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이 막 방으로 급히 뛰어왔을 때 신유리는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손을 든 채 전화 받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핸드폰은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핸드폰 화면은 여전히 켜진 상태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홍도의 가족분께서는 빠른 시간 내로 제일 병원으로 오셔서 환자의 시신에 관한 일을 인계해 주셔야겠습니다.”이신은 급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바라보았다. 신유리는 멍해 있었다. 그녀는 이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한참을 땅에 떨어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쪼그려 앉더니 핸드폰을 줍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 어제까지만 해도 외할아버지꼐서는 아무 일도 없으셨어요.”“실례지만 신유리 씨 아닌가요? 성남시 제일병원에 남겨주신 연락처가 바로 이겁니다.”전화 너머의 말이 끊겼지만 신유리는 미처 반응을 못한듯 핸대폰을 들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망연자실해 있었다. “여보세요? 신유리 씨 맞습니까?”전화 너머로 다시 소리가 울려오자 신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신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추기려 했지만 그녀는 혼자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일어서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신유리의 머리속은 텅 빈 채 아까 전화 너머의 목소리만 끊임없이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홍도의 시신?’‘이홍도가 누구지?’‘...외할아버지?’‘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는 괜찮으셨잖아. 어떻게 갑자기... 시신이라니?’신유리는 흐리멍덩하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주위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신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더니 잠긴 목소리로 외쳤다.“유리야!”신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무슨 일 있어? 난 지금 바로 병원으로 가봐야 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날 기다리고 있대. 무슨 일 있으면 내가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면 안 돼? 미안해, 진짜 미안해.”그녀는 말에 조리가 없어서 그 두 마디만 반복할 뿐이었다.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신유리의 손목을 잡아
“서 대표님.”이석민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손에 핸드폰을 쥔 채 테이블 뒤편의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제일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입니다. 지난달에 연락했던 공익 건강검진 활동 때문에 그쪽에서 이번에도 계속 진행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서준혁은 원래 계약서를 보고 있었는데 이석민의 말에 전화를 넘겨받았다. 화인 그룹은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최근에 공익 활동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가 전화를 건네받자마자 전화너머에서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서 대표님,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서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시끄러웠습니다.”서준혁은 별로 개의치 않고 대답했고 전화 너머로 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병원과 환자 사이의 갈등이 적지 않은데 가족 간의 갈등은 처음 봐서 경찰에 신고할 정도입니다.”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이 환자는 처음에 대표님의 외삼촌께서 집도하셨습니다. 원래 어르신께서 회복이 잘 되셨는데 결국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제 말은, 이 환자는 대표님의 외삼촌께서 집도하셨습니다. 바로 개두술이 필요한 노인입니다.”“그다음 말.”전화를 끊을 때까지 서준혁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차가웠다.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세가 솟구쳐 올랐다. 그 시각 제일 병원.주국병과 이연지가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다가 병원의 경호원이 올라와 강제로 두 사람을 사무실로 데려갔다. 밖의 소리가 점차 조용해지자 신유리는 외할아버지의 침대 옆에 엎드려 눈을 감은 할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평소의 잠든 모습과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침대 옆에 툭 늘어진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피부의 온도는 점점 흘러가 버렸고 그 마지막 온기조차 다 흩어져버려 신유리가 아무리 쓰다듬어도 여전히 생기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노크 소리가 다시 울렸을 때 신유리
서준혁의 표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 그는 신유리를 주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신유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한구의 시신마냥 감정도 생각도 없었다. 방금 들어가 경찰에게 주국병을 고소한다고 해도 순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고 약간의 시간과 에너지조차도 그 누구와 공유할 수 없었다. 서준혁도 물러서지 않았고 신유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이신이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실례합니다. 길을 막고 계시네요.”서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다시 신유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신유리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너무 작아서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년 동안 줄곧 일하느라 바쁘다고 한 번도 할아버지와 함께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 마지막 시간인데, 좀 조용히 할 수 없어?”서준혁은 양미간을 찌푸렸고 신유리는 이신을 보며 말했다. “이쪽의 일은 네가 좀 도와서 봐줄 수 있어?”이신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신유리에게 걸쳐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었다. 노인들은 흔히 사람이 떠난 후 영혼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신유리는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찾지 못해 조급해하지 않도록 그녀가 마땅히 외할아버지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떠나자 이신의 얼굴의 온화함이 흩어졌다. 그는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 “서 대표님께서는 그만 일 보러 가셔도 될 것 같네요. 유리는 제가 돌볼게요.”서준혁은 피식하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 정도로 한가한 줄 이정이 알면 기꺼이 할 일을 찾아줄 텐데요.”이신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몸에서 늘 드러나던 나른했던 기운은 적잖게 가다듬어졌다. “서 대표님이야말로 이렇게 한가해서 쓸데없이 참견할 여유까지 있으시다면 먼저 자신
주국병 그 사람은 행여나 신유리가 정말로 돈을 주지 않을가봐 외할아버지를 몰래 데리고 나가는 이런 파렴치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이렇게 하면 신유리에게서 계속 돈을 받아낼 수 잇다는 생각으로 말이다.곡연이 이 일을 신유리에게 전해주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정말이지 멍청하고 추악한 사람이네요, 나중에 어떤 인과응보를 받을 줄 알고 이러는 건지.”말을 듣고 있는 신유리의 낯빛은 새하얗게 변해있었다.이유는 아주 교활하고 멍청해 웃기기까지 하였지만 하필이면 이런 우둔한 생각들이 외할아버지를 해하였다.이연지와 주국병은 아직까지도 파출소에 있었고 이신과 연우진은 신유리와 함께 그들을 며칠 동안 지키고 있었다.며칠간 신유리는 눈에 확연히 알릴정도로 말라있었다. 원래도 마른 그녀의 몸매가 지금은 거의 뼈밖에 남지 않아 옷을 입어도 공간이 넉넉했다.“유리야, 지금 많이 힘든 거 잘 알아.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어떡해.”말을 하는 연우진의 손엔 보온병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신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걱정근심이 가득해보였다.“집에서 직접 끓인 국이야, 조금이라도 마셔.”“거기다가 둬, 좀 잇다 마실게.”신유리가 천천히 대답했다.그녀는 좀 잇다 먹겠다는 핑계로 며칠을 지내왔고 둔 음식들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었다.연우진이 말을 하려는 찰나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힐끔 쳐다보고는 벨소리를 꺼버렸다.곧이어 연우진이 들고 있던 보온병을 이신에게 건네주더니 말했다.“먹는 거 보고계세요,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급급히 자리를 떠버렸고 남겨진 이신은 보온병에 담겨진 국을 절반 부어 신유리 앞까지 갖다 주었다.살짝 올라간 눈초리에는 말 못할 애매한 감정이 담겨있는 듯 했고 이신은 먼저 입을 뗐다.“이러면 할아버지가 많이 속상해하실겁니다.”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유리는 국이 담겨진 병을 건네받았다.하지만 바로 마시지 않고 잠겨있는 목소리로 이신에게 물었다.“할아버지는... 지금 날 보실 수
도착한 절에서는 향을 피우는 냄새가 가득 풍겼는데 그 냄새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신의 안정을 느끼게 하였다.나지막이 들려오는 종소리와 스님들의 소리, 신유리는 이신을 바라보며 물었다.“절 왜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와서 같이 향하나 피울까요?”그녀의 물음에 이신은 말했다.절엔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심조심 말을 하고 발걸음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절 안에 있는 불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들 같았다.“어렸을 때 할머니를 대신해 향을 피워본 적이 있습니다.”조용한 분위기속에서 이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향을 피우는 장소는 절 뒤에 위치하여있는 마당, 등기를 책임지고 있는 스님은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건네고는 신유리에게 향을 피울 재료들을 건네주었다.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만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어디선가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오고 가만히 서있는 신유리를 발견한 이신이 말했다.“제 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그리운 사람에게 향 하나를 피워주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을 인도해줄 수 있답니다.”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던 신유리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향을 피우는 신유리는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고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집으로 돌아갔을 때, 빨간색으로 칠해진 현관문은 여전했고 신유리는 조금 망설이면서 문을 열었다. 며칠간 비운 집은 낡은 시설이라 먼지가 가득 쌓여있었고 문을 열자 대량의 먼지들이 흩날렸다.집안상태를 확인한 신유리는 이신을 못 들어오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집이 너무 어지러 워서...”“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시고, 근처에 있겠습니다.”이신은 그녀의 말에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한참 뒤에 대답을 해주었다.신유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신이 떠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그날 밤 급히 떠나가느라 집안은 도둑이 든 것 마냥 난장판이 되어있었다.신유리는 소파에 털썩 앉아 집안 가구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조금만
곡연과 허경천은 부서로, 이신은 직원들을 데리고 재료를 고르러 가야하니 신유리는 혼자서 화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떠나기 전 이신은 표정을 아주 살짝 찡그리며 말을 꺼냈다.“곡연 씨랑 같이 가시죠.”“괜찮아요. 뭐 얘기 다 끝냈으니 전 가서 도장만 찍어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그의 말에 신유리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대답했다.이신은 여전히 찡그린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신유리는 한숨을 쉬며 대답을 이어갔다.“걱정마세요, 저 진짜 괜찮아요.”신유리가 완강하게 거절의사를 비추자 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화인으로 향하기전 직접 이석민에게 연락을 취했다.이석민은 그녀더러 작은 회의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해줬다.신유리는 화인의 구조에 대해 많이 익숙하기에 이석민이 말한 작은 회의실이 대표사무실 옆에 위치하여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점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주현을 마주친 것이다.주현은 전에 시한에서 마주쳤을 때와 다른 점이 없었는데 몸엔 예쁜 옷들을 입고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위풍당당한 주현의 모습은 서준혁과 아주 닮아있었다.신유리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옆으로 몇 걸음 비켜주었다. 필경 두 사람은 친하지도 않고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주현은 일부로인지 우연인지 신유리가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그녀와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주현의 불순한 의도가 분명해보이자 신유리는 발걸음을 멈췄고 주현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신유리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준혁씨 만나러 왔어요?”물음 속에 섞여있는 비아냥거림은 티 날 정도로 선명했고 신유리는 짜증이 밀려왔다. 주현은 지난번 시한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많은 적대심을 비췄다.주현의 적대심은 송지음보다 더욱 많고 더욱 거셌다.여전히 신유리로 하여금 이해가 안 되게 하는 점은 그때 송지음과 서준혁의 친밀하고도 가까운 사이였다.많은 생각들을 뒤로한 채 신유리는 주현을 쳐다보며 대답했다.“계약
“합정에 가시려고요?”서준혁의 말에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합정이라는 곳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신유리는 이연지와 주국병이 생각이 나 무의식적으로 반감이 들었다.서준혁이 앉아있는 이석민에게 떠나라는 듯 눈빛을 슬쩍 보내자 그는 알겠다 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이석민이 자리를 뜬 후에야 서준혁은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신유리씨 아버지 되는 사람이 저한테 아주 큰 선물을 준비했더군요. 제 모든 정보가 합정에 뿌려져서 제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닌데...”그는 말을 이어가며 손가락으로 툭툭 책상을 치더니 걸상에 등을 기댔다.“신유리씨? 당신이 해결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주국병 그 사람이 왜 서대표님 정보를 알고 있는 거죠?”신유리는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물었다.“이 물음은 제가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서준혁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그 2억이 넘는 돈도 제가 갚았고, 지금 협박을 당하는 것도 저고, 신유리씨 저보다 더 잘 살고 있는데요?”그의 말에 신유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서준혁에게서 2억이 넘는돈을 빚진 상태였기 때문이다.서준혁에게서 빌린 돈은 주국병의 빚을 갚기 위한 최후의 수단 이였다.“알겠습니다. 같이 갈게요.”한참을 찡그리고 있던 신유리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빌린 돈은 제가 어떻게든 갚을게요.”신유리는 쭈뼛쭈뼛 대답을 이어갔고 서준혁은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어떻게든?”“신유리씨 지금 월급으로는 턱도 없을 텐데, 이신씨가 얼마 줍니까?”서준혁의 말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건 서대표님께서 상관할 바 아니고요. 아무튼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테니 걱정마세요.”임아중은 전에 너무 세게 나가면 결국 밑지는 건 본인이 될 거라고 말해주었었다. 하지만 신유리는 서준혁에게 그 어떠한 것도 빚지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 제일 좋은 선택은 깔끔한 관계일 테니까.2억이 아니라 20억 이였어도
신유리가 바라본 이신은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모습이었다.서준혁과는 달리 하얀 피부에 정교한 이목구비, 또렷한 눈매와 높은 콧대를 지녔다.신유리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지금 이런 일에 신경을 쓸 정력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안 믿는 게 아니라 이런 작은 일로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신씨는 제 친구로서 이미 저 많이 도와줬어요.”신유리의 말에 이신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그녀를 똑똑히 바라보았다.“저는 친구...”“이신씨.”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말을 끊어버렸다.“내일 아침 비행기예요, 먼저 가서 짐부터 싸고 있어야 해서... 될수록 월요일에 돌아오는 거로 할게요.”말을 끝낸 신유리는 이신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임아중이 나왔을 때 마침 신유리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이신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위로를 건넸다.“너무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좀 주자고요. 집에 그렇게 큰 일이 발생했는데 언제 이런 감정들에 연연하겠어요.”이신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임아중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깜짝 놀란 임아중은 얼른 말을 이어갔다.“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이예요. 지나가는 길!”임아중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사무실을 떠나려고 발걸음을 옮겼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고 한숨을 쉬며 이신을 쳐다봤다.조금 고민을 하던 그녀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용기는 백점만점이지만... 타이밍이 좀 안 맞았어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요. 잘 참다가 왜 이래요?”“연애라는 건 천천히 뭐든 천천히 해야 돼요. 마치 끓는 물처럼?”임아중의 말에 이신은 콧방귀를 끼며 입을 열었다.“진욱씨랑 아중씨 처럼요? 물이 끓기도 전에 다른 사람한테 뺏기는?”그의 대답에 기분이 상한 임아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신유리는 별로 챙길 물건도 없었다. 그녀의 캐리어안에는 몇 벌의 옷가지들과 일부 약들이 전부였다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