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네 일도 아닌데 오직 날 위해 사건 뒤집어주려는 거잖아. 고마워. 방금 운 건 이 사건이 마음속에 너무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드디어 희망이 보이자 멘탈이 무너진 것 같아.”그녀가 말했다.강지혁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유진아, 방금 내가 말한 미안해 석 자가 무슨 뜻인지 넌 영원히 모를 거야.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횡포하게 굴었어. 나 때문에 그 고통을 겪게 했고 만신창이가 돼버렸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네게 결백을 돌려주는 거야.’다만 그녀가 원하는 진실은 영원히 얻지 못할 듯싶다!강지혁은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다음날 임유진은 탁유미에게 휴가 내고 강지혁과 함께 로펌으로 향했다. 그녀에 관한 사건이다 보니 유난히 긴장되는 하루였다.그리고 더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강지혁이 선택한 로펌은 그녀가 전에 일했던 바로 그 로펌이었다!임유진은 놀란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봤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알아, 누나 전에 여기서 일한 거.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전에 일했던 동료들이 계속 누나 비꼬잖아. 그래서 여기로 택했어. 누나가 당한 굴욕들 전부 보상해줄 거야. 전에 누나 무시하고 경멸한 사람들 아무도 감히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해줄 거야. 누나는 가해자가 아니야. 이 사건의 피해자가 바로 누나란 걸 로펌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알릴 거야.”강지혁이 말했다.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 앞에서 그녀가 여느 때보다 당당해지길 바랐다.임유진의 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졌다. 사실 어떤 일들은 많은 시련을 겪고 난 이후로 서서히 무뎌져 갔다.하지만 강지혁은 그녀가 경멸을 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 이 점은 임유진도 잘 알고 있다.그녀는 강지혁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펌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손에 식은땀이 쫙 나는 걸 알아챘다.여전히 긴장한 그녀였다! 증거를 수집하고 검찰 측에 재신청할 수 있어도, 거의 승산이 있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어쩌면 사건을 뒤집는
임유진이 손을 다 씻고 휴지로 닦으려 할 때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고 상대도 그녀를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유진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임유진도 여기서 정한나를 볼 줄은 몰랐다. 그녀는 전처럼 오피스룩을 입지 않았고 되레 빌딩 청소 아줌마 같은 옷차림이었다.“왜요?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요?”임유진이 싸늘하게 되물었다.저번에 정한나가 그녀 사건을 로펌 신입사원들에게 실습용 사례 삼아 입을 나불거린 이후로 임유진은 그녀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소인인 걸 알았으나 그녀의 ‘악’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극심할 줄은 몰랐다.정한나도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한나는 이젠 로펌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명색이 변호사인데 화장실 청소나 책임져야 했으니 이 모든 게 임유진 때문이다!강현수가 임유진을 지켜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하지만 바로 다음 날 로펌 사장이 그녀를 사무실로 불러들이더니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로펌에서 사직하거나 전근으로 화장실 청소를 당분간 책임지고 그 후의 일은 상황을 봐서 결정하겠다고 했다.정한나는 반나절 머리를 쥐어짜고 갈등하다가 결국 두 번째 방안을 선택했다. 이대로 잘리면 그녀를 받아줄 곳이 없으니까. 실업자 신세에 친척들과 남자친구를 무슨 면목으로 마주하겠는가.지금 비록 화장실 청소나 하고 있지만 회사 직원들 말고는 남자친구와 가족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나중에 새 로펌을 찾거든 자연스럽게 여길 떠나면 그만이다.그런데 아쉽게도 임유진에게 들켜버렸다.항상 그녀만 임유진을 비웃었는데 어느덧 이런 꼴로 임유진을 마주해야 하니 분노만 더 짙어졌다.임유진이 등 돌려 화장실을 나서려 할 때 정한나가 문득 기발한 꾀가 떠올라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더니 등 뒤로 숨겼다.“잠깐만요 유진 씨! 대체 강현수 씨랑은 무슨 사이에요? 그날 왜 그렇게 유진 씨를 지켜준 거죠? 외투까지 걸쳐줬잖아요! 두 사람 진작 알고 지냈죠? 보통 사이 같지 않던데, 내 말 틀려요?”정한나는 그녀를 쫓
정한나는 볼이 화끈거리고 반쪽 얼굴이 얼얼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누가 때린 건지 되돌아봤는데 전에 봤던 임유진의 남자친구였다.“감히... 네가 감히 날 때려?”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왜? 내가 너 때리면 안 돼?”강지혁은 분노가 극에 달하자 되레 싸늘하게 웃으며 한없이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내가 지금 당신 도와주고 있잖아. 임유진이 강현수와... 바람을 피웠다고, 두 사람...”정한나가 밀려오는 고통을 참으며 계속 입을 나불거렸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싸대기가 날아왔다.그녀의 양쪽 볼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정한나 입안에서 피비린내까지 났으니 방금 두 싸대기가 얼마나 심했을지 충분히 예상 되었다!하지만 그녀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한 건 상대의 음침한 눈빛이다. 그건 마치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언제든지 정한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고작 임유진의 남자친구일 뿐인데, 뭐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정한나는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경찰에 신고해서 두 사람에게 제대로 망신 줄 생각이었다!바로 이때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로펌 사장의 목소리도 들렸다.“강지혁 씨, 오셨어요? 유진 씨도 오셨네요. 오랜만이에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평소에 차갑기 그지없던 사장이 지금은 얼굴에 열정으로 차 넘쳤다!강지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서서 고개 숙여 임유진을 쳐다봤다.“얘가 바로 저번에 찻물 뿌린 그년이지? 오늘 또 이런 식으로 말하네? 네가 말해봐. 얘 어떻게 해줄까?”강지혁은 당연히 미리 조사했다.정한나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임유진 남친 너무 거만 떠는 거 아니야? 제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날 어떻게 해주냐고? 내 운명이라도 쉽게 바꿀 기세인데?’옆에 있던 사장이 이 광경을 보았고 정한나의 시뻘건 얼굴도 흘겨보았다. 사장은 강지혁의 싸늘한 표정에 그 자리에서 호통쳤다.“정한나, 대체 어떻게 된 거야?”정한나가 감히 말할 엄두가
강지혁 일행이 회의실로 들어가자 누군가가 정한나에게로 다가와 말했다."정한나 씨, 휴대폰 주시죠.""내가 왜!"정한나는 자신의 핸드폰을 꽉 쥐었다. 바보도 아니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이대로 남의 손에 넘겨줄 리가 없었다.하지만 상대방은 마치 정말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혁 씨를 상대로 녹음 파일만 넘기면 되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앞으로 허튼소리만 안 하면 임유진 씨도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겁니다. 하지만 이 경고를 무시할 시에는..."사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한나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잠깐만, 당신 방금 뭐라고 했어? 강지혁?""네, 오늘 강지혁 씨가 임유진 씨를 데리고 이쪽으로 온 건 임유진 씨 사건을 뒤집기 위해서입니다."그 말에 정한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강지혁... 임유진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라고? 말도 안 돼! 그때 임유진이 차로 치어 죽인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약혼녀잖아...그런데 이제는 사건까지 뒤집겠다고?! 그 말은 임유진이 살인자가 아니란 뜻이야?!그 순간, 정한나는 머리가 새하얗게 돼버려서는 아까 맞은 뺨이 욱신거리더니 이제는 살이 에일 것처럼 아팠다....임유진과 강지혁은 회의실로 들어왔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임유진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로펌 대표도 있었고 그녀가 막 로펌으로 들어왔을 때 동경했었던 선배 변호사들도 있었다.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그녀에게 매우 조심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게 강지혁 때문이라는 걸 임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임유진은 그들과 딱히 옛 추억을 회상하러 온 게 아니므로 그녀가 할 일은 그저 로펌에서 정리해준 자료들을 보는 것뿐이었다.자료 중에는 전에는 없던 새로 나온 증거들이 들어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때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이었다.강지혁이 그 몇 명의 목격자들을 다 찾아내 그들 입에서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했다는 진술까지 다 받아낸 것이다.물증에 관해서는 누군가가 경찰서 사람을 매수가 거짓 증거를 만들었다고 적
임유진은 곧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진애령은 진씨 가문 아가씨로서 당시에는 진화그룹 대표이기도 했다. 진씨 일가에서 자식은 총 두 명이었지만 진세령은 연예계로 진출했기에 당연하게도 진애령이 가문을 이을 후계자가 됐다. 게다가 진애령은 강지혁의 약혼자였고 이 모든 사실을 종합했을 때 허재명은 충분히 두려울 만했다. 법은 그를 심판하지 않았을 테지만 진씨 일가와 강씨 일가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임유진은 왜 허재명이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됐다.눈앞에 놓인 증거들로 만약 재심이 열린다면 사건을 뒤집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건 바로 허재명이 아직 해외에 있다는 것이다.성공적으로 사건을 뒤집는다고 해도 허재명이 해외에 있는 한 범죄자를 국내로 데려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그때, 마치 임유진의 고민을 읽은 것처럼 강지혁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마. 해외에 있다고 해도 내가 반드시 국내로 데려와 죄를 인정하게 할 테니까."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임유진은 믿음이 갔다.모든 자료가 문제없음을 확인한 임유진은 봉투에 사인했고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된 후 임유진의 선배 변호사였던 사람이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유진아, 몇 년간 고생 많았어. 아마 너는 곧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변호사가 되겠지. 그러면 그때 나한테로 와."임유진은 그 말에 그저 옅게 웃어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상대방이 뭔가 더 얘기하려고 입을 열려고 하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혁아, 나 조금 피곤해.""그럼 이만 가자."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고 회의실에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후 강지혁은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많이 피곤하면 차에서 누워 자도 돼.""아니야."임유진은 고개를 젓다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나 술 마시고 싶어.""술?"강지혁이 눈썹을 치켜
임유진은 그렇게 한잔 두잔 마시며 취기가 온몸을 감싸올 때까지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한편,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그저 말없이 술을 따라줄 뿐이었다."혁아, 난 가끔 운명이라는 게 너무 웃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해."임유진은 손에 든 와인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중얼거렸다."왜 그렇게 생각해?"강지혁이 부드럽게 물었다."내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 그때는 모든 증인과 물증들이 다 나를 가리키는 바람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매일같이 생각했지. 이 사건의 진실은 대체 뭘까, 대체 누가 이 모든 증거들이 나를 가리키게 판을 짠 걸까..."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실소를 터트렸다."나 말이야. 그때 내 주변 지인 하나하나 다 의심했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가 나한테 큰 원한을 품은 건 아닐까 하고."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강지혁의 귀를 타고 들어와 망치로 변해 그의 심장을 거세게 내리쳤다.임유진은 고개를 살짝 들더니 웃었다."혁아, 그거 알아? 난 정말 몰랐어.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운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진애령 씨와 어떤 원한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무서워서, 형을 살까 봐, 진씨 일가에게 보복당할까 봐 두려워서 내 인생을 망쳐버렸을 줄은..."감옥에 있었던 3년은 지금도 임유진 마음속 깊은 곳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그 3년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커리어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으며 영원히 아이까지 잃을 뻔했다.하지만 이 모든 게 그저 한 사람의 두려움 때문이었다니!이런 간단하고도 우습기까지 한 이유를 그녀는 4년이나 찾아 헤맸다.강지혁은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둔 거, 진실을 밝힐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녀가 감옥에 가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거에 미치도록 후회하고 있다.그때는 그도 그 언젠가 임유진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고 이 여자가 겪은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겪은
마치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음식을 넣어주듯 그는 꽤 진지하게 이 동작을 반복했다.강지혁을 아는 사람이 이 광경을 봤으면 아마 놀란 나머지 현실부정을 할 것이다. 강지혁이 누군가의 식사 수발을 들어준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일 테니까.한편, 이 광경은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술집 손님들이다. 그들은 마치 영화 한 장면을 보듯 넋을 놓고 쳐다봤다.날은 벌써 어두워졌고 술집에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다. 기존에 있던 손님들은 물론이고 새롭게 들어온 손님들마저 시선을 강지혁과 임유진 쪽으로 돌렸다.강지혁은 원체 잘생긴 얼굴이고 특히 술집에서는 여성들이 대시하기 가장 좋은 인물일 테니까.그런 그가 정성스럽게 한 여자에게 이것저것 먹여주고 있으니 거기에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을 여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누구라도 임유진 자리에 자신이 들어가고 싶을 것이다.하여 몇몇 여성들은 강지혁의 옆에 임유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시도해보고 싶었다.술집은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곳이니까.몇 분 후, 꽤 예쁜 얼굴에 몸매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 한 명이 강지혁 쪽으로 다가가 예쁘게 웃었다."나 여기 앉아도 돼요? 오늘 혼자 왔는데."그러고는 강지혁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냈다. 가까이에서 보니 남자는 여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이런 남자라면 하룻밤 관계라도 선뜻 수락할 수 있다.다만 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경고했다."꺼져."그 말에 여자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이 남자 옆에 앉아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여자보다 훨씬 예뻤으니까.여자는 혹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더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옆에 있는 그 여자 혹시 그쪽 친구예요? 이미 취해서 재미없을 것 같은데, 나는 그쪽 엄청 재밌게 해줄 수 있어요. 그리고 날 마음대로 해도 뭐라 안 할 건데."여자의 말은 명백한 섹스어필이었
여자는 남자가 너무 무서워 얼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헌팅에는 실패했지만,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남자이니까."저... 저는 그럼 이만..."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잠깐..."그때 임유진이 여자를 불러세웠다. 그러고는 뭔가 엄청나게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여자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임유진의 말을 들었음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때 강지혁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기다리라잖아."‘네?’여자는 그 말에 육성으로 반응하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성들에게 잡혀버렸고 그대로 다시 강지혁의 테이블로 끌려갔다.여자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토록 후회한 적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남자 한 명 꼬시려다가 팔자가 꼬이게 생겼다."저기... 우리 일단 말로 하는 게 어떨까요? 혹시 내가 아까 말을 잘못한 게 있다면 당장 사과할게요. 네?"여자는 거의 울먹거리며 사정했지만, 강지혁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임유진을 향해 말했다."자, 봐봐. 네가 부른 사람 왔어."애정가득한 그의 얼굴은 그에게 사랑받으면 정말 행복하고 어떤 고난도 이 남자가 대신 해결해 줄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게 한다.여자는 임유진이 그녀에게 뭐라고 할까 봐 잔뜩 긴장하며 얼어있었다. 술에 취한 이 여자가 혹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면 옆에 앉은 남자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배에 칼을 꽂을 것 같았다."너..."임유진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술에 잔뜩 취해 말을 이었다."너 아직 우리 혁이 넘보지 않을 거란 말 안 했잖아!"여자는 그 순간 마음이 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잠깐만... 잔뜩 겁주며 나를 데려온 게 고작 그 얘기를 안 해서?’"너... 끅... 우리 혁이 넘보면 안 돼!"임유진은 이제 트림까지 하며 이 말을 벌써 몇 번이나 내뱉었다. 아마 그녀에게 있어 이 말이 상당히 중요한 듯싶었다."저는 절대 혀, 혁이 씨를 넘보지 않을 겁니다!"여자는 선서만 안 했지 거의 맹세한 것과 다름없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