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빈은 멈칫거렸으나 이윽고 웃으며 말했다.“이런 독특한 디자인의 암기를 제가 어떻게 가지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가주께서 예뻐해 주시고 새로운 도씨 가문의 상속자도 유리 후배와 사이가 깊지 않습니까.”이에 강유리는 두말하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에 있는 물건을 보려고 했다.그러자 고한빈은 안색이 살짝 변하면서 다소 낭패하게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재판은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강유리를 보호하려고 했다.“유리야……”“먼저 암기를 사용한 건 저 사람입니다. 저는 스스로 보호한 것뿐입니다.”강유리는 조금 전 행위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다.재판은 연세가 좀 있으시고 도씨 가문의 어르신이라 강유리를 편애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하지만 조금 전 강유리가 암기를 사용한 것을 그도 똑똑히 보았다.하여 순간 침묵하더니 가주 쪽을 보고 허락을 받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시합을 중단하겠습니다. 암기에 대해서 차후에 자세하게 조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조사하긴 뭘 더 조사합니까?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뭐가 또 있습니까?”고한빈은 이런 대답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다.말하면서 그는 다친 손을 높이 들고 덧붙였다.“그럼, 이 은침을 제가 스스로 찌른 것이라는 말씀입니까?”그러자 육시준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조금 전 상황으로 봐서는 유리가 세 번 만에 당신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유리가 무슨 이유로 암기를 사용하겠습니까?”그 말에 고한빈은 콧방귀를 뀌었다.“본래 독한 사람이고 나한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인데, 이유가 더 필요하겠습니까?”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강유리는 차갑게 바라보기만 했을 뿐, 이상하리만큼 반박하지 않았다.“일단 치료부터 받고 봅시다. 다친 이상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재판은 공적으로 의사를 밝히며 그 어떠한 감정도 곁들이지 않았다.고한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조교의 도움으로 일어서기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도씨 가문은 독을 이용하는 데 능하며 그 기술은 무척이나 강하여 현대 의료 수준으로도 알아내기 어려울 정도이다.이 방면에 관해서는 반드시 동문의 독술 의사를 찾아야 한다.의사를 기다리는 중에 도씨 가문 가주는 직접 앞으로 나서서 한 번 훑어보고 나더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강유리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육시준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고한빈을 한 번 보고는 발을 들어 잇달아 떠났다.두 걸음 정도 내디디더니 갑자기 멈춰서고는 고개를 돌려 홍석천을 바라보았다.“같이 가요.”홍석천은 저도 모르게 자기를 강유리와 같은 편으로 그려 넣었다.그러나 지금은 이 곳에 남아 상황을 살피니 고한빈의 상태가 어떠한지 보고 싶었지만, 순간 생각이 바뀌면서 가만히 보고 있어도 달려질 것이 없으니 차라리 강유리를 도와 한 마디라도 더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을 내렸다.하여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육시준의 뒤를 따라 떠났다.한편, 서재 안에서.두 사람은 들어서자마자 화를 참고 있는 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네가 조사하고 있는 일은 고한빈과 무관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무관하다고! 근데 왜 그렇게 고집 부리며 적대시 하는 거야?”가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에 강유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부님도 제가 고한빈을 일부러 겨냥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도씨 가문 가주는 협박하는 빛이 가득한 도주원의 눈길을 마주하고 나서 결국 화를 삼켜내고 의자에 털썩 앉아 언성을 살짝 낮추고 말했다.“그럼, 왜 암기를 사용했는지 설명해 봐. 그것도 독이 묻은 은침으로 말이다.”그는 조금 전 강유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그리 독하게 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은침 끝에는 정말로 독이 묻어 있었다.홍석천은 이제 막 서재로 발을 들여놓고 한쪽에 서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나서 순간 안색이 확 변했다.‘정말로 독이
홍석천을 그곳에 남겨두었다면 분명 동료와 선배에게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다.그럼, 아무리 굳게 먹었던 마음일지라도 분명 흔들리게 될 것이다.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강유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역경을 맞서 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질 수 있다.“사부님, 저를 시준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육시준은 급히 해명하려고 하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의를 갖춘 채 호칭을 바로 잡아 주었다.도씨 가문 가주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지만, 육시준의 질문에 대답은 해주었다.“감시 카메라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지금 복구 중입니다.”“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육시준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이에 도씨 가문 가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육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저희 LK 그룹 직원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그러자 도씨 가문 가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도씨 가문 내부에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 작은 일로 육 대표님께 염려 끼쳐 드리지 않겠습니다.”“......”‘아직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도씨 가문 가주는 확실히 아직도 화를 내고 있다.하지만 일이 이 지경으로 번진 이상 말린다고 한들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차라리 내친김에 홍석천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도씨 가문 가주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홍석천을 심사하는 듯이 뚫어지게 노려보았다.홍석천은 그런 그의 눈빛에 살짝 기가 죽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가주님......”“만약 강유리가 음험한 술수로 동문을 해친 일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은문에서 쫓아낼 것이다. 넌 도씨 가문의 인정을 힘겹게 받지 않았느냐. 저런 사람한테 네 미래를 걸 필요는 없다고 본다.”“저......”“고한빈 또한 잘못을 회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민경훈이 너를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도씨 가문 가주였다.그의 뒤에는 강유리를 비롯한 일행도 함께 있었으나 도주원은 보이지 않았다.어쩌면 이번 일로 실망이 가득하여 발걸음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시끌벅적하던 방안은 가주의 말과 함께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조금 전 앞다투어 토로했던 불만의 소리도 뚝 그쳤다.마치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들이 꺼낸 말이 아니라는 듯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고한빈은 가주의 말을 듣고 두 눈이 살짝 반짝이면서 마음속 깊이 기대가 부풀기 시작했다.가주가 자기를 관심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럼, 조금 전 강유리가 사용했던 그 은침에는 정말로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했다.‘날 걱정 하고 있으시네? 강유리한테 완전 실망하셨나 봐?’“모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 가운데 동문인 저한테 음험한 술수까지 사용했습니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독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제가 당하고 그다음 날에는 또 누가 당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고한빈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방 안으로 들어온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주께서 공정 공평하신 분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막 입문한 제자들에게 도씨 가문은 사리를 분명히 따지는 곳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습니다. 이곳에서는 규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그 어떠한 인정도 돌봐주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싶습니다.”그는 타당하고 신랄한 말을 하면서 도씨 가문 가주의 위엄을 높이는 동시에 강유리를 편 드려는 가주의 속셈을 미리 차단했다.사적인 마음이 하나도 없는 거처럼 남을 위하는 척을 하면서 도씨 가문의 명성을 높이려는 듯했다.도씨 가문 가주는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가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여유로워 보이는 자태와 달리 얼굴에는 위엄이 가득했다.“그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그 말에 고한빈의 두 눈은 살짝 반짝였고 강유리를 흘겨보더니 다소 흥분한 듯한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이 고한빈은 당황함도 잠시, 곧 차분해졌다.“가주께서 저를 지켜봐 주셨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강유리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유리를 편들어 주신다면 같은 제자로서 불평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고한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불평과 함께 본능적으로 식지를 만지작거렸다.마치 식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그러나 바로 이때 내내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지석훈이 나지막이 고한빈을 위해 불평을 토로했다.그는 다소 긴장한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제삼자의 입장에 서서 보면 가주께서는 여전히 유리 사숙의 편을 들어주시는 걸로 보입니다. 아직도 저희 사부님의 트집을 잡고 있으시니 말입니다.”이에 고한빈은 옆에서 보란 듯이 지석훈을 야단쳤다.“가만히 있으세요! 가주께서 모두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사숙은 본래 우리와 다른 대우를 받고 있었습니다.”“......”두 사람이 서로 맞장구를 치자 주위의 제자들은 더욱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강유리 일행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불만이 가득했다.“짝짝짝.”이때 강유리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고한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감탄하는 빛도 스며있었다.“그렇게 좋은 연기력으로 영화배우나 하시지 왜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는 겁니까? 성신영과 겨룬다고 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사숙,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고한빈이 나서서 대꾸하기도 전에 지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의 말에 따라 주위에서도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도씨 가문 가주는 본래 고한빈에게 스스로 자백할 기회를 주려고 했으나 관을 보지 않은 이상 절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원아, 가지고 오너라. 도대체 내가 누굴 감싸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줘야겠다.”그 말에 의문이 가득한 사람도 당황한 빛을 드러낸 사람도 있었다.그렇게 주목이 쏠린 가운데 원이는 컴퓨터
도씨 가문 가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이 반지는 도씨 가문의 암기다. 어디서 얻었고 지금 반지는 어디에 있느냐?”그러자 고한빈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없고 조작된 동영상이 분명합니다. 저를 몰아세우려고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이곳이 도씨 가문의 지역이고 강유리를 끔찍이 여기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일이 이 지경에 이른 이상 고한빈은 이를 악문 채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다.그 각도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는 것이 맞고 모든 이가 알고 있는 바이다.감시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갑자기 감시 카메라가 등장하자 의문을 불러오기 마련이다.고한빈의 사유는 그런대로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표정에 드러난 불안함은 마음속의 불안함까지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마음속의 의문이 풀렸고 더는 나서서 소리를 내어주는 이가 없었다.도씨 가문 가주 또한 그와 빙빙 돌아가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무대 위에서도 돌아오는 길에도 반지를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반지가 연기처럼 사라졌을 리도 없다. 그럼, 현장에 있던 한 사람의 손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뭇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저마다 표정이 다채로웠다.그러나 도씨 가문 가주가 하는 말에 그 “한 사람”이 정해졌다.“이제 와서 꺼낸다고 해도 늦었다. 너희들한테서 나오지 않기를 지금부터 간절하게 바라거라.”말을 마치고 그는 밖을 향해 눈짓을 했다.그러자 낯이 익은 사람들이 무술관의 옷을 입고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왔다.나태하고 산만한 일반 직원이 아니라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로 보였다.무술관에 오랫동안 머문 이들은 놀라워하지 않았는데, 신입생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다가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도씨 가문 출신이라면, 그게 개라 할지라도 괄목상대가 된다.]소문은 말 그대로라는 것이 이로써 분명해졌다.조금 전 입문에 성공한 이들 중 탄탄한 집안 배경으로
지석훈은 마음이 덜컹거리더니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의사 선생님이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절대 죽을 리는 없습니다.”강유리는 한사코 지석훈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모두에게 혐의가 있는 상황이니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아니면 독이 언제 몸속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 채 당하게 될 것입니다.”관심하려고 지석훈에게 다가간 신입생들은 그 말을 듣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조금 전 원이한테 한마디 대꾸도 못하던 소년은 모든 화를 강유리에게로 돌리기 시작했다.“이간질 하지 마세요!”강유리는 원수라도 본 듯한 그 신입생의 모습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곧이어 지석훈까지 수색하게 되었는데, 그의 몸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그 소년의 순서가 되자 기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 수색자는 고개를 돌려 원이를 보았다.원이가 직접 나서서 다가오고 구경하던 이들도 긴장해하며 고개를 내밀었다.소년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뚝 떨구었다.그러자 검은색에 디자인이 특별한 반지가 소년의 외투 주머니에서 나왔다.그 광경을 모두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그전까지 수색자는 소년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고 기기로만 수색했었다.하여 수색자가 소년을 모함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붉으락푸르락한 소년은 문득 고개를 들더니 날카로운 칼날다운 눈빛으로 강유리를 쏘아 보며 히스테리를 부렸다.“너! 네가 날 모함한 거야! 네가 조금 전에 그딴 말을 했잖아!”강유리는 어이가 없었지만 미친 듯한 소년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 어떠한 설명도 하기 귀찮아졌다.소년이 미쳤다고 한들 현장에 있던 다른 이들까지 미친 건 아니다.보다 못한 홍석천이 나서서 소리를 내며 반박하기 시작했다.“우리 사부님은 이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분신술이라도 써서 그 반지를 당신 주머니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사숙은 그럴 기회도 없
싸우고 있던 지석훈과 소년도 입을 다물고 고한빈을 바라보았다.고한빈은 지금 고개를 떨구고 눈꺼풀을 내리깔고 있어 그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마침내 얇은 입술을 벌리기 시작했다.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모습으로 천천히 대답했다.“네, 제가 먼저 손을 썼습니다. 하지만 저 또한 핍박으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도씨 가문 가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널 핍박했다는 말이냐?”“가주께서 강유리를 가장 아끼시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우린 강유리를 이길 수도 없고 감히 겨뤄볼 수도 없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어르신과 가주께서 그런 강유리의 뒤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고한빈은 멈칫거리더니 이어 말했다.“근데 이번 신입생들은 모두 제가 심사를 거쳐 골라낸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신입생도 저와 선배들이 함께 정성껏 훈련한 겁니다. 근데 왜 강유리가 제멋대로 돌아와서 우리가 힘들게 이뤄낸 성과를 앗아가는 겁니까? 가주께서 말리기는커녕 왜 가만히 보고만 있으신 겁니까? 저희한테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말하다가 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며 질의하는 눈빛으로 가주와 강유리 쪽을 바라보았다.가주가 강유리를 아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다들 마음속으로 똑똑히 알고 있으며 받아들인 일이기도 하다.그러나 도가네 무술관으로 들어온 이들은 모두 좋은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그 누구도 편애하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고 편애를 받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한빈의 말에 어느새 다들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하여 그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없어졌고 일부 선배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만 참지 못하고 그를 위해 소리를 내주었다.“한빈 후배가 잠시 어떻게 돼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없고 스스로 교훈도 얻었으니 가주께서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누군가가 나서면 잇따라 나서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맞습니다. 한빈 후배 손이 적어도 3개월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