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이틀 동안 신유리는 매일 병원, 성북, 그리고 별장 이 세 곳만 다녔다.이신 쪽도 모두 일 때문에 바빴다. 신유리는 허경천이 그들과 드리머 측의 소통이 유쾌하지 않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특히 드리머 측 기업도 끊임없이 부서를 찾고 있었다.신유리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들은 신유리가 요즘 외할아버지의 일 때문에 바쁘다는 것을 알고 동의하지 않았다.곡연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유리 언니, 걱정하지 마요. 이건 작은 일이니 형님이 틀림없이 잘 처리할 거예요.”신유리도 자신의 현재 상태가 결코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요새 서준혁과 연락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왕 선생이 그녀에게 전화해 병원으로 오라고 했을 때, 신유리는 사람을 불러 성북의 집 수도관을 수리했다.이쪽은 오래된 동네여서 안의 기반 시설이 모두 열악한 데다가 지금은 거주자가 적기 때문에 관리자도 없었다.낮에 나갈 때는 괜찮다. 적어도 밝으니 말이다. 하지만 밤에 돌아오면 아주 번거롭다. 단지 건물 입구의 가로등이 마침 고장났기 때문에 아주 어두웠다.신유리는 동사무소에 가서 아파트 관리자의 전화번호를 받은 뒤, 운전을 하고 병원으로 갔다.외할아버지의 수술에 대해 상세하게 상의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그들이 수술에 동의하자 왕 선생은 하성에게 연락했고, 두 사람은 시간을 금요일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신유리가 갔을 때, 하성은 이미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에는 많은 의사들이 있었다. 그중에 두 명은 일부러 다른 도시에서 온 하성의 제자였다.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 늦었어요.”하성은 냉엄하고 엄한 눈빛으로 신유리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보았다. 조금 불쾌했지만,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다.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환자의 검사 보고서가 모두 나왔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뇌내 혈전의 그림자가 흐
이연지는 미친 듯이 달려와 미미를 품에 안았고, 주국병은 발로 그녀의 팔을 세게 걷어찼다!이연지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지만 주국병은 거세게 욕을 퍼부었다. “쓸데없는 것, 네가 돌아올 낯짝이라도 있냐? 네 그 잘난 자식한테 가서 돈 몇 푼 받아오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네 입으로 말해 봐! 정말 남편이 그 사람들 손에 죽기를 바라는 거야?”그는 욕을 퍼붓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풀더니 이연지의 등을 마구 때렸다. 찰싹!크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는 남자의 계속되는 저주와 모욕이 담겨있었다."내가 똑바로 말하는데, 남편 인생 힘들게 만들면 네 인생도 좋지는 않을 거야. 내가 이 돈벌이를 외국에 시집보내서 팔아넘길 거니까! 알아들어?!"이연지는 대답하지 않고 미미를 껴안고 울기만 했다. 주국병은 힘에 부쳐 의자에 주저앉아 짜증스럽다는 듯 마른 세수를 하였다.그는 이연지를 발로 걷어차며 낮고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사실 밖에서 돈을 빌렸어. 안 갚으면 우리 식구 셋 다 죽는다고!"이연지는 잠시 멈칫 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무슨 말이긴 뭐가 무슨 말이야? 남편이 밖에서 돈 좀 빌렸다고!"주국병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네 그 배은망덕한 딸은 아버지한테는 관심도 없으니, 내가알아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지.”이연지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하니 미미를 껴안고 있다가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울기 시작했다.신유리는 합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신을 따라 여정원을 보러 갔다.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 카페에서 여정원과 약속을 잡았고, 그는 리사를 데리고 왔다.리사는 신유리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인사했다.여정원은 겉으로는 자상한 척 신유리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끈적한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유리 씨, 저희가 다시 협력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쁩니
외할아버지의 수술은 금요일 오전에 예정되어 있었다.신유리는 한밤중에 병원에 도착했는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외할아버지 곁에 있고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하성은 외할아버지의 기본적인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보여 일반인에 비해 위험도가 높다며 수술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지 말라고 그녀에게 여러 번 상기시켰다.사실 신유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외할아버지가 남은 여생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결국 수술을 선택하게 되었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아직 쉬고 있었고, 신유리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병실 밖에서 기다렸다.아침 6시, 외할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수술은 첫 번째 순서로 예정되어 있었다.그는 마취 때문에 어젯밤부터 금식을 했다. 신유리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면봉을 물에 담가 그의입술에 발라 수분을 공급해주었다.외할아버지는 흐릿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신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 선생님은 능력 있는 분이시니까요. 한숨 주무시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져 있을 거예요."외할아버지는 입을 열고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말했다. "걱정…마라."신유리는 잠시 멈칫 하더니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숨겼다.그녀는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볍게 주무른 뒤 주머니에서 작은 부적을 꺼냈다."보세요, 제가 부적을 가져왔어요." 신유리는 부적을 외할아버지 앞에 놓았다. 그녀의 눈시울은 붉어졌지만, 꾹 참고 말하며 감정을 숨겼다.외할아버지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모르지만, 손가락으로 열심히 부적을 쓰다듬었고,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무언가 중얼거렸다.이신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 외할아버지는 막 수술실로 들어간 상태였다.수술은 대략 5~6시간 정도 걸렸고, 신유리는 그를 따라 수술실 밖 대기실에 도착했다.그녀는 전화를 받았고, 시선은 여전히 불이 켜진 수술실 문을 향해 있었다.그때 이신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할아버지는 수술실에 들어가셨어?"이신은 신유리가 한밤
신유리는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 연우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리야, 나 지금 출장 와 있는데 방금 너네 외할아버지께서 수술을 받으신다는 소식을 들었어. 지금 상황은 괜찮아?"신유리는 요즘 너무 바빠서 연우진과 연락을 하지 못했다. "괜찮아.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외할아버지께서는 덕을 많이 쌓으신 분이라 분명 괜찮으실 거야."신유리는 고맙다고 말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을 지킨 연우진은 먼저 한숨을 내쉬며 자책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유리야, 왜 네가 힘들 때마다 나는 네 옆에 없는 걸까?"신유리는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 "어쨌든 다 내 일인 걸.""난 정말 무능한 친구인 것 같아." 연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최근 집안 일을 많이 맡아서 처리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출장으로 보내고 있었기에 신유리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내가 가기 전에 이신에게 좀 더 잘 챙겨달라고 했어. 어려운 일 있으면 바로 걔한테 찾아가 봐." 연우진은 몇 마디 더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는 정말 바쁜 듯해 보였다.그런데 전화를 끊기 전, 신유리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신유리는 잘못 들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런데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이 켜졌고, 이번에는 이연지였다.신유리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이연지가 그녀를 찾는 경우는 돈 문제 이외에는 없었다. 신유리는 오전 내내 대기실에 앉아 있었고, 오후 1시가 되자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하성이 지친 표정으로 나왔고, 신유리는 일어설 힘조차 없어 멍하니 하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의자 가장자리를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갔고, 그 탓에 손이 하얗게 변해있 었다.신유리는 두려워졌다. 수술이 끝날
중환자실의 면회시간은 모두 오후였으며, 외할아버지는 막 수술을 마쳤기 때문에 감염 예방을 위해 당분간 면회가 불가능했다.신유리는 이곳에서 필요한 모든 절차를 완료한 뒤였기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그녀는 원래 오늘 밤까지 병원에서 잘 생각이었지만, 저녁에 뜻밖에도 임아중이 찾아왔다.임아중은 병원에 오는 것 임에도 여전히 하이힐을 신었다. 그녀는 자신이 몸집이 작아 이렇게 해야 포스 있어 보인다고 했다.임아중은 오자마자 눈살을 찌푸린 채 신유리를 살펴보았다. "몰골이 왜 이래? 이신이 나한테 너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가라고 한 게 드디어 이해가 간다."신유리는 몰골이 보기 흉하다는 말을 여러 사람에게 들었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턱을 매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괜찮긴 무슨, 너 지금 너무 초췌해." 임아중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신유리는 저녁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수술을 걱정하느라 전혀 식욕이 없었다."두 사람 정말 대단하다." 임아중은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덥석 신유리의 손을 잡았다. "나랑 밥 먹으러 가자, 외할아버지가 방금 수술을 마치셨으니 지금은 못 뵙겠네. 먼저 푹 쉬어둬. 네 몸이 상해 있으면 외할아버지가 회복하셨을 때 걱정하실 거 아니야!"신유리는 그녀가 자신을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도 임아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다만 임아중은 곱게 자란 탓에 병원 근처의 작은 식당은 마음에 들지 않아하며 신유리를 끌고 도심의 번화가로 차를 몰고 갔다.임아중은 그녀를 태국 음식점으로 데려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친구가 오픈한 가게야. 어제 막 오픈했어."신유리는 음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 주문의 모든 것을 임아중의 선택에 맡겼다.주문을 마친 뒤, 테이블 위에 놓인 임아중의 휴대폰이 울렸다. 임아중은 눈을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말했다. "우서진은 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요즘 들어 나를 왜 이렇게 귀찮게 하지?”신유리가
하지만 서준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신유리는 전화를 끊고 잠시 뒤 다른 사람에게 전화 한통을 걸었다.이번에는 바로 연결되었다.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서준혁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서 대표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지금은 전화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이석민이었고, 어렴풋이 뒤로 들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그러자 신유리가 멈칫하였다. "바빠요?"이석민은 듣자마자 신유리라는 걸 알고 곧바로 근처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혹시 서 대표님에게 무슨 볼 일 있으세요? 저희는 지금 와인 시음회에 와 있고 서 대표님은 지금 부산에서 접대 중이세요.”"와인 시음회요?" 신유리가 물었다. "와인 시음회를 왜 아침에 해요? 저녁에 하는 거 아니에요?""부산 쪽 사람들이 오후에 일이 있어 서둘러야 한다고 해서 앞당겼어요." 이석민은 말을 마친 후 신유리에게 물었다. "서 대표님에게 급한 볼 일이 있으신 거면 제가 바로 전화드려볼게요."신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통화를 마친 뒤, 신유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사실 그녀는 서준혁에게 왜 외할아버지를 위한 돈을 지불한 건지 묻고 싶었다.그런데 갑자기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다시 유 원장을 찾아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고, 유 원장이 서준혁에게 돈을 다시 돌려주기를 바랐다.유 원장은 그녀가 단호한 것을 보고 더 이상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환불은 할 수 있지만 계좌 입출금이 조금 번거로워요. 내일 은행으로 가서 찾아 드릴게요."“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신유리는 병원에 좀 더 있다가 나왔고, 나왔을 때는 이미 오후가 되어 있었다.이번이 그녀가 병원을 떠난 가장 이른 시간이었다.서준혁은 아직도 그녀에게 연락이 없었다. 이석민이 전화해서 서준혁에게 사실을 알렸는지 모르겠다.그런데 기다리던 서준혁의 전화는 오지 않았고, 오히려 연우진의 전화가 왔다.“유리야,
다음 날, 신유리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곡연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려오는 신유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리 언니, 어젯밤에도 잠 못 잤어요?” 신유리는 설거지를 하다가 거울을 보았는데,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그녀는 어젯밤에 잠을 못 자서 안색이 별로 안 좋았다. 그녀는 곡연과 무리들이 모두 정장을 차려입은 걸 보고는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형님 부서의 관계자분과 약속이 있어서요, 또 세미나가 있기도 하고요."신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병원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이신이 그녀의 시간을 뺏는 것이 걱정되어 그랬을 것이다.그러자 허경천이 말했다. "그냥 작은 세미나예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형님이 일단 일 보시라고 하셨어요.” 신유리는 이신이 보이지 않자 물었다. “이신은 지금 어디에 있죠?”허경천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마 나갔나 봐요."신유리는 별다른 말 없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떠날 준비를 했다.문 손잡이를 당기자마자 밖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문이 열렸고, 이신은 차분한 눈빛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나가려고?""응, 일이 좀 있어서."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유리를 위해 옆으로 비켜주었고, 신유리가 나간 후 그녀를 따라 차고로 갔다."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차고 입구에 도착한 뒤, 신유리는 그제야 멈춰 서서 이신에게 물었다.이신의 잘생긴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흰색 셔츠와 슬랙스를 입어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신유리 앞에 선 그가 잠시 뒤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에게 와."신유리는 순간 당황했다. 이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의 눈빛에서 그의 복잡한 심정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이신에게 물었다.
하정숙은 성격이 좋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항상 거만한 표정을 지었고, 말투도 심술궂고 불쾌했다.신유리는 이를 보고도 놀랍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뜻 밖에도 하정숙이 그녀를 발견했다.그녀의 짜증 섞인 표정은 좀 더 싸늘해졌고,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역시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몰아서 일어나는가 보네.”송지음도 신유리를 보았다. 방금 하정숙이 한 말을 신유리가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표정이 굳어졌다유일하게 침착한 사람은 신유리뿐이었다. 그녀는 하정숙의 말을 듣지 못한 듯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그때, 왕 선생이 그녀를 보았고, 그의 태도는 상당히 온화했다. "지금 환자 상태가 괜찮지만 어쨌든 수술을 하면 몸이 상하기 마련이에요. 관리를 잘 해주셔야 해요. 그리고 환자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중환자실에 이주 정도 더 입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괜찮으실까요?"중환자실 비용은 그리 저렴하지 않았기에 이를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왕 선생은 결제를 위한 청구서 몇 장을 더 주었다.이후 신유리가 서류를 들고 사무실을 나오자 마자 다른 사람에게 가로 막혔다.요즘 송지음은 더 이상 처음 입사했을 때처럼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양복 셋업을 입고 머리에 컬을 넣어 어깨까지 내렸다. 엘리트 도시 미인처럼 보였다.반면 신유리는 요즘 병원을 오가느라 바빠 옷을 입을 시간조차 없어 평범한 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였고, 긴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여 있었다.송지음은 신유리를 훑어보고는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리 언니, 정말 언니였네요. 아까 슬쩍 봤을 때는 알아보지도 못했어요"그녀는 조금 놀란 듯 말했다. "화인을 나가시고 이렇게 많이 변하실 줄은 몰랐어요."송지음의 말 속에 담긴 비웃음을 신유리가 왜 못 느끼겠나?그녀는 송지음보다 키가 컸지만 오늘 송지음은 하이힐을 신었고 신유리는 편의상 플랫슈즈를 신었다. 때문에 송지음이 그녀보다 머리 반절 정도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