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되던 해 텅 빈 집에 홀로 버려진 송서희를 집으로 데려온 심도윤. 하얀 교복 셔츠를 입은 소년이 허리를 굽히고 송서희에게 묻는다. “오빠랑 갈래?” 그날 이후 심도윤은 그녀의 전부가 된다. 심도윤은 송서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붓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그저 여동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와 만나는 많은 여자를 보면서 어린 소녀의 마음 한구석은 차갑게 식어버린다. 심도윤에게 하정준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송서희의 눈에 비친 그는 아주 악질인 나쁜 놈이고 피하기에 급급한 그런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하정준과 송서희는 떳떳하지 못한 관계가 되고 만다. 많은 사람이 모인 술자리, 술기운이 점점 짙어진다. 2층의 불이 꺼진 방, 남자가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 안고 문으로 밀어붙이면서 키스를 퍼붓는 바람에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하정준이 송서희의 귀를 깨물며 협박한다. “네 오빠한테 들키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더 보기송중섭이 혈관이 막혀 수술했다는 소식은 송서희가 맨 나중에야 알았다.심씨 집안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가 박혜은과 심도윤의 아버지 심정원의 대화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들은 것이다.“너 몰랐니?”박혜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송서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아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아서요.”“아니, 네 어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큰 일을 너한테 안 전하니...”박혜은이 사람을 불러 영양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할아버지께서 아직 병원에 계시니까 지금 당장 가서 인사라도 드려 봐.”“가고 싶지 않아요.”송서희는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제가 가면 좋아지기라도 하나요.”“그래도 친할아버지잖아. 심장 수술까지 받으셨는데, 손녀가 한 번도 안 보러 갔다고 소문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아.”박혜은은 그런 꼴이 싫어서라도 그녀를 권유했다.‘불효면 어때.’송서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얘가 정말...”박혜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괜히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삐뚤어지게 키웠다고 떠들 거 아니니.”송서희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던 이미숙은 몹시 걱정스러워하며 당부했다.“가서 어르신을 뵈면 말이라도 곱게 해서 잘 보여야 해요. 좀만 애교 있게, 듣기 좋게...”송서희는 이미 기대를 접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말을 아무리 이쁘게 해봤자 뭐 하겠어요. 아예 날 싫어하는걸.”이미숙은 문간에 서서 그녀가 차에 오르는 걸 지켜보다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착한 아가씨인데, 왜들 이렇게 안 예뻐해 줄까...’귀국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송서희는 송중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중섭은 그녀를 손녀로 대해 준 적이 없었다.따라서 그녀도 송중섭에게 특별히 빚진 느낌 같은 건 없었다. 둘 사이 정이라고는 차라리 생판 남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아니, 적어도 낯선 사람은 그녀를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병문안 오는 것도 그냥 체면 차리기 위한 것뿐이었다.병원
송서희는 그를 못 본 척하고 싶었다. 딱 돌아서서 가 버리면 좋으련만 주변 사람들 눈이 너무 날카로웠다.특히 한 직원은 하정준을 보자마자 싹싹하게 달려가 아부하기 시작했다.“하정준 대표님, 엔젤 소프트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저희를 눈여겨 봐주신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어요. 대표님은 엔젤 소프트의 은인이십니다. 저희 모두 한없이 존경하고 있어요!”하정준은 묘한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그래요? 근데 날 별로 안 존경하는 사람도 있던데.”한 직원은 거짓말스럽게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저희 송 대표님은 대표님 얘기만 나오면 항상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신다니까요!”‘...말 좀 적당히 꾸며 내지.’송서희가 속으로 헛기침을 삼키는 사이, 그 직원은 슬쩍 눈짓까지 보냈다. 어서 맞장구치라는 뜻이다.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이 주신 도움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않고 셔츠의 세 번째 단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런데도 하정준은 그런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그럼 이 단추라도 떼어서 줄까? 둘이 따로 얘기 좀 해 보지 그래?”송서희는 가까스로 핑계를 댔다.“죄송해요. 오늘 아침에 잠을 잘못 자서 목이 뻐근하네요.”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키득거리는 어조로 받았다.“방금 고개 돌리는 거 보니까 난데없이 유연하던데?”“...”송서희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무척 바쁘시고 한 번 입만 열면 수천만씩 왔다 갔다 하는 분이니까... 저희가 시간을 뺏을 순 없죠. 다들 가시죠.”그러곤 바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시종일관 표정도 굳어 있었다.그의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임원들은 물론 그녀의 직원들까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송 대표님 제정신이에요? 감히 하 대표님께 그딴 태도를...!”“당신들은 몰라요!”권하영은 내막도 모르면서 옹호하고 나섰다.“우리
의사가 약품 상자를 들고 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사 한 대를 준비해 송서희에게 놓았다.“무슨 약을 썼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해요. 다만 증상을 완화해 줄 수 있고, 대략 15분쯤 지나면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약간 불편할 순 있지만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의사는 약상자를 챙기며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침대 위 여자를 힐끔거리며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확실했다.하정준은 이미 다시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몹시 산만하면서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무슨 말을 해야 하고 뭘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서 잘 판단해요.”느긋하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의사는 목덜미에 칼이 닿아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일은 반의반 글자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그렇게 대답하자, 하정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서둘러 방을 나가며 문까지 조심스레 닫았다.송서희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이불 위로 펼쳐져 부드럽고 매끄러운 흑색 비단처럼 있었다. 아직도 눈빛이 조금 흐릿하고 피부엔 홍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송서희는 소파 쪽 남자를 돌아봤다.하정준은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담배를 씹듯 물고 있다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왜, 뭘 그렇게 봐?”송서희는 스스로 그에게 매달렸던 일을 떠올리면 부끄러움과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지어 돈을 줄 테니 자자고까지 했으니 생각만 해도 민망하고 치욕적이었다.“...의사를 불렀으면 저한테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하정준은 게으른 목소리로 대꾸했다.“네가 안 물었잖아.”맞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정준은 분위기를 타서 그녀를 놀려 먹기만 했다.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의사까지 불러 준 마당에 뭐라 따질 구실도 없었다. 되려 고맙다고 해야
이런 꼴로 병원에 실려 가면 내일 당장 연성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질 게 뻔했다. 피해자라고 한들 결국 망신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건 송서희 자신이다.심도윤은 육나나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이 난리통이 크게 퍼지면 육나나 쪽 집안에서 불만을 품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송씨 가문도 그녀 때문에 체면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생각하면, 비행기에 태워서 해외로 보내버릴지도 몰랐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송서희는 침대가 놓인 자리 옆에 멍하니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목덜미 쪽 피부는 이미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반면 하정준은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담배를 끼고 완전히 남 일인 듯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송서희는 지금 자기 처지가 뭘 뜻하는지 잘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정재훈이 있었다면 과일칼부터 들이밀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정준이지 않은가.‘도저히 무리인가... 아니, 잘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을지도...’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시끄럽게 싸웠다.눈에 띄게 병원에 옮겨져 떠들썩해지는 것보단 차라리 하정준과 잠자리를 갖는 편이 훨씬 단순해 보였다.그는 애초부터 풍류를 즐기는 타입이라,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살짝 건드려도 지조 운운하며 거절할 확률은 낮아 보였다.‘어차피 난 자존심 구길 대로 구겼고 별소리 다 들어봤는데 뭐...’길게 고민한 끝에, 송서희는 침대보를 꽉 쥐고 고개를 들어 소파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정준 오빠, 저... 좀 도와주실래요?”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송서희는 몰랐다.볼이 약간 붉어지고 맑은 눈동자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쉽게 더럽혀서는 안 될 청초함과 약에 의해 뒤섞인 아찔한 욕망이 교차하며 남자에게 이런 부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위험한 유혹이었다.하정준은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고 은은한 주황빛 조명 아래서 눈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흩뜨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어떻게 도와줄까?”어차피 방법은 뻔했다
하정준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짧은 동작은 어떠한 말보다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송서희는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서 나갔다.잠시 후, 아이들과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는 뒤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 소리에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하정준이 서 있었다. 순간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는 새하얀 왕자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다리가 아주 길어 보였다. 허리를 졸라매는 디자인 탓에 탄탄하고 매끈한 몸 선이 한층 더 부각됐다. 게다가 어깨도 넓고 반듯했다. 그가 걸어 들어오자마자 여자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먼저 달려가려고 난리였다.안지아는 그 순간 자기가 좋아하는 주디고 뭐고 다 잊은 듯 호기롭게 외쳤다.“제 왕자님이 돼 줘요.”그러나 하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턱하고 앉았다.“꿈도 참 크네.”한편, 억지로 반쯤 쭈그려 앉아 있던 난쟁이 분장 친구들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차별이 심한 거냐.”안성훈 역시 기분이 언짢았다.“진짜 희한하네. 아까는 그렇게 부탁해도 거절하더니 갑자기 알아서 입고 나온 거야?”이번 생일파티에는 안지아의 절친들과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각 가문의 아이들까지 잔뜩 몰려들어 마치 놀이공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은 금방 다른 데 관심을 돌리는 법이라 케이크가 들어오자 우르르 달려갔다.송서희도 그 틈에 겨우 조용해졌다. 그녀는 소파 쪽으로 가서 하정준과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녀는 샴페인 한 잔과 작은 케이크를 곁들여 먹었다. 문득 하정준이 있는 쪽을 힐끗 보다가 그의 시선과 부딪쳤다.그는 턱에 손을 괴고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전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송서희는 먼저 말을 걸었다.“뭘 봐요.”하정준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말투엔 장난스러움과 은근히 드러내는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공주를 보고 있지.”송서희는 조롱받는 느낌이었다
거실에서 안성훈은 여전히 하정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너 말이야. 저 멍청이가 서희 괴롭히는 거 봤으면 바로 가서 도와줘야지. 선원 둘 불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결국 배 안에 있는 사람 전부가 다 알게 됐잖아. 서희 성격 여려서 얼마나 신경 쓰이겠어.”“네 머리는 장식이냐.”차금종이 한마디 했다.“정재훈이 하정준이랑 원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자식이 정준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거야? 정준이하고 조금이라도 연관된 건 뭐든지 뺏으려 드는 애야. 원래 서희한테 흥미를 가져봐야 길어야 삼사일 정도였을 텐데, 정준이 보호하는 걸 알면 그때부터 끝까지 쫓아다닐 거라고. 약 먹이고 납치라도 해서 손에 넣으려 들 거야.”“그건 그렇네.”안성훈이 빈정거리듯 말했다.“정재훈 이놈이 평생 사랑하는 건 우리 정준이밖에 없지.”하정준은 느긋하게 눈길을 굴렸다.“저기 내려가서 정재훈이랑 같이 있고 싶으면 말해. 너희 둘 쌍쌍이 날아가게 해줄게.”“아쉽게도 정재훈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안성훈은 고소하다는 듯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리고 너, 앞으로 서희한테서 좀 떨어져 있어. 안 그러면 그 짐승 같은 놈이 또 서희를 물고 늘어질 거야.”하정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태도였고,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트럼프 카드 한 장을 쥔 채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그날 해 질 무렵 요트가 항구에 닿았다. 구름은 노을에 물들어 분홍빛 오렌지색으로 점차 물들었고 바다는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았다.육나나는 심도윤의 차에 올랐다. 심도윤은 조수석 문을 닫고 돌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 말도 하기 전에 송서희가 먼저 눈치를 챘다.“나나를 태워줘요. 저는 성훈 오빠 차로 갈게요.”심도윤은 그녀에게 당부했다.“집에 가거든 푹 쉬고 열 안 내리면 약 챙겨 먹어.”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한편, 하정준의 코니세그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안성훈의 차는 그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잠을 자고 난 송서희는 스스로 체온을 쟀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여전히 몸이 허약했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에는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수현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농담을 보내며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했다.송서희는 서수현을 안심시키려는 듯 메시지를 보냈다.“나중에 건강해지면 저랑 같이 와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창가로 가서 서수현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때 아래 갑판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갑판에서는 심도윤과 정재훈이 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 얼어붙었고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전날 밤 정재훈이 송서희를 건드린 사건이 선원들 사이에서 소문처럼 흘러 결국 심도윤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심도윤이 정재훈을 찾았을 때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누군가 배에 데려온 모델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심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나가요.”모델은 곧장 일어나 도망쳤다.“왜 이렇게 성질부려요.”정재훈이 비웃었다.“설마 저한테 따지려고 온 거예요? 저는 그냥 도윤 씨 동생이랑 장난 좀 친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서희도 멀쩡하고요.”“구아는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심도윤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전에도 경고했을 텐데, 다시는 구아를 건드리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정재훈은 태연히 술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심도윤과 마주 섰다.“여자는 그냥 재미로 노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안 놀아도 다른 누군가가 놀겠죠. 어릴 땐 몰라도 이제 성인이 됐는데 이렇게까지 감싸는 이유가 뭐예요? 설마 직접 데리고 놀려고요?”심도윤은 점잖은 품격을 가진 신사였고, 정재훈은 전형적인 약자를 괴롭히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심도윤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을 때, 그는 미소를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노크가 두어 번 들렸다. 이미 쉬고 있던 의사가 급히 불려 나와 송서희의 금속에 베인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고 약을 발라줬다.상처가 조금 깊어 의사는 파상풍 주사를 놓고 덧붙였다.“상처가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물기 전까지 물에 닿으면 안 됩니다.”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따랐다.치료를 마친 의사는 송서희와 하정준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 일을 심도윤 도련님께 알려야 할까요?”그는 이 상황이 하정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송서희는 물에 젖은 몸을 수건으로 감싼 채였고 발에는 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뭔가 수상쩍었다.의사는 양쪽 모두를 건드리기 어려웠다. 말을 하면 하정준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웠고, 말을 하지 않으면 내일 심도윤이 알게 되었을 때 책임을 묻지 않을까 걱정되었다.하정준은 무심하게 말했다.“알아서 해요.”예전 같았으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송서희는 가장 먼저 심도윤을 찾아가 서운한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심도윤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심도윤은 약혼자와 함께 바다에 나왔다. 하지만 그 좋은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깨질 가능성이 있었다. 심도윤은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고, 만약 이로 인해 정씨 가문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모두 그녀의 책임으로 돌려질 상황이었다.‘내가 없으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송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내일 얘기할게요.”그녀는 육나나가 정말로 심도윤의 방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문을 두드려 방해할 수도 없었다.스위트룸은 같은 층에 있었다. 치료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서희와 하정준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앞뒤로 걸었다.방 앞에 도착한 송서희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 하정준에게 말했다.“정준 오빠, 아까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제가 괜히 오빠한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무심코 오빠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방음 처리된 소재 덕분에 선실은 완벽한 고요에 싸여 있었다. 스위트룸은 호텔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송서희는 침대 옆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졌다.5월 초의 바다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수영장의 물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마치 유연한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몇 번이고 왕복으로 헤엄쳤다. 지쳐서 멈출 때쯤, 그녀는 물 위에 떠올라 짙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라앉혔다. 물속으로 깊숙이 내려가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 듯했다. 그리고 부력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지탱하며 보호해 주는 듯했다.심도윤은 그녀에게 있어 바로 이런 물과 같은 존재였다.만약 그날 그녀가 길가에서 울고 있을 때 심도윤이 멈추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됐을까? 그녀는 나쁜 사람에게 납치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선량한 사람을 만났을까?만약 심도윤이 그녀를 송씨 가문에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방치되어 왜곡된 병적인 인격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그 빈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오늘 밤은 달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숨이 한계에 달하자, 송서희는 물 위로 몸을 솟구쳐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텅 비어 있던 수영장 가장자리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정재훈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 밤중에 수영하러 나왔어? 혼자 외로워서 잠이 안 와?”송서희는 순간적으로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다른 쪽으로 헤엄쳐 사다리를 잡고 물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수영을 나온 것은 단지 하정준과의 싸움 때문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져서 즉흥적으로 결심한 것이었다. 게다가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았다.검은 드레스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채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수건을 집으려는 순간, 정재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며 그녀를 주시했다.송
송서희는 이번 귀국 스케줄이 급하게 잡힌 거라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비행기가 드디어 착륙했다. 공항에 흘러나오는 모국어와 주변에 오가는 행인들을 보고 나서야 고국 땅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송서희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안에는 평범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머릿결 사이로 금지옥엽의 귀티가 흘러넘쳤다.운전기사가 물었다.“어디로 모실까요?”“제원 병원으로 가주세요.”4월의 연성은 만물이 깨어나는 생기로 흘러넘쳤다. 송서희가 5년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이번에 급하게 귀국한 건 선배인 서수현이 아파서였다.병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삐쩍 마른 서수현이 양반 자세로 침대에 앉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색즉시공, 공즉시색. 남자한테는 마음을 줘선 안 돼..”송서희는 그제야 걱정을 내려놓았다.“한 번 아프더니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았어요?”불경을 읽던 서수현은 송서희를 보자마자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서희야, 여긴 어떻게 왔어?”“선배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들어와야죠.”송서희가 침대 옆에 앉았다.“의사 선생님이 뭐래요?”얼마 전 서수현은 골수 형성 이상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쉽게 말해 조혈모세포로 인한 악성 종양인데 어떤 사람들은 백혈병의 초기 단계라고도 했다.수년간 만난 남자 친구는 서수현이 입원한 틈에 회사의 모든 현금과 핵심 인원들을 빼돌렸고 서수현이 2년 동안 연구한 기술 자료까지 전부 가져갔다.“좋은 소식 하나랑 나쁜 소식 하나 있어.”서수현이 말했다.“의사 선생님이 그러는데 지금 중위험 두 번째 단계라 백혈병이 될 가능성이 커서 항암 치료를 진행해야 한대.”“그럼 좋은 소식은요?”지금 이런 상황에 송서희는 긍정적인 소식을 듣고 싶었다.“좋은 소식은 항암 치료를 하면 악화되는 걸 막을 수는 있지만 완치는 안 되고 또 난소 기능에도 영향을 줘서 나중에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대.”송서희는 그녀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바꿔서 말한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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