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송재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도재가 하마터면 연지수에 의해 모함당할 뻔했다는 것조차 전혀 몰랐었다. 무의식 간에 실시간 검색어를 클릭하기 전까지 말이다.설영준과 연지수의 원나잇 스캔들을 보게 된 송재이가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송재이는 설영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속 설영준의 이미지는 이러한 표면적인 글과 비디오 클립을 훨씬 능가했다.그때,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 벨 소리가 그녀의 깊은 생각을 깨뜨렸다.휴대폰 화면에는 설영준의 이름이 떠 있었다.송재이는 묵묵히 발신자 명함을 바라보더니 깊게 심호흡을 마치고 전화를 받았다.“재이야, 뉴스 봤어? 아니다, 당연히 봤겠지.”설영준의 목소리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피곤하게 들렸다.송재이는 가볍게 벤치에 기대어 캠퍼스를 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그래, 봤어. 근데 네 반응이 정말 빠르다는 건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아.”송재이의 말투가 조금 가벼워진 것을 눈치챈 것인지 전화 건너편의 설영준도 그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일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나와 연지수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야.”다급히 해명하는 설영준의 목소리에 송재이는 방긋 웃으며 답해줬다.“나도 알아. 설영준, 난 무조건 당신 믿어.”송재인의 말을 듣자 마음속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돌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은은한 상실감이 느껴지기도 했다.그는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조금 주저하며 물었다.“자기야, 정말 조금도 질투하지 않은 거야? 그런 뉴스를 보고도 자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어?”뜻밖의 말에 송재인은 가볍게 웃기 시작하더니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영준 씨, 지금 설마 날 시험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내 질투심으로 네 허영심을 만족시키기를 원하는 거야?”송재이의 놀림에 설영준은 조금 어색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곧바로 보고를 시작했다.“대표님, 전문적인 조사를 통해 서도재 씨의 상업적 조작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우선 최근 워크아웃에서 회사 주가 조작 혐의로 자본시장법의 176조 주가 조작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설영준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물었다.“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서도재 씨가 여러 계좌를 통제하는 역조작을 해 주가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련 거래 기록과 통신 증거를 확보했습니다.”설영준은 변호사에게 계속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음으로 서도재 씨가 파트너와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허위진술을 한 사실이 발견돼 계약법에 규정된 사기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자 설영준은 잠시 사색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그렇다면 이런 증거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충분합니까?”“충분합니다. 또한, 회사법에 따르면 서도재 씨의 이러한 행동은 회사에 상응하는 민사 책임을 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확신에 찬 변호사의 말에 설영준의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자, 그럼 이제 법적 절차에 따라 관련 자료를 준비해주십시오. 우리는 이제 모든 단계가 합법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서류를 준비하고 후속 법적 조치에 대해 협의하겠습니다.”법을 이용해 서도재를 수습할 뿐만 아니라 뒷조사를 통해 알게 된 연지수가 서도재 몰래 남자를 찾아다니는 사진과 동영상까지 낱낱이 폭로하면 서진 그룹이 인수되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일이다....한편, 서지훈은 요즘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는 인터넷의 그 뉴스를 보고 하마터면 화가 나서 기절할 뻔했다.하지만 지금은 짜증만 낼 때가 아니라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인맥을 동원하여서야 송재이의 연락처를 얻을 수 있었다.그렇게 마침내 송재이와 연락이 닿았고 전화로 끈질기게 졸라서야 마침내 그녀와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식당 안.진작에 도착한 서지훈은 송재이가 식당 문 앞에 나타난 것
서지훈과 송재이는 모두 설영준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서지훈은 그렇게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마침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설영준에게 다가가 안부 인사를 전했다.“영준아, 여기에는 웬일로 왔냐?”그러나 설영준은 그저 피식 냉소를 흘린 후 송재이의 곁으로 다가갔고 송재이는 서지훈과의 만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속삭였다.“영준 씨, 지훈 아저씨가 날 찾아왔어. 내가 서진 그룹을 도와줬으면 한다고...”그러자 설영준은 그녀의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재이야, 서지훈이 찾아온 목적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일은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내가 처리할게.”같은 시각, 서지훈은 설영준을 보며 절망적인 눈빛을 반짝였다.설영준이 한번 결정한 일은 절대 돌이킬 여지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때, 설영준이 고개를 돌려 서지훈을 바라보며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서지훈 씨, 전 당신을 어른으로서 존경하지만 저는 반드시 우리 회사의 이익을 보호해야 합니다. 서진 그룹의 문제는 재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서지훈은 설영준의 맞은편에 앉아 어떻게든 서진 그룹 인수를 포기하도록 설영준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촘촘히 배어 나왔다.“영준아, 난 네 아버지 설경철과 당시 동업자였어. 우리는 운명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이러면 네 아버지가 알고 실망할까 봐 두렵지도 않으냐?”서지훈은 설경철의 이름까지 내걸고 설영준을 압박하려 했다.“지훈 아저씨, 아버지는 멀리 영국에 계시지만 회사를 저에게 맡긴 것은 저의 판단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회사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희망이 보이지 않자 서지훈의 안색도 점차 굳어져만 갔다.“영준아, 네 아버지와 난 젊었을 때부터 함께 해왔다. 이 정을 봐서라도 서진 그룹을 봐주면 안 되겠냐?”그런데 그 순간,
서경철은 사무실 책상 뒤에 앉아 경건한 눈빛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지훈아, 네 행동은 이미 회사의 윤리 준칙과 비즈니스 윤리를 심각하게 위반했어. 자네 행동은 회사의 이익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용도 저버렸다고. 회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난 회사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그러자 서지훈은 냉소를 지으며 따져 물었다.“비즈니스 윤리? 이건 그냥 네가 오버하는 거고. 우리는 단지 원가를 낮추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그랬을 뿐이라고. 게다가 이런 일은 업계에 비일비재한데 왜 그렇게 옹졸하게 굴어?”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서지훈에 설경철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지훈에게 다가가 맑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서지훈, 넌 이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신용과 성실은 우리 회사의 핵심 가치야. 그러니 이 원칙을 훼손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네 행동은 이미 회사법 중 이사와 임원의 충실한 의무에 관한 조항을 위반했으니 난 너에게 회사를 떠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서지훈은 안색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를 뿌득뿌득 갈며 입을 열었다.“그래. 하지만 날 내쫓는 건 네 오른팔을 부러뜨리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내가 떠난 뒤, 네가 어떻게 회사의 운영을 유지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회사의 이익은 그 무엇보다 큰 법이지. 그러니 난 자네 빈자리를 채울 더 적합한 사람을 찾을 거야. 서지훈, 이번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고 앞으로 컴플라이언스 경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랄게.”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평화롭기만 한 설경철의 말투에 서지훈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곧바로 설경철의 사무실을 떠났다.물론 나중에 두 사람 모두 화해의 기회를 찾았지만 당시의 그 가시는 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놓았다.특히 설경철은 당시 서지훈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기에 이후 서지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런데 다행히도 설경철은 신용이 있는 사람이다.그는
그들이 떠난 후 서지훈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식당의 매니저를 찾아가더니 단도직입적으로 설영준과 만났던 관련 CCTV 영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매니저,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건 나도 알지만 난 이 영상이 정말 필요하네.”서지훈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선생님, 죄송하지만 저희도 개인정보 보호 정책이 있기에 마음대로 CCTV 영상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그러자 서지훈은 호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고 계속하여 부탁했다.“난 서진 그룹 대표 서지훈일세. 이 비디오는 사적인 용도로만 사용되며 누구에게도 유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할게.”매니저는 명함을 보고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서지훈의 요청에 동의했다.그는 곧바로 관련 CCTV 영상을 돌리기 시작했고 서지훈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된 채 오직 회중시계의 흔적만을 찾고 있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 마침내 그는 설영준의 회중시계가 떨어지는 그 장면을 찾았다.서지훈은 재빨리 화면을 캡처해 회중시계의 모습을 저장했다.어쩌면 이 시계가 그의 유일한 단서가 되고 태세를 전환하는 결정적인 열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식당을 나온 후, 서지훈은 즉시 그가 아는 사설탐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나야, 서지훈.”전화가 연결되고 서지훈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자네 도움이 필요하네.”이윽고 전화 건너편에서 탐정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듣고 있습니다. 서 대표님, 무슨 일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이에 서지훈은 경위를 간단히 말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이 회중시계의 출처를 알아봐 줘.”가만히 듣고 있던 탐정은 잠시 중얼거리다가 곧 대답해주었다.“네, 대표님. 최대한 빨리 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이런 조사는 쉽지 않거든요.”“시간이 문제가 아니야. 알아만 내준다면 추가 비용을 얼마든지 지급하겠어.”“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
일주일 후, 설영준이 서진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한 날.아침 햇살이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통해 회의실 책상 위로 쏟아져 들어왔다.몸에 딱 떨어지는 슈트를 입은 설영준은 유난히 멋있어 보였다.그리고 맞은편에는 서도재와 서지훈이 앉아 있었다.어두운 낯빛은 누가 봐도 곧 일어날 일에 대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기자들이 회의실 주변에 둘러앉아 연이어 플래시를 터뜨렸다.카메라 렌즈는 계약을 앞둔 양측을 비추었다.볼펜을 들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설영준의 모습은 거침없고 자신만만했다.서도재와 서지훈은 한숨을 내쉬더니 눈빛 교환하고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설 대표님, 서진 그룹의 향후 계획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한 기자가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설영준이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서진 그룹은 시장 기반과 잠재력이 탄탄한 만큼 자원 통합과 기획 조정을 통해 시장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것입니다.”“그렇다면 서진 그룹의 경영진에도 변화가 있을까요?”다른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설영준의 시선이 서도재와 서지훈을 향했고, 이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회사의 실제 수요와 전략 기획에 따라 경영진 변화 여부를 결정 지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결과가 어떻든 간에 회사의 장기적인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할 겁니다.”설영준은 느긋하게 기자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전문성이 돋보이는 답변에 현장에 있는 기자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기자간담회가 끝날 무렵, 한 젊은 여성 기자가 질문권을 얻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물었다.“설 대표님, 설한 그룹에서 서진 그룹을 인수한 다음 향후 사업 발전 방향과 시장 확대 전력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는지 한 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설영준이 대답했다.“설한 그룹은 기술 혁신과 시장 확장을 위해 항상 노력해 왔죠. 서진 그룹을 인수하고 나서 일단 두 회사의 자원을 통합하고 사업 구조를 최적화할 것입니다. 특히 신흥 시장과 첨단 기
송재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화면에는 연지수가 보낸 카톡 메시지가 떴다.[재이 씨, 조만간 한 번 볼까요? 중요한 할 얘기가 있어요.]송재이는 섣불리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어쨌거나 현재 연지수의 처지가 매우 난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서도재와 무슨 관계인지 폭로된 이후로 그녀의 사생활은 많은 사람의 관심사가 되었다.동시에 다른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온라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그런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서 자신에게 연락한 연지수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저녁에 설영준이 돌아오자마자 송재이는 즉시 마중 나가 연지수한테서 받은 카톡을 보여줬다.“영준 씨,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연지수가 스스로 뒷수습하기도 벅찰 텐데 나랑 만날 시간이 어디 있겠어?”송재이가 물었다.설영준은 휴대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답장 바로 안 하길 잘했어. 연지수는 비록 서도재의 마수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비난의 대상이 된 건 사실이야. 어차피 경주를 떠나게 생겼는데 이판사판으로 너한테 복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그럼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만나자고 한 걸까?”설영준은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섣불리 짐작하기는 어려워. 다만 목적이 무엇이든 신중한 대처가 필요해. 요즘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보자고 답장해 보는 건 어때?”송재이는 설영준의 조언에 따라 연지수에게 카톡을 보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지수의 답장이 도착했다.[재이 씨가 지금 날 경계하는 걸 알지만 직접 만나서 해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영준 씨도 관련된 일이니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메시지를 확인하자 송재이는 깜짝 놀라 곧바로 설영준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설영준은 문자를 보고 나서 피식 웃었다.“나까지 언급한 이상 한번 보긴 해야겠네?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아내자고.”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
연지수와 송재이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고, 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이때, 연지수가 다소 노골적이며 직설적인 질문으로 정적을 깼다.“재이 씨, 궁금한 게 있는데 영준 씨는 하룻밤에 몇 번까지 가능해요?”그녀는 도발적인 말투로 비아냥거렸다.어리둥절한 표정의 송재이는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얼떨결에 대답했다.“지수 씨, 우리 둘이서 얘기할 적절한 화제는 아니라고 보는데?”하지만 연지수는 끈질기게 물어지며 냉소를 지었다.“서도재랑 자면서도 항상 영준 씨와 한다고 상상했거든요. 아니면 끝까지 갈 수가 없죠.”송재이는 연지수가 점점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에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지수 씨가 전화에서 영준 씨랑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고 했잖아요. 대체 뭐죠?”연지수가 피식 웃으며 조롱했다.“아, 영준 씨를 정말 좋아하나 보네.”송재이는 페이스를 잃지 않고 다시 물었다.“연지수 씨! 영준 씨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이내 시큰둥한 대답이 들려왔다.“아까 얘기했잖아요. 영준 씨 체력이 어떤지 궁금하다고.”그제야 무의미한 만남에 응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할 말을 잃었다.이내 떠나려고 뒤돌아서는 순간 연지수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액체를 끼얹었다.“뭐 하는 거야!”송재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서 피했다.연지수의 눈에 광기가 가득했다.“송재이! 영준 씨와 사귄다고 해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지? 잘 봐! 아주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니까.”연지수가 손목을 꺾자 병 속의 액체가 튀어나왔다.송재이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의 인영이 시야에 나타났다.설영준이 어디선가 뛰쳐나와 신속하고 단호하게 송재이의 앞을 가로막았다.곧이어 액체가 등에 닿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영준 씨?!”연지수의 비명이 들려왔다.설영준은 뒤돌아서 연지수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연지수는 심장이 미친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