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 송재이의 졸음이 서서히 사라졌다.그녀는 눈을 뜨고 헛된 생각을 하고 있었고 체온의 전달로 그녀의 마음도 따끈따끈해졌다.다음날 송재이는 늦게 일어났다.세수한 후 거실로 걸어가자 익숙한 밥 냄새가 났다.부엌에서 수도꼭지가 콸콸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물소리가 사라졌고 누군가 도마에서 채소를 썰고 도자기가 부딪치는 소리 찌개 끓이는 소리가 났다.이런 짙은 사람 사는 듯한 소리는 송재이에게 있어서 매우 감동적이었다.엄마가 살아계실 때만 이렇게 고즈넉한 삶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이 사치가 돼버렸다.“밥 먹자.”설영준은 부엌에서 나와 고개를 들어 한마디 했다.“그래.”앉아서 보니 오늘 아침 메뉴는 시금칫국이었다.그녀는 숟가락을 들고 국을 한 모금 마셨고 잠시 후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설영준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송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방이 너무 더워서 그래?”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고 그의 말투에 섞인 조롱을 알아챘다.“어, 아침에 햇빛이 너무 쨍쨍하네!”설영준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밥을 먹을 때 송재이는 줄곧 머리를 숙이고 설영준을 감히 보지 못했다.두 사람 사이의 얇은 벽이 끝내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까워진 듯했다.…그녀는 장하 별장에서 살고 싶지 않아 이사를 나왔다.마지막 남은 옷도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수모를 그녀는 줄곧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그가 여러 번 암시하였다 하더라도 그녀도 앞으로 자신의 집에서만 살기로 했다.한 번은 그녀가 감기에 걸려 목욕을 하고 일찍 이불에 들어가 잠을 자려 하는데 설영준이 왔었다.술을 마시고 그녀의 침실에 들어와 두말없이 뽀뽀를 하려 했다.그녀는 몸이 아픈 데다 그에게 이런 괴롭힘까지 당하니 당연히 화가 나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그 뺨에 설영준도 술에서 깬듯했다.송재이는 조금 멈칫했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방문 앞을 가리키며 그를 향해 나지막
이튿날 송재이는 악단에 볼일이 있어서 점심에 나갔다.돌아왔을 때는 오후 4시가 넘었다.막 돌아오자마자 설영준이 거실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 긴 다리가 매우 두드러졌다.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 끝을 팔꿈치에 아무렇게나 걷어 올렸는데 이런 옷차림은 송재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그는 등을 돌리고 전화를 하고 있었다.업무상의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았는데 차분한 말투였다.송재이는 그가 주성 그룹 인수 후 몇 가지 일에 대해 말하는 것과 수십억의 계약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민효연한테서 들어서 대략 알고 있었는데 주성 그룹의 오늘은 설영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엊그제 주정명이 이미 형을 선고받았고 그가 한 일은 중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설영준이 이 일을 성사시켰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마음이 이상했다.그녀는 이런 설영준이 매우 무섭다고 생각했다.전화를 끊은 후 설영준은 송재이를 보고 말했다.“왔어?”“응.”“만두 다 빚었어, 이제 쪄서 먹자.”말하고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갔다.40분 후에 식사를 시작했다.송재이와 설영준은 각각 식탁 양쪽에 앉았다.그녀는 아주 맛있게 먹었는데 지난번에 만두를 먹었을 때는 설 전날 설가에서 박윤찬과 설도영과 함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만두는 그녀와 박윤찬이 싼 것이었다.설영준은 시종일관 옆에 앉아 책을 읽으며 조금도 돕지 않았다.그때 그녀는 그가 요리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와 같은 거만한 도련님을 비웃었다.이제야 그녀는 진정한 고수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사람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맛이 어때?”설영준이 물었다.“맛있어.”“윤찬 씨의 요리 솜씨에 비하면?”그날은 확실히 그가 만든 소였다. 송재이는 도가 부자에게도 조금 보냈었다.그녀는 궁리 끝에 대답했다.“당신과 박 변호사님 요리 솜씨 모두 좋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모두
설영준은 등을 교체하는 동작에 매우 능숙했다.송재이는 냉장고에 재료를 넣은 후 돌아서서 허리를 짚고 그를 보며 웃었다.“좀 하는데?”“이 정도는 기본이지.”송재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설영준이 의자에서 내려오려고 하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그를 부축하려고 했다.설영준은 거절하려고 했다가 말을 도로 삼켰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에서 벌떡 뛰어내렸는데 내려온 후에도 그녀의 팔을 잡고 놓지 않았다.심지어 온몸을 송재이에게 기댄 다음 내친김에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그녀의 어깨에 있는 머리카락 더미에 얼굴을 묻었다.“뭐 하는 거야?”“희롱?”설영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충분히 안은 후 얼굴을 옆으로 하여 송재이의 귀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송재이는 간지럼을 타 웃으며 줄곧 피했다.그러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로챘고 이번에는 키스했는데 가볍게와 힘 있게를 넘나는 키스였다.그가 이렇게 애틋한 감정으로 그녀에게 키스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예전 같았으면 아마 그가 마음이 동한 줄 알았을 거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짐승 적인 본능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고 여자를 꼬시는 일종의 수단이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다.꿀벌이 꽃에서 꿀을 추출하는 것은 그 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타고난 본능일 따름이다.추출하지 않으면 속이 불편할 뿐.송재이는 그에게 천천히 다 빨아 먹혔다.그녀는 그에게 힘없이 안겨 있다가 결국 다시 침대로 옮겨졌다.설영준은 송재이에게 자신의 몸에 엎드리라고 하였다.그리고 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그녀는 오래 지속된 키스에 숨이 차 헐떡거렸는데 사슴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설영준은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좀만 있어, 움직이지 말고.”말을 마치고는 그는 또 그녀를 끌어안았다.온몸을 그의 가슴에 기댄 그녀는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송재이는 갑자기 걱정이 들었다.한때 그녀는
송재이는 최근 상태가 매우 좋았다.예전에도 예뻤는데 요즘은 한층 더 화사하고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서유리마저도 그녀가 예뻐졌다고 난리도 아니었다.“피부가 너무 촉촉한 거 아녜요? 지금은 청순할 뿐만 아니라 여성스러움도 가지고 있어요.”서유리가 농담조로 말하자 송재이는 웃어 보였는데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연지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송재이를 한 번 보고 얼굴에 웃음을 지었지만 눈빛은 오히려 차가웠다.요즘 연지수는 자주 이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저번에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송재이와 연지수가 잔을 부딪친 이후로 이 두 천적이 화해한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송재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연지수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큰 수를 참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이날 악단은 늦게 연습이 끝났다.송재이가 연습이 끝났을 때 리허설실의 사람들은 거의 다 가버렸다.그녀가 휴게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을 줄이야.점검 기사님은 내일 아침 출근해야 수리하러 올 수 있다고 한다.늦은 시간이라 이 시간에는 층에 희미한 불빛만 있을 뿐이다.그녀는 당황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계단으로 향했다.구식 음성 등이라 발을 동동 굴러야 등이 들어오고 소리가 안 나면 자동으로 꺼졌다.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두려움을 이겨내고 한 층 한 층 내려갔다.악단 작업실은 11층에 있었고 그녀는 4층까지 내려갔을 때 손을 뻗어 난간을 붙잡았다.그녀가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기분이 싸했다.송재이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또 계속 내려갔다.그러다 갑자기 주위의 등이 한꺼번에 꺼졌고 그녀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 같았다.막 발을 동동 구르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엄청난 힘이 그녀를 밀었다.그녀는 팔걸이를 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밀려서 비틀거렸다.그녀의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났고 그러다 위층에서 그대로 굴러떨어
병원 입구에서 내릴 때 마침 약을 처방받고 나오는 박윤찬을 만났다.그는 요즘 일이 너무 힘들어서 며칠째 목이 아파서 병원에 왔던 터였다.뜻밖에도 송재이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니 정말 처참했는데 발이 두 배로 부어 있어서 걸음걸이는 거의 옆에 있는 여자한테 지탱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여자도 말라서 몇 걸음 못 걷고는 둘 다 땀에 흠뻑 젖었다.“재이 씨.”그녀는 고개를 들자마자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박윤찬을 보았다.박윤찬은 더 묻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잠깐만요. 휠체어를 빌려 올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잠시 후에 그는 휠체어를 밀고 돌아왔다.이제 훨씬 편해졌다.“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서유리예요.”서유리는 자발적으로 박윤찬에게 자기소개했다.박윤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녕하세요.”지금 그의 주의력은 모두 송재이의 발에 있었는데 보아하니 골절된 것 같았다.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틀림없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그는 휠체어를 밀고 병원에 들어갔다.서유리는 계속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의사가 검사해보니 확실히 골절되어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송재이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실로 들어갔다.이 기간에 박윤찬은 돈을 내고 입원 절차를 밟으며 바쁘게 돌아쳤다.질서 정연하고 시종일관 침착했다.서유리는 복도 밖에 서서 안에서 수술을 받는 송재이를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박윤찬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중에 결혼하면 집 안팎에서 아내는 걱정할 필요 없이 혼자 도맡아 할 거 아닌가.그럼 그의 아내는 얼마나 홀가분하겠는가.한 시간 후에 송재이가 수술실에서 나왔다.그녀는 일주일 동안 입원해서 편히 안정을 취해야 했다.송재이는 괜찮아 보였는데 발만 다쳤을 뿐 상태가 허약하지는 않았다.“설 대표님은 재이 씨 입원한 거 아세요?”송재이는 고개를 흔들었다.“그럼 제가 지금 연락할게요.”송재이는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
앞으로 사흘 동안, 설영준은 여 비서에게 식사 배달을 시켰다.하루 세 끼 다양한 메뉴로, 특히 국이 많았다.송재이는 설영준이 만든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어 그가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식사할 때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설영준을 떠올렸고 마음도 덩달아 달달해졌다....사흘째 되는 날 두 명의 불청객이 찾아왔다.연지수가 서도재를 데리고 왔는데, 명목은 병문안이었다.서도재는 꽃다발과 골절 회복에 좋은 영양제를 들고 걸어왔고 연지수는 그의 뒤에서 순한 모습으로 따라왔다.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연지수는 송재이를 한번 훑어보며 물었다. “송재이 씨, 괜찮아요?”송재이는 팔을 들어 올리며 연지수가 더 잘 볼 수 있게 한 후 미소를 지었다. “뭐 보다시피 괜찮아요.”약간의 비꼬는 느낌이 담겨 있는 말투를 듣자, 연지수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송재이는 이 일이 연지수의 짓임을 더욱 확신했다.“송 선생님, 빠른 쾌유를 빕니다.”서도재의 눈은 병실에 들어온 이후 줄곧 송재이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비록 그녀는 환자복을 입은 채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 헤쳤지만 부서질 것 같은 아름다움이 담겨 있어서 더욱 사랑스러웠다.송재이에겐 이것이 그녀와 서도재가 처음 정식으로 만난 자리였다.상대방이 꽤 음흉해 보였지만 그래도 송재이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안녕하세요, 서 전무님.”“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요.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송재이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으나 금방 미소를 지었다. “전무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존중하는 것 같아요.”서도재는 히죽거리며 웃었다.지난번에 연지수에게 송재이를 손에 넣고 싶다고 말한 이후, 연지수는 눈치 있게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며 둘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원래 레스토랑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병실에서 처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그래도 괜찮았다. 사람이 아플 때는 더 약해지기 마련이라, 자신이 더 친절하게 다가가면 손에 넣기 쉬울 거라 믿었
돌아가는 길에 서도재는 줄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옆에 앉아 있던 연지수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어쨌든 지금 그녀는 여전히 그의 여자였다.그의 변태적인 취향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임무는 약속대로 완수했지만 서도재는 설영준의 존재 때문에 더 이상 행동할 엄두를 못 냈다.겁먹은 건 서도재였는데 왜 그녀가 이렇게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연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직도 마음이 있다면 송재이의 연락처를 넘겨줄 수 있어요. 방금도 서로 인사했으니 적당한 핑계를 대서 만나자고 해보는 건 어떨까요?”“그 여자는 설영준의 사람이에요. 내가 어떻게 만나겠어요?”서도재는 평소와 다르게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이 그의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연지수도 화가 났지만 서도재와 정면으로 맞설 용기는 없어서 그저 차갑게 웃으며 비꼬았다. “난 당신이 송재이를 많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용기는 없고 마음만 있는 거였네요. 진짜 배짱이 있었다면 그게 누구의 여자건 상관없이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파악!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도재는 연지수의 뺨을 때렸다.그는 병실에서부터 화가 나 있었지만 여 비서가 있어서 참았던 것이다.이제 연지수가 경솔하게 그를 자극하자 그는 그 화를 그녀에게 풀었다.“누구한테 함부로 말하고 있는지 알아?” 서도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당신이 클럽에서 함부로 고르던 남자가 아니야. 누가 당신을 이 자리에 올려놨는지, 당신이 논란의 중심에 있을 때 누가 구해줬는지 잘 생각해봐. 이제 와서 감히 날 가르치려 들어? 당신이 제정신이야?”클럽의 남자들...어떻게 알았지?연지수는 얼굴을 감쌌다.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얼굴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더 컸다.그녀는 단 한 번밖에 그런 적이 없었다!그때는 서도재의 휴대폰에서 우연히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틀 후, 송재이는 퇴원했다.아직 깁스를 풀지 못해서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밤이 되면 설영준은 여전히 그녀를 위해 요리를 했고 그녀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며칠 동안 그녀를 품지 못했더니 설영준은 참기 힘들었다.두 사람이 이번에 화해한 후 그는 그녀에 대한 욕망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이전에는 그녀가 가끔 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돌보러 가느라 밤마다 그에게 허락을 구하곤 했다.그는 장하 별장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가끔 그녀를 불러서 함께 보내기도 했지만 일을 마치고 나면 곧바로 잠이 들곤 했다.하지만 지금은 일이 끝나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비단같이 부드러운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송재이도 잠들지 못하고 섹시하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서도재 씨랑 비즈니스로 무슨 사이야?”“침대에서 다른 남자 얘기를 하다니, 일부러 분위기를 망치려는 거야?”“아니야.” 설영준은 가볍게 웃었다. “적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해. 이익이 있을 때는 친구고, 이익이 없을 때는 적이 되는 거지, 이해하지?”“내가 입원했을 때 서도재 씨가 지수 씨를 데리고 나를 보러 왔어. 근데, 그 사람이 좀 음흉한 것 같아.”송재이는 단순히 불평하고 싶은 것이었다.이때 설영준은 송재이와 막 운동을 마친 상태라 두 사람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그의 팔은 그녀의 상체를 감싸고 있었다.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끊임없이 그녀를 자극했다.“너한테 어떻게 했는데?”설영준은 그녀의 귓가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는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여 비서도 있었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근데 그 눈빛, 생각만 해도 역겨워.”“네 남자 말고는 다 음흉하고 역겹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주 좋아, 갈수록 마음에 드네.”그는 그녀의 몸을 돌린 후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송재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살짝 밀며 말했다. “뭐래! 지금까지는 서도재 씨만 맘에 안 들었지,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다른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