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할 얘기 없으시면 이만 나가볼게요.”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강현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꼭 그렇게 나한테 선을 그어야겠어?!”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감정적으로 변했다.강현수는 지금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그저 가만히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오래전 앳된 얼굴의 강현수는 풀숲에서 그를 업고 내려와 잔뜩 지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이곳을 벗어나면 내가 예쁜 치마를 엄청 많이 사줄게. 그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줄게! 오직 너만을 지켜줄게!”그때의 임유진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애란 원래 자기가 했던 말을 금방 잊어버리니까.하지만 그를 잊어버린 건 그녀였다. 임유진은 의도치 않는 고열로 그와 함께한 모든 추억을 전부 다 잊어버렸다.그 때문에 강현수가 그 뒤로 줄곧 그녀를 계속 찾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십몇 년의 세월 동안 그의 그리움은 어느새 집념이 되었고 그건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었다.그리고 그 집념은 현재 배여진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그녀가 사랑하는 건 그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모든 걸 다 말해버리면 강현수의 집념은 오롯이 그녀에게로 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 눈빛이 마치 어렸을 때의 그 소녀가 바라보는 듯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의 두 눈은 그의 꿈에 자주 등장했었다. 어릴 때 그 소녀가 크면 분명히 이런 눈일 거라고 수천 번은 더 상상했으니까.강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
임유진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고 심지어는 전에 산속에서 우연히 만나 그녀를 업고 산에서 내려갔던 장면을 자주 꿈으로 꿨다.그리고 매번 꿈속에서 임유진을 업을 때마다 그는 마치 그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듯했다.“정말 더 이상 강지혁 사랑 안 할거예요?”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어딘가 모를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옅게 웃었다.“내가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게 당신들한테는 그렇게 중요해요?”강지혁은 강현수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강현수는 이제 더는 강지혁을 좋아하지 않는지 묻는다.두 남자는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묻는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임유진이 원하는 건 그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뿐이다.임유진의 미소와 목소리는 무수히 많은 비수가 되어 강현수의 심장을 찔렀다....임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오늘은 너무나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막 단지 앞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씨 저택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임유진의 앞으로 걸어왔다.“유진 씨, 대표님께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차량을 바라보았다.최근 강지혁은 보통 기사를 보내거나 아예 집 안에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오늘은 조금 의외였다. 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기사를 따라 차량 옆으로 다가갔다.기사가 그녀를 위해 뒷좌석을 문을 열어주자 바로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임유진이 차에 올라탄 후 차량은 천천히 단지를 벗어났다.“어디 가는 거야.”“오늘 갑자기 누나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어졌어. 월세방은 너무 작아서 불편하니까 우리 집으로 가.”“내가 한 것보다는 집에 있는 셰프님 요리가 더 맛있을 텐데.”“난 누나가 해준 게 제일 맛있어.”강지혁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전에 좁은 원룸에 있었을 때 임유진은 그에게 자주 요리를 해주었다.요리라고 해도 강지혁이 평소 먹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네 일이잖아.”강지혁은 아주 당연하게 대답했다.“찾아온 건 맞지만 딱히 별말은 안 했어.”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모든 꿰고 있는 듯했다.여전히 강지혁의 감시 아래 있는 건가?“그래?”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갔다.“솔직히 궁금해. 왜 강현수한테 네가 그때 그 여자아이라고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물었다.“대답해줘. 왜 말 안 했어?”임유진은 갑자기 코가 시큰거렸다.왜 말 안 했냐니.어떻게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기억을 되찾은 뒤에도 강현수에게 얘기하지 않은 건 강지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배여진이 그녀의 행세를 하며 강현수를 속여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혁이 그 일로 불안해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강현수와의 모든 걸 끊기도 마음먹은 것이다.임유진은 그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흥미를 잃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장기 말 같은 거였다.“왜 내가 얘기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해?”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그걸 말했으면 아까 너 혼자 오지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이 진실을 말했다면 강현수는 절대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말할 필요를 못 느낀 것뿐이야.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고.”“그 사촌 언니라는 여자가 네 행세를 하며 그딴 태도를 보이는 데 정말 괜찮아? 만약 네가 원한다면 더 이상 사칭하지 못하게 내가 해결해 줄게. 강현수가 그 여자를 감싸고 돈다고 해도 말이야.”“필요 없어.”임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족 간의 정, 뭐 그런 거야?”“그런 거 아니야.”임유진은 배여진에게 가족 간의 정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배여진도 결국 외할머니 손녀이고 어릴 때 할
강지혁은 이 순간 임유진에게 요리를 부탁한 것을 후회했다.“계속 그러고 있어. 찌개는 내가 끓일게.”“네가?”임유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왜, 불안해?”강지혁은 냄비 앞으로 가더니 일단 내용물을 확인하고 물을 한번 넣더니 조미료도 한번 넣고 적당히 졸인 후 맛을 한번 보고는 만족한 듯 불을 껐다.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우아하고 자연스러워 임유진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찌개를 다시 끓일 때 이따금 그녀 쪽을 바라보며 제대로 흐르는 물에 손을 두고 있는지 체크했다.임유진은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손을 뺄 수 있었다.아직 조금 붉은 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아직도 빨개.”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틀 정도 지나면 괜찮을 거야.”임유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강지혁은 그녀의 데인 손가락을 입에 넣어 혀로 부드럽게 핥았다.그 행동에 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그녀의 손가락을 핥는 것을 그만두고 서서히 입술로 그녀의 손가락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의 시선은 줄곧 임유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임유진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심장 박동도 점점 더 거세졌다.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계속 이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녀는...임유진은 있는 힘껏 손을 빼고서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이제 정말 괜찮아!”강지혁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보다 더 어둡게 빛나는 그의 눈 때문에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채기 힘들었다.“먹자 이제.”도우미는 임유진이 만든 요리들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밥 먹는 동안 두 사람 중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온통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다.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현관을 나
방금 그는 하마터면 그대로 그녀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갈 뻔했다.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서 임유진과 헤어졌지만, 그녀의 행동은 여전히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임유진은 아까 작정하고 유혹하는 것도 아닌 그저 단순히 그와 눈을 맞춘 것뿐이다. 그럼에도 강지혁은 그 시선 한 번에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말해줘. 어떻게 해야 널 사랑하는 거 그만할 수 있는지... 말해줘, 유진아...”고요한 방안에서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지혁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임유진이라는 여자 앞에서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침대에 홀로 누워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또 한 번 되새기기만 했다. 그의 세상이 온통 그녀로만 가득 차 있는 것처럼....다음날, 임유진이 로펌으로 출근해보니 직원들의 태도와 시선이 전과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몇 명은 임유진 곁으로 와 대놓고 강현수와의 관계를 묻기도 했다. 물론 그럴 때면 임유진은 그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그 대답에 호기심 가득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흥이 깨진 얼굴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정한나는 그런 임유진을 보며 질투심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사람들 보는 앞에서 임유진을 개망신 주고 로펌에서 쫓아내 버리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이 전부 다 어그러졌다.이제는 임유진을 내보내기는커녕 동료 직원들의 반응을 보면 임유진과 어떻게든 엮이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 어제 그녀와 함께 임유진을 비난했던 몇 명은 임유진이 지나갈 때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는 했다.정한나는 그 모습이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3일 뒤 열릴 재판에 필요한 자료들 정리해주세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에게 재판에 필요한 절차들과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임유진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었다.“네, 알겠습니다. 차 변호사님, 이 사건 정말 피고인
임유진은 탁유미 엄마가 장 보러 갔다는 말에 조금 안심했다. 어차피 집 근처에서 장을 볼 테니 말이다.그녀는 윤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해 상황을 대충 파악한 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이야, 이모랑 전화 끊고 나서 일단 엄마 셔츠 단추를 풀어주고 엄마 발아래에 베개를 하나 놓아줄래? 이모가 지금 바로 구급차에 연락할 거야. 이따가 할머니 돌아오면 내가 구급차 이미 불렀다고 얘기해 줘. 할 수 있겠어?”“네, 할 수 있어요.”윤이의 씩씩한 대답에 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바로 119에 전화를 걸어 탁유미의 상태와 현주소를 알려주었다.15분 정도 흘렀을 무렵, 탁유미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구급차가 도착해 구급대원들이 간단한 검사를 해준 결과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 병원에 이송할 거라는 내용이었다.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 병원인지 알아낸 후 전화를 끊었다.퇴근 시간이 되고 그녀는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가 탁유미의 병실에 도착했다.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고작 일주일 얼굴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전보다 훨씬 야위어있었다.탁유미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했고 입술도 핏기 하나 없었다.“오늘 고마워요. 유진 씨가 구급차 불러줬다면서요?”“감사 인사는 됐어요. 그보다 어쩌다 쓰러진 거예요? 의사 선생님은 뭐래요?”임유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영양실조에 수면 부족이래요.”탁유미 엄마가 한숨을 내쉬며 대신 답변했다.임유진은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요즘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이 있던가?“요즘 입맛이 별로 없어서 계속 적게 먹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고요.”탁유미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이경빈 때문인가요?”임유진의 질문에 탁유미는 간이침대에 누워 자는 윤이에게 시선을 주었다.윤이는 아까 탁유미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안심하고 잠을 잤다.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아이의 눈을 빨갛게 부어있었다.“네, 맞아요.”임유진에게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얼마 전 이경빈이 S 시를 떠나
“언니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자신이 하게 되면 탁유미는 경제적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 다만...“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말은 못 해줘요. 솔직히 여러모로 언니한테 불리한 싸움이거든요.”“알아요.”탁유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불리한 요소들은 그녀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고 짊어져야 할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이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에 임유진의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다.“고마워요, 유진 씨.”“참, 언니, 앞으로 계속 S 시에 있을 거죠? 윤이 유치원은 정했어요?”임유진은 윤이가 유치원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지 알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아니요.”탁유미의 표정이 또다시 시무룩해졌다.요 며칠 일반 유치원에 연락을 해봤지만 윤이가 청각장애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하나같이 난감한 기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윤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봐도 결과는 같았다.임유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제가 한번 알아볼게요.”“혹시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탁유미가 다급하게 물었다.“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임유진의 시선이 푹 자고 있는 윤이에게로 향했다.지금은 그저 유치원이지만 앞으로 윤이가 크면 클수록 훨씬 더 잔인하고 잔혹한 현실이 닥쳐 올 것이다.임유진은 이 아이가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희망 따위 져버린 그녀에게 예쁜 웃음을 지어줬던 아이가 바로 윤이니까.게다가 앞으로 평생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으니 윤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 것도 나름 괜찮을 것 같았다....“경빈 씨? 경빈 씨!”이경빈은 저만의 상념에 빠져있다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무슨 생각 해요?”공수진이 물었다.S 시에서 돌아온 뒤부터 이경빈은 자주 이렇게 멍을 때리고는 했다.그렇게 파티장에서 뛰쳐나가고 나서 이경빈은 그녀의 부모를 찾아가 직접 사과까지 하고 다시 적당한 시기에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발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무
“미리 얘기하지만 아이 엄마는 탁유미야.”이경빈의 입에서 공수진이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튀어나왔다.아이라니! 탁유미와 이경빈 사이의 아이라니! 그것도 아들!그럼 그때 탁유미가 임신이고 뭐고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건가? 감옥에 들어가기 싫어서 했던 거짓말이 아니라?!공수진은 질투와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그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탁유미가 감방에 있을 때 아이를 진작 처리해 버릴 걸 그랬다며 속으로 무척이나 후회했다.공수진은 복잡한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탁유미 씨가 경빈 씨 아이를 낳았다는 거죠?”“미안해.”이경빈이 사과했다.“경빈 씨가 왜 미안해요. 나는... 나는 어차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니까. 경빈 씨 피를 이은 아이가 이렇게라도 생기니 차라리 잘 된 거죠.”공수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울음을 참는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럼 경빈 씨는 이제 탁유미 씨와 함께할 건가요...? 이해해요. 그게 경빈 씨 결정이라면 나는...”그녀는 목이 메는 듯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이경빈은 그 모습에 그녀를 자신의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내가 그 여자와 함께할 일은 없어. 너한테 아이에 대한 질문을 한 것도 네 의견이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야.”“정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정말 그 아이의 엄마가 되어도 될까요?”“안 될 거 뭐 있어. 너는 이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인데.”“탁유미 씨가 아이를 순순히 내어줄까요...?”공수진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이경빈은 그 질문에 그날 자신의 팔을 잡으며 애원하던 탁유미의 얼굴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공수진을 더 꽉 끌어안았다.머릿속으로는 그 여자 생각은 그만하라고 되뇌면서 말이다.‘내가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할 사람은 공수진이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건 공수진이어야 해!’“내어주고 말고 그 여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이의 양육권은 내가 꼭 가져올 거야.”공수진은 이경빈의 품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경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