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네, 알겠습니다.”도우미는 숙취해소제만 남겨두고 헐레벌떡 방을 나갔다.안방에는 또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한지영, 얼른 일어나.”“싫어요!”한지영은 술에 취했어도 이 세글자만은 또렷하게 뱉었다.“자, 착하지. 얼른 숙취해소제부터 마셔.”백연신이 마치 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말하는 걸 부하직원이 봤으면 아마 경악을 할 것이다.그는 한지영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 다정해 본 적이 없다.“나 어떡해요... 점점 더 연신 씨가 좋아지는 것 같아요...”술에 취해 내뱉는 소리가 분명했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백연신의 심장은 거세게 뛰어버리고 말았다.“그렇게 날 좋아하면서 그딴 건 왜 보러 간 거야? 게다가 다른 남자 옷까지 뺏고.”“그거야... 유진이 스트레스 풀어주려고 간 거죠, 헤헤... 물론 걔들이 잘생기긴 했지만...”한지영은 트림을 한번 시원하게 하더니 양손으로 백연신의 얼굴을 감쌌다.“그건 그냥 감상만 하는 거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연신 씨예요... 나는 연신 씨가 정말 정말 너무 좋아요...”그녀는 말과 함께 마치 느끼한 아저씨처럼 백연신의 볼 곳곳에 뽀뽀해댔다.백연신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밀어내기는커녕 뽀뽀 세례를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러왔지만, 그 상대가 한지영이라서 오히려 향기롭기도 했다.한지영은 좋아한다고 얘기할 때마다 그에게 입을 맞췄다.“한지영,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봐.”이렇게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한지영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더니 백연신의 마음이 두근거릴 만큼 환하게 웃었다.“나는 연신 씨를 사랑해요.”백연신은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아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그녀가 계속 이렇게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이번 생은 꼼짝없이 한지영이라는 여자에게 감겨버렸지만 이 지독한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다음 날 아침.한지영은 알람 소리에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어제 술을 너무 마신 탓에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크게 외쳤다.“유진이는요? 나 어제 유진이랑 같이 갔었는데?”그 말에 백연신은 간신히 눌렀던 화가 또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유진 씨랑 같이 있었던 건 기억이 나나 보지? 어제 나한테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바쁘다며, 그런데 그딴 곳을 가?”한지영은 잘못한 건 아는지 이불 속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유진이가 요즘 스트레스받는 것 같아 데리고 간 거예요. 그리고 나 일 한 건 맞거든요? 다 마치고 오후쯤에 유진이한테 갔죠.”“그래? 그럼 왜 그렇게 신이 나서 옷까지 뺏었을까? 평소 내 옷은 눈길도 안 주더니, 애먼 남자 옷은 그렇게 꼭 쥐고 안 놔?”화를 내는 건 분명했지만 그녀의 머리를 마사지해주는 그의 손은 여전히 부드러웠다.“그, 그건... 그것도 유진이 주려고 했죠!”한지영은 임유진 핑계를 대며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리고 어제 술김에 임유진이 원한다면 주겠다 하기도 했으니 딱히 거짓말한 것도 아니다.“그러고 보니 그 셔츠는 어디 있어요?”한지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버렸어.”백연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한지영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아쉬움 가득한 얼굴을 했다.“그걸 버리면 어떡해요. 그거 인터넷에 팔면 10만 원은 받을 수 있었다고요!”그렇다. 그녀는 지금 돈이 아까운 것뿐이다.“됐어, 그 돈 내가 줄게.”“그게 같아요? 돈도 내가 직접 벌어야 좋은 거라고요!”한지영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연신 씨 조금만 더 세게 해봐요. 응, 거기. 거기 좀 더 주물러봐요.”백연신은 미안해하며 납작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당당하게 명령까지 하는 그녀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그럼 어제 유진이 먼저 데려다주고 여기로 온 거예요? 유진이도 많이 취했죠?”“많이 취하긴 했는데 유진 씨 데려다준 건 내가 아니라 강지혁이야.”그 말에 한지영이 눈
“그럼 우리가 어젯밤, 같이 있었다는 것도... 세상에...”한지영은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가뜩이나 보수적인 집안인데 그런 집안의 딸이 남자를 먼저 덮치고 밤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나랑 같이 있는 게 창피해?”괴롭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며 백연신은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아 물었다.“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한지영은 서둘러 해명했다.“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보수적이라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함께 밤을 보냈다는 걸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까 봐 그래요.”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부모님께는 술 취한 너를 호텔 방에서 재워뒀다고 했어.”한지영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일단 옷부터 갈아입어. 해장국 끓이라고 해뒀으니까 그거 먹으면 속도 괜찮아 질 거야.”어젯밤 결국 그녀에게 숙취해소제는 먹이지 못했다.“알았어요.”백연신은 침대에서 내려가 그녀에게 새 옷을 건네주더니 자기도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한지영은 옷을 갈아입는 그의 행동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았다.고작 옷을 입는 것뿐인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아무리 취해도 기억을 잃는 게 아닌데... 한지영은 어젯밤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왜 그렇게 봐?”옷을 다 갈아입은 백연신이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물어보자 한지영은 아쉬운 듯 시선을 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백연신이 가져다준 옷을 입으려고 들어보니 그건 명품이었고 가격은 그녀의 1년 수입보다 높았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남자친구가 주는 것이니 그냥 당연하게 받기로 했다.한지영은 씻은 후 백연신과 함께 아래로 내려가 아침을 먹은 후 숙취해소제도 마셨다.그것 또한 마시기 싫다고 억지를 부리는 걸 백연신이 어르고 달래 힘겹게 다 마셨다.백연신은 한지영을 디자인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주고 그녀가 내릴 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다음은 없어. 다시는 그딴 곳 갈 생각하지 마. 알았어?”“알았어요.
[응, 괜찮아. 어제는 연신 씨네 집에서 잤어.]한지영은 술에 취해 백연신을 덮쳤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아까 아침밥 먹을 때 백연신이 진지하게 얘기를 꺼냈었다.“너 이제 초범 아니야. 이러고도 나 책임 안 지겠다고 하면 진짜 죽을 줄 알아.”원래 이런 말은 여자가 하는 게 맞지만 이 두 사람 관계에서만큼은 백연신이 말하는 게 더 잘 어울리기도 했다.“책임 질 거지?”백연신이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어... 그래야죠.”한지영은 뜨거운 그의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아까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한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달콤한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가슴 한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그녀는 임유진과 대화를 마친 후 일을 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임유진 역시 휴대폰을 집어넣고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사건을 훑어보던 손이 얼마 안가 멈추고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어젯밤 강지혁은 왜 그곳에 간 걸까? 게다가 그 장소는 또 어떻게 알고?그리고 누나 제안은 이미 거절했는데 왜 또 눈앞에 나타나는 걸까?헤어졌는데 분명히 헤어진 게 맞는데 이건 그녀가 상상했던 이별과는 매우 달랐다.깔끔하게 서로를 지우고 연락도 안 하며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지만,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아니야. 생각하지 마, 임유진!’임유진은 고개를 세게 흔들며 지금은 강지혁이 아닌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어느새 오후가 되고 차 변호사는 임유진을 사무실로 불러와 말했다.“유진 씨는 다시 곽동현 씨를 만나 그날 곽동현 씨가 얘기해줬던 의심스러운 부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사인까지 받아오세요. 증인이 직접 얘기했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경찰 쪽은 얘기해 본 결과 재수사는 아직 어렵지만 이 사건을 담당했던 분에게 의문점을 제기하니 개인적으로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이죠.”정말 희망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경찰 쪽에서 새로운 증거를 입수하게 되면 재수사도 분명히 가능
“좀 지저분하죠...?”곽동현은 민망한 듯 웃어 보였다.“창업이라는 게 다 이렇죠. 솔직히 동현 씨가 조금 부럽기도 해요.”임유진 역시 로펌에서 경험을 쌓다가 언젠가는 자신의 로펌을 차리는 게 꿈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변호사도 아니라 변호사 비서 일을 하고 있으니, 정말 세상일이란 생각대로 흘러가는 건 아닌 듯싶었다.“여기 동현 씨가 저번에 얘기해줬던 의문점을 문서로 적어봤어요. 읽어보고 문제없으면 거기에 사인하면 돼요.”임유진은 이곳으로 오기 전 이미 미리 그에게 얘기했던 터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곽동현은 서류를 받아들고 한번 쭉 훑어보더니 바로 사인했다.임유진도 다시 서류를 받아들고 옆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그러다 사인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자신을 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전에... 많이 힘들었죠.”감옥이라는 두 글자를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임유진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이미 지나간 일인데요, 뭐.”그녀는 정말 괜찮다는 듯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하지만 곽동현은 그 미소를 보며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가 이 얘기를 갑자기 꺼낸 건 방금 사인하는 임유진의 손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삐뚤빼뚤했기 때문이었다.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던 건지, 단지 이름을 적는 것인데도 그녀는 매우 느렸다.감옥에서 생긴 상처인 걸까?임유진에게는 이미 여러 번 거절당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녀를 걱정하게 된다.하여 임유진이 볼일을 마치고 몸을 일으켰을 때 곽동현은 결국 그녀를 붙잡고 말았다.“유진 씨... 이따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윤이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서요. 같이 고르러 가 줄 수 있어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듯 다시 물었다.“윤이한테 선물을 주겠다고요?”“네, 그때 잠깐 같이 있었던 것뿐이지만 꽤 정이 들었나 봐요.”게다가 영민해 보이는 아이가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는 동정심도 일었다.“그래요. 그럼 이따 같이 가요.”그녀도 마침 탁유미와 윤이가
윤이 또래 남자아이들은 이런 장난감 총을 좋아한다.얼마 안 가 윤이 때문에 온 집안이 다 버블로 차버렸고 이에 곽동현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저... 아무래도 윤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요 근처에서 놀다가 반 시간 후 다시 데리고 올게요.”“그럼 부탁해도 될까요?”탁유미가 웃으며 답했다.“그럼요. 저도 윤이랑 노는 게 좋아요.”윤이는 곽동현의 손을 잡고 신이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탁유미는 두 사람이 나간 뒤에야 임유진에게 물었다.“웬일로 저분과 같이 왔어요?”“사건 때문에 얘기 나누러 갔다가 동현 씨가 윤이 선물 고르는 걸 부탁해서 같이 오게 됐어요.”임유진은 옆에 놓인 캐리어를 보면서 물었다.“언제 떠나요?”“3일 뒤에요. 가구 같은 건 이삿짐센터에 맡기고 저랑 엄마 그리고 윤이는 KTX 타고 갈 거예요.”“그러면 그때 배웅하러 갈게요.”“괜찮아요. 주말도 아닌데 유진 씨는 출근해야죠.”탁유미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마음만 받을게요. G 시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유진 씨한테 연락할게요. 그리고 유진 씨가 배웅하러 오면 윤이가 안 가겠다고 할지도 몰라요.”임유진도 옅게 웃었다.“알겠어요. 그럼 조심해서 가요.”“네, 그럴게요.”탁유미는 G 시에 가면 이번에야말로 그토록 원하면 평화 같은 날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더 이상 이경빈과는 만나지 않기를 밤마다 빌고 또 빌었다....“경빈 씨, 이 목걸이 어때요?”공수진은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더 잘 보이도록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불빛까지 받아서 그런지 다이아몬드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괜찮네.”이경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마음에 들면 사.”“160억이나 하는데 괜찮아요...?”공수진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응, 괜찮아.”공수진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하지만 그녀는 사실 다이아몬드 목걸이보다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갖고 싶었다.며칠 후에 있을 파티에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알리기로 했지만 그는 아직
탁유미, 그 여자 생각만 하면 이경빈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별로야.”그는 인상까지 찌푸리며 말했다.“결혼인데 다른 거로 해. 보석이긴 해도 눈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어.”공수진은 순간 조금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다른 거로 하죠, 뭐. 경빈 씨는 어떤 디자인의 반지가 좋아요?”“반지는 며칠 후에 다시 보러 오는 거로 해. 파티에서 우리 결혼 날짜 발표하고 나서 골라도 안 늦어.”공수진의 눈에 일말의 실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곧바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때 가서 천천히 골라요.”두 사람은 다이아몬드 귀걸이까지 고른 뒤 가게를 나왔다.“먼저 가.”“경빈 씨는요?”공수진이 조금 놀라 물었다.“나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들어가. 이따 전화할게.”공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준비한 차에 앉으려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경빈 씨, 우리 결혼 날짜 말인데요, 정말 그날로 할거예요?”“왜? 무슨 문제 있어? 집안 어르신들이 받아온 날짜잖아. 좋은 날로 받아오셨겠지.”두 집안 어른들이 받아온 날짜인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그녀는 이경빈과 결혼할 것이며 이씨 집안 안주인이 될 것이다.공수진은 그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결혼식은 반년 뒤로 정해졌고 반년 후 그녀는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그리고 탁유미 그 여자는 이제 끼어들지 못한다!이경빈은 공수진이 떠나는 걸 확인한 후 도로를 따라 걷다가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성당이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도드리는 사람 한 명 없이 무척이나 조용했다.그는 성모 마리아가 아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을 바라보았다.전에 탁유미는 이 조각상 앞에서 몇 시간이나 서 있다가 결국에는 눈물까지 흘렸다.그때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그냥... 예수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갑자기 떠올라 버렸어... 만약 언젠가 내 자식이
아이가 생겼다는 탁유미의 말은 그저 감정을 이용해 자신을 붙잡으려는 마지막 발악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애초에 자신은 그녀에게 감정 따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이경빈은 마음속으로 이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녀가 피를 뚝뚝 흘리던 그 날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탁유미는 그날, 마치 그와의 인연을 모두 잘라내려는 듯했다.얼마나 어렵게 그녀를 다시 찾아냈는데 만약 이대로 또다시 못 보게 된다면...이런 가정을 할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아직 제대로 복수를 끝내지도 못했는데, 고작 몇 년 옥살이 한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이경빈은 결국 돌고 돌아 그 핑계로 자신을 설득하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야. 그 여자한테 사람 붙여. 그리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나한테 알리고.”이번에는 절대 그렇게 쉽게 사라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탁유미, 날 안 보는 게 네 소원이면, 나는 절대 그 소원이 이뤄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탁유미의 집에서 나온 후 곽동현은 임유진을 입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가는 길, 곽동현이 물었다.“윤이네 정말 이사 가기로 한 거예요?”“네.”“아쉽네요. 윤이랑은 조금 더 같이 놀고 싶었는데.”곽동현은 진심으로 윤이가 마음에 들었다.“사는 곳이 달라지는 것뿐이에요. 앞으로 쭉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그때 도로 반대편에서 차 한 대가 무섭게 돌진하더니 곽동현의 차가 목적인 듯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뭐야?!”곽동현은 재빨리 핸들을 꺾은 후 브레이크를 밟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그러고는 화가 났는지 안전벨트를 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유진 씨는 여기 있어요. 대체 또 어떤 부잣집 도련님이 이런 정신머리로 운전을 하는 건지.”그는 방금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차가 한정판 벤틀리에 가격이 어마어마한 차량이라는 걸 알고 있다.곽동현이 운전석에서 내리려는데 임유진이 그의 손을 잡고 제지했다.일부러라도 스킨십은 하지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
그날 밤, 임유진과 강지혁은 마치 5년 전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열렬하게 사랑을 나눴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그녀가 더 적극적이라는 것이었다.강지혁은 정사가 끝이 난 후 노곤해진 그녀를 안아 들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욕실로 가 그녀를 깨끗이 씻겼다.아마 그의 이런 챙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임유진뿐일 것이다.다 씻은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가운을 입힌 후 다시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로 걸어왔다.임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혁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강현수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야?”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꿈틀거리며 물었다.“우리 다음에는 자세 좀 바꾸는 거 어때? 물론 리드하는 것도 좋지만 생각보다 내가 체력이 없어서.”“...”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랐다. 아까 그를 아래에 깔고 멋대로 주도권을 쥐어간 그녀의 행동만 생각하면 지금도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어쩐지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그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는 게 없는 것 같았다. 강지혁은 임유진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너는 과거의 내가 선택했던 내 아내야. 예전의 내가 그렇게도 널 많이 사랑했다면 지금의 나도 널 사랑할 수 있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사랑할 거야?”“그래. 하지만 절대 날 배신해서는 안 돼. 5년 전처럼 내 곁을 떠나서도 안 되고. 알았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어루만졌다.강지혁은 그날 별채에 있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도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다. 절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기억을 잃은 강지혁도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무서운 걸까?“혁아, 내가 널 떠난 건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있어서였을 거야. 절대 원해서 널 떠난 건 아니었을 거야.”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어머니와 똑 닮았
내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키스는 왜 해?임유진은 그 생각에 울컥하며 키스를 끝내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았고 맹렬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그러다 임유진이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을 느낄 때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네가 못 믿는 건 아니고?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방금의 키스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내쉬는 숨은 무척이나 거칠었다.“반대로 물어볼게. 그럼 너는? 너는 날 얼만큼 사랑하는데?”임유진은 귓가에 울려 퍼진 그의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강지혁의 두 눈은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마치 두 사람을 감도는 공기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간신히 진정한 임유진의 호흡이 또다시 흔들리며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잠깐의 침묵 후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다시 떠진 그의 눈동자에는 싸늘함만이 감돌고 있었다.“그다지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서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다는 등의 말을 꺼내지 마. 그리고 네가 날 사랑한다는 말도.”강지혁은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키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이에 임유진은 만약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를 보낸다면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그녀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른 후 더 이상 그가 멀어지지 못하게 했다.“혁아, 날 똑바로 봐!”다급한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멈추더니 이내 조금 놀란 듯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내가 널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추측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지금도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게 궁금하다면 알려줄게.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임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러고는 강지혁이 했던 키스와 달리 은근하고 유혹적이며 또 절절한 키스를 퍼부었다.키
임유진은 말을 하며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몸을 돌린 순간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하고 강지혁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 그리고 눈앞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침대에 눕혀져 버렸다.임유진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겨를도 없이 강지혁의 몸이 그녀에게로 바짝 다가왔다.강지혁은 두 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둔 채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가져갔다.숨이 거칠고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것이 아주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아까는 그렇게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 도망가지? 네가 원하는 대로 얘기하고 있잖아.”“네가 흥분을 가라앉히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던 것뿐이야.”임유진이 버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이 누르는 바람에 좀처럼 상체를 일으키지 못했다.“혁아, 일단 좀 비켜봐.”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웠고 강지혁은 그녀에게 가감 없이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나는 지금 충분히 이성적이야.”강지혁이 답했다.그의 코는 거의 그녀의 코와 맞닿을 정도였다.몸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임유진의 체취가 그의 몸을 감싸왔다. 마치 그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그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그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신경이 쓰이는 걸까? 강현수와 그녀의 과거가?“강현수 좋아하지 말고 사랑하지도 마. 알아들었어?”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난 한번도 강현수를 좋아하거나 사랑한 적이 없어!”임유진이 외쳤다.“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나였다.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야?”강지혁이 물었다.“그래.”임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단호하게 외쳤다.“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강지혁의 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