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 그러세요!”강현수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차 변호사는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두 사람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말했다.“여기서 얘기하도록 해요, 유진 씨.”임유진은 이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문이 닫힌 후 회의실 안에는 강현수와 그녀 둘만 남았다.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회의실 밖.정한나와 주변 동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임유진과 유승호의 밀회에서 갑자기 세레나가 등장해 본처의 바람현장 목격 장면이 연출되더니 후반으로 가서는 사실 임유진은 유승호가 아닌 강현수와 뭔가 있었다는 결말로 끝이 났다.강현수가 등장했을 때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물론 정한나만 제외하고 말이다.전에 그녀가 임유진을 괴롭혔을 때도 강현수는 오늘처럼 임유진을 지켜주었다.요즘은 계속 배여진이라는 여자와 스캔들이 많이 뜨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임유진에게는 흥미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현수에게는 항상 여자가 많았고 그 여자들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으니까.하지만 오늘 또 한 번 타이밍 좋게 나타나 또다시 임유진을 지켜줄 줄이야...대체 임유진이 뭐길래 강현수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정한나는 강현수를 떠올리다 문득 최근 부교수가 된 자신의 남자친구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임유진을 조롱하고 모욕하던 직원들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치 짠 듯이 입을 다물고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회의실 내부.적막을 깨고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하지만 저와 강현수 씨 둘이서 나눌 만한 얘기는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왜 보자고 하신 거죠?”만약 아까 그 상황에서 강현수가 1초라도 더 늦었더라면 임유진은 오늘 몸이 성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굳이 따로 얘기를 나누려는 강현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강지혁이랑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강현수가 물었다.그날 파티장에서 임유진은 강지혁과 재결합
“더 할 얘기 없으시면 이만 나가볼게요.”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강현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꼭 그렇게 나한테 선을 그어야겠어?!”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감정적으로 변했다.강현수는 지금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그저 가만히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오래전 앳된 얼굴의 강현수는 풀숲에서 그를 업고 내려와 잔뜩 지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이곳을 벗어나면 내가 예쁜 치마를 엄청 많이 사줄게. 그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줄게! 오직 너만을 지켜줄게!”그때의 임유진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애란 원래 자기가 했던 말을 금방 잊어버리니까.하지만 그를 잊어버린 건 그녀였다. 임유진은 의도치 않는 고열로 그와 함께한 모든 추억을 전부 다 잊어버렸다.그 때문에 강현수가 그 뒤로 줄곧 그녀를 계속 찾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십몇 년의 세월 동안 그의 그리움은 어느새 집념이 되었고 그건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었다.그리고 그 집념은 현재 배여진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그녀가 사랑하는 건 그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모든 걸 다 말해버리면 강현수의 집념은 오롯이 그녀에게로 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 눈빛이 마치 어렸을 때의 그 소녀가 바라보는 듯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의 두 눈은 그의 꿈에 자주 등장했었다. 어릴 때 그 소녀가 크면 분명히 이런 눈일 거라고 수천 번은 더 상상했으니까.강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
임유진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고 심지어는 전에 산속에서 우연히 만나 그녀를 업고 산에서 내려갔던 장면을 자주 꿈으로 꿨다.그리고 매번 꿈속에서 임유진을 업을 때마다 그는 마치 그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듯했다.“정말 더 이상 강지혁 사랑 안 할거예요?”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어딘가 모를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옅게 웃었다.“내가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게 당신들한테는 그렇게 중요해요?”강지혁은 강현수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강현수는 이제 더는 강지혁을 좋아하지 않는지 묻는다.두 남자는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묻는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임유진이 원하는 건 그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뿐이다.임유진의 미소와 목소리는 무수히 많은 비수가 되어 강현수의 심장을 찔렀다....임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오늘은 너무나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막 단지 앞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씨 저택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임유진의 앞으로 걸어왔다.“유진 씨, 대표님께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차량을 바라보았다.최근 강지혁은 보통 기사를 보내거나 아예 집 안에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오늘은 조금 의외였다. 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기사를 따라 차량 옆으로 다가갔다.기사가 그녀를 위해 뒷좌석을 문을 열어주자 바로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임유진이 차에 올라탄 후 차량은 천천히 단지를 벗어났다.“어디 가는 거야.”“오늘 갑자기 누나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어졌어. 월세방은 너무 작아서 불편하니까 우리 집으로 가.”“내가 한 것보다는 집에 있는 셰프님 요리가 더 맛있을 텐데.”“난 누나가 해준 게 제일 맛있어.”강지혁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전에 좁은 원룸에 있었을 때 임유진은 그에게 자주 요리를 해주었다.요리라고 해도 강지혁이 평소 먹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네 일이잖아.”강지혁은 아주 당연하게 대답했다.“찾아온 건 맞지만 딱히 별말은 안 했어.”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모든 꿰고 있는 듯했다.여전히 강지혁의 감시 아래 있는 건가?“그래?”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갔다.“솔직히 궁금해. 왜 강현수한테 네가 그때 그 여자아이라고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물었다.“대답해줘. 왜 말 안 했어?”임유진은 갑자기 코가 시큰거렸다.왜 말 안 했냐니.어떻게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기억을 되찾은 뒤에도 강현수에게 얘기하지 않은 건 강지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배여진이 그녀의 행세를 하며 강현수를 속여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혁이 그 일로 불안해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강현수와의 모든 걸 끊기도 마음먹은 것이다.임유진은 그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흥미를 잃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장기 말 같은 거였다.“왜 내가 얘기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해?”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그걸 말했으면 아까 너 혼자 오지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이 진실을 말했다면 강현수는 절대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말할 필요를 못 느낀 것뿐이야.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고.”“그 사촌 언니라는 여자가 네 행세를 하며 그딴 태도를 보이는 데 정말 괜찮아? 만약 네가 원한다면 더 이상 사칭하지 못하게 내가 해결해 줄게. 강현수가 그 여자를 감싸고 돈다고 해도 말이야.”“필요 없어.”임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족 간의 정, 뭐 그런 거야?”“그런 거 아니야.”임유진은 배여진에게 가족 간의 정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배여진도 결국 외할머니 손녀이고 어릴 때 할
강지혁은 이 순간 임유진에게 요리를 부탁한 것을 후회했다.“계속 그러고 있어. 찌개는 내가 끓일게.”“네가?”임유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왜, 불안해?”강지혁은 냄비 앞으로 가더니 일단 내용물을 확인하고 물을 한번 넣더니 조미료도 한번 넣고 적당히 졸인 후 맛을 한번 보고는 만족한 듯 불을 껐다.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우아하고 자연스러워 임유진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찌개를 다시 끓일 때 이따금 그녀 쪽을 바라보며 제대로 흐르는 물에 손을 두고 있는지 체크했다.임유진은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손을 뺄 수 있었다.아직 조금 붉은 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아직도 빨개.”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틀 정도 지나면 괜찮을 거야.”임유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강지혁은 그녀의 데인 손가락을 입에 넣어 혀로 부드럽게 핥았다.그 행동에 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그녀의 손가락을 핥는 것을 그만두고 서서히 입술로 그녀의 손가락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의 시선은 줄곧 임유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임유진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심장 박동도 점점 더 거세졌다.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계속 이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녀는...임유진은 있는 힘껏 손을 빼고서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이제 정말 괜찮아!”강지혁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보다 더 어둡게 빛나는 그의 눈 때문에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채기 힘들었다.“먹자 이제.”도우미는 임유진이 만든 요리들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밥 먹는 동안 두 사람 중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온통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다.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현관을 나
방금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갈 뻔했다.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서 임유진과 헤어졌지만, 그녀의 행동은 여전히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임유진은 아까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도 아닌 그저 단순히 그와 눈을 맞춘 것뿐이다. 그럼에도 강지혁은 그 시선 한 번에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말해줘.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하는 거 그만할 수 있는지... 말해줘, 유진아...”고요한 방안에서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지혁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임유진이라는 여자 앞에서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침대에 홀로 누워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또 한 번 되새기기만 했다. 그의 세상이 온통 그녀로만 가득 차 있는 것처럼....다음날, 임유진이 로펌으로 출근해보니 직원들의 태도와 시선이 전과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몇 명은 임유진 곁으로 와 대놓고 강현수와의 관계를 묻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면 임유진은 그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그 대답에 호기심 가득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흥이 깨진 얼굴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정한나는 그런 임유진을 보며 질투심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사람들 보는 앞에서 임유진을 개망신 주고 로펌에서 쫓아내 버리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이 전부 다 어그러졌다.이제는 임유진을 내보내기는커녕 동료 직원들의 반응을 보면 임유진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 어제 그녀와 함께 임유진을 비난했던 몇 명은 임유진이 지나갈 때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정한나는 그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3일 뒤 열릴 재판에 필요한 자료들 정리해주세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에게 재판에 필요한 절차들과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임유진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었다.“네, 알겠습니다. 차 변호사님, 이 사건 정말 피고인
임유진은 탁유미 엄마가 장 보러 갔다는 말에 조금 안심했다. 어차피 집 근처에서 장을 볼 테니 말이다.그녀는 윤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해 상황을 대충 파악한 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이야, 이모랑 전화 끊고 나서 일단 엄마 셔츠 단추를 풀어주고 엄마 발아래에 베개를 하나 놓아줄래? 이모가 지금 바로 구급차에 연락할 거야. 이따가 할머니 돌아오면 내가 구급차 이미 불렀다고 얘기해 줘. 할 수 있겠어?”“네, 할 수 있어요.”윤이의 씩씩한 대답에 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탁유미의 상태와 현주소를 알려주었다.15분 정도 흘렀을 무렵, 탁유미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구급차가 도착해 구급대원들이 간단한 검사를 해준 결과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병원에 이송할 거라는 내용이었다.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 병원인지 알아낸 후 전화를 끊었다.퇴근 시간이 되고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가 탁유미의 병실에 도착했다.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고작 일주일 얼굴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전보다 훨씬 야위어있었다.탁유미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했고 입술도 핏기 하나 없었다.“오늘 고마워요. 유진 씨가 구급차 불러줬다면서요?”“감사 인사는 됐어요. 그보다 어쩌다 쓰러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은 뭐래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영양실조에 수면 부족이래요.”탁유미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대신 답변했다.임유진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요즘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이 있던가?“요즘 입맛이 별로 없어서 계속 적게 먹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고요.”탁유미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이경빈 때문인가요?”임유진의 질문에 탁유미는 간이침대에 누워 자는 윤이에게 시선을 주었다.윤이는 아까 탁유미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을 잤다.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아이의 눈을 빨갛게 부어있었다.“네, 맞아요.”임유진에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얼마 전 이경빈이 S 시를 떠나
“언니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자신이 하게 되면 탁유미는 경제적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다만...“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말은 못 해줘요. 솔직히 여러모로 언니한테 불리한 싸움이거든요.”“알아요.”탁유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리한 요소들은 그녀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고 짊어져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에 임유진의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다.“고마워요, 유진 씨.”“참, 언니, 앞으로 계속 S 시에 있을 거죠? 윤이 유치원은 정했어요?”임유진은 윤이가 유치원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아니요.”탁유미의 표정이 또다시 시무룩해졌다.요 며칠 일반 유치원에 연락을 해봤지만 윤이가 청각장애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하나같이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윤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봐도 결과는 같았다.임유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제가 한번 알아볼게요.”“혹시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탁유미가 다급하게 물었다.“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임유진의 시선이 푹 자고 있는 윤이에게로 향했다.지금은 그저 유치원이지만 앞으로 윤이가 크면 클수록 훨씬 더 잔인하고 잔혹한 현실이 닥쳐 올 것이다.임유진은 이 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희망 따위 져버린 그녀에게 예쁜 웃음을 지어줬던 아이가 바로 윤이니까.게다가 앞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으니 윤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경빈 씨? 경빈 씨!”이경빈은 저만의 상념에 빠져있다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무슨 생각 해요?”공수진이 물었다.S 시에서 돌아온 뒤부터 이경빈은 자주 이렇게 멍을 때리고는 했다.그렇게 파티장에서 뛰쳐나가고 나서 이경빈은 그녀의 부모를 찾아가 직접 사과까지 하고 다시 적당한 시기에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무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