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담윤의 목소리는 그들의 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신유리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 제 앞에 꿇어주시죠? 서 씨 가문에서 저랑 제 어머니에게 사과하는 셈 치게.” 옥상에는 바람 소리만이 가득 찼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서준혁을 오담윤은 묵묵히 쳐다봤다. 신유리는 점점 더 커지는 눈으로 오담윤과 서준혁을 번갈아보았고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서준혁을 보며 입을 열려고 뻐끔거렸지만 목이 막혀 소리가 안 나왔고 눈에는 불안함과 공포감이 휩싸여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서준혁을 보며 오담윤은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주식까지 다 줄 수 있으면서 이렇게 작은 요구도 못 들어주십니까?” 오담윤은 더는 자신의 악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서준혁을 농락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는 서씨 가문 사람들 중 한명이 자신에게 꿇는 것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끓게 하고 싶었다. 오담윤은 그래도 조금이나마 서씨 가문 사람들이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서준혁, 나를 탓하지는 마. 탓하려면 서창범이 네 아빠라는 일을 탓해, 그 사람이 우리 엄마랑 결혼한 일을 탓하라고.” 오담윤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안 그랬으면 우리 엄마도 그리 허망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니까.” 오담윤의 목소리는 급격하게 떨려왔다.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서창범이 자신을 보러 와주기를 바랬어, 왜인 줄 알아?” 그는 마치 고통스러운 일이 떠오르기라도 한 듯 표정이 일그러졌고 힘겨워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 뛰어내린 엄마의 모습을 목격한 뒤로 매일 수면제를 먹어야 잠에 드는 힘든 나날들을 보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에는 큰 산처럼 크고 든든했던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고 믿었던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존재했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서준혁에게 알려줬다. “네 어머니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내 엄마를 조롱하고 짓밟아버렸기 때문이야.” 가련하고 불쌍한 그 여자는
경찰은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고 오담윤은 마치 자신의 최후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반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경찰이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를 기다렸다. 오담윤은 경찰들과 함께 떠나기 전 서준혁과 신유리의 옆을 지나치며 크게 소리내 웃더니 말했다. “서 씨 가문이 도대체 얼마나 고귀한데? 서창범 그 인간은 실패자야, 너도 마찬가지고.” 그의 웃음소리는 복수를 마쳤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약간의 쓸쓸함으로 물들어져 있었지만 그 속에 서씨 가문에 대한 원한이 제일 많은 것 같았다. 오담윤과 대치하던 옥상은 페기 된 공장이라 유리 조각들과 딱딱한 돌덩이 같은 물건이 땅 바닥에 가득했고 서준혁은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가고 말았다. 서준혁이 신유리를 꼭 끌어안고 구른 그 몇 바퀴 때문에 그의 등 뒤에는 수많은 상처들이 생겼다. 게다가 쇠 못 같은 물건이 그의 등에 박혀 서준혁은 많은 피를 흘려버렸다. 신유리는 그때 자신이 서준혁을 부를 때 그의 창백한 안색과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신유리 씨도 상처 치료하러 가시죠, 안 그러면 준혁이가 수술 마치자마자 또 찾아갈 거니까.” 우서진은 신유리에게 슬쩍 말을 걸었고 그 목소리에 신유리는 이내 정신이 들었다. 코끝에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맴돌았고 신유리는 멍하니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서준혁이 신유리를 열심히 보호했다고 하더라로 그 위험한 공장에서 단 하나의 상처가 없는 것은 말이 안됐다. 신유리는 당시에 오담윤에 의해 손목이 끈으로 묶여있던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온 몸에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손목은 피부가 다 까져 벌겋게 부은 신유리의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 마를 대로 말라버린 입술과 여전히 아픈 목을 하고 우서진에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경찰은 우서진의 신고로 의해 도착했던 것이고 서준혁에게서 떠난 그는 바로 신고를 하고는 서준혁과 연락을 취해 경찰차 뒤에서 열심히 뒤를 따랐다. 우서진은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유리
비록 인정하기는 싫지만 신유리는 지금 이신이 이곳에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터질 정도로 복잡한 머리 때문에 왜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병실의 분위기는 약간 얼어붙었고 임아중은 눈을 깜빡거리며 고요함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요 며칠 내가 자두 챙길게, 마침 나도 요즘은 한가해.” 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뭐라 대답을 하려는 그때, 옆에서 물 한잔이 그녀에게 건네졌다. “아직도 열이 나는 것 같은데 물 많이 마셔, 너 괜찮은거 보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내일 아침 비행기도 떠나야 해서 호텔로 먼저 돌아가야 돼. 아직 밀린 업무도 있고 해서 먼저 갈게.” 이신은 담담한 말투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을 했고 신유리는 컵을 건네받고는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 “미안해, 또 너한테 방해만 됐네.” 임아중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와 모습을 다 지켜봤고 눈치를 챘지만 모르는척 해줬다. 이신은 얼마 안 있다가 떠났고 임아중은 그를 바래다주며 물었다. “다음 주에 어머니 뵈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내일 간다고 했어?” “내가 거기있으면 유리가 불편해해서.” 이신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라 신유리가 감정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신은 신유리가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편하게 휴식하지 못하고 신경을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성큼성큼 걷던 이신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 신유리의 병실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생각정리를 끝낸 듯 떠나버렸다. 임아중은 이신이 떠나는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안타까워하며 돌아갔고 신유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경 자기 자신의 일도 제대로 못하는 그녀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까지 참견한다면 피곤해질것이 분명하니까. 그리고 옆에서 아무리 뭐라고 말을 해도 본인의 나름대로 하기가 마련이다. 서준혁은 저녁에 열이 갑자기 펄펄 끓었고 의사는 약간의 감염증상이라 약을
자신을 부르는 나지막한 신유리의 목소리에 서준혁은 깜짝 놀라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제발, 무서우니까 그러지마.” 그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신유리에게 빌었다. 서준혁은 더는 그녀에게서 자신을 밀어내려는 차갑고 단호한 말들을 듣고 싶지가 않았고 그녀가 이제는 자신을 다시는 안 볼까봐 두려워졌다. [이렇게 되면 안돼.] [우리 사이가 이러면 안돼.] 전에는 두 사람 사이에 이정도로 금이 가지는 않았었지만 서준혁이 미련하게도 한번 또 한 번 신유리를 짓밟고 절벽 끝까지 밀어붙였다. 서준혁은 이제 신유리를 잡을 힘도 없어졌고 몸에는 점점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애써 신유리의 손목을 잡으려고 노력해 힘을 주었지만 사실상 잡힌 신유리에게는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준혁이 맞고 있던 수액이 제대로 약이 투입되지가 않아 그의 피가 다시 되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졌고 주사를 맞은 곳에서도 피가 차오르고 있었다. 신유리는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한 적이 있기에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서준혁의 손을 자신의 손목에서 떼어내고는 침대에 잘 올려두었고 서준혁은 멍한 표정으로 신유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피 나잖아, 처리하고 기다렸다가 말하자.” 서준혁이 신유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때에 그녀가 먼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신유리만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간호사는 빠르게 병실로 들어와 서준혁의 주사를 다시 잘 처리하고는 그에게 움직이지 말고 잘 맞으라고 다시 말을 해줬다. 신유리는 그의 병실 안에 얼마간 있다가 나갈 채비를 하며 서준혁에게 말했다. “우서진 씨 아직 밖에 있어, 들어와서 너랑 같이 있어주라고 할게.” 서준혁은 힘겹게 입을 뗐다. “유리야,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신유리는 고개도 돌리지 않으며 대답했다. “상처가 다 나으면 그때 다시 얘기해.” 서준혁은 뒤돌아서있는 그녀를
병실로 돌아간 신유리는 서준혁과 병실에 있을 때 발생한 일에 대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임아중은 울어서 팅팅 부은 신유리의 눈을 보고는 걱정되는 한편 화도 나 그녀에게 바로 물었다. “서준혁 그 인간이 또 너 괴롭혔어?” 신유리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젠 내 앞에서 걔 이름 꺼내지도 마, 내가 서준혁한테 말했거든. 이제 서로 빚진거 없으니까 그만하자고.” 임아중은 신유리의 대답에 멍해졌다. “뭐...뭐라고?” “이제부터는 서준혁은 서준혁, 나는 나야.” 신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시간 좀 지나면 국내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청할 거야.” 임아중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신유리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너랑 서준혁 씨가 이제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으면 왜 이신이에게는 그렇게 차갑게 구는 건데? 그날 걔가 돌아갈 때 뒷모습이 얼마나 쓸쓸해보였는지 알아?” 신유리는 임아중의 말에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똈다. “나는 걔한테 방해가 되면 안 되잖아.” “뭐가 방해야? 이신이가 얼마나 좋은 남잔데 얼른 잡아야지!” “걔가 너무 좋은 남자라 내가 피해가 될 것 같아.” 신유리는 임아중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이신이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녀는 이신과도 같은 좋은 남자는 응당 자신을 온 마음 바쳐 좋아해주는 여자를 만나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선택을 했다. 본인처럼 이미 헤질 대로 헤진 마음으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채로 살아가는 여자는 이신한테 안 맞는 여자라고 믿기 때문에. [내가 걔랑 만나면 이신한테는 불공평해지는 일이야.] 임아중은 신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자두를 데리고 조용히 나갔고 신유리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만들어줬다. 신유리는 열이 내렸지만 그래도 미열이 지속되는 상태라 병원에서는 그녀더러 며칠간 더 관찰을 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임아중은 매일 자두와 함께 신유리의 병실로 찾아왔고 올 때마다
신연의 등장에 신유리는 딱히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왜냐하면 전에 신연이 곧 찾아오겠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유리는 신연이 병원으로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부산 태씨 가문의 일은 이 업계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거렸고 다들 태씨 가문 둘째 도련님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려 온 집안을 망가뜨린다고 비난했다. 다행히도 태씨 가문 셋째 딸의 남자친구가 나타나 무너지기 직전인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다시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다. 모든 사람은 다들 태씨 가문에서 좋은 사위를 찾았다고 평판을 내렸고 신연의 능력과 실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이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 신유리는 잘 모르지만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바로 신연이 이미 태씨 가문을 손아귀 안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태씨 가문 둘째 도련님은 연회에서 한번 마주친 적 있던 신유리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저 혈기왕성한 청년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신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신연은 이미 태지연과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기분이 매우 좋은지 신연의 입 꼬리는 떨어질 줄을 몰랐고 신유리는 그를 보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소파 저기 있으니까 가서 앉으세요.” 신연은 그녀의 병실을 쭉 훑어보았지만 소파에 앉지는 않았다. 신유리는 그제야 신연이 태지연의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태지연은 왜인지 모르게 전보다 더 말라있었고 피부는 더 하얘진 것 같아보였다. 신유리는 태지연이 쭉 입술만 오므린 채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에게 물었다. “태지연 씨는 어디 아프신 건가요? 여기 병원인데, 한번 검사나 받아보실래요?” 신연도 신유리의 물음에 태지연을 쳐다봤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저 괜찮아요. 어제 잘 휴식을 못해서 그럴 거예요.” 아무리 봐도 그녀의 상태는 이상했지만 신유리는 그것 또한 그들의 일이기에 더는 묻지 않고
서준혁은 여전히 환자복을 입은 상태였고 위에는 외투 하나를 걸친 채 자두를 안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사이 같았다. 신유리는 그의 품에 안겨있는 자두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준혁은 신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는 자두를 천천히 내려놓고는 신유리에게 천천히 물었다. “들어가도 돼?” 신유리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서준혁은 그제야 병실 안으로 발을 들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애 감기 안 걸리게 조심했어.” 신유리는 방금 전 자신의 한 말이 생각이 나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아.” 자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서준혁에게 갔지만 늘 환한 미소로 돌아왔기에 신유리는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가 있었다. 서준혁은 멈칫거리더니 신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을 했다. 더 많이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행여 불편해 할까 두려웠고 전에는 몰랐지만 신유리의 이런 말투조차 지금 그는 행복에 겨워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서준혁을 보고는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그녀의 감정변화를 알아차린 서준혁은 실망하는 듯 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신연 씨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적당히 만나. 네가 혹시 다칠까 걱정되니까.” 진지하게 말을 하는 서준혁은 신유리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줄까봐 계속 말을 했다. “태 씨 가문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진송백 씨의 실종도 신연 씨랑 관계가 있는 것 같고, 만약 너한테 태 씨 가문 일을 부탁하려는 거면 그냥 무시해.” 신유리는 원래부터 태씨 가문과 신연의 사이를 의심하기는 했지만 서준혁마저 이렇게 말을 해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준혁은 그녀를 위해 좋은 마음으로 한번 귀띔을 해주는 것이니 신유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고마워.” 그러나 신유리는 그녀와 신연의 계약이 이미 끝이 났고 월말에 귀국을 한다는 사실은 서준혁에게 알리지 않았다. 서준혁은 신유리의 병실에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신유리
병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고 자두의 흐느낌 소리만 들려왔다. 서준혁은 온몸이 굳어버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자두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마저 갈라졌다.“너... 방금 뭐라고 불렀어?”자두는 그저 서준혁을 끌어안고 울면서 한편으로 서준혁의 다친 손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의 상처를 호호 불어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서준혁은 본능적으로 신유리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약간 당황한 듯 서준혁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자두를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입을 열었다. “신경 쓰이면 고치게 할게.”“그럴 리가 없잖아.”서준혁은 그제야 기쁨에 맞닥뜨린 듯한 느낌을 확실하게 받았다.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새까만 눈동자에는 기쁨이 번졌다.그는 고개를 숙여 자두를 안아 올리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두야, 한 번만 더 아빠라고 불러줄래?”자두의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고 그녀는 몸을 돌려 서준혁의 목을 끌어안더니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은 채 흐느꼈다.서준혁은 그녀를 감싸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 자두 걱정하지 마. 아빠는 하나도 안 아파.”그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당장이라도 붕대를 풀어 헤치고 자두가 다시 한번 불어주기를 원하는 기세였다. 이내 신유리는 그를 저지했다.신유리는 자두를 그의 품에서 안아가며 말했다. “나 오늘 퇴원이야, 그러니까 자두는 더 이상 네 병실에 가지 않을 거야.”그는 기뻤던 마음이 이내 가라앉으며 짧게 대답했다. “병원에 오래 머무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나중에...”서준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나중에 자두 엄마를 보러와도 될까?”신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실망감이 드러났고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서준혁이 떠나려고 하자 자두는 마치 그를 따라가려는 듯 신유리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임아중은 신유리의 평온한 얼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