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진짜일까?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강지혁이 맞을까?S 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을 찾기 더 힘들다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그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이 동생이라고 얘기했던 그 ‘동생’과 동일 인물일까?하지만 방금 임유진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강현수를 경계하던 그 모습은 절대 단순한 누나 동생 사이 같지 않았다.그건 임유진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눈이었다.강지혁과 강현수 이 두 남자가 지금 임유진을 두고 싸우는 건가?곽동현은 어쩐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한편 배여진은 어느새 강현수 곁으로 다가와 불쌍한 얼굴로 물었다.“현수 씨... 유진이 사랑한다는 거 진심이에요?”“그래.”강현수는 짤막하게 얘기했다. 배여진이 자신에게 어떤 마음인지 잘 알고 있지만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생명의 은인일 뿐 그의 여자는 될 수 없었다. 처음 그녀를 보던 그 순간에도 그에게는 낯선 느낌밖에 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유진이 옆에는 아직 강지혁 씨가 있잖아요. 헤어졌는데도 둘이 같이 있을 정도면 현수 씨랑은...”“배여진!”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잘라버리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이건 내 일이야. 거기까지 해.”배여진은 그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강현수가 곁을 지나쳐 경찰서를 나갈 때야 비로소 입술을 꼭 깨물고 그를 따라나섰다.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온 배여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현수 씨 일에 일부러 간섭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조금 두려운 것뿐이에요!”이 말을 하는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있었다.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두렵다고 한 건 진심이었다.“두렵다고?”강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현수 씨가 유진이랑 잘 되기라도 하면... 그럼 지금처럼 나한테 잘해주지 않을까 봐...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래서 두려워요.”배여진은 이제 울먹거리기
“여진아, 앞으로 지나친 스킨십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불필요한 오해 받는 거 싫으니까.”강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자신의 마음을 몰랐을 때는 배여진이 옆에서 여자친구인 척하는 행동을 내버려 둘 수 있었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에게 배여진은 생명의 은인이라 그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몸값을 올리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사랑하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버린 이상 그녀에게 괜한 오해를 받는 행동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배여진은 그의 말에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앞으로는 주의할게요.”불쌍하고 가녀린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는 분노와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옆에 늘어트린 두 손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부들거렸다.이 모든 게 다 임유진 때문이다.고작 임유진에게 고백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선을 긋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눈에 훤했다.만약 임유진과 강현수가 정말 사귀기라도 한다면 임유진은 무조건 어릴 때의 진실을 그에게 말할 것이고 강현수는 무조건 임유진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잃게 된다.배여진은 상상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마을 사람들 모두 그녀가 미래 재벌가 사모님이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데 이대로라면 마을에서 제일 큰 놀림거리가 될 게 뻔했다.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조롱당하는 일만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든 임유진과 강현수가 이어지지 못하게 막아야만 한다!...벤틀리 차 안은 지금 지나치게 고요하다.강지혁은 뒷좌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임유진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녀리고 기다란 그녀의 손은 관절이 미세하게 변형되어 있었고 자세히 보면 손가락과 손등 위에 오래된 상처 같은 것들도 있었다.그녀의 손은
그 말에 임유진은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드디어 가족이 생긴 줄 알고 무척이나 좋아했었다.하지만 그 좋아했던 마음만큼 지금은 이 순간이 더욱더 잔혹하게 느껴졌다.강지혁은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누구든 단번에 반하게 만들 것 같은 얼굴이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아니면 강현수 때문에 그래? 강현수가 사랑한다고 하니까 이제는 내가 이렇게 만지는 것도 싫어졌어?”뜨거운 입김과는 반대로 그녀를 보는 그의 눈은 지금 서늘하기 그지없었다.“강현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래?”강지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그 말은 강현수를 사랑할 일은 없다는 뜻인 거지?”“내가 사랑하든 안 하든 그게 중요해?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연인이 아니라 누나 동생 사이야. 내가 만약 강현수를 정말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임유진은 순간 욱해서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강지혁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차 안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변해버렸다.이에 임유진은 어쩐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얼굴을 조금 더 그녀와 가까이 밀착시키더니 이윽고 두 사람의 살결이 닿고야 말았다.그리고 곧바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정말 강현수를 사랑할 거야?”임유진의 몸이 움찔 떨리더니 곧바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지금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고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그녀는 강지혁이 지금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한... 마치 분노하는 것 같았다.그의 목소리도 그의 행동도 무척이나 다정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만약 이때 그녀가 강현수를 사랑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어쩐지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응? 왜 말을 안 해? 정말 강현수를 사랑할 거야?”강지혁은 다시 한번 물었다. 마치 오늘 그녀의 입에서 그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듯이 말이다.“나는...”임유진은 바싹 마른 입을 힘겹게 열었다.“그럴 생각 없어.”그녀는 처음부터
“혁아, 우리 관계 언제 끝낼래?”임유진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히 물었다.이에 강지혁의 손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그녀가 원룸 방에서 그에게 웃어줬던 것처럼.“누나, 우리 사이에 끝은 없어.”강지혁은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그는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이 없다....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임유진은 그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로펌에 도착하자 차 변호사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유진 씨 몸은 좀 어때요, 정말 다친 데 없어요?”어제 그녀와 통화하던 중에 전화가 갑자기 끊겼고 다시 걸어보니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는 발을 동동 구르다 신고할까도 생각했었다.다행히 그런 생각이 들던 찰나 임유진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얘기해준 뒤에야 그는 한시름을 놓았다.“네, 정말 괜찮아요. 이따 어제 일 물어볼 겸 경찰서에 한번 가보려고요.”“그럴 필요 없어요. 아침 일찍 내가 이미 다녀왔거든요. 어제 유진 씨 해하려고 했던 남자, 소지혜 팬이더라고요. 전에 두 번이나 유진 씨 해하려고 했던 것도 전부 그 남자가 꾸민 짓이었어요. 그리고 어제 유진 씨가 얘기해줬던 사건의 단서 말이에요. 그거 경찰서 쪽에 의뢰해 보니 루비 반지를 끼고 있던 사람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거로 나왔어요.”임유진은 그 말을 듣더니 활짝 웃었다.이렇게 되면 사고 당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소지혜라는 증거가 더 확실해지게 된다!“그런데 그 남자가 저를 두 번이나 해하려 했다고 직접 시인하던가요?”임유진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아니요. 그게 들어보니까 어젯밤에 웬 서류가 경찰서에 보내졌대요. 거기에 그 팬이라는 남자가 인터넷으로 유진 씨를 해하려 했다는 증거들이 전부 다 들어 있었고요.”“그거 보낸 사람은요? 누구래요?”“그건 경찰 쪽에서 얘기를 안 해주더라고요.”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경찰서 쪽에서 모르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고 해도 의뢰를 받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앞으로 유진 씨에게 작은 사건을 자주 배당해줄게요. 일단 경력을 쌓고 신뢰도를 높이면 앞으로 변호사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고마워요, 차 변호사님.”차 변호사가 다시 자리로 돌아간 후 임유진은 데스크 직원으로부터 곽동현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임유진은 아래로 내려가 곽동현을 데리고 작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멀쩡한 임유진과는 달리 곽동현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를 만나자마자 안절부절못하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동현 씨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괜찮으니까 얘기해요.”“여기 오기 전에 재하 사건 관련해서 들었어요. 소지혜 그 여자가 드디어 피고인석에 앉게 된다면서요? 차 변호사님이 오늘 아침 재하 부모님께 전화해서 이 모든 게 유진 씨가 발견한 단서 덕분이라고 하셨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유진 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찾아왔어요.”“동현 씨가 그날 소지혜가 루비 반지를 끼고 있던 얘기를 해줘서 나도 생각난 거예요.”임유진은 미소를 지었다.“고맙다는 인사는 동현 씨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게 맞아요.”곽동현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잠시 뒤 또다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참, 예전에 봤던 그 동생분이 바로 어제 경찰서에 왔던 강지혁 대표인 거죠...?”임유진은 잠깐 흠칫하더니 이내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맞아요.”“역시 그랬군요...”곽동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음에도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럼 유진 씨는 어쩌다 강지혁 씨의 누나가 된 거예요?”곽동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그 질문에 임유진은 자조하듯 웃었다.그의 말처럼 어쩌다 그녀는 ‘혁이’가 아닌 강지혁의 누나가 됐을까?곽동현은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서둘러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얘기 안 해줘도 돼요. 난 그냥 어제 강지혁 씨도 그렇고 강현수 씨도 그렇고..
그에게는 그녀 말고도 중요한 것들이 있었으니까.하지만 강현수는 잃을 게 많은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임유진 때문에 극단적인 일도 서슴지 않았고 마치 임유진이 전부인 사람처럼 행동했다.곽동현이 떠난 뒤 임유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방금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겼다.강현수가 그녀를 찾겠다고 하마터면 소지혜를 죽일 뻔했다고?설마 그럴 리가.강현수가 전에 그녀에게 신경 썼던 건 그녀가 어렸을 때 소녀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배여진이 곁에 있는데 대체 왜...임유진은 어제 경찰서에서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어릴 때의 강현수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꼭 찾으러 가겠다고 얘기한 것처럼 그의 진지한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퇴근 시간이 되고 임유진이 빌딩에서 나오자 강현수가 바로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같이 식사하는 거 어때요? 할 얘기 있잖아요, 우리.”임유진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를 보고 있으니 문득 아까 곽동현이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이 남자가 정말 어제 하마터면 살인할 뻔했다는 건가?솔직히 당시 그의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그는 언제나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으니까.“아니면 이곳에서 얘기할 거예요?”강현수가 다시 물었다.임유진은 그제야 꽤 많은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강현수는 그의 사회적 지위나 이런 게 아니더라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남자였다.그리고 지금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는 로펌 직원들도 있었다.아마 내일이면 사무실 안에서 강현수와 그녀에 관한 가십거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자리를 옮기죠.”이대로 사람들 구경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그녀는 원래 얘기나 하게 카페 같은 곳을 가려고 했지만 강현수가 배고프다며 기어이 식사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임유진은 결국 그를 데리고 월세방 근처 백반집으로
가게 안에는 그들을 제외하고도 식사하러 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여성들의 시선이 강현수에게 향하는 순간 임유진은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온 걸 후회했다.룸이 있는 음식점으로 가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음식을 시킨 후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제 나 찾으려고 고생했다면서요. 고마워요.”“크게 도움이 된 건 없었죠.”“뭐가 됐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죠...”임유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어제 현수 씨가 한 고백에 대한 대답 지금 할게요. 나는 현수 씨 안 좋아해요. 그러니까 괜한 곳에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강현수는 그 말에 미간을 꿈틀거렸다.생각해보면 그를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거절한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사람을 착각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 확실히 감정을 깨달았을 때도 그렇고 임유진은 언제나 거절하지만 했다.“강지혁 때문이에요?”강현수는 전혀 타격 없는듯한 얼굴로 물었다.“아니요.”임유진은 고개를 저었다.강지혁이 어제 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는 강현수를 거절했을 것이다.그녀에게는 아직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만한 여유도, 시간도, 마음도 없었으니까.“그러면 혹시 나한테 여자친구가 많았던 게 신경 쓰여요?”“확실히 현수 씨는 여자친구가 많았었죠. 그리고 하나같이 예쁘고 끼도 많고 능력도 있었고요. 그런데 왜 하필 나예요?”임유라만 해도 그랬다. 그녀도 얼굴이 예뻤기에 그의 여자친구 자리를 꿰차고 그의 서포트를 받으며 꾸준하게 배역을 따낼 수 있었다.강현수는 자조하듯 웃었다.“유진 씨도 알 텐데요. 내가 그 여자들을 곁에 둔 건 어릴 때 그 아이를 그리워해 그 아이와 비슷한 외모의 여자를 둔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요.”그는 말을 하면서 줄곧 임유진과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유진 씨가 그때 그랬죠? 누군가를 정말 그리워한다면 아무리 비슷한 사람을 옆에 둬도 소용없다고요. 그 말이 맞았어요. 실제로 그럴수록 그리움만 더 켜졌으니까요.”임유진은 그와 시선을 마주한 순
강현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손을 빼내려고 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 손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끌어당겼다.“느껴져? 평소보다 더 빨리 뛰는 거?”그의 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어제 CCTV를 보다가 그 남자가 널 뒤쫓아 가고 이윽고 네가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여기가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알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호흡이 가빠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고 손이 떨려 물컵 하나 제대로 쥐지 못했어.”강현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그는 마치 어린애가 속상함을 털어놓듯, 사라진 그녀를 질책하듯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뱉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이래도 너를 향한 내 감정이 착각 같아 보여?”강현수는 그녀의 시선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는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그녀는 강현수가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그의 심장에 닿은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현수 씨...”그녀는 입을 열어 뭐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진아.”강현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다른 건 다 의심해도 상관없지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마.”초라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남자는 몸을 기울인 채 여자의 오른손을 꽉 잡고 그의 왼쪽 가슴에 대고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당혹감도 그리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었다.이 순간, 두 남녀는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주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듯했다.옆에서 식사 중이던 사람들은 모두 식사를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휴대폰를 들어 몰래 그 장면을 찍기도 했다.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가 어느새 음식점 밖에 주차된
임유진이 드레스를 먼저 찜한 이상 소민아에게 해당 드레스를 욕심낼 기회는 없었다.“임유진 씨... 우연이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소민아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소리 지르는 소리가 탈의실까지 전해오던데 그게 소민아 씨였군요?”임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분명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라고 혁이가 얘기하지 않았나요?”소민아는 그 말에 이를 더 꽉 깨물었다.혁이라는 애칭을 부르며 강지혁과의 관계를 다시금 상기시켜주려는 그녀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일전에 그녀가 관계를 좁히기 위해 강지혁을 ‘지혁 씨’라고 불렀을 때 강지혁은 바로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굳히며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꼭 그녀에게는 이름조차 허락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네, 사모님...”소민아가 어색하게 웃었다.“방금은 오해가 좀 있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오해라뇨! 저 몰상식한 여자가 물을 끼얹었잖아요!”소민아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직원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이에 소민아는 입술을 깨물며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아니 그게... 그러니까...”“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CCTV를 돌려보면 되겠네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CCTV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만약 제 친구가 억울한 상황이면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테니 그렇게 아세요.”소민아는 그 말에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오해였을 뿐인데 굳이 일을 키울 필요가 있을까요?”“일을 키운 건 내가 아닐 텐데요?”임유진은 타협 따위 없다는 얼굴로 답했다.한지영에게 쏘아붙였던 사장과 직원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우물쭈물하는 소민아의 모습에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소민아는 지금 행여라도 임유진을 건드릴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있었다.그때 세 명의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은 다름 아닌 고이준이었다.고이준은 안으로 들어온 후 곧바로 임유진의 앞으로
“여기는 그쪽 같은 사람이 함부로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에요.”소민아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한지영은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지금 함부로라고 했어요? 지금 그쪽이 누리고 있는 건 모두 딸이 강씨 가문의 양녀가 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전에는 학력도 나보다 낮고 커리어도 별 볼 일 없던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격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네?”소민아는 인플루언서였다고는 하나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지영보다 훨씬 낮았고 다른 조건을 비교해봐도 어디 하나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소민아는 한지영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아까 직원이 건넨 물컵을 한지영 쪽으로 확 기울였다.한지영은 소민아를 도발하며 줄곧 경계하고 있었기에 소민아가 손목을 꺾는 순간 바로 다시 반대로 꺾어 컵 안의 물이 전부 다 소민아에게로 쏟아지게 했다.“아악! 이게 뭐 하는 짓이야!”소민아의 날 선 외침에 가게 안 손님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두 사람 쪽으로 집중됐다.사장은 깜짝 놀라 다가오더니 소민아의 옷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그러자 소민아가 손가락을 길게 뻗으며 한지영을 가리켰다.“저 여자가 나한테 물을 끼얹었어요!”한지영은 이에 담담하게 대꾸했다.“입은 삐뚤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먼저 나한테 물을 끼얹으려고 했던 게 누군데.”사장은 두 사람을 한번씩 훑어보더니 곧바로 한지영을 향해 말했다.“손님, 소민아 씨에게 당장 사과해주세요. 뭐가 됐든 손님이 물을 끼얹었잖아요.”한지영은 우습다는 듯 사장을 바라보았다.“원인은 다 제쳐주고 결과만 보겠다는 건가요?”“소민아 씨는 고객님 때문에 옷을 버렸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잘잘못을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죠? 만약 사과 못 하시겠다면 저희는 강제로 손님을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물론 소민아 씨가 손님께 어떤 책임을 묻든 저희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거고요.”사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소민아에게 아부하던 직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직원과 달리 사장의 태도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이분은 저희한테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직원으로 바꿔주세요.”임유진이 차분하게 말했다.“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사장은 간단하게 사과를 전한 후 곧바로 해당 가게에서 제일 젊은 직원을 불렀다.임유진은 직원의 명패에 달린 이름과 조금 긴장한 듯 얼굴이 빨개져 있는 신입 직원을 보고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요구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얘기해주었다.신입 직원은 그녀의 요구에 따라 열심히 드레스를 검색했다.“이대로 끝이라고? 아까 너도 봤잖아. 서비스업 종사자로서의 소양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거.”“사장을 불렀는데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는데 거기서 뭐라고 더 하겠어. 입만 아프지. 걱정하지 마. 이따 반드시 후회할 거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다시 얌전히 드레스를 구경했다.그때 신입 직원이 다가와 임유진에게 드레스 몇 벌을 소개해 주었다. 대여섯 벌 되는 드레스 중에 한정판인 드레스가 한 벌 있었는데 신입인 그녀로서는 임유진에게 바로 시착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만약 임유진이 만약 마음에 든다고 하면 사장에게 권한을 신청해야만 했다.임유진은 직원이 한정판이라고 소개한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가 군데군데 박혀있는 해당 블랙 드레스는 신비로운 느낌을 주며 은은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5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비치는 만큼 드레스도 예쁜 것이어야 했기에 임유진은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와! 유진아, 이거 아까 네가 골랐던 드레스보다 더 예쁜데?”한지영이 감탄하며 말했다.“이거로 할게요. 시착 가능하죠?”임유진이 묻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블랙 드레스를 들고 오며 임유진을 탈의실로 안내했다.그리고 한지영은 임유진이 시착을 마칠 동안 소파에 앉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아까 그들에게 불친절했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향해 살갑게 웃어 보이는 것
“뭐야, 티 났어?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한지영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너랑 친구 한 세월이 얼만데 내가 그것도 눈치 못 채겠어?”며칠 전에 한지영의 전화를 받았을 때 임유진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지영이 너무나도 하이 텐션이었기 때문이다.한지영은 아예 대놓고 고민 있는 얼굴을 할 때도 있지만 이렇듯 과한 텐션으로 자기감정을 감출 때도 있었다.“그래서 무슨 일인 건데?”임유진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었다.한지영은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한숨을 내쉬며 곧바로 그녀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백연신을 만났어.”“혹시 찾아간 거야?”임유진도 얼마 전 백연신이 이곳으로 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아니. 백연신이 내 앞에 나타났어. 단순히 우연인 건지 아니면 일부러 찾아온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때는 취하기도 했고 또 머리가 엉망이라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너 설마...”“걱정하지 마. 다시 이어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 뛰어들지는 않을 테니까.”한지영은 애써 미소를 짓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이틀 뒤에 강지혁이랑 파티에 참석하게 됐다며. 너 아직 드레스 못 고른 거 아니야? 마침 근처에 유명한 드레스 샵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드레스 샵으로 들어갔다.유명한 샵이라 그런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드레스들이 하나같이 비쌌다.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5년 만에 돌아와 처음으로 참석하는 파티인 만큼 저렴한 드레스를 입을 수는 없었기에 임유진은 그냥 이곳에서 고르려고 했다.임유진과 한지영은 가게 안을 둘러보며 드레스를 골랐다. 두 사람 모두 오늘은 캐주얼한 차림으로 입었던 터라 임유진이 실버 드레스를 골랐을 때 따라다니던 직원이 곧바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죄송하지만 해당 드레스는 전시용으로만 사용되는 드레스라 시착이 불가능하세요.”임유진은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그때 다른 고객을 상대하고 있던 직원 한 명이 아무 말도 없이 다가와
백연신의 차량이 천천히 단지 앞에 미끄러졌다.한지영은 집 앞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벨트를 풀고 고맙다고 한 다음 차 문에 손을 올렸다.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때 백연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남자와는 사귀기라도 할 생각이야?”한지영은 그 말에 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3초 정도 지난 후에야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챘다.“우진 씨 괜찮은 사람이에요. 연봉도 높고 직장도 안정적이고 나랑 대화도 잘 통하고요. 그리고 얼굴도 준수하죠. 만약 우진 씨만 괜찮다면 나는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한지영이 말했다.“고작 그런 조건 때문에 사귄다고? 그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지?”백연신이 한지영을 노려보며 말했다.한지영은 순간 그의 태도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마음에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우진 씨 정도면 1등 신랑감이에요.”“한지영!”백연신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고 이제는 분노까지 서렸다.한지영은 그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대체 뭐에 화를 내는 거지? 다른 남자를 만난 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자기는 여자친구도 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거지?“백연신 씨, 아까 레스토랑 앞에 나타난 거 정말 우연 맞아요? 혹시 나 보러 일부러 온 거예요? 날 왜 찾아온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연신 씨랑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연신 씨와 고은채 씨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방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한지영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난 우리가 헤어졌어도 연신 씨가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요.”백연신은 그녀가 마음을 다해 사랑한 유일한 남자였다. 사랑이 식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해서 헤어진 것이기에 헤어졌어도 그에게는 이런 식의 축복을 얼마든지 빌어줄 수 있었다.한지영은 백연신과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려는 듯 먼저 악수를 청했다.“잘 가요.”하지만 백연신은 그녀의 손을 잡지
연우진은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레스토랑 앞까지 왔다가 한지영의 옆에 서 있는 백연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마침 얼마 전 회사에서 백선 그룹과 계약을 하나 맺었던 터라 그는 보고를 통해 백선 그룹의 회장 얼굴을 보았었다.한지영은 연우진의 차를 발견하고는 백연신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나 이만 가볼 테니까... 끅, 연신 씨도 이만 가봐요. 그럼...”그녀는 말을 마친 후 곧바로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그런데 한지영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백연신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확 잡아끌며 연우진의 차에 멀어졌다. 그러고는 운전석에 있는 연우진을 향해 말했다.“한지영은 내가 알아서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쪽은 이만 가봐요.”이에 연우진이 차창을 내리며 뭐라 하려는데 백연신은 그의 대답 따위 들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근처에 주차된 자기 차로 걸어갔다.“백연신 씨, 이거... 놔요...!”한지영이 힘없이 끌려가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녀의 외침에 연우진은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남자가 정말 백선 그룹의 회장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그런데 백연신 회장이 왜 여기 있는 거지?아까 그를 대하는 말하는 말투 하며 표정 하며 꼭 그를 질투하고 있는 것 같았다.질투라고? 그 백연신이?그때 연우진의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혹시 한지영 씨가 아까 얘기했던 전 남자친구가 백연신 씨인 건가...?”만약 정말 그러하다면 백연신은 매스컴이 보도한 것처럼 고씨 가문의 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전 여자친구인 한지영을 두고 있다는 말이 된다.백연신은 한지영을 차 옆까지 끌고 와서야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냉랭한 얼굴로 그녀가 중심을 채 잡기도 전에 바로 조수석에 태워버렸다.한지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그가 움직이는 대로 이끌려가다 차량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고서야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보았다.차량은 한지영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벨트 매.”백연신이 말했다.한지영은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라 그런지 그의
“네.”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진을 보냈다.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근처 쓰레기통 앞으로 가 음식물을 게워냈다.그렇게 한참을 토하던 그녀는 오늘 먹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티슈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때 웬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고마워요.”한지영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것이 손수건인지 티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입가를 쓱 닦았다.야무지게 다 닦고서야 그녀는 손에 든 것이 티슈가 아닌 손수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 이거는 내가 내일 세탁해서 다시 줄게요.”한지영은 말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연우진이 건넨 손수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익숙한, 5년간 틈틈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슈트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린 채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원래부터 예뻤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세월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한지영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끅...”술 냄새를 가득 담은 딸꾹질과 함께 조용했던 침묵이 깨졌다.“오랜... 만이에요.”한지영의 입에서 먼저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셨던 터라 말이 느려지고 또 버벅거렸다.“너 취했어.”백연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술을 좀 마셨어요.”한지영은 눈앞의 남자를 두 눈에 똑바로 담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아까 그 남자는... 남자친구야?”백연신이 물었다.“남자친구?”한지영은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술에 취해있어 그런지 그 웃음이 어쩐지 바보 같아 보였다.“아... 우진 씨는 오늘 소개팅한 남자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 만남인데도 대화도 잘 통하고...”한지영은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그간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제껏 설렌다는 느낌이 들었던 여성분이 없었어요.”설레는 느낌이라는 걸 누군가는 부질없는 감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지영은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이제껏 많은 아이돌과 배우들을 좋아해 왔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설레었던 사람은 백연신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아무리 소개팅을 해봐도 같이 있으면 가슴이 뛴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없었다.“설렌다는 느낌... 중요하죠.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던 상대를 놓치고 다시 찾으려고 하면 더 힘들고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이 조금 흠칫했다.“지영 씨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봐요?”“네, 딱 한 번 있었어요.”한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우진은 분명히 소개팅 상대였지만 그녀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묘하게 친구 같이 느껴졌다.“어떤 사람이었어요?”연우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그 사람은 일단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죠.”백연신 얘기에 한지영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이미 헤어졌음에도 백연신과 함께 했던 나날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제일 소중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연우진이 생각보다 편한 말 상대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백연신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지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말이 많았다.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고 연우진은 그런 그녀의 얘기를 그저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지영이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자 연우진은 그제야 술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이제 그만 마셔요. 이러다 취하겠어요.”“취하는 게 뭐가 나빠요?”한지영이 웅얼거렸다.“지영 씨랑 나 오늘 첫 만남 아닌가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막 보여줘도 돼요?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연우진의 말에 한지영이 피식 웃었다.“정말 그럴 생각
한지영은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개팅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백연신이 아니라 소개팅 상대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올지도 모른다.저녁.한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창가 쪽으로 향하니 소개팅 상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연우진이었고 현재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한지영은 남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프로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모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다.연우진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에 앉아있는 자세까지 바른 것이 상당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35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한지영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한지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네, 안녕하세요.”한지영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첫 만남에 할법한 얘기를 서로 두어 마디 주고받은 후 곧바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사실 한지영은 그저 아무런 고깃집이나 들어가 대충 식사를 하고 만남을 끝내려고 했는데 연우진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소개팅하는 여자들과는 항상 레스토랑을 가는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으로 왔다.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보니 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주문하세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지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들을 주문했다.이에 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다른 음식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실례가 안 된다면 지영 씨가 소개팅에 나온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혹시 나이 압박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싶은 건가요?”음식을 먹던 중에 연우진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