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호텔 15층의 프라이빗 룸.서지훈이 창문 앞에 서서 창밖의 복잡한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소용돌이치듯 복잡했다.그는 오늘 이 만남이 회사를 구할 유일한 기회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자 그는 급히 몸을 돌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들어오세요.”서지훈이 말했다.문이 열리자 무표정의 설영준이 침착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설영준의 시선이 서지훈을 스쳐 그의 뒤에 서 있는 아들 서도재에게 머물렀다.서도재는 민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형제간의 우정으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보려고 했다.“안녕하세요, 아저씨.”설영준은 서지훈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지만 서도재의 인사는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서지훈이 재빨리 다가가 설영준의 손을 잡아 그를 자리에 앉혔다.“영준아, 왔구나. 얼른 앉아라. 오늘 널 부른 건 도움을 좀 청하고 싶어서야.”설영준은 자리에 앉아 평온한 눈빛으로 서지훈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어려워하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꼭 돕겠습니다.”서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회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영준아, 지금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자금줄도 막히고 몇몇 프로젝트로 중단된 상태야. 너희 회사는 요즘 잘 나간다며. 그래서 말인데...”설영준이 손을 들어 서지훈의 말을 끊었다.“아저씨, 제가 아저씨를 존경하는 건 맞지만 아저씨도 아시다시피 비즈니스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저희 회사 자금도 이미 다 정해진 것들이라 함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서지훈의 표정이 변했다. 설영준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거절할 줄은 몰랐다.“영준아, 나도 지금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민망해. 하지만 더 방법이 없단다. 너와 도진이는 친구잖니? 그걸 생각해서라도 좀 도와줄 수 없겠니...”설영준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아저씨, 저랑 도진이의 관계는 아저씨가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서지훈의 눈에는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찼다. 그는 서도재를 보며 점점 억누르기 힘든 화를 느꼈다.설영준의 거절과 현재 회사의 어려운 상황이 서도재의 과거 행동과 절대 떼어놓을 수 없음을 서지훈도 알고 있었다.“지금 이 꼴 좀 봐라! 다 그때 네가 했던 어리석은 짓 때문에 설영준이 우릴 완전히 돌아섰어. 지금 회사까지 이렇게 어려워졌잖니!”서지훈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회의실의 정적을 와장창 깨뜨렸다.서도지의 표정이 변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이때 화가 폭발해버릴 줄은 몰랐다.“아버지, 그건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저도 지금 열심히 다 보상하려고 노력 중이에요!”서도재가 애써 변명하려 했다.“보상? 네가 한다는 보상이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켰는지 알아? 설영준이 사업계에서 어떤 사람인데, 네가 그런 사람의 여자를 건드린 거야!”서지훈의 분노가 점점 커지더니 그의 손가락이 몇 번이나 서도재의 이마에 닿았다.서도재의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순간적으로 무력감을 느꼈다.“저도 잘못한 거 알아요. 하지만...”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지훈에 의해 가로막혔다.“하지만이 어디 있어! 네가 아무리 변명해봤자 네 무능함과 무지가 우릴 절망에 빠뜨린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니? 단순히 사과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야 이게?”서지훈의 목소리를 거의 고함에 가까웠다.더 참을 수 없었던 서도재가 분노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아버지, 저도 잘못한 거 안다고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고칠 수 있어? 뭐로 고칠 건데? 네 그 무능이랑 분노로?”서지훈이 냉소적인 웃음을 지으며 실망감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도재를 바라보았다.“저는...”서도재의 말이 다시 한번 끊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끊은 것이다.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며 최대한 차분해지려 노력했다.“아버지, 지금 제가 뭐라고 해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기회를 한 번만 주세요. 제가 제 가
설영준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의 시선이 연지수의 몸에 떨어졌다.“네, 연지수 씨.”연지수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더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설 대표님, 저... 저 계속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요. 저 사실...”연지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설영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연지수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지는 알고 있습니다.”설영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에 관해 얘기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연지수 씨랑 서도진과의 관계도 대충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구해드리죠.”그 자리에 얼어붙은 연지수는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설영준을 바라보았다.연지수가 서도진에게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영준이 알고 있었던 걸까?그녀는 순간적으로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이 들었다.연지수는 밀려드는 수치심과 민망함에 입술을 꽉 깨물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은 그런 연지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 전의 말을 다시 반복했다.“그러니까, 도와드리겠다는 말입니다.”연지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지금 그녀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설 대표님, 제... 제가 뭐라고 답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연지수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설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무서워하지 마세요, 연지수 씨.”그저 간단한 말 한마디일 뿐이었지만 그 말에 연지수는 엄청난 안정감을 느꼈다. 설영준은 그녀가 오랫동안 꿈꿔온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런 남자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려워 말라는 말을 해주고 있었다.어쩌면 서도진의 곁에서 받던 고통 때문에 작은 달콤함에도 홀라당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망설이고 있던 연지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매우 확고해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했다.“네, 도와주세요.”설영준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말을 얻었다....설영준은 연지수를 이용해 서진 그룹에 대한 공격을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었다.그렇다. 연지수는 서
서도재의 눈에는 피로가 서려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의 앞에서 감히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던 탓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영준아, 내가 돌아가서 팀원들이랑 토론 좀 해볼게.”설한 그룹을 떠난 서도재는 몇 명의 핵심 관리팀원들을 긴급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집안 서재의 분위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 모두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설한 그룹의 인수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 사업이 그렇게 설한 그룹의 손에 넘어가게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서도재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서 대표님, 지금 자금도 부족하고 저희는 외부 자금이 없으면 더 못 버틸 겁니다.”재무부 부장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다른 자산부터 매각하고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마케팅부서 부장이 동의했다.“맞습니다. 이렇게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경영부서 부장도 덧붙였다.그들의 열띤 토론 중, 문밖에서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서도재는 바로 경계하며 몸을 일으켜 서재를 벗어났다.문밖에서 연지수가 복도 그림자에 숨겨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 같았다.서도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수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주춤 물러났다.서도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며 연지수에게 다가갔다.“연지수,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서도재의 목소리엔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연지수는 깜짝 놀랐지만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나... 나 그냥 지나가다가.”서도재는 의심 어린 눈길로 연지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끼어들지 마. 이런 사업적 기밀은 너랑 아무 상관없으니까.”연지수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했다.“미안, 다시는 안 이럴게.”서도재는 연지수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재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고 하루빨리 사업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서도재가 콧방귀를 뀌며 서재로 다시 돌아가 계속 토론에 참여했다.연지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설영준은 송재이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다.그는 송재이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재이야, 난 네가 이런 사업 문제로 걱정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지킬 테니까 어떤 상처도 안 받았으면 좋겠어.”송재이는 설영준의 배려에 마음속에서 어떠한 따뜻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영준아, 난 너 믿어. 네가 다 잘 처리해 줄 거라고 생각해.”설영준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주머니에서 정교한 회중시계를 꺼내 테이블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네가 준 이 회중시계, 난 항상 갖고 다니거든. 내가 아무리 바빠도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언제나 상기시켜 주거든.”송재이는 감동하는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만 좋다면, 난 뭐든 다 행복해.”송재이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설영준이 말했다.“우리 내려가서 태국 음식이나 먹으러 갈래? 환경을 좀 바꾸면 편해질지도 모르잖아.”송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두 사람은 함께 밑으로 내려갔다.레스토랑은 이국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따뜻한 조명과 부드러운 음악이 사람들을 편하게 했다.둘은 창가에 있는 자리를 골라 착석했다.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설영준은 송재이의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두 사람의 따뜻하고 달달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송재이는 설영준과 함께 하는 지금이 정말 행복했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설영준만 있어 준다면 송재이는 언제든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식사 도중 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그렇게 송재이는 잠시 혼자 있게 되었다.식탁 위에 올려둔 설영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무심코 시선을 돌려 확인한 휴대폰 화면에는 연지수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연지수...이 이름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송재이는 갑자기 피어오르는 의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연지수가 왜 설영준에게 문자를 보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단순한 호기심에 송재이는 설영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어 카카오톡에 접속해보았다.연지수가 서
연지수도 송재이를 발견했다.그녀의 놀라움으로 가득 찬 눈빛은 곧이어 도전적인 눈빛으로 바뀌었다.연지수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송재이에게 다가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송재이 씨 아니에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대요?”연지수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송재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그러게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혼자 쇼핑 중이신 거예요?”연지수의 눈빛에는 질투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그럼요, 혼자죠. 항상 옆에 누가 있어 주는 재이 씨랑은 다르게요! 아직도 설 대표님이랑 사귀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송재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과찬이십니다. 저랑 영준이는 항상 좋았죠, 뭐. 지수 씨도 요즘 영준이랑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던데요.”연지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송재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설영준과 자신의 관계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다... 알고 있었어요?”송재이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뭐 어찌 됐든 잘 되길 바랄게요. 다만 서 대표님이 연지수 씨가 배신한 걸 아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굳이 제 입으로 말 안 해도 더 잘 아시겠죠...”연지수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녀는 일부러 입꼬리를 올리며 일부러 해맑게 웃었다.“충고 감사해요, 재이 씨! 하지만 저는 자신 있어서요.”송재이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연지수와 더 싸워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이원희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원희 씨, 가요. 쓸데없는 사람 때문에 기분 잡치고 싶지 않거든요.”이원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두고 앞으로 걸어갔다. 연지수는 그 자리에 혼자 남아 우두커니 복잡한 감정의 표정으로 서 있었다.연지수는 진심으로 설영준과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서도재를 떠올릴 때마다 몸이 저절로 떨려왔다.지금 그녀가 하는 일이 서도재에게 들켜버리면 어떤 고통을 당할지 모른다는 미지가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었
설영준의 비웃음 섞인 미소가 그대로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연지수는 얼굴을 두르고 있던 선글라스와 스카프를 벗어 얼굴의 상처를 드러냈다.그녀의 눈빛이 비장해 보였다.“설 대표님,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제 부탁 들어주시기 힘들 거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몸 하나 지킬 방법은 찾아야죠.”설영준의 시선이 연지수 얼굴에 난 상처에 고정되었다. 상처와 마주하자마자 설영준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연지수가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설 대표님, 저 안 도와주시면 저는 이 일을 미디어에 제보하는 수밖에 없어요. 저랑 원나잇 하고 그날 밤에 설 대표님이 이 상처를 내셨다고요.”설영준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연지수를 바라보았다.“연지수 씨,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요? 저 설영준의 이미지는 그렇게 쉽게 더럽혀지지 않아요.”연지스의 눈빛에 절망이 깃들었다.“믿기 어려운 얘기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언론에 제보하는 순간, 제 말을 믿는 사람도 분명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표님은 물론 대표님의 회사 이미지에까지 큰 타격을 줄 거예요.”설영준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연지수 씨가 그런 짓을 할수록 본인만 계속 불행해질 겁니다. 이런 재미 없는 장난은 그만두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방법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더 이상 연지수와 얽히고 싶지 않았던 설영준은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룸을 빠져나갔다.그와 동시에 연지수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준은 뒤쫓아 나갔다. 설영준이 반응하기도 전에 연지수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설영준의 거절에 연지수가 아예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녀의 히스테리컬한 울부짖음 소리가 고요한 레스토랑을 쩌렁쩌렁 울렸다.설영준의 인내심도 바닥이 나버렸다. 그의 눈빛에는 짜증이 잔뜩 서려 있었다.“연지수 씨, 이래봤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설영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연지수를 다시 한번 거절했다. 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연지수에게서 벗
같은 시각 설영준은 차 안에 앉아 미간을 찌푸렸다.생각하면 할수록 오늘의 일이 수상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오늘따라 연지수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마치 배후에 무슨 목적을 숨기고 있다는 듯 말이다.사색에 잠겼던 그는 재빨리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그 식당 매니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곧 연결되었고 핸드폰 건너편으로부터 매니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식당 매니저의 목소리는 매우 공손했고 설영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오늘 내가 떠난 후 복도에 있는 CCTV 영상 좀 보내줄 수 있겠어?”식당 매니저는 뜻밖의 부탁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즉시 대답해주었다.“물론이죠,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영상 조회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 고마워.”설영준은 간결하게 대꾸한 뒤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CCTV에 관한 영상 링크가 이메일로 도착했고 그는 즉시 링크를 눌러 동영상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영상에는 그가 떠난 후 연지수의 행동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닦은 뒤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설영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 연지수는 확실히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묵묵히 동영상을 보고 있던 설영준이 이를 꽉 악물었다.그는 재빨리 자신의 변호사와 법무팀에 연락해 대책 마련에 나섰고 회사의 홍보팀에도 여론의 파장에 대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설영준의 사무실 안, 모든 것이 긴박하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의 변호인과 홍보팀 모두 설영준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대책 마련에 분주히 돌아쳤다.“반드시 모든 입장이 빈틈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영상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합니다.”설영준의 지시에 법무팀의 관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대표님, 저희는 이미 해명할 준비가 돼 있으며 연지수 씨의 행위에 대해서도 법적 소송을 제기할 예정입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