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강현수의 관심을 끌려던 여자들은 임유라의 목걸이를 보고 그녀의 말까지 듣더니 눈가에 질투와 부러움이 가득 찼고 결국 시무룩하여 자리를 떠났다.임유라는 목적을 달성하자 입꼬리를 씩 올렸다.주위 사람들이 다 나간 후에야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쥬얼리샵에서 이렇게 비싼 목걸이를 골랐다고 미워하는 건 아니죠?”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여운 척 갖은 애교를 떨었다.배우로서 그녀는 어떤 표정이 자신을 더 안쓰러워 보이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난 그저 현수 씨한테 더 잘 어울리는 여자가 되고 싶을 뿐이었어요. 당신 곁에 섰을 때 당신 체면을 깎아내리고 싶진 않았거든요.”강현수는 눈앞의 여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더 잘 어울려? 그녀가 생각한 어울림은 고작 액세서리와 명품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일까?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강현수와 어울리는 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이 여자는 역시 입술 말곤 그의 기억 속 그 소녀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이 물건들은 이미 샀으면 산 거지 자책할 필요 없어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내 체면을 깎아내릴지 아닐지는... 제대로 한번 고민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뭐라고?’임유라는 흠칫 놀랐다.‘지금 이 말 무슨 뜻이지? 내가 지금 본인 체면을 깎아내렸다는 거야?’임유라는 금방 내려놓았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아 참, 유라 씨 언니분 지금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알아요?”강현수가 무심코 물었다.임유라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다가 짜증 섞인 상대의 눈빛을 보고 나서야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언니는... 환경위생과에서 근무하잖아요?”강현수는 쓴웃음을 지었다.“보아하니 언니한테 정말 관심이 없네요.”임유라는 몸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강현수의 말투에 담긴 불쾌함을 바로 느꼈다.“그게... 실은 언니가 줄곧 집에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지금은 강지혁 씨랑 함께 있어서 넉넉하게 지내고 있을 거예요.”임유라는 일부러 강지혁을 강조해
여기까지 생각한 임유라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그녀는 문득 딱딱한 물건에 손이 닿아 힐끔 내려다보니 강현수가 늘 착용하고 다니는 은팔찌였다.이 팔찌는... 임유라는 그의 가슴팍에 있는 은팔찌를 보며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하디 평범한 팔찌인데 그는 왜 항상 이렇게 착용하고 다니는 걸까? 마치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임유라는 팔찌를 가져와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하지만 강현수가 곧장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손목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팔찌를 내려놓았다.임유라는 고통을 호소하며 싸늘한 강현수의 두 눈을 마주했다.분명 취했을 텐데 지금 이 순간 그의 눈빛에서 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도리어 소름 끼치도록 정신이 맑아 보였다.“이건 네가 만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그는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알았어요... 앞으로 더는 안 만질게요. 난 그저 현수 씨 옷 갈아입혀 주고 편히 잠들라고 그런 거예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현수 씨... 일단 이 손 좀 놔줘요...”임유라는 너무 아파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손목이 곧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강현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다시 눈 감고 침대에 누웠다.“나가.”강현수가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엔 여기 남아서 당신 돌보고 싶어요. 많이 취했고 도우미들도 이미 잠들어서...”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나가.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말고.”임유라는 이를 꽉 악물었다. 어렵게 구한 기회인데 이대로 사라지다니.다만 그녀는 감히 더는 말할 엄두가 안 나 의기소침해서 강현수의 방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방안에 강현수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그는 손을 들어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어루만졌다. 결국 취기가 올라온 것이다.오늘 밤 그는 가슴이 답답해 술을 좀 많이 마셨다. 낮에 임유진을 본 것 때문일까?머릿속에 자꾸만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강지혁의 여자
그 시각 임유라는 눈앞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전에 이 화실을 지나가다가 한번 들어가 보려 했는데 강현수에게 바로 제지당했다.하여 이번에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다만 그 안에 임유진의 초상화가 있을 줄이야.지금 성인이 된 임유진이 아니라 어릴 때의 임유진이었다.한 소녀가 소년을 업고 있는 그림인데 소녀의 얼굴은 임유진의 어릴 때 모습과 똑같았다.게다가 소녀가 입고 있는 꽃무늬 치마는 임유진의 사진첩에서 봤던 그 치마와 매우 흡사했다.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왜 강현수의 화실에 임유진의 초상화가 있는 걸까? 두 사람은 대체 어떤 관계일까?임유라의 머릿속은 수많은 의혹으로 가득 찼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더할 나위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예전에 느꼈던 불안감보다 훨씬 더 강렬한 공포였다.그녀가 간신히 얻은 모든 것을 임유진에게 빼앗기는 느낌이었다.‘안 돼! 절대 안 돼!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임유진과 강현수가 무슨 사이이든 그녀야말로 강현수의 여자친구이고 장차 강씨 일가에 시집가서 재벌가의 사모님으로 거듭날 사람이다!...임유진은 강씨 저택에 돌아와 강지혁의 침실 문 앞에 가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문이 열렸는데 강지혁이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머리도 살짝 젖어 있었다. 보아하니 금방 샤워를 마친 듯싶었다.“저기... 잘 자.”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그의 요구 때문에 임유진은 매일 밤 돌아올 때 그가 집에 있으면 그의 방으로 가서 굿나잇 인사를 한다.하지만 강지혁이 재빨리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아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누난 나한테 잘 자라는 인사만 하면 끝이야?”강지혁이 물었다.임유진은 입술을 앙다물고 무고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굿나잇 인사만 하기 위해 찾아온 게 틀림없었다.강지혁은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번쩍 안았다. 그는 임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고 그녀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러고는 매력적인 눈동자로 그녀를 애절하게 쳐다보았다."누나뿐이야."강지혁이 이토록 누군가의 시선을 갈망하는 것도 임유진뿐이었고, 강지혁의 질문에 아무 대답이 없어도 그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임유진뿐이었다. 강지혁은 그녀 앞에만 서면 원래의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 머리 말려줘."그는 젖은 머리를 말리려고 했었던 수건을 임유진한테 들이밀었다. 임유진은 그 말에 상당히 당황했는지 그저 강지혁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머리를 자신의 눈앞에 가져다 놓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왜? 예전에는 종종 해줬었잖아."강지혁이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았다.‘그때랑 지금이 어떻게 같냐고!’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천천히 수건을 그의 머리 위에 얹고 요구대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녀는 수건 때문에 강지혁의 얼굴을 그나마 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얌전한 강아지처럼 그녀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상황이 마치 자신이 강지혁의 주인이고 말 한마디면 강지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속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고 자신을 비웃었다. 현실은 정반대였으니까.강지혁이 지금 강아지처럼 온순하게 굴어서 그녀가 이런 착각이 드는 걸까?그렇게 한참을 말린 후 임유진의 손이 천천히 멈추더니 입을 열었다."다 됐어."수건을 치워버리자 방금까지 물기를 닦아낸 탓인지 강지혁의 앞머리는 그의 이마와 눈을 거의 가리다시피 했고 임유진은 그 모습에 ‘혁이’가 떠올랐다.앞머리 뒤에 가려진 그의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는 임유진을 삼켜버릴 듯 응시했고 임유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강지혁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이제는 청초해 보이기까지 한 그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강지혁은
"앞으로도 말 잘 들을 테니까, 나 좋아해 줄래?"애절하게 말하는 강지혁을 보며 임유진은 망설였다.만약... 그가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그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상대는 하필이면 강지혁이었고 3년이라는 감옥생활 동안 임유진은 하루도 그가 악몽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고 그가 무섭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임유진은 이제 강지혁과의 관계를 자신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무섭고 두려웠지만, 자꾸 그가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파 난다.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달콤한 말을 속삭일 때면 임유진은 어김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강지혁은 정말로 임유진을 그저 게임 상대로만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진심도 섞여 있는 걸까? 그렇다면 임유진은? 임유진은 그한테 설레고 있는 걸까?임유진은 현재 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버리는 늪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임유진은 가게 안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바로 강현수였고 그는 이런 작은 가게에 얼굴을 비출 사람이 아니었다.준수한 얼굴에 꼭 어울리는 정장 차림, 그리고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까지 그에게 어울리는 건 고급 레스토랑이나 라운지 바 같은 곳이지 절대 이런 후미진 작은 가게가 아니었다.계산대에는 탁유미가 아닌 탁유미 엄마가 서 있었다.그리고 이때 강현수도 임유진을 발견하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네요?""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임유진이 궁금한 듯 물었다."어제 길을 가다 우연히 유진 씨가 스쿠터 타고 가는 걸 봤어요. 뒤에 ‘윤이 식당’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러다 오늘 마침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식사도 할 겸 들렀죠."강현수는 아마 모를 것이다.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와는 반대로 그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따뜻함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을."유진 씨, 여기 세 곳 더 배달해야 해요."그때 탁유미 엄마가 임유진을 향해 외쳤다."네."
"유진 씨, 잠시만요."다급해진 강현수가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혹시 화났어요? 유진 씨 일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없었어요."그러자 임유진이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화 안 났어요."임유진은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이런 일에까지 화를 냈다면 그녀는 진작에 화병으로 몸져누웠을 것이다.강현수가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혹시 일자리 필요하면 언제든 나한테 연락해요."그러자 임유진이 그를 쳐다보다 단호하게 얘기했다."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강현수 씨가 제 직업까지 신경 써줄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지금 배달원 일에 만족하고 있어요."그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강현수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이제 손 좀 풀어주시겠어요? 배달하러 가야 해서."강현수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서서히 손에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임유진은 모르겠지만 강현수는 꽤 임유진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지금에 잇따르기까지, 물론 전부 임유라의 입에서 전해 들은 말이긴 하지만."지금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강현수는 피식 웃었다."한때 잘나가는 변호사였던 사람이 지금 배달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요?"그에 임유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변호사라는 건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꽤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듯했다.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스쿠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뒤편에서 또다시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것 같네요. 강지혁 옆에 더는 있고 싶지 않게 되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요."그 말에 임유진이 잠깐 멈칫하나 싶더니 이내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언젠가 임유진이 강지혁의 곁을 떠나게 되는 날이 와도 강현수를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사회적 신분을 생각하면 아마 그는 강지혁보다 더 냉정하고 무정할 것이니까.강현수의 연애사는 꽤 화려한 편이다. 그는 자신의
"너 어디 있냐고 그래서 주방에 있다고 하니까 슬쩍 쳐다보더니 가버리던데?"탁유미 엄마가 대답했다."대체 저 사람이 누군데? 너 아는 사람이야?"필경 자신의 딸이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다급하게 숨어버리는 걸 봐버렸으니 탁유미 엄마도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가 복잡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강현수라고 엔터 사업 쪽에서 알아주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저 남자하고 몇 번 정도 마주친 적 있었어요.""그럼 너 알아본 거 아니야?"탁유미 엄마가 다급하게 묻자 탁유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아마... 알아본 것 같아요."탁유미가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는 하나 알아보지 못한 거였으면 굳이 떠날 때 그녀에 관해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자 탁유미 엄마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그, 그럼 이제 어떡하지? 너 여기 있다고 얘기라도 하게 되면 어떡해? 아! 아까 유진 씨 보니까 그 남자와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유진 씨한테 부탁해 보면 어때? 너 여기 있는 거 말하지 말아 달라고."그에 탁유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솔직히 강현수가 어쩌다 이런 작은 가게까지 오게 됐는지 의문이긴 했었지만, 상황을 보니 임유진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그 강현수가 일개 식당 배달원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다고?’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자 탁유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진 씨, 혹시 강현수 씨랑 아는 사이에요?""언니가 강현수 씨를 어떻게 아세요?"임유진이 놀란 듯 묻자 탁유미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매번 여자친구 스캔들로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리잖아요.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다 유명 연예인이라고. 그래서 알죠.""강현수 씨하고는 몇 번 만난 적 있었어요.""그럼 그 사람하고... 아, 아니에요."탁유미가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임유진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배달음식을 들고 말했다."언니, 그럼 저 배달 다녀올게요.""그래요."탁유미는 역시 자신이 직접 강현수를
‘그러니까 임유진 씨의 마음을 얻고 싶은 게 맞다는 거지...?’고이준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강지혁이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임유진 씨는 과거에... 아픈 상처를 지닌 분이셔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마음을 사로잡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억지로 밀어붙인다거나 하면 겉으로는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고요."고이준이 임유진을 냉철하게 분석했다."이건 어디까지나 제 의견이긴 합니다만, 항상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임유진 씨 마음의 벽도 서서히 무너질 테니까요.""그러니까 내가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거지?"강지혁의 혼잣말에 고이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자세로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자신이 언제 철저하게 잘 보이라고 했나..."그런데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고이준은 한 번도 여자에게 먼저 잘 보이려고 노력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대표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고이준은 발신자를 보더니 이내 신속하게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고이준이 전화를 끊고는 강지혁에게 말을 전했다."대표님, 누군가가 진애령 씨 사건을 들쑤시고 있다고 합니다."그러자 강지혁의 얼굴이 삽시에 굳었다."누가?""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현재 알고 있는 건 꽤 여러 명이 당시 사건자료와 증인들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해성시에 있는 증인한테는 현재 사람까지 붙인 것으로 보입니다.""‘갈’씨 성을 가진 그 증인 말하는 거야?"강지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네, 그리고 지금 해당 증인을 조사하고 있는 사람은 일전 한지영 씨가 고용한 사립탐정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이준은 한지영이 사립탐정을 고용한 시점에서 이미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
강지혁은 샤워를 마친 후 가운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부터 떨어져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얼굴 전체를 뒤덮은 물방울들은 꼭 그의 눈물 같기도 했다.“할아버지가 얘기한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예요. 유진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고 나도 아버지처럼 목숨을 끊을 생각 없어요. 나와 유진이는 곧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평생 잘 살 거예요.”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속에는 견고한 다짐이 섞여 있었다....그 뒤로 며칠간 임유진과 강지혁은 거의 저택에만 있다시피 했다.임유진은 간혹 심심하거나 할 때 한지영과 탁유미에게 전화를 해 무료함을 달랬다.한지영과 탁유미는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 잘 됐다며 기뻐해 주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바가 없지만 뭐가 됐든 잘 해결됐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그리고 다 알고 있는 한지영은 다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내려놓기로 한 거야? 괜찮겠어?”그녀는 임유진의 당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 임유진이 감방에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것과 괴롭힘에 지쳐 하마터면 자살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기에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응. 한번 노력해보려고. 진심이야.”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그럼 다행이고. 참, 엄마랑 아빠가 명절 겸 너희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데 시간 괜찮아? 나 구해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시대.”“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더 고맙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임유진은 한지영에게만큼은 뭘 줘도 아깝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으로 가는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방금 지영이랑 통화했는데 내일 우리더러 자기
다만 전과 다른 게 있다면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이 씻고 나왔을 때 강지혁은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나는 소파에서 잘게. 내가 침대에서 자야 네가 편할 거야.”강지혁은 그녀가 그로 인해 또다시 토를 하고 반응을 일으킬까 봐 자진해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다음날.임유진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윗몸을 일으켰다. 앞을 바라보니 강지혁은 소파에 누운 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이상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단 한 번도 그녀보다 늦게 눈을 뜬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침 9시였다.‘아직도 잔다고?’임유진은 의문을 품으며 조용히 강지혁의 잠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제도 느꼈지만 그는 확실히 살이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에서도 살이 빠진 게 확 티가 날 정도였다.게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그의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도 있었다.그때 강지혁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평온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두려움에 잠식되고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강지혁의 입이 살짝 열리며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뭐가 그럴 리 없는데?”임유진은 그의 상태에 조금 당황한 듯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와 살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또다시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내가 내려놓겠다잖아. 과거 같은 거 이제는 잊어보겠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반응이냐고!’임유진은 몸이 점점 차가워지자 결국 손을 거두어들이고 큰소리로 강지혁을 향해 외쳤다.“혁아, 혁아! 일어나봐!”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강지혁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절망으로 가득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대체 꿈에서 뭘 봤길래 이래?”임유진이 호흡을 가다듬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잖아.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지영이 말대로 이제는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려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내쉰 후 자신 안의 갈등과 모순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드디어 요 며칠 줄곧 고민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혁아, 널 용서할게. 그리고 널 떠나지 않을게. 그때 너한테 했던 약속, 지킬게.”그녀는 결정을 내렸다.이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마치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라는 듯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어쩌면 임유진은 그간 그녀를 괴롭혔던 것들을 전부 다 내려놔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강지혁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를 놓쳐버린다면 평생 후회와 지금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떨리는 입술을 서서히 벌리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용서해줄 거야? 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응,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강지혁의 어머니도 그를 떠났고 강지혁의 아버지도 그를 떠났고 이제는 강지혁의 할아버지마저 그를 떠났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임유진은 평생 강지혁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강지혁은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임유진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다 용서할 테니까 울지 마...”“응. 안 울게. 나 안 울어...”강지혁은 울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애써 눈물을 참아보며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는 강지혁의 모습은 정말 흔치 않은데 오늘 그는 그녀의 앞에서 두 번이나 펑펑 울어댔다.일전 병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를 이렇게 울보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
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마치 이제야 생기가 돌아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입꼬리를 아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렸다.“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정말...?”강지혁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였다.임유진은 생각보다 더 큰 그의 반응에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고작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그에게는 눈물까지 글썽일 일이었나?강지혁이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일이다.그리고 그녀 역시 강지혁 못지않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식으면 맛없어.”“응, 그럴게. 오늘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 설날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많을 거야.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은 조금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질문을 빙자한 자신의 바람을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응. 앞으로는 매년 이렇게 함께 있을 거야.”그녀의 이 한마디로 그의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그때 강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기쁜 듯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그 웃음이 꼭 따뜻한 햇볕과도 같아 임유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우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찌릿하며 마음이 아파 났다....강지혁이 갑자기 울어버리는 바람에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이따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을 볼 건데 같이 볼래?”임유진이 물었다.그러고 보면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 프로를 안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어릴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 품에 안겨 늘 함께 예능 프로를 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가게 된 뒤로는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예능 프로든 설 특선 영화든 하나도 관심이 없어졌다.설날만 되면 티비 시청 권한은 언제나 임유라에게 있었으니까. 임유진은 진정한 가족 같은 임정호와 방미령, 그리고 임유라 사이
“언제부터 자고 있었습니까?”강지혁이 물었다.“주무신 지 1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이모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곁을 양보했다.강지혁은 허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그는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가 됐을 때만 그녀를 만질 수 있다. 또다시 그녀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토해서는 안 되니까.이모님은 강지혁의 행동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강지혁이 그 대신으로 고용한 사람이라 그간 강지혁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 사모님이지 임유진을 그저 엉겁결에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 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꿰찬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사랑할 거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는 유리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또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이 행동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었다.그때 임유진의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몽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혁아...”강지혁은 그 말에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미안, 내가 깨웠지? 졸리면 더 자도 돼.”“안 잘래. 지금 자면 저녁에 잘 수 없을 테니까.”임유진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강지혁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뻗은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더니 이모님더러 부축하라고 했다.“세수하고 나와. 그동안 식탁 세팅하고 있을 테니까.”“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배가 커진 탓에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세수를 다 하고 식탁 쪽으로 걸어가자 강지혁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은 채 고개를
임유진이 먼저 식사 제안을 해왔다는 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 틀림없었다.똑똑.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조급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허락이 떨어지자 고이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진세령이 탈옥했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경찰들 말로는 오늘 새벽 3시경에 탈옥했다고 합니다. CCTV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고요. 그래서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진세령을 도와준 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한번 훑어 내려갔다.진씨 가문일까? 아니면 소씨 가문?진세령은 연예인이었으니까 뒷배가 있는 사생팬이 그녀를 꺼내줬을 수도 있다.만약 그것도 아니면...“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인간들한테 사람을 붙여.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김재호를 찾아내!”강지혁은 김재호가 꼭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그 시한폭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전에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김재호의 실종이 정말 강문철의 지시와 연관이 있는 건지, 만약 있다고 하면 그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김재호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다....드디어 설 전날이 되고 임유진은 드디어 강지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강지혁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회색 스리피스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조금 핼쑥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하지만 다 좋은데 두르고 있는 목도리와 장갑은 지금 그의 패션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그가 하고 있는 목도리와 털장갑이 1년 전 자신이 그를 위해 뜬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당시 그녀는 오래된 스웨터의 올을 다 풀고 그것으로 그의 목도리와 장갑을 만들었다.“왜? 왜 그렇게 빤히 봐?”강지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아... 그냥 음.. 네가 그 목도리랑 장갑을
임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미안해. 미안해 지영아. 울지 마...”“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한지영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이내 씩씩하게 말을 내뱉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앞만 보며 나아갔으면 좋겠어. 진심이야.”임유진은 그녀의 웃음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텐데도 한지영은 힘든 티 한번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다.“응, 행복해질게. 꼭 그럴게. 그리고 너도 하루빨리 나아서 원래의 한지영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낳으면 맨날 너한테 봐달라고 부탁할 테니까.”임유진의 진심 반 장난 반이 담긴 말에 한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백연신은 이제 잊겠다고,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보내주겠다고, 그와의 기억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주겠다고 말이다....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이제 이틀 뒤면 설날을 맞이하게 된다.임유진은 부드럽게 복부를 쓸어내리며 벌써 강지혁을 못 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요 며칠 그녀는 줄곧 한지영과의 대화를 되뇌었다. 한지영은 그녀에게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앞만 보며 살라고 했다.고통이라...만약 누군가가 강지혁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다’였다.강지혁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잔인한 진실이 눈앞에 놓였을 때 그렇게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렇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걸 차가운 눈길로 그저 지켜보기만 한 남자를 그녀는 아직도 깊이 사랑하고 있다.임유진은 그때 강지혁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그녀는 절대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휴대폰을 뒤척이며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그녀의 배
“대표님은 그저 사모님을 더 잘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고이준이 답했다.“보호요? 감시가 아니라?”임유진의 되물음에 고이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지혁은 일전 그에게 김재호의 일에 관해서는 임유진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다. 곧 출산을 앞둔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싫다면서 말이다.임유진은 고이준의 침묵에 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볼록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아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에 도착해보니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한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치료에 잘 협조한 덕에 한지영은 이제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퇴원하는 날도 이제는 멀지 않아졌다.“유진아, 왔어?”한지영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빨리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너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임산부란 말이야!”임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몸은 좀 어때? 선생님은 뭐라셔?”“다음 주면 퇴원할 수 있대.”한지영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더니 허전한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그녀는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부 다 잘라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다 잘려있었다.퇴원하고 나면 아마 가장 먼저 가발을 사야 할 것이다.“어제 유미 언니가 나 보러 왔어. 언니는 이미 퇴원했대.”“너랑 언니랑 두 사람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언니는 착한 일을 한 보답을 받은 거고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한지영은 새삼 자신이 살아난 것이 놀라웠다.“참, 그러고 보니 뉴스 봤어. 진애령을 죽인 게 진세령이었다면서?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는 줄곧 허재명이 진범인 줄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도 참 대단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까지 속였지?”“속이지 못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응? 그게 무슨 말이야? 속이지 못했다니?”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