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임유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부드러운 마사지를 즐겼다.“근데 혁아... 강현수 씨 말이야. 그 사람을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임유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에는 그가 플레이보이라고만 생각됐지만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그의 태도를 보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그는 어릴 때 만났던 여자아이를 찾는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얼마 동안 찾은 걸까? 10년? 20년?그 긴 시간 동안 오직 한 사람만 찾아 헤맸다고? 대부분 사람들은 진작 포기했을 텐데.“그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맸는데 과연 찾을 수 있을까?”임유진이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해? 찾았으면 좋겠어 말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되물었다.“찾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날 그 사람으로 착각하지 않잖아.”대답을 마친 그녀는 눈을 감고 있어 강지혁의 음침한 눈빛을 보지 못했다.‘착각? 아니야, 강현수는 제대로 찾았어! 하지만 내가 착각으로 만들어줄 거야. 유진이는 내 사람이어야만 해. 절대 아무한테도 안 줘.’“사실 생각해보면 계속 못 찾고 대체품만 옆에 두는 것도 너무 슬픈 일이잖아.”임유진이 비스듬히 눈을 뜨고 강지혁을 바라봤다.“대타가 아무리 많아도 강현수 씨가 원하는 사람을 못 찾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강지혁이 가볍게 웃었다.“확실히 슬프네. 강현수가 하루빨리 그 사람 찾길 바라야지.”...그 뒤로 며칠 동안 임유진은 계속 윤이 식당에서 배달했고 탁유미는 새로운 직원을 구하는 일에 착수했다.신인에게 한 주 동안 수습 기간이 있어 임유진의 배달 업무량도 훨씬 줄어들었다.윤이는 그녀가 떠나는 걸 안 이후로 그녀가 가게에만 있으면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그녀가 떠나는 게 많이 아쉽나 보다.“이모 나중에 윤이 보러 자주 놀러 올 거야. 윤이도 이모 생각나면 엄마한테 말해서 이모 집으로 와. 이모한테 전화해도 되고. 이모 번호 다 외웠잖아!”임유진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지만 난 매일 이모 보고 싶다고요.”윤이가 말했다.한동안 재활 치료를
그 당시 경매가가 무려 200억을 뛰어넘었고 임유진은 대체 누가 이렇게 비싼 다이아를 살지 궁금하다며 장난을 쳤었는데 지금 이 다이아몬드가 그녀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이거 오로라잖아!”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본 적 있나 봐.”강지혁도 살짝 의외였다.“응.”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였다.“이거로 누나 결혼반지 맞춰주려고. 나중에 누나가 원하는 디자인을 선택해. 디자이너에게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하면 돼.”강지혁이 말했다.결혼반지?! 임유진은 충격에 휩싸여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 200억 가까이 되는 다이아로 그녀의 결혼반지를 만들어주겠다는 건가?! 임유진은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왜? 마음에 안 들어?”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다른 다이아로 골라볼게. 혹시 누나가 좋아하는 다이아 종류가 따로 있어?”“아니 그게 아니라!”그녀는 재빨리 그의 말을 부정했다.“이 다이아 엄청 비싸잖아. 너 정말 이걸로 결혼반지 만들게?”“아니면?”강지혁이 가볍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사뭇 귀여울 따름이었다.“목걸이로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가격이 비싼 거라면...”그가 잠시 뜸 들이더니 그녀의 오른손을 들고 약손가락에 가볍게 키스했다. 이제 곧 이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줄 예정이다.“얼마나 비싼 반지든 누난 낄 자격 있어. 누난 내 여자니까!”그가 키스한 곳에서부터 따뜻한 전류가 퍼지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온몸을 녹여주었다.임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게 바로 그녀가 결혼할 사람이다. 보석처럼 손에 고이 받들고 소중히 다뤄주는 바로 그런 남자!이런 남자의 프러포즈를 받은 것은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인 듯싶다.임유진은 다이아 반지의 디자인을 쭉 둘러본 후 디자이너와 잠시 더 토론하고 초보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드디어 첫 번째 소통을 마쳤다. 디자인에 관한 일은 몇 번 더 소통해야 하고 게다가 결혼반지에 관한 일이니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배고파?”강
전에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강지혁으로 인해 가능하게 변하는 걸까?“누나 계속 사건 뒤집고 싶댔잖아. 왜 지금은 아무 말 없어?”그녀의 침묵에 강지혁이 물었다.“그 증거들로... 정말 내 사건을 뒤집을 수 있어? 내가 정말 진실을 보상받을 수 있어?”임유진이 나지막이 물었다.진실이라... 강지혁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문제없을 거야. 나만 믿어!”임유진은 그 순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고마워, 혁아!”그녀의 눈물에 강지혁은 어쩔 바를 몰랐다. 얼른 티슈를 뽑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는 그였다.“울지 마. 내가 증거 수집하고 사건 뒤집으려고 노력하는 건 누나 울리기 위해서가 아니잖아.”그녀가 눈물을 보일 때마다 강지혁은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하지만 임유진이 되레 더 크게 울었다. 마치 이 몇 해 동안 억울하게 뒤집어썼던 누명이, 꾹 짓눌렀던 고통이 한순간에 왈칵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그를 꼭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으엉... 흐엉...”드디어 해탈한 듯한 울음소리에 얼마나 많은 서러움과 고통이 담겨 있을까!한편 강지혁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다.그녀를 위해 결백을 찾아줄 순 있지만 제아무리 반쪽 하늘을 가리는 강지혁이라 해도, 엄청난 부자라 해도 그녀가 잃었던 지난 세월을 되돌려줄 순 없다.그녀를 사랑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이렇게 깊이 사랑할 줄 진작 알았더라면 그해 절대 그녀에게 그런 시련과 고통과 서러움을 안겨주지 않을 텐데.아쉽게도 세상에 후회 약은 없다.그해의 횡포가 오늘날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임유진 때문에 강지혁은 지금 이토록 무거운 죄악감에 시달리고 있다.다른 그 어떤 이의 감정도 무시할 수 있지만 오직 임유진만 안 된다.그는 뻣뻣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울지 마, 유진아. 그만 울어, 응?”지칠 줄 모르는 듯 그렇게 몇 번이고 위로했다.임유진도 자신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정신을
“이건 네 일도 아닌데 오직 날 위해 사건 뒤집어주려는 거잖아. 고마워. 방금 운 건 이 사건이 마음속에 너무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드디어 희망이 보이자 멘탈이 무너진 것 같아.”그녀가 말했다.강지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유진아, 방금 내가 말한 미안해 석 자가 무슨 뜻인지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횡포하게 굴었어. 나 때문에 그 고통을 겪게 했고 만신창이가 돼버렸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네게 결백을 돌려주는 거야.’다만 그녀가 원하는 진실은 영원히 얻지 못할 듯싶다!강지혁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다음날 임유진은 탁유미에게 휴가 내고 강지혁과 함께 로펌으로 향했다. 그녀에 관한 사건이다 보니 유난히 긴장되는 하루였다.그리고 더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강지혁이 선택한 로펌은 그녀가 전에 일했던 바로 그 로펌이었다!임유진은 놀란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봤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알아, 누나 전에 여기서 일한 거.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전에 일했던 동료들이 계속 누나 비꼬잖아. 그래서 여기로 택했어. 누나가 당한 굴욕들 전부 보상해줄 거야. 전에 누나 무시하고 경멸한 사람들 아무도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해줄 거야. 누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이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누나란 걸 로펌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알릴 거야.”강지혁이 말했다.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 앞에서 그녀가 여느 때보다 당당해지길 바랐다.임유진의 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졌다. 사실 어떤 일들은 많은 시련을 겪고 난 이후로 서서히 무뎌져 갔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경멸을 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 이 점은 임유진도 잘 알고 있다.그녀는 강지혁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펌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손에 식은땀이 쫙 나는 걸 알아챘다.여전히 긴장한 그녀였다! 증거를 수집하고 검찰 측에 재신청할 수 있어도, 거의 승산이 있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어쩌면 사건을 뒤집는
임유진이 손을 다 씻고 휴지로 닦으려 할 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고 상대도 그녀를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유진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임유진도 여기서 정한나를 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전처럼 오피스룩을 입지 않았고 되레 빌딩 청소 아줌마 같은 옷차림이었다.“왜요?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요?”임유진이 싸늘하게 되물었다.저번에 정한나가 그녀 사건을 로펌 신입사원들에게 실습용 사례 삼아 입을 나불거린 이후로 임유진은 그녀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소인인 걸 알았으나 그녀의 ‘악’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심할 줄은 몰랐다.정한나도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한나는 이젠 로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명색이 변호사인데 화장실 청소나 책임져야 했으니 이 모든 게 임유진 때문이다!강현수가 임유진을 지켜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하지만 바로 다음 날 로펌 사장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러들이더니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로펌에서 사직하거나 전근으로 화장실 청소를 당분간 책임지고 그 후의 일은 상황을 봐서 결정하겠다고 했다.정한나는 반나절 머리를 쥐어짜고 갈등하다가 결국 두 번째 방안을 선택했다. 이대로 잘리면 그녀를 받아줄 곳이 없으니까. 실업자 신세에 친척들과 남자친구를 무슨 면목으로 마주하겠는가.지금 비록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지만 회사 직원들 말고는 남자친구와 가족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나중에 새 로펌을 찾거든 자연스럽게 여길 떠나면 그만이다.그런데 아쉽게도 임유진에게 들켜버렸다.항상 그녀만 임유진을 비웃었는데 어느덧 이런 꼴로 임유진을 마주해야 하니 분노만 더 짙어졌다.임유진이 등 돌려 화장실을 나서려 할 때 정한나가 문득 기발한 꾀가 떠올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더니 등 뒤로 숨겼다.“잠깐만요 유진 씨! 대체 강현수 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그날 왜 그렇게 유진 씨를 지켜준 거죠? 외투까지 걸쳐줬잖아요! 두 사람 진작 알고 지냈죠? 보통 사이 같지 않던데, 내 말 틀려요?”정한나는 그녀를 쫓
정한나는 볼이 화끈거리고 반쪽 얼굴이 얼얼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누가 때린 건지 되돌아봤는데 전에 봤던 임유진의 남자친구였다.“감히... 네가 감히 날 때려?”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왜? 내가 너 때리면 안 돼?”강지혁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되레 싸늘하게 웃으며 한없이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내가 지금 당신 도와주고 있잖아. 임유진이 강현수와... 바람을 피웠다고, 두 사람...”정한나가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계속 입을 나불거렸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싸대기가 날아왔다.그녀의 양쪽 볼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정한나 입안에서 피비린내까지 났으니 방금 두 싸대기가 얼마나 심했을지 충분히 예상 되었다!하지만 그녀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 건 상대의 음침한 눈빛이다. 그건 마치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언제든지 정한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고작 임유진의 남자친구일 뿐인데, 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정한나는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경찰에 신고해서 두 사람에게 제대로 망신 줄 생각이었다!바로 이때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로펌 사장의 목소리도 들렸다.“강지혁 씨, 오셨어요? 유진 씨도 오셨네요. 오랜만이에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평소에 차갑기 그지없던 사장이 지금은 얼굴에 열정으로 차 넘쳤다!강지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서 고개 숙여 임유진을 쳐다봤다.“얘가 바로 저번에 찻물 뿌린 그년이지? 오늘 또 이런 식으로 말하네? 네가 말해봐. 얘 어떻게 해줄까?”강지혁은 당연히 미리 조사했다.정한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임유진 남친 너무 거만 떠는 거 아니야? 제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날 어떻게 해주냐고? 내 운명이라도 쉽게 바꿀 기세인데?’옆에 있던 사장이 이 광경을 보았고 정한나의 시뻘건 얼굴도 흘겨보았다. 사장은 강지혁의 싸늘한 표정에 그 자리에서 호통쳤다.“정한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정한나가 감히 말할 엄두가
강지혁 일행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누군가가 정한나에게로 다가와 말했다."정한나 씨, 휴대폰 주시죠.""내가 왜!"정한나는 자신의 핸드폰을 꽉 쥐었다. 바보도 아니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이대로 남의 손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마치 정말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혁 씨를 상대로 녹음 파일만 넘기면 되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앞으로 허튼소리만 안 하면 임유진 씨도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겁니다. 하지만 이 경고를 무시할 시에는..."사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한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잠깐만,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강지혁?""네, 오늘 강지혁 씨가 임유진 씨를 데리고 이쪽으로 온 건 임유진 씨 사건을 뒤집기 위해서입니다."그 말에 정한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강지혁... 임유진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라고? 말도 안 돼! 그때 임유진이 차로 치어 죽인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약혼녀잖아...그런데 이제는 사건까지 뒤집겠다고?! 그 말은 임유진이 살인자가 아니란 뜻이야?!그 순간, 정한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돼버려서는 아까 맞은 뺨이 욱신거리더니 이제는 살이 에일 것처럼 아팠다....임유진과 강지혁은 회의실로 들어왔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임유진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로펌 대표도 있었고 그녀가 막 로펌으로 들어왔을 때 동경했었던 선배 변호사들도 있었다.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그녀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게 강지혁 때문이라는 걸 임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임유진은 그들과 딱히 옛 추억을 회상하러 온 게 아니므로 그녀가 할 일은 그저 로펌에서 정리해준 자료들을 보는 것뿐이었다.자료 중에는 전에는 없던 새로 나온 증거들이 들어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때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이었다.강지혁이 그 몇 명의 목격자들을 다 찾아내 그들 입에서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했다는 진술까지 다 받아낸 것이다.물증에 관해서는 누군가가 경찰서 사람을 매수가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고 적
임유진은 곧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진애령은 진씨 가문 아가씨로서 당시에는 진화그룹 대표이기도 했다. 진씨 일가에서 자식은 총 두 명이었지만 진세령은 연예계로 진출했기에 당연하게도 진애령이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됐다. 게다가 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자였고 이 모든 사실을 종합했을 때 허재명은 충분히 두려울 만했다. 법은 그를 심판하지 않았을 테지만 진씨 일가와 강씨 일가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임유진은 왜 허재명이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눈앞에 놓인 증거들로 만약 재심이 열린다면 사건을 뒤집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허재명이 아직 해외에 있다는 것이다.성공적으로 사건을 뒤집는다고 해도 허재명이 해외에 있는 한 범죄자를 국내로 데려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그때, 마치 임유진의 고민을 읽은 것처럼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마. 해외에 있다고 해도 내가 반드시 국내로 데려와 죄를 인정하게 할 테니까."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임유진은 믿음이 갔다.모든 자료가 문제없음을 확인한 임유진은 봉투에 사인했고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 후 임유진의 선배 변호사였던 사람이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유진아, 몇 년간 고생 많았어. 아마 너는 곧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변호사가 되겠지. 그러면 그때 나한테로 와."임유진은 그 말에 그저 옅게 웃어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상대방이 뭔가 더 얘기하려고 입을 열려고 하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혁아, 나 조금 피곤해.""그럼 이만 가자."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고 회의실에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후 강지혁은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많이 피곤하면 차에서 누워 자도 돼.""아니야."임유진은 고개를 젓다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나 술 마시고 싶어.""술?"강지혁이 눈썹을 치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