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그를 다시 사랑할 때까지라니? 그러면 이곳에 가두겠다는 말이 전부 진심이었다는 건가?“너 미쳤어? 너 이거 납치야!”임유진은 그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소리라도 크게 질러야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미쳤냐고?”강지혁은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귓불부터 시작해 하얗게 질린 두 볼, 그리고 잔뜩 찡그린 미간에까지 입을 맞췄다.“이미 진작에 미쳤을지도 모르지.”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모든 희로애락이 이 여자에게 지배당하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미쳤을지도 모른다.“너 때문에 처음 알았어.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질투할 수도 있구나 하는걸. 손가락을 부러트린 거로는 부족해. 아까는 아예 목을 비틀고 싶었어... 알아?”강지혁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어두운 방 안에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어느새 야릇하게 변해있었다.그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손으로는 그녀의 드레스를 찢기 시작했다.“하지 마!”임유진이 드레스를 꽉 잡으며 외쳤다.“네가 다른 남자가 준 옷을 입는 게 싫어.”강지혁은 차갑게 읊조렸다.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강현수가 그리워 마지않는 여자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옷이니까.강현수는 임유진이 어릴 적 그를 구해준 여자아이라는 걸 모르는데도 결국 임유진에게 이 드레스를 선물해주었다.결국 운명이라는 건가?자기도 모르게 끌리고 헤어져도 결국에는 다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라는 건가?그럼 자신은 뭐지?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먼저 사랑한 건 자신이다. 강현수가 아니라!“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지?”강지혁은 드레스를 다 찢어 버리고는 그녀의 심장 근처에 손을 올렸다.주위가 어두웠던 탓에 그녀는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네 심장이 다시 날 향해 뛸 수 있는 건지 알려줘.”임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강지혁은 이제
한편 한지영은 백연신의 차로 드디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지만 강지혁을 만나지는 못했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강지혁은 오늘 이곳에 임유진을 데려온 적이 없다고 했다.이에 한지영이 저택 안으로 들어가 직접 확인하려 하자 집사는 단호하게 거절하고는 저택 문을 닫아버렸다.문전박대당한 한지영은 닫힌 문을 힘껏 노려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백연신은 초조한 얼굴의 여자친구를 보며 그녀 마음속에 임유진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만약 나도 언젠가 유진 씨와 똑같은 일을 당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열심히 찾아줄 거야?”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지금 그런 말을 할 때예요? 설마 유진이 질투하는 건 아니죠?”“그렇다면?”백연신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한지영은 어이가 없어 잠깐 멈칫하다가 갑자기 뒤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옷을 잡아 힘껏 아래로 내리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백연신 씨뿐이에요. 유진이는 내 친구고요. 그러니까 질투는 이제 그만 해요.”대충 뽀뽀로 달래려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백연신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한지영은 다시 초조한 표정으로 돌아와 그의 팔을 잡았다.“그보다 지금은 어떻게 이 집 안으로 들어갈지 빨리 생각해봐 봐요. 아니면 우리... 담장을 넘는 건 어때요?”그녀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 듯 벽 쪽으로 걸어갔다. 이에 화들짝 놀란 백연신이 서둘러 그녀의 팔아 제지했다.“미쳤어? 여기가 누구 집인지 벌써 잊은 거야? 안쪽 마당에 CCTV는 물론이고 담장 자체에 고압 전류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도둑이라고 인식해 안에서 전류를 흘려보내기라도 하면 너는 끝이야!”한지영은 그런 생각은 못 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그럼 어떡해요. 정면돌파도 안 돼, 담장을 넘는 것도 안 돼,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나는 지금 유진이가 어디 있는지만 알고 싶은 것뿐인데...”강지혁이 여전히 임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 강지혁이 자신을 작정하고 이곳에 가두려고 한 이상 이 방문을 나갈 수는 있어도 이 저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그때 방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걸어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옷가지들이 있었다.“일어났어?”그는 침에 위에 앉아 온몸에 이불을 돌돌 말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임유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그를 노려만 보았다.강지혁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그녀 앞으로 다가가 옷을 내밀었다.“갈아입을 옷 가지고 왔어. 이리 와, 입혀줄게. 사이즈 맞나 보게.”“내가 입을 수 있어!”임유진은 이불을 꽉 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래 그럼. 네가 알아서 입어.”강지혁은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옷을 그녀의 옆에 올려두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안 나가는거지?이렇게 빤히 지켜보면 갈아입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강지혁은 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전에 함께 살았을 때는 내 앞에서 잘만 갈아입었잖아.”“그때는 네가 내 남자친구였으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지금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잖아.”그 말에 강지혁의 안색이 미세하게 변하더니 서서히 두 눈을 감았다.“이제 됐지? 안 볼 테니까 갈아입어.”강지혁은 방에서 나가는 것이 아닌 그저 눈만 감았다.임유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잘생긴 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 이러고 있으니 마치 하나의 정교한 조각상이 따로 없었다.한참을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애써 눈을 돌리고 그가 가져온 옷을 입기 시작했다.그녀는 강지혁의 시선이 지금 차단된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옷을 갈아입을 때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다... 입었어.”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강지혁은 그제야 두 눈을 뜨고는 예쁜 눈동자로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얼굴이 빨개진 건 나 때문이야?”입
“이미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나는 이제 너한테 아무런...”“감정도 없다고?”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그러면 지금은 내가 아닌 누구를 좋아하는데?”임유진은 그의 눈빛이 보내는 위험한 신호를 감지했다.“누구도 안 좋아해. 거기에는 강현수도 포함이야.”그녀는 강현수를 더 이상 둘 사이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자신 때문에 다친 그의 손이 너무나도 걱정됐다.“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강현수가 너를 끌어안도록 내버려 둔 건데? 언제부터 둘이 그렇게 친했다고.”“내가 강현수한테 마음이 있다고 하면 그건 어릴 때의 우정일 뿐일 거야.”임유진은 솔직하게 얘기했다.“그리고 지금은 강현수를 볼 때마다 죄책감만 들어...”“죄책감?”강지혁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강현수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날 찾아 헤맸는데 정작 난 기억이 돌아왔으면서도 진실을 얘기해주지 못했으니까.”그녀는 다 알면서도 강현수가 사람을 착각한 채로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어제 날 갑자기 끌어안은 것도 어릴 때의 그 아이와 내가 겹쳐 보여서 그랬을 거야.”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뒤 강현수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시선은 임유진을 향한 것이 아닌 어릴 때의 그 여자아이를 향한 시선이었다.그러니 어제의 그 포옹은 단지 어릴 적 그녀와 ‘현수’ 사이의 포옹일 뿐이다.“그래. 네가 강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믿을게. 그럼 나는? 날 다시 사랑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강지혁은 몸을 일으켜 두 손을 침대 위에 두어 그녀를 품속에 가둔 채 시선을 마주쳤다.가까워진 거리에 임유진은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독하게도 그녀의 취향이었다. 훤한 이마에 오뚝한 콧날, 그리고 섹시한 입술에 예쁜 눈동자까지. 그 어느 하나 취향이 아닌 곳이 없었다.그는 눈길 하나로 사람을 쉽게 제압하고 또 쉽게 매혹한다. 이대로 계속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홀리고야 만다.이런 남자를 다
“나는 네가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날 사랑하길 원해. 지금은 날 사랑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너는 분명히 다시 전처럼 날 사랑하게 될 거야. 유진아, 나는 단언할 수 있어.”강지혁은 어디서 나온 건지도 모를 자신감으로 단호하게 얘기했다.이 남자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다시 그를 예전처럼 그렇게 사랑하게 될 거라고?이미 산산이 조각나버린 마음이 정말 전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밤이 되고 이경빈은 차량 뒷좌석에 앉아 피곤한 듯 이마를 주물렀다.오늘 그는 변호사와 함께 양육권 문제로 얘기를 나눴다.그가 고용한 변호사는 양육권 소송 전문 변호사로 승률이 언제나 높았다. 변호사의 분석에 따르면 80% 이상의 확률로 양육권을 가지고 올 수 있다고 했다.윤이가 지금까지 쭉 탁유미의 손에서 자랐다고는 하나 그녀에게는 형을 산 경력이 있으니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했다.당시의 사건이 지금에 와서 양육권을 뺏을 중요한 무기가 될 줄이야.이경빈은 그 사건만 떠올리면 심장이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대체 왜 이런 걸까.그는 당시 탁유미를 지목한 것은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수없이 되뇌었다.탁유미는 억한 마음을 품고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고 그는 그걸 직접 목격했다.그 여자가 벌을 받는 건 마땅했다. 공수진은 그 일로 아이를 잃은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까.그러니 탁유미가 낳은 아이를 공수진에게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고작 3년이라는 형을 산 것으로 씻겨 내려갈 죄가 아니었다.하지만... 탁유미가 법정에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외치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꼭 머릿속 깊이 새겨진 낙인처럼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다.그때 그녀는 이미 3년이라는 판결이 났음에도 끝까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재판장 앞에서 억울하다며 목놓아 울부짖고 재판이 끝나고 끌려나갈 때는 한이 서린 목소리로 이경빈을 향해 말했다.“내가 오늘 겪은 이 고통, 언젠간 너도 똑같이 받길 바라!”당시의 이경
이경빈이 타고 있는 차량이 이제 막 화로 3가에 진입했다. 조금만 더 가면 바로 포장마차 거리가 나온다.이경빈은 기사에게 갓길에서 차를 세우라고 한 다음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대표님, 야식거리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아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모실까요?”“아니요. 필요 없습니다.”이경빈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줄줄이 늘어선 포장마차와 푸드트럭, 이경빈의 눈에는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이런 곳을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곧바로 가녀린 몸매의 한 여성에게 고정되었다.많은 인파 속에 묻혀 있어도 그는 여전히 한눈에 그 여성을 알아보았다.얇은 티셔츠에 편한 운동복 바지, 거기에 허리춤에 두른 검은색 앞치마까지 탁유미는 그의 곁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탁유미는 가녀린 팔뚝으로 아주 익숙하게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이경빈은 문득 예전에 그녀가 갈비찜을 해주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다가 잔뜩 태워 먹고 속상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결국 이경빈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둘이서 함께 식사를 해결했고 탁유미는 다 먹은 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너 딱 기다려. 내가 언젠가 너한테 맛있는 갈비찜 먹여줄 거니까! 갈비찜뿐만이 아니라 뭐든 잘하고 말 거야. 그래서 너 살이 통통 오르게 만들 거야.”그러고는 갑자기 풉 하고 웃었다.“왜 웃어?”이경빈이 고개를 갸웃했다.“그냥 네가 살이 통통 올라 배가 나온 아저씨가 되면 어떨까 상상했더니 너무 웃겨서. 그런데 나 요리 솜씨 좋아지면 우리 둘 다 살찌겠다. 하하하.”탁유미는 그때의 다짐대로 지금은 확실히 예전보다 요리 솜씨가 좋아졌지만 이상하게 전보다 훨씬 더 야위었다.이경빈이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 탁유미는 김
“혼자 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옆으로 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착석했다.양복 차림의 그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아 조금 웃기기도 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이 이곳까지 직접 걸음을 해 거기에 음식까지 주문할 줄은 몰랐다.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지?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요리를 하면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곧 전 메뉴가 준비되고 그녀는 이경빈이 앉은 테이블 위에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작은 테이블 위에 메뉴가 넘칠 듯 올려졌다.탁유미는 이 순간 메뉴에 7가지 음식밖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게 아니라면 테이블을 하나 옆에 붙여야 했을 테니까.“음식 솜씨가 예전보다 좋아졌네.”탁유미가 마지막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이경빈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이에 탁유미의 몸이 움찔 떨렸다.“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변하지 않으면 윤이를 먹여 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탁유미는 각종 화장품에 매달렸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기본적인 스킨케어만 하고 생기있는 얼굴을 위해 옅은 립스틱 정도만 바르고 다닌다.게다가 스킨케어 제품도 최대한 양이 많고 저렴한 것으로 구매하며 립스틱은 이미 몇 년째 한 가지만 쓰고 있다.그리고 그녀의 손은 음식을 해야 했기에 칼에 베이고 굳은살이 생겨 성한 구석 하나 없었다.탁유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새로운 손님을 받으러 갔다.이경빈은 바삐 돌아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피곤한 게 눈에 뻔히 보이는 데도 그녀는 손님들을 상대할 때 언제나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예쁜 미소였지만 전처럼 마음속 깊이 우러러 나오는 미소와는 달리 오로지 손님을 상대하기 위한 그런 미소였다.이경빈은 젓가락을 들어 앞에 놓인 음식들을 하나하나 먹어보기 시작했다.그는 셰프의 요리를 맛보기라도 하듯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탁유미는 최대한 이경빈의 존재를 무시하며 그를 다른 손님들과 똑같이 대하려고 애
그 여성은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탁유미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고고하고 항상 제일 좋은 것만 고집하는 이경빈이 고작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전에도 인지도가 없는 여자 연예인이 그의 술잔에 약을 타 그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경빈은 약효가 분명히 약효가 돌고 있음에도 상대방에게 작은 스킨십도 허락하지 않았다.그 뒤로는 예상했던 바와 같이 그 연예인은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됐고 아예 해성시에서 사라져버렸다.탁유미는 그 기억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만 생각해. 과거는 악몽일 뿐이야. 그러니까 그만 생각해.’이경빈이 그녀에게 남겨준 유일하게 좋은 건 윤이 뿐이다.탁유미는 떠오르는 기억을 다시 가라앉힌 뒤 이경빈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다 그의 까만 눈과 그만 딱 마주쳐버리고 말았다.고작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그녀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본 채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이경빈은 무슨 생각인 건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드라마 찍어? 눈빛이 왜 이렇게 뜨거워? 그 뜨거운 눈빛 우리한테도 주면 안 되나?”지독한 술 냄새가 탁유미의 코를 찔러왔다.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이미 거하게 한잔한 두 명의 취객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음흉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중 한 명은 스킨십을 시도하려는 듯 어느새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이에 그녀가 다급하게 옆으로 피해 거리를 두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훑었다.이들은 가게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은 아니었다.아니면 그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사람을 더 고용한 건가?그래서 이제는 성희롱인 건가?“어어? 우리가 뭐 벌레라도 돼? 왜 피하고 그래.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몇 살이야?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