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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먹기 전엔 따귀부터

Author: 미야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2-31 14:24:37
조금 전까지 비꼬던 빨간 옷 여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뒤에서 남의 험담을 하다가 딱 걸린 것보다 더 난처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친한 친구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왜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송서희의 눈매는 부드러웠지만 그들을 볼 때는 차갑고 냉정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문자라도 보내면 되잖아요. 내 번호가 없었어요?”

상대방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서희 씨가 번호를 바꾼 줄 알았죠.”

“보내 봤으면 안 바꿨다는 걸 알았을 텐데.”

송서희는 그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지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까 하던 말 왜 하다가 말아요?”

빨간 옷 여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냥 남들이 하는 말을 들은 거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서희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하는 소리가 유독 찰지고 맑았다.

빨간 옷 여자는 송서희가 손을 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고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주제넘었어요. 남들이 뭐라 지껄이든 다시는 듣지 않을게요. 서희 씨, 화내지 말아요...”

송서희는 파란 옷 여자를 쳐다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얘가 혼자 얘기한 거라고요.”

송서희가 차갑게 말했다.

“대화도 서로 맞장구를 쳐야 오가죠. 아까 맞장구를 엄청 잘 치더니 이제 와서 배신하려고요?”

그녀가 다시 손을 들자 두 사람은 동시에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송서희는 옆 테이블에서 2단 크림 케이크를 가져와 그들 앞에 놓았다.

“오늘 우리 오빠 생일이라서 기분을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안 그러면 절대 뺨 한 대로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입을 조심하지 않으면 막아버려야지 어쩌겠어요.”

말투는 가벼웠지만 기세는 참으로 위압적이었다.

“이 케이크를 다 먹기 전까지 여기서 나갈 생각 말아요.”

송서희는 말을 마치고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두 사람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커다란 케이크를 보면서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송서희가 발걸음을 옮긴 그때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계단 난간에 한 사람이 기대 서 있었다.

하정준은 막 잠에서 깬 듯한 모습이었는데 회색 실크 셔츠의 단추를 헐렁하게 풀어헤치고 있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나른함이 묻어 있었다. 그 바람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듯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의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 찬 걸 보니 조금 전의 소동을 모두 본 게 분명했다.

송서희는 잠시 멈칫했다.

“정말 무서운 여자야.”

하정준은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며 말했다.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 아니겠지?”

송서희는 조금 전 따귀를 날린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살살 때린 건 아닌지 후회했다.

하지만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위압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여 심도윤이 그녀를 잘 가르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난 그냥 케이크를 권했을 뿐이에요.”

하정준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에서 내려왔다.

“케이크를 먹기 전에 따귀부터 때리는 건 너희 집안 규칙이야?”

그의 키가 하도 커서 옆으로 지나갈 때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송서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그를 불렀다.

“정준 오빠.”

하정준은 돌아서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지금 엔젤 소프트는 대진 그룹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만약 은성 그룹과 계약한다면 공들여 만든 것을 공짜로 넘겨줘서 빈털터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약하지 않으면 기회가 대진 그룹에 넘어갈 것이고 이 역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엔젤 소프트는 서수현이 맨손으로 일궈낸 회사다. 대진 그룹 같은 자금이 넉넉한 대기업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서수현은 액체 수소 드론 연구에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공짜로 넘겨주는 건 변함이 없었고 누구에게 주든 파산 위기는 무조건 직면해야 했다. 하정준을 만난 이상 어떻게든 다시 노력해봐야 했다.

송서희가 말했다.

“대진 그룹에서 제시한 가격이 매우 낮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꼭 좋은 사업인 건 아니에요. 엔젤 소프트는 앞으로의 기술 개발 성과를 은성 그룹에 먼저 공유할 것을 약속할 수 있어요. 장기적으로 보면 은성 그룹이 엔젤 소프트와 협력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수현 선배의 상황이 정말 어려워요. 이 협력 선배한테 엄청 중요한데 기회 한번 주면 안 될까요?”

하정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매너 있는 태도를 보여주며 여유롭게 물었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떡할 건데?”

조금 전까지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매의 눈으로 송서희를 쏘아보았다.

송서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하정준이 말했다.

“왜? 나한테도 케이크를 권하려고?”

“...”

송서희는 자신이 하정준에게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심도윤의 이름을 꺼냈다.

“우리 오빠랑 친구잖아요. 오빠를 봐서라도 도와주면 안 돼요?”

하정준은 몸을 곧추세우고 다시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네 오빠의 체면을 이용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나랑 얘기하라고 해.”

송서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원래 오늘 심도윤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이 일로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여자들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심도윤을 그런 말투로 헐뜯는 것을 원치 않았다.

송서희가 입을 열기만 하면 심도윤이 분명히 도와줄 것이고 심도윤이 나서서 한마디만 하면 그녀와 서수현이 마주한 문제도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그의 보호를 받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진 못해도 적어도 의지하지는 말아야 했다.

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하정준은 이미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홀로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도 못 들은 척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수많은 케이크 중에서 아무거나 고른 다음 포크를 들었다.

송서희는 하고 싶은 얘기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반짝이는 은색 포크가 그녀의 블루베리 무스 케이크에 꽂히더니 하정준의 입으로 들어갔다.

송서희는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시 꾹 삼켰다.

그녀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몇 년 사이 틈을 타서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뒤에서는 험담하면서 앞에서 아첨하는 건 이 바닥 사람들의 주특기였다.

송서희가 심도윤과 정확히 무슨 관계든 관계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도 정 안 되면 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심도윤은 송서희를 보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고는 옆에 의자를 하나 더 놓아달라고 했다.

송서희가 앉으려던 그때 안성훈이 손을 뻗어 의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희 넌 내 옆에 와서 앉아. 네가 도윤이 옆에 앉을 때마다 운이 너무 좋아지잖아. 오늘은 나한테 그 운을 좀 줘.”

심도윤이 말했다.

“실력이 없으면 구아도 너를 구할 수 없어.”

송서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성훈은 카드 게임을 20년 넘게 했지만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녀가 아니라 재물의 신이 와도 구할 수 없었다.

그가 매번 돈을 잃는 건 다 잃을 만해서 잃는 것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심도윤의 휴대폰 화면이 켜지면서 메시지가 떴다. 송서희는 대충 힐끗거렸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심도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잠시 후 전화가 오자 그제야 휴대폰을 들고 일어서면서 송서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네가 대신 해줘.”

송서희는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마침 좋은 패를 받아서 이 판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상대편 남자가 물었다.

“하 대표님, 와서 카드 게임 하지 않을래요?”

배불리 먹은 하정준이 다가오더니 상대방이 양보한 자리에 앉았다. 그는 패를 한번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패가 왜 이래?”

송서희의 옆에 앉은 차금종이 웃으며 말했다.

“서희가 여기 있는데 다른 사람의 패가 좋을 수 있겠어?”

그가 말을 마치고 카드 한 장을 내놓자 송서희는 그 카드를 가져오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하정준이 카드 두 장을 던졌다.

송서희는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하정준이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지 않는 카드를 안성훈에게 준 바람에 송서희는 세 번을 도는 동안 한 장도 가져오지 못했다.

네 번째 만에 그녀는 드디어 카드를 가져올 기회를 잡았다. 운이 한꺼번에 몰려와 카드를 가지려는데 하정준이 찬물을 확 끼얹었다.

“내려놔.”

송서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양심이 없는 것.”

옆에 있던 안성훈도 알아차렸다.

“서희가 이긴 것 같은데?”

‘하정준은 지금 우리한테 갑이야.’

송서희는 마음속으로 두 번 외쳤다. 서수현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아니에요.”

하정준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뒷다리로 지탱하면서 의자에 기댄 채 천천히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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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Updated :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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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사귀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귀었다고 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그리고 만약 남자친구가 생기면 박혜은도 안심하고 더 이상 심도윤에게 마음을 못 접은 도둑처럼 자신을 경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안성훈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어이쿠야, 어떤 외국 녀석인데? 어떻게 생겼어? 외국인이야, 한국인이야? 왜 우리한테 안 보여줬어?”“헤어졌어요.”거짓말쯤이야 간단했다.“왜 헤어졌는데?”송서희는 그가 캐묻는 게 귀찮아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그냥 재미로 만났던 거예요.”그 말이 나오자 몇 초간 공기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송서희는 강렬한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그 시선을 따라보니 하정준과 눈이 마주쳤다.‘뭘 봐?’송서희는 그 말이 뭐가 그렇게 놀라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여기 있는 도련님들을 보면 하나같이 만난 여자가 자기가 아는 남자보다 많았다.다만 평소에는 너무 얌전했고 심도윤이 성안의 공주님처럼 그녀를 보호했기에 그런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오빠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하정준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흥미로운 듯이 물었다.“몇 명이나 만났는데?”‘무례한 자식!!’송서희는 곤란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그럼 정준 오빠는요? 몇이나 만났는데요?”하정준도 쉽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난 남자랑 안 놀아.”‘그래...’“아이고, 우리 서희 다 컸네.”안성훈은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여동생이 세 살 때 처음으로 자기 뺨을 때렸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꼬맹이였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남자 마음을 갖고 놀 줄도 알고.”송서희가 말했다.“오빠는 스물두 살 때 여자랑 안 놀았어요?”“헐. 그러네.”안성훈은 웃으며 말했다.“서희는 어떤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하는데? 오빠한테 말해 봐. 오빠가 더 좋은 남자 찾아줄게.”송서희의 이상형은 이미 완벽한 샘플이 존재했다.점잖고 다정하고 항상 그녀에게 한없이 인내심 넘치는 사람이었다

    Last Updated : 2024-12-31
  • 금지된 사랑   제14화 미래 새언니

    박혜은과 가정부들이 다 자는 시간이라 심 씨 저택은 불이 꺼져 있었고 복도에만 송서희를 위한 불이 켜져 있었다. 이 씨 아주머니는 겉옷을 걸치고 방에서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왜 이렇게 늦었어요? 사모님께서 아가씨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요. 계속 기다리는 걸 내가 겨우 설득해서 올라가 쉬게 했어요. 배 안 고파요? 국수라도 끓여 드릴까요?”“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어서 들어가 쉬세요. 저도 이만 자러 갈게요.”송서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미숙은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가정부 방으로 돌아갔다.송서희는 불을 켜지 않고 살금살금 위층 침실로 돌아가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아침에 박혜은이 그녀를 보고 물었다.“어젯밤에 어디 갔었니? 아주머니 말로는 새벽에야 들어왔다던데.”“성훈 오빠랑 술 마시고 왔어요.”송서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녀의 표정에 아무런 이상이 없자 박혜은의 불안한 마음은 그제야 가라앉았다.이미숙이 커피를 내려 가져오자 송서희는 프라이를 먹으면서 맞은편에서 박혜은이 하는 말을 들었다.“도윤이도 생일 지나면 서른하나인데 결혼할 때가 됐어. 어제 아빠랑 얘기했는데 연성에서 집안 좋은 아가씨 좀 찾아보려고. 오빠도 괜찮다고 하더라. 너 요즘 시간 있으면 같이 좀 봐줄래?”“네, 좋아요.”송서희는 고개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어머니가 고른 사람이라면 분명 다 좋으실 거예요.”사실 박혜은은 그냥 떠보는 거였고 송서희랑 같이 사진 한 번 본 게 전부였다.심씨 가문 같은 명문가에서의 결혼이란 두 가문의 이익을 위한 결합이었기에 송서희와 같은 후배들이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심씨 가문의 사람도 아니지 않은가.이런 계층에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니 심도윤의 결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막 샤워를 마쳤을 때 안성훈의 전화가 걸려왔다.안성훈은 나가서 놀자고 했지만 송서희는 거절했다.“오빠들끼리 놀아요.

    Last Updated :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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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지된 사랑   제40화 누가 때렸어

    송중섭이 혈관이 막혀 수술했다는 소식은 송서희가 맨 나중에야 알았다.심씨 집안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가 박혜은과 심도윤의 아버지 심정원의 대화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들은 것이다.“너 몰랐니?”박혜은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송서희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아무도 제게 알려 주지 않아서요.”“아니, 네 어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큰 일을 너한테 안 전하니...”박혜은이 사람을 불러 영양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할아버지께서 아직 병원에 계시니까 지금 당장 가서 인사라도 드려 봐.”“가고 싶지 않아요.”송서희는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며 무심히 대답했다.“제가 가면 좋아지기라도 하나요.”“그래도 친할아버지잖아. 심장 수술까지 받으셨는데, 손녀가 한 번도 안 보러 갔다고 소문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아.”박혜은은 그런 꼴이 싫어서라도 그녀를 권유했다.‘불효면 어때.’송서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얘가 정말...”박혜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괜히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삐뚤어지게 키웠다고 떠들 거 아니니.”송서희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던 이미숙은 몹시 걱정스러워하며 당부했다.“가서 어르신을 뵈면 말이라도 곱게 해서 잘 보여야 해요. 좀만 애교 있게, 듣기 좋게...”송서희는 이미 기대를 접었다는 투로 중얼거렸다.“말을 아무리 이쁘게 해봤자 뭐 하겠어요. 아예 날 싫어하는걸.”이미숙은 문간에 서서 그녀가 차에 오르는 걸 지켜보다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착한 아가씨인데, 왜들 이렇게 안 예뻐해 줄까...’귀국한 지 한 달이 넘도록, 송서희는 송중섭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중섭은 그녀를 손녀로 대해 준 적이 없었다.따라서 그녀도 송중섭에게 특별히 빚진 느낌 같은 건 없었다. 둘 사이 정이라고는 차라리 생판 남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아니, 적어도 낯선 사람은 그녀를 증오하지는 않을 것이다.병문안 오는 것도 그냥 체면 차리기 위한 것뿐이었다.병원

  • 금지된 사랑   제39화 묘한 이중성

    송서희는 그를 못 본 척하고 싶었다. 딱 돌아서서 가 버리면 좋으련만 주변 사람들 눈이 너무 날카로웠다.특히 한 직원은 하정준을 보자마자 싹싹하게 달려가 아부하기 시작했다.“하정준 대표님, 엔젤 소프트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저희를 눈여겨 봐주신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어요. 대표님은 엔젤 소프트의 은인이십니다. 저희 모두 한없이 존경하고 있어요!”하정준은 묘한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그래요? 근데 날 별로 안 존경하는 사람도 있던데.”한 직원은 거짓말스럽게 손사래를 쳤다.“그럴 리가요! 저희 송 대표님은 대표님 얘기만 나오면 항상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신다니까요!”‘...말 좀 적당히 꾸며 내지.’송서희가 속으로 헛기침을 삼키는 사이, 그 직원은 슬쩍 눈짓까지 보냈다. 어서 맞장구치라는 뜻이다.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하 대표님이 주신 도움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지 않고 셔츠의 세 번째 단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그런데도 하정준은 그런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다.“그럼 이 단추라도 떼어서 줄까? 둘이 따로 얘기 좀 해 보지 그래?”송서희는 가까스로 핑계를 댔다.“죄송해요. 오늘 아침에 잠을 잘못 자서 목이 뻐근하네요.”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키득거리는 어조로 받았다.“방금 고개 돌리는 거 보니까 난데없이 유연하던데?”“...”송서희는 최대한 예의를 차리는 척하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무척 바쁘시고 한 번 입만 열면 수천만씩 왔다 갔다 하는 분이니까... 저희가 시간을 뺏을 순 없죠. 다들 가시죠.”그러곤 바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시종일관 표정도 굳어 있었다.그의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임원들은 물론 그녀의 직원들까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송 대표님 제정신이에요? 감히 하 대표님께 그딴 태도를...!”“당신들은 몰라요!”권하영은 내막도 모르면서 옹호하고 나섰다.“우리

  • 금지된 사랑   제38화 순위

    의사가 약품 상자를 들고 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사 한 대를 준비해 송서희에게 놓았다.“무슨 약을 썼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해요. 다만 증상을 완화해 줄 수 있고, 대략 15분쯤 지나면 효과가 나타날 겁니다. 약간 불편할 순 있지만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예요.”의사는 약상자를 챙기며 처음부터 끝까지 시선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침대 위 여자를 힐끔거리며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확실했다.하정준은 이미 다시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몹시 산만하면서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무슨 말을 해야 하고 뭘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서 잘 판단해요.”느긋하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의사는 목덜미에 칼이 닿아 있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일은 반의반 글자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겁니다.”그렇게 대답하자, 하정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의사는 서둘러 방을 나가며 문까지 조심스레 닫았다.송서희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이불 위로 펼쳐져 부드럽고 매끄러운 흑색 비단처럼 있었다. 아직도 눈빛이 조금 흐릿하고 피부엔 홍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송서희는 소파 쪽 남자를 돌아봤다.하정준은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담배를 씹듯 물고 있다가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왜, 뭘 그렇게 봐?”송서희는 스스로 그에게 매달렸던 일을 떠올리면 부끄러움과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심지어 돈을 줄 테니 자자고까지 했으니 생각만 해도 민망하고 치욕적이었다.“...의사를 불렀으면 저한테 미리 말해 주지 그랬어요?”하정준은 게으른 목소리로 대꾸했다.“네가 안 물었잖아.”맞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먼저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하정준은 분위기를 타서 그녀를 놀려 먹기만 했다.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도움을 받았고, 의사까지 불러 준 마당에 뭐라 따질 구실도 없었다. 되려 고맙다고 해야

  • 금지된 사랑   제37화 어떻게 도와줄까

    이런 꼴로 병원에 실려 가면 내일 당장 연성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질 게 뻔했다. 피해자라고 한들 결국 망신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건 송서희 자신이다.심도윤은 육나나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이 난리통이 크게 퍼지면 육나나 쪽 집안에서 불만을 품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송씨 가문도 그녀 때문에 체면에 스크래치가 났다고 생각하면, 비행기에 태워서 해외로 보내버릴지도 몰랐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송서희는 침대가 놓인 자리 옆에 멍하니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목덜미 쪽 피부는 이미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반면 하정준은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담배를 끼고 완전히 남 일인 듯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송서희는 지금 자기 처지가 뭘 뜻하는지 잘 알았다. 만약 이 자리에 정재훈이 있었다면 과일칼부터 들이밀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정준이지 않은가.‘도저히 무리인가... 아니, 잘 생각하면... 안 될 것도 없을지도...’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시끄럽게 싸웠다.눈에 띄게 병원에 옮겨져 떠들썩해지는 것보단 차라리 하정준과 잠자리를 갖는 편이 훨씬 단순해 보였다.그는 애초부터 풍류를 즐기는 타입이라,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살짝 건드려도 지조 운운하며 거절할 확률은 낮아 보였다.‘어차피 난 자존심 구길 대로 구겼고 별소리 다 들어봤는데 뭐...’길게 고민한 끝에, 송서희는 침대보를 꽉 쥐고 고개를 들어 소파 위의 남자를 바라봤다.“정준 오빠, 저... 좀 도와주실래요?”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송서희는 몰랐다.볼이 약간 붉어지고 맑은 눈동자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쉽게 더럽혀서는 안 될 청초함과 약에 의해 뒤섞인 아찔한 욕망이 교차하며 남자에게 이런 부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위험한 유혹이었다.하정준은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고 은은한 주황빛 조명 아래서 눈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흩뜨리지 않은 채 대꾸했다.“어떻게 도와줄까?”어차피 방법은 뻔했다

  • 금지된 사랑   제36화 이상한 것

    하정준이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짧은 동작은 어떠한 말보다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송서희는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을 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서 나갔다.잠시 후, 아이들과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그녀는 뒤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 소리에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하정준이 서 있었다. 순간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그는 새하얀 왕자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다리가 아주 길어 보였다. 허리를 졸라매는 디자인 탓에 탄탄하고 매끈한 몸 선이 한층 더 부각됐다. 게다가 어깨도 넓고 반듯했다. 그가 걸어 들어오자마자 여자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다들 먼저 달려가려고 난리였다.안지아는 그 순간 자기가 좋아하는 주디고 뭐고 다 잊은 듯 호기롭게 외쳤다.“제 왕자님이 돼 줘요.”그러나 하정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턱하고 앉았다.“꿈도 참 크네.”한편, 억지로 반쯤 쭈그려 앉아 있던 난쟁이 분장 친구들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차별이 심한 거냐.”안성훈 역시 기분이 언짢았다.“진짜 희한하네. 아까는 그렇게 부탁해도 거절하더니 갑자기 알아서 입고 나온 거야?”이번 생일파티에는 안지아의 절친들과 같은 반 친구들, 그리고 각 가문의 아이들까지 잔뜩 몰려들어 마치 놀이공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은 금방 다른 데 관심을 돌리는 법이라 케이크가 들어오자 우르르 달려갔다.송서희도 그 틈에 겨우 조용해졌다. 그녀는 소파 쪽으로 가서 하정준과는 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녀는 샴페인 한 잔과 작은 케이크를 곁들여 먹었다. 문득 하정준이 있는 쪽을 힐끗 보다가 그의 시선과 부딪쳤다.그는 턱에 손을 괴고 나른하게 앉아 있었다. 대체 얼마나 전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송서희는 먼저 말을 걸었다.“뭘 봐요.”하정준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돌았다. 말투엔 장난스러움과 은근히 드러내는 가벼움이 섞여 있었다.“공주를 보고 있지.”송서희는 조롱받는 느낌이었다

  • 금지된 사랑   제35화 달래기 어렵네

    거실에서 안성훈은 여전히 하정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너 말이야. 저 멍청이가 서희 괴롭히는 거 봤으면 바로 가서 도와줘야지. 선원 둘 불러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결국 배 안에 있는 사람 전부가 다 알게 됐잖아. 서희 성격 여려서 얼마나 신경 쓰이겠어.”“네 머리는 장식이냐.”차금종이 한마디 했다.“정재훈이 하정준이랑 원한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자식이 정준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모르는 거야? 정준이하고 조금이라도 연관된 건 뭐든지 뺏으려 드는 애야. 원래 서희한테 흥미를 가져봐야 길어야 삼사일 정도였을 텐데, 정준이 보호하는 걸 알면 그때부터 끝까지 쫓아다닐 거라고. 약 먹이고 납치라도 해서 손에 넣으려 들 거야.”“그건 그렇네.”안성훈이 빈정거리듯 말했다.“정재훈 이놈이 평생 사랑하는 건 우리 정준이밖에 없지.”하정준은 느긋하게 눈길을 굴렸다.“저기 내려가서 정재훈이랑 같이 있고 싶으면 말해. 너희 둘 쌍쌍이 날아가게 해줄게.”“아쉽게도 정재훈은 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안성훈은 고소하다는 듯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그리고 너, 앞으로 서희한테서 좀 떨어져 있어. 안 그러면 그 짐승 같은 놈이 또 서희를 물고 늘어질 거야.”하정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태도였고,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트럼프 카드 한 장을 쥔 채 손가락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그날 해 질 무렵 요트가 항구에 닿았다. 구름은 노을에 물들어 분홍빛 오렌지색으로 점차 물들었고 바다는 내내 푸른 빛을 잃지 않았다.육나나는 심도윤의 차에 올랐다. 심도윤은 조수석 문을 닫고 돌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 말도 하기 전에 송서희가 먼저 눈치를 챘다.“나나를 태워줘요. 저는 성훈 오빠 차로 갈게요.”심도윤은 그녀에게 당부했다.“집에 가거든 푹 쉬고 열 안 내리면 약 챙겨 먹어.”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봤다.한편, 하정준의 코니세그는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안성훈의 차는 그

  • 금지된 사랑   제34화 역시 하정준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잠을 자고 난 송서희는 스스로 체온을 쟀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여전히 몸이 허약했고 힘이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에는 많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수현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농담을 보내며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고 했다.송서희는 서수현을 안심시키려는 듯 메시지를 보냈다.“나중에 건강해지면 저랑 같이 와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창가로 가서 서수현에게 보낼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그때 아래 갑판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갑판에서는 심도윤과 정재훈이 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 얼어붙었고 신발을 신을 틈도 없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전날 밤 정재훈이 송서희를 건드린 사건이 선원들 사이에서 소문처럼 흘러 결국 심도윤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심도윤이 정재훈을 찾았을 때 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누군가 배에 데려온 모델을 끌어안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심도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엮이고 싶지 않으면 나가요.”모델은 곧장 일어나 도망쳤다.“왜 이렇게 성질부려요.”정재훈이 비웃었다.“설마 저한테 따지려고 온 거예요? 저는 그냥 도윤 씨 동생이랑 장난 좀 친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서희도 멀쩡하고요.”“구아는 당신 장난감이 아니에요.”심도윤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전에도 경고했을 텐데, 다시는 구아를 건드리지 마요.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정재훈은 태연히 술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심도윤과 마주 섰다.“여자는 그냥 재미로 노는 거 아니에요? 제가 안 놀아도 다른 누군가가 놀겠죠. 어릴 땐 몰라도 이제 성인이 됐는데 이렇게까지 감싸는 이유가 뭐예요? 설마 직접 데리고 놀려고요?”심도윤은 점잖은 품격을 가진 신사였고, 정재훈은 전형적인 약자를 괴롭히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다.심도윤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꽂혔을 때, 그는 미소를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 금지된 사랑   제33화 달래기

    노크가 두어 번 들렸다. 이미 쉬고 있던 의사가 급히 불려 나와 송서희의 금속에 베인 상처를 빠르게 치료하고 약을 발라줬다.상처가 조금 깊어 의사는 파상풍 주사를 놓고 덧붙였다.“상처가 감염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물기 전까지 물에 닿으면 안 됩니다.”송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따랐다.치료를 마친 의사는 송서희와 하정준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 일을 심도윤 도련님께 알려야 할까요?”그는 이 상황이 하정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송서희는 물에 젖은 몸을 수건으로 감싼 채였고 발에는 다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뭔가 수상쩍었다.의사는 양쪽 모두를 건드리기 어려웠다. 말을 하면 하정준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웠고, 말을 하지 않으면 내일 심도윤이 알게 되었을 때 책임을 묻지 않을까 걱정되었다.하정준은 무심하게 말했다.“알아서 해요.”예전 같았으면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송서희는 가장 먼저 심도윤을 찾아가 서운한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심도윤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닐까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심도윤은 약혼자와 함께 바다에 나왔다. 하지만 그 좋은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깨질 가능성이 있었다. 심도윤은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고, 만약 이로 인해 정씨 가문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모두 그녀의 책임으로 돌려질 상황이었다.‘내가 없으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송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내일 얘기할게요.”그녀는 육나나가 정말로 심도윤의 방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문을 두드려 방해할 수도 없었다.스위트룸은 같은 층에 있었다. 치료실에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서희와 하정준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앞뒤로 걸었다.방 앞에 도착한 송서희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 하정준에게 말했다.“정준 오빠, 아까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마요. 제가 괜히 오빠한테 화를 냈던 것 같아요. 그동안 무심코 오빠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는데, 정말 미안해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 금지된 사랑   제32화 도움 요청

    방음 처리된 소재 덕분에 선실은 완벽한 고요에 싸여 있었다. 스위트룸은 호텔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송서희는 침대 옆에 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졌다.5월 초의 바다는 여전히 쌀쌀했지만 수영장의 물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몸은 마치 유연한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였다.몇 번이고 왕복으로 헤엄쳤다. 지쳐서 멈출 때쯤, 그녀는 물 위에 떠올라 짙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가라앉혔다. 물속으로 깊숙이 내려가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 듯했다. 그리고 부력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지탱하며 보호해 주는 듯했다.심도윤은 그녀에게 있어 바로 이런 물과 같은 존재였다.만약 그날 그녀가 길가에서 울고 있을 때 심도윤이 멈추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됐을까? 그녀는 나쁜 사람에게 납치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선량한 사람을 만났을까?만약 심도윤이 그녀를 송씨 가문에서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방치되어 왜곡된 병적인 인격으로 변했을까? 아니면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그 빈집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오늘 밤은 달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고 안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숨이 한계에 달하자, 송서희는 물 위로 몸을 솟구쳐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텅 비어 있던 수영장 가장자리에는 낯익은 남자가 서 있었다.정재훈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이 밤중에 수영하러 나왔어? 혼자 외로워서 잠이 안 와?”송서희는 순간적으로 흥미를 잃었다. 그녀는 다른 쪽으로 헤엄쳐 사다리를 잡고 물 밖으로 나왔다.그녀가 수영을 나온 것은 단지 하정준과의 싸움 때문에 기분이 너무 안 좋아져서 즉흥적으로 결심한 것이었다. 게다가 수영복도 갈아입지 않았다.검은 드레스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채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수건을 집으려는 순간, 정재훈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며 그녀를 주시했다.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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