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순간 그의 올곧은 시선이 꼭 자신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 보는 듯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강현수 씨.”임유진은 깊게 한번 숨을 들이켜더니 진지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강현수 씨 말이 맞아요. 나는 강현수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지금 그저 하루하루가 평안하게 흘러가기를 원해요. 연애 놀이 같은 거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아요.”“나는 한 번도 당신을 연애 놀이 대상으로 본 적 없어요.”강현수도 똑같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혹시 내가 했던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겁니까? 그런 거면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을 믿을 수 있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알려줘요.”임유진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나는 지쳤어요. 사랑 같은 거 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이미 지쳐있다고요.”“그러면 받기만 해요.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 때, 그때 나를 사랑해줘요. 나는 지금 당신이 날 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그 말에 임유진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하필 나예요? 나는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살다 나온 여자예요. 그리고 당신이 계속 찾아 헤맸던 사람도 아니고요.”마지막 말을 할 때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그러게요. 왜 당신일까요.”강현수는 조용히 읊조리며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임유진은 그의 손길에 순간 움찔하며 피하려다가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몸이 얼어붙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그의 눈동자 속에는 어쩐지 모를 처연함과 꾹꾹 눌러 담은 갈망이 잔뜩 어려있었다.“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징역형도 산 데다가 내가 찾던 사람도 아닌데 왜 하필 당신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확실히 당신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많았겠죠. 하지만...”강현수는 잠깐 말을 끊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고 그건 내가 당신이라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게 증명되는 일이
“그럼... 사무실 안에서 기다릴게요.”“아니요. 밖에서 기다려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비서의 단호한 대답에 배여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그녀는 어쩐지 비서의 태도가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커피를 가져다줄 때 평소처럼 아부하는 것 같은 느낌은 확연히 사라지고 없었다.강현수가 인터뷰에서 그녀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확실히 선을 그어서일까?배여진은 그 생각만 하면 주먹이 떨렸다.강현수가 그 말을 한 탓에 학교 친구들은 그녀에게 갖은 삿대질과 조롱을 해댔고 드라마 제작팀은 평소 살가웠던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뿐더러 아예 그녀라는 존재를 무시하기도 했다.강현수의 관심이 그녀에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는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때, 회사 임원중 한 명이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와 비서에게 다가와 물었다.“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나?”“네, 어떤 여성분과 함께 법무팀으로 가셨다고 합니다.”“그래, 그건 나도 들었어. 다들 그 여자가 대표님이 인터뷰에서 얘기한 여자라고 난리야. 평소 자기 할 일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여자와 함께 법무팀까지 같이 갔으니 그럴 만도 하지.”임원은 흥미 가득한 얼굴로 얘기했다.“그 여성분이 어떤 분인지 상무님은 혹시 아세요?”비서도 임유진의 얼굴은 못 봤던 터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듣기로는 로펌 직원이라는 것 같던데 자세하게는 잘 몰라.”로펌 직원?!임유진이 틀림없다!배여진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그 여자가 임유진이라고 확신했다.강현수는 지금 자신의 모든 신경을 임유진에게 쏟고 있다.‘안 돼. 이대로는 안 돼!’만약 강현수와 임유진이 함께 하게 되면 배여진은 강현수의 곁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유진아!”임유진은 회사를 나왔다가 배여진의 부름에 자리에 멈춰 섰다.배여진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그때 경찰서에서 현수 씨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 그때 보니까 강지혁 씨는 아직 너 좋아하는 것 같던데, 너랑 지혁 씨... 정말 헤어진 거 맞아?”배여진의 질문에 임유진은 그저 그녀를 담담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배여진은 갑자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알다시피 나는 똑똑하지도 않고 전에는 이상한 사람하고 결혼해 힘들게 살았어. 그러다 현수 씨를 만났고 이제 현수 씨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리고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현수 씨를 좋아해.”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너한테는 강지혁 씨가 있잖아. 나한테 남은 사람은 현수 씨밖에 없어. 그런 나한테서 현수 씨 빼앗아 갈 건 아니지...?”임유진은 그녀를 계속 바라만 보았다.배여진은 그 시선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 혹시 내가 전에 했던 얘기 때문에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그랬다면 미안해. 하지만 현수 씨 일은 진심이야.”“그래서? 나는 강현수를 사랑하지 않아. 강현수한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뭐, 이런 말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러면 언니 마음이 조금 안심될 것 같아? 만약 내가 언젠가 강현수를 좋아하게 되면 지금 한 말을 들먹이며 나를 막아보기라도 하게?”임유진은 기나긴 침묵 끝에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배여진의 뜨끔하는 표정을 보니 그럴 속셈이 맞는 듯했다.“언니, 이러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외할머니 얼굴을 봐서 다시 한번 충고하는데 강현수는 절대 쉬운 남자가 아니야. 지금이라도 사실을 털어놓으면 어쩌면 큰 봉변은 당하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헛된 걸 욕심내면 그때는...”만약 강현수가 배여진의 거짓말을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 그녀를 곱게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어느 때보다 더 잔혹해질지도 모른다.“너 그게 무슨 뜻이야?!”배여진의 표정은 삽
고이준은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서서히 단지를 벗어났다.강지혁은 피곤한 듯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아까 임유진을 본 순간 줄곧 공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는 또다시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그의 모든 감정을 이토록 쉽게 쥐고 흔들 수 있다. 임유진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에게 만족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여자다.강지혁은 자신이 마치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게 설계된 몸이 된 것만 같았다.“고 비서는 내가 아직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 같아?”강지혁의 뜬금없는 질문이 조용한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고이준은 핸들을 꽉 쥔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대체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대표님, 저는 음... 그게...”고이준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이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강지혁은 그의 의도를 파악한 듯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고이준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제가 느끼기에 대표님께서는 아직 임유진 씨를 사랑하시는 거로 보입니다. 아니면 강현수 씨가 임유진 씨에게 사랑을 고백한 후 그렇게 화를 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예전에는 여자들이 어떻게든 강지혁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렸다면 지금은 강지혁이 어떻게든 임유진의 옆에 있으려고 매달리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내가 유진이를 누나라고 부르는 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말이네?”어쩐지 허탈한 듯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이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는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노숙자로 알던 시절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요?”그 시절이 그리운 거라고?강지혁의 눈이 흠칫 떨렸다.확실히 그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그때의 임유진은 강지혁을 완전히 믿고 있었으며 그에게 가족이라는 따뜻함도 주었으니까.그런 따뜻함은 그의 어머니도, 그의 할아버지도 심지어는 그
소지혜가 다시 끌려간 후 임유진은 그 자리에 멈춰 움직일 수가 없었다.소지혜가 그토록 순순히 인정한 게 강현수와 관련 있다는 건가?한편 차 변호사는 소지혜의 말을 듣더니 잠깐 생각에 잠겼다.법원에서 나와보니 입구 쪽에 마세라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강현수가 내리더니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차 변호사는 그를 보고는 임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강현수 씨한테는 유진 씨가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주세요. 아마 강현수 씨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끝나지 못했을 테니까요.”차 변호사는 임유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고는 강현수와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차를 타고 가버렸다.임유진은 계단 위에 멈춰선 채 시선을 내려 강현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강현수는 고개를 들어 그런 임유진을 보며 웃었다.법원에서 나오던 사람들은 강현수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연예인보다 훨씬 더 얼굴이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어디로 가든지 항상 이목이 쏠렸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계단을 내려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사건 무사히 해결된 거 축하해요.”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임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대뜸 이런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이것으로 소지혜가 태도를 바꾼 이유가 그와 연관이 있는 게 확실시되었다.“사건 담당 변호사는 내가 아니라 차정훈 변호사예요.”그 말에 강현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됐든 잘된 거잖아요.”“소지혜 씨가 죄를 인정하게 한 거 현수 씨예요?”임유진이 물었다.“그 여자가 그래요?”“네.”“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강현수는 마치 이런 건 지극히 간단한 일처럼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소지혜가 인정하도록 한 건지는 모른다. 다만 해당 사건으로 소지혜는 더 이상 연예계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도와줘서 고마워요.”“고마우면 지금 나랑 어디 같이 가줘요.”
“안 봐도 돼요. 전에 손 때문에 강지혁이랑 같이 병원에 간 적 있었거든요.”임유진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거절했다.강지혁과 함께 병원에 갔었을 때 의사는 치료 가능한 최적기를 놓쳤다며 그녀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약만 처방해주었다. 다만 비 오는 날만 되면 약 효과가 없는 것인지 으슬으슬 아프기는 했지만 말이다.“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선생님한테 한번 보여요.”강현수는 임유진의 손을 잡고 반강제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안으로 들어와 보니 안은 훨씬 더 썰렁했고 진료실로 들어가니 백발에 흰 수염을 가진 노인 한 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진료실 벽면에는 작은 티비가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해당 드라마는 임유진도 직장 동료들이 얘기한 적 있어 알고 있었다.감동적이고 재밌는 드라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의사가 진료시간에 이토록 열심히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노인은 마치 시사 토론이라도 보는 것처럼 표정이 진지했다.“여사님이 최근 꽂힌 드라마인가 보죠?”강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소영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그를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이런 드라마 좀 안 찍을 순 없어? 마누라가 혼자 보면 될 것을 기어코 나와 함께 보겠다고 매일 밤 난리야. 안 보고 잠이라도 들면 다음 날에 재방송으로 꼭 보라고 신신당부까지 해.”어제저녁 많이 피곤했던 터라 드라마 시작과 함께 잠이 드니 오늘 아침 식사 시간에 어떻게 보다가 잠들 수 있냐며, 오늘 내로 재방송을 보고 오라고 출근 때까지 시달렸다.이딴 드라마가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자 자고로 부부란 취미도 같이 해야 한다며, 그래야 감정이 식지 않고 오래간다고 일리 있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이에 소영훈은 결국 꼬리를 내렸지만 이런 드라마가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공부한다 생각하고 열심히 보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이 드라마 우리 회사 작품 아니에요.”소영훈은 혀를 차더니 티비를 꺼
확실히 강현수 말대로 실력 있는 의사인 듯싶었다.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진의 모습에 강현수의 심장은 한번 또 한 번 내려앉았다.대체 그녀는 그간 어떤 고통을 겪었던 걸까.손톱이 뽑히고 손가락 골절까지... 대체 누가 이딴 짓을 한 거지?!강현수는 순간 그녀의 손을 이렇게 망쳐놓은 이름 모를 상대에게 살인 충동까지 일었다.소영훈은 심각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매만지더니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일단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봐야 하니까 먼저 엑스레이부터 찍읍시다.”임유진은 그를 따라 검사실로 향했다. 소영훈은 엑스레이 결과를 보고 정밀 검사를 위해 CT까지 찍게 하였다.임유진은 다 찍은 후 다시 진료실로 돌아왔고 얼마 안 가 소영훈도 다시 진료실로 들어왔다.“손가락을 다치고 나서 제때 치료를 못 한 탓에 치료할 수 있는 최적기를 놓쳤어요.”“네, 알고 있어요.”강지혁과 함께 찾은 의사 역시 이와 똑같은 얘기를 했었다.“습하고 추운 날이면 손가락이 많이 아팠을 겁니다. 정교한 움직임은 그간 하기 힘들었을 거고요. 하지만 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에요.”소영훈의 소견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제 손, 치료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아마 대학 병원으로 가면 통증 완화 약 처방만 내려줄 겁니다. 하지만 나한테서 치료받으면 손가락 움직임을 조금 더 원활하게 해줄 수 있어요. 젓가락을 쥐거나 글을 쓰는 일상적인 행동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겠죠. 다만 치료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울 거예요. 마취를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임유진은 이제까지 손가락은 평생 이럴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살았다.“괜찮아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어요.”3년간 옥살이하고 나니 웬만한 고통은 다 참을 수 있게 되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세요. 아, 다음에 언제 올 수 있을지는 미리 얘기해 줘요.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해둘 수 있으니까.”“저... 비용은 어느 정도 들까요?”임유진이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데려온 거고 마침 운 좋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니 다행인 거죠.”강현수는 임유진을 차에 태운 뒤 자신도 운전석에 올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동을 걸며 그녀에게 물었다.“손은 언제 다친 거예요?”“이렇게 된 지 한 4년 정도 되네요.”4년이라...그렇다는 건 이제 막 감방에 들어갈 때 생긴 일일 것이다.“감옥에 있을 때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건가요?”임유진은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누가 그랬어요? 대체 누가 손을 그렇게 만들었어요?”강현수의 낮은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대체 누가 그녀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질렀을까.임유진이 옥살이를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그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까지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그러다 오늘 처음으로 그녀가 겪은 고통의 한 조각을 엿보게 되었다.임유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누가 그랬는지 물었어요.”강현수가 다시 한번 물었다.“그걸 지금 말해준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내가 겪은 고통을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 주기라도 할 거예요?”“그래 줄까요?”강현수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전부 다 찾아내 그녀가 겪었던 고통 그 이상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임유진은 강현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차량이 신호등에 걸렸을 때 강현수는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난 진심이에요. 유진 씨가 원한다면 당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들을 전부 다 찾아내 똑같이 갚아 줄 수 있어요.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어요. 유진 씨의 분이 풀린다면 기꺼이 해줄 수 있어요.”그는 진심이었다.그의 눈빛이 그의 입술이 전부 그녀에게 그는 진심이라고 얘기해 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순간 어린 시절 자신의 등에 업힌 채로 얘기했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