 어디로 향하는 일이 거의 없도록 만들었고 대부분 그녀의 뒤를 함께 따라나섰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말에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늦잠 잤을 뿐이야. 핸드폰은 내가 어제 꺼버리는 바람에.” 서준혁은 한 눈에 봐도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고 새까만 눈동자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을 꺼낼까를 망설이고 있었다. “원래 전날에 진즉 왔어야 됐는데 업무를 채 처리 못해서, 그래서 어젯밤에 돌아왔어.” 신유리는 서준혁과 달리 냉정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온 건데?” “어제 송지음 만났다고 했잖아. 내가 물으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를 끊어버려서, 혹시 오해할 까봐 바로 왔어. 무슨 문제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 다른 사람한테 묻지 말고.” 서준혁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너를 속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의 말에도 신유리는 여전히 방 문 앞을 막고 서서 서준혁을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물어볼거 없어. 너도 이것 때문에 특별히 찾아 안 와도 되고.” 신유리는 금방 눈을 뜬 탓에 목이 잠겨 있어 딱히 큰 위협감이 없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문을 다시 닫으려 하는 순간, 서준혁이 바로 막아버렸다. 그는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가 너한테 설명을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너 오해할 까봐.” “뭐 딱히 오해할 만 한건 없었어.” 신유리가 말을 마치자 그녀의 귀에는 서준혁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서준혁은 조용히 신유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고 그녀는 이내 사무실 책상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사무실을 수없이 왔던 신유리기에 책상이 있는 곳을 둘러볼 필요도 없었고 마치 버튼을 누른 것 마냥 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두 장의 계약서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신유리는 동공이 흔들리더니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그 두 장의 계약서중 하나는 화인 지사 주식 증여서, 다른 하나는 서준혁의 개인 재산 증여서였다. 계약서에는 모두 서준혁의 이름이 사인이 되어 있었고 옆에는 사인을 위한 필이 하나가 준비돼있었는데 서준혁이 말을 안 해도 누구의 사인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한참 생각해봤어.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현실적인 것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아무리 감정으로 호소를 한다 한들 너한테는 가식적으로 보일게 뻔해. 나조차도 내가 거짓 된다고 생각할 거고, 그래서.” 그는 뚜벅뚜벅 신유리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이어갔다. “전에 그 쓰레기 같던 나를 대신해 지금의 내가 사과할게, 그래서 지금 난 내가 놓인 처지가 참 쌤통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너도 네가 물러날 길은 만들어놔야지?” 신유리는 무슨 대답을 하려고 입을 뻥긋거렸지만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준혁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고 화인 본사와 화인 지사는 진즉에 두 개로 갈라졌으니 서준혁의 뜻은 바로 화인 지사를 신유리에게 넘긴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모두를 다 걸고 말이다. 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가만히 있다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이런거 필요 없어.” 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다시 말했다. “물러설 길? 서준혁, 너 지금 너무 이기적인거 알아? 누가 이딴거 가지고 싶대? 내가 너랑 만나겠다고 했냐고. 넌 한 번도 네 자신을 바꾼 적 없어. 네가 나한테 뭘 주고 싶으면 나는 네가 주는걸 꼭 받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신유리의 눈과 서준혁의 눈이 딱 마주쳤다. “할아버지한테서 전화 왔어. 자두가 엄마를 찾는대.” 서준혁이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서준혁은 계약서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신유리를 더는 밀어붙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오담윤에게 납치를 당했던 얼굴이 떠올라 무엇이든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신유리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고 그녀를 대신해 잘못된 모든 일들을 다잡아주고 싶었다. 신유리도 마음속이 복잡한지 할아버지 옆으로 다가가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 멀리서부터 자두의 웃음소리와 유씨 아저씨가 할아버지에게 천천히 움직이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아버지는 자두를 안고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고 나이가 있던 터라 속도는 느렸지만 자두는 그래도 환하게 웃으며 신나했다. 자두는 곧 1살이 될 나이라 몸무게도 눈이 띄게 증가해 신유리는 할아버지가 행여 다칠까 얼른 자두를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예뻐하시는거 아니에요? 무리하셨죠?” 할아버지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예뻐해야지! 내 핏줄이고 내 손녀잖아.” 자두도 순한 아이라 할아버지와 있는 내내 애를 먹인 적이 없었고 신유리가 돌아온 것을 발견하자마자 얼른 달려가 푹 안겼다. 옆에 있던 서준혁이 자신에게 오라고 한참을 달랬지만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신유리도 낯선 환경 속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낸 자두가 안쓰러워 할아버지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 하였다. “정말 딱 맞춰 돌아왔구나, 마침 점심을 준비하라고 시켰는데 먹고 가렴.” 그러자 할아버지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신유리에게 말했다. 준비한 점심은 아주 풍성했는데 할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준비를 마친 듯 했다. “마음에 드니? 네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다시 만들어오라고 할 테니 편히 말하 거라.” “아니요.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돼요.”
신유리가 자신을 딱히 보고싶지 않아하는 것 같기에 서준혁도 조용히 자리를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 순간, 뒤에서는 자두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두는 차에서 잠을 자다가 이제야 눈을 떴고 일어나자마자 아빠인 서준혁에게 매달렸다.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 자두는 신유리에게만 달라 붙어있었지만 옆에 있는 남자가 서준혁이라는 것을 지금 알아차렸는지 그에게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다. 서준혁도 자두의 생활습관에 익숙해진 터라 헛기침을 하다가 주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애랑 같이 안 놀아주니까 이젠 또 떼쓰려고 하네, 내가 가서 분유 준비해 올게.” 자두는 매번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분유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준비한 분유를 다 마신 아이는 서준혁의 손을 잡으며 놀아달라고 옹알이를 했지만 두 사람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서준혁이 물어봐서야 자두가 원하는 놀이가 바로 “꼬리 따기”라는 유희였다. 할아버지는 수화기 너머로 유희 규칙을 알려주며 말했다. “자두가 병아리 역할을 하고 준혁이 네가 독수리 역할을 맡으면 된다. 유리는 옆에서 애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면 되고.” “오전에 텔레비전에서 나온 그 게임을 자두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랑 유 씨가 아이랑 놀아줬다.” 할아버지와의 통화를 끝낸 신유리는 그가 정말 최선을 다해 아이와 놀아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옷을 잡고 놓지 않는 “바보” 같은 딸 자두를 보며 물었다 “말 잘 듣고 있으라고 했잖아.” 서준혁은 어느새 셔츠 단추와 소매를 풀며 신유리를 쳐다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준비 됐어?” 신유리는 서준혁의 장난 섞인 눈빛에 빠르게 자두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겨놓고는 당부했다. “잘 숨어있어! 독수리가 올 거야.”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는건 오직 자두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자두는 신유리의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고개를 내밀어 서준혁을 살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일부로 아이를 깜짝 놀래켰다.
서준혁은 김건우를 따라 산부인과로 들어섰고 복도에는 배가 잔뜩 나온 임산부들이 즐비했지만 다들 옆에 보호자가 서있었다. 가족일 수도 남편일 수도 있는 보호자들이 다들 옆에서 임산부를 보호하고 있는 듯 했다. 서준혁은 그곳에 혼자 앉아 신유리가 검사를 받으러 올 때마다 혼자 큰 배를 감싸 쥐고 사람들 틈에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유리는 아마 아주 천천히 걸었겠지?] 다른 사람이 행여나 자신과 부딪힐까 조심조심 했고 앉을 때도 부은 다리 때문에 몹시 불편한 신유리였다. 무릎도 시리고 허리와 등도 쑤시고 어디가 아프더라도 옆에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견뎌야 한 신유리다. 서준혁은 공허한 눈으로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오늘은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산부인과를 찾은 날이었다.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그는 지나간 날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서준혁은 감히 신유리가 낯선 환경에서 혼자 아이를 낳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못했다. 이런 비통한 감정은 김건우가 그를 데리고 수술실밖으로 향했을 순간부터 더 심해졌다. 비록 수술실 밖이었지만 안에서는 여자가 뼈가 갈리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한없이 절망스러운 것 같았다. 이런 일에 익숙한 김건우마저 임산부의 소리를 들을 때면 귀를 막고 벌벌 떨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의사들은 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비명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서게 되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준혁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 너무 무섭다.” “여자가 애를 낳으면 다 이래?” 서준혁은 여자의 울음 섞인 비명소리를 듣고 있자니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빨개진 두 눈을 감추려고 지그시 눈을 감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순간 서준혁은 도대체 왜 신유리가 자신을 그렇게 피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자신과 선을 딱 그어버리는지도 전부 다 알았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이기적인
식사자리가 끝이 날 때까지 탕후루를 결국 못 얻어낸 자두는 입이 잔뜩 나와 뾰로통해 있었다. 아이는 삐친 건지 신유리의 말로 안 들으려 하며 옆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놀겠다고 떼를 써댔다. 이제는 좀 컸다고 남한테 안겨있기 보다는 스스로 걷기를 더 좋아하는 자두라 신유리는 허리를 숙여 아이의 손을 꼭 잡고 걸어야만 했다. 백화점 쪽에는 작은 광장 하나가 있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세 사람의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다른 세 가족은 중간에 아이를 세워 놓고는 그네를 태우듯 아이의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자두는 자신과 덩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서준혁의 손을 막 잡아 끌었다. 아이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차린 신유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아직 어린 나이라 뼈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에 그런 행동은 꽤나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두가 어찌 그런 것을 알겠는가? 신유리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자두는 아까의 탕후루가 또 생각이 나 속상해졌는지 바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울음을 터뜨렸다. 서준혁은 딸이 우는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쭈그려 앉아 아이를 달래려 하다 문득 반응을 했는지 신유리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 머리가 아파난 신유리는 혹시 방금 자신의 말투가 너무 엄격했는지를 반성했다. 자두는 원래 하얗고 두부같이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다른 아이보다 더 귀엽고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또 속이 상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마저 얼른 달래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만들었다. 서준혁은 자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줬다. 그러자 더 슬프고 속상해진 자두는 신유리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준혁에게 안기더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사탕 안 줘, 안 놀아줘.” 서준혁이 고개를 들자 신유리는 이미 입술을 꽉 깨물고 망설이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우는 아이를 번쩍
신유리가 마침 저녁을 먹으려던 참에 어르신께서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노인의 부탁을 받아들여 자두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자두의 생일은 8월이고 반달 정도 남았다. 신유리의 생각으로는 굳이 성대하게 보낼 필요 없이 친한 친구들과 밥 먹고 추억으로 사진을 남기면 충분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먼저 말을 꺼냈으니 생일에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신유리는 무척이나 고민이 됐다.신유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어르신은 서준혁을 바라봤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유리랑 우리 귀여운 손녀를 데려오지 못하면 앞으로 집에 돌아올 생각하지 마!“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르신에게 상기시켰다. “할아버지,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신하율은 할아버지의 손녀가 아니에요.”“네가 신하율이라고 했잖아. 유리랑 화해할 능력이 없으니, 내가 유리를 딸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 그럼 자두는 내 손녀고.”어르신의 투정에 옆에 있던 유 아저씨마저 마른기침을 하며 지나치지 말라고 눈치 줬다.서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재수 없는 말 좀 하지 마세요.”‘신유리를 자신의 양딸로 인정하겠다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그럼 난 뭐가 되는 거야?’서준혁은 어르신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 순간 어르신께서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디 가려고? 유리가 곧 자두를 데리고 올 텐데, 어떻게 말할지 생각해 봤어?”“유리 성격상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때 가서 또 일을 그르치지 말고, 자존심 좀 내려놔.”서준혁의 얼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유리한테 말할 생각 없어요.”“뭐?”“화인 그룹 지사를 그녀 명의로 넘긴 걸 말할 생각이 없다고요. 할아버지도 유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아시잖아요. 유리한테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자두랑 평안하기만을 바랄 뿐이에요.”서준혁은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 “나머지는
서준혁은 자두를 안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유리는 핸드폰을 내리며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서준혁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다 입술을 오므린 채 미간을 찌푸렸다. 신유리는 다가가 자두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놀다 지쳤는지 졸음이 쏟아졌다. 신유리는 주먹을 움켜쥐더니 이내 다시 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신유리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신... 만나러 가?”신유리는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같이 밥 먹기로 했어.”문을 닫으려는 순간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서준혁을 보며 물었다. “뭔 일이 있어?”사실 서준혁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무슨 자격으로 그런 요구를 제기할 수 있을까. 그는 문틀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더니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속한 모임은 저녁이었다. 임아중은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이신이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우리 먼저 가자. 자두야, 예쁜 언니 보고 싶었어?”자두는 임아중을 향해 메롱 했다. 임아중은 당황해하며 신유리에게 고발했다. “봤어? 얘가 지금 무슨 표정 짓는지?”신유리는 뒤돌아 자두를 보며 문을 열려는 순간 서준혁이 문 앞에 선 채 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서준혁은 뒤에 있는 임아중을 보더니 물었다. “지금 가려고?”“그럼?”신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아중이 먼저 대답했다. “비켜줄래? 길 막고 있잖아.”서준혁은 문 앞에 선 채 시선은 줄곧 신유리에게 머물러 있었다. 신유리는 오늘 옅게 화장하고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었으며 목걸이와 귀걸이도 착용했다. 분명 신경 써서 꾸민 모습이었다. 서준혁은 마음이 쓰렸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언제나 생얼이었는데 이신을 만나러 가면서는 이렇게 신경 써서 꾸몄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아. 데려다줄게, 끝나면 다시 데리러 오고.”신유리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임아중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