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연예계에서 가장 신비롭고 사랑을 받는 톱스타조차 그의 여자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그의 눈은 빨개졌고, 강유리를 향해 울부짖었다.“이것도 네가 나한테 주는 벌이야? 그렇다면 감수해야지. 난 그저 제발 네가 다시 나한테 돌아왔으면 좋겠어……”그는 고통을 참으며 어렵게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며 애틋한 마음을 표현했다.“유강 주얼리에서 한정판으로 나온 거야. 전에 네가 좋아하던 게 생각나서 하나 샀어.”그의 행동은 어렵게 가라앉힌 분위기를 다시 얼어붙게 했다. 강유리는 차가운 눈빛의 육시준과 눈이 마주쳤고, 육시준이 입을 열었다.“받아주고 싶어?”“아니.”강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받아줄지 말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받아주겠다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비틀어 버릴 것만 같았다. 육시준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지만, 조금의 따뜻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착하지?” 강유리가 대답하려는데 육시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더니 머리를 숙여 차갑게 키스했다. 강유리는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짙은 점유욕을 느낄 수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느껴져 거절하려 했지만, 그는 더 격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는 입술이 얼얼하고 피비린내를 풍기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줬다. 강유리는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녀를 보지 않았고, 임천강의 형편없이 짓눌린 얼굴로 시선을 향했다. “봤어? 각자가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난 어쨌든 쓸모 있는 사람이잖아. 넌? 이런 유행 지난 반지나 가져오고. 형편없는 미친놈. 오늘부로 유리한테서 떨어져. 다시 한번 매달리면 평생 죽기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해줄 테니까 각오해.”“……”육시준의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했지만 뼈 마디마디까지 서늘해질 정도로 쌀쌀했다.임천강은 상상하지 못할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육시준의 경고가 진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 두려웠다. 육시준은 더 이상 그에게 쓸데없는 말을 할 기회조차
“그래, 넌 네 행동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번마다 내가 구걸하길 원하고 질투하고 화내고 내가 달래주기만 기다리고! 네가 도도하고 항상 사람들이 네 말만 잘 들어줘서 그러는 건 알겠는데 적어도 날 존중해 줘야 하진 않겠어?”“내가 널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육시준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그녀의 모든 생각을 존중하고 그녀가 자기 물건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결정도 존중했다.사람들이 자기가 하라던 대로 하는 거에 습관된 육시준은 맞지만, 그 또한 누군가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존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거야?’“넌 이게 존중이라고 생각해? 방금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날 어떻게 대했는데? 넌 날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고작 너의 승리를 자랑할 도구?”강유리의 눈가는 촉촉했다.육시준은 그녀의 울먹이는 말투에 마음 한편이 총에 맞은 것처럼 아팠다.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먼저 변명을 했다.“그런 뜻은 아니었어.”“하지만 그렇게 행동했잖아! 사과해!”“…”육시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유리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고 조그만 얼굴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나도 겁이 안 나는듯한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뾰로통해 있는 느낌이었다.육시준은 자신이 그녀의 애교에 저항력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이런 모습에 더욱더 어쩔 바를 모르겠다.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막무가내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 감정을 미처 생각 못 했어.”하지만 그녀가 그를 거절하는 이유가 고작 그 남자랑 데이트하러 가기 위해서라는 걸 생각하면 육시준은 냉정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게다가 어제 그녀는 또박또박 다른 일이 있어서 남는 거지 그를 위해 남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임천강 때문인 건가?강유리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의 진지한 사과를 들은 찰나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동안 많이 다퉈서 그녀 또한 뭔가를 터득해 낸 바가 있었다. 쌍방 모두가 자기의 잘못을
말은 끝났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육시준을 보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육 회장님?”육시준은 갑자기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되물었다.“첫사랑이 그렇게 잊기 어려워?”“네?”임강준은 잠깐 당황했다.육시준은 차분한 편이라 이번처럼 참을성 없이 누군가를 폭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전부터 임천강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고 자신이 강유리를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줄도 알지만 헤어지면 깔끔하게 잊을 줄도 알고 눈엔 온통 일밖에 없는 여자.저번에도 분명 나에게 설명했었어. 복수를 위해 나와 결혼한 게 아니라고.그리고 나와 임천강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지. 그러니 강유리 마음속에는 분명히 내가 있어.“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사랑은 여성분들한테 있어서 제일 아름답고 제일 순진했던 추억이니까요.” 임천강은 육시준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똑같이 진지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육시준의 안색은 어두워졌다.“위선적이고 탐욕이 끝도 없는 인간인데 뭐가 아름다워? 게다가 지금은 결혼도 했는데. 그럴 리가 없어!”임천강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사람이라면 모두 사심이 있는데 그렇다고 위선적이라고 평가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결혼했다고 해도 이혼할 수 있잖습니까! 부부 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결혼도 오래갈 수가 없다고 생각…”“넌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생각해?” 육시준은 위협적인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눈치챈 임강준은 입을 재빨리 다물었다.육시준의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평온한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본능적으로 자기가 육시준의 뜻을 왜곡했다고 느꼈다.“회장님, 영화 얘기 아니었습니까? 주영 씨가 평판도 좋으셔서 흥행성적도 목표에 도달했고 결말도 화제성이 높습니다!”영화의 결말은 엄청 현실적이었다.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여자주인공이 의미 없는 결혼 관계를 끝내고 용감하게 사랑을 찾아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극소수의 사람만 전 남자 친구가 여자주인공한에게 상처를 줬었기에 용서하
강유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오전에는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육시준이 가끔 부리는 억지에 강유리는 어이가 없긴 했지만 솔직히 싫진 않았으며 그를 달래주는 것도 꽤 나쁘진 않았다.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강유리도 덩달아 즐거웠기 때문이다.“내 남편인데 당연히 달래줘야지!”강유리는 육시준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으려고 했지만 육시준이 굳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마음속에 켕기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미안해서?”“내가 켕기는 게 뭐가 있어?”강유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건 전혀 없었지만 솔직히 미안한 마음은 조금 들었다.오전에 육시준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할 때 말투에 감정이 조금 들어있긴 했다. 데이트 신청을 하는 육시준의 태도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러고 나서 임천강을 우연히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이상하게 육시준에게 미안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화 좀 풀어. 오전에는 내가 잘못했어. 네가 바쁜 와중에 나랑 영화 보려고 했던 건데 내가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이나 하고. 사과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에 내가 거하게 쏠게. 응?”익숙한 듯 다정한 말투에 애교 섞인 모습까지, 이 모든 건 강유리가 육시준을 달랠 때 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육시준은 그런 강유리를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이마의 주름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녀는 뭔가 켕기는 짓을 저질렀을 때만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그뿐만 아니라 강유리가 이런 모습을 하는 건 단지 그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것이며 자기 잘못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강유리는 지금 자신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영화 막바지에 여자 주인공은 결국 자기 남편을 선택했어. 전 애인과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이 많다고 해도 그건 그저 추억일 뿐이야. 사람은 현재를 살아야 해.”말을 끝낸 육시준은 강유라의 손에서 팔을
프로젝트 담당자가 다급하게 전화하자 육시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을 앞당겨 실행하여 육경원을 확실하게 쫓아낼 생각이었다.“넷째 도련님께서 이 프로젝트를 손에 넣자마자 제일 먼저 공급업체를 바꿔버렸습니다. 원재료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임강준이 자기 생각을 얘기하자 육시준이 물었다.“사상자 상황은 어때?”“지금까지 13명이 중상을 입었고 경상을 입은 사람은 백 명 가까이 됩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임강준의 대답에 육시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임강준은 그런 육시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사실 이럴 때 대표님이 상황을 수습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을 하시는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 자식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육시준이 싸늘하게 대답했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난 다른 전 애인과 달라. 가식 떠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란 말이야.”“아…”임강준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육시준을 바라보았다.“네가 말해봐. 내가 임천강 그 자식과 비교했을 때 어때?”화제가 너무 빨리 바뀐 탓에 임강준은 따라가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래도 진정성이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런 사람은 대표님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고 확신이 서지 않는 육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근데 이 여자는 나와 영화 보는 걸 거절하고 그 사람과 커피숍에서 추억을 들먹이고 있었어.”육시준의 말에 임강준이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이 말을 들어도 되는 건가? 무섭네 무서워.’하지만 최고의 비서로서 사장님의 질문을 회피할 수는 없었기에 이성적으로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상대방이 추억에 빠진 거예요, 아니면 두 사람이 같이 추억에 빠진 거예요? 사모님이 그 사람과 몰래 만날 생각이었다면 대표님에게 들키지 않았겠죠? 전 사모님 눈이 높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급한 탓에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에게 속은 거죠. 그렇다고 똑같은 속임수에 두 번이나 당할 사람은
화를 내려고 하던 강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물었다.“보고하지 않았다고? 어제 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으러 오라고 전한 거 아니었어?”문기준은 강유리의 격한 표현에 입꼬리를 살짝 떨면서 대답했다.“전 그런 적 없습니다. 제가 아닙니다.”“그럼 누구야?”“저도 모릅니다.”아무 말 없던 강유리는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가 확신이 서는 듯했다. 육시준은 그녀가 거절했다는 거에 대해 화를 낸 게 아니라 거절을 한 것도 모자라 임천강을 만났다는 점에 화가 난 것이고 어젯밤에 했던 말들도 일부러 그녀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확실했다.전 애인과 아무리 아름다운 추억이 많다고 해도 그건 그저 추억일 뿐이고 사람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말…아름다운 추억은 개뿔, 임천강과 그녀의 추억 속에는 금전 거래밖에 없었다!화가 잔뜩 난 강유리는 다시는 육시준과 연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휴대폰이 들어있는 가방을 구석에 던져버렸는데 이내 가방을 힐끔 쳐다보던 그녀는 손을 뻗어 가방을 잡아당겼다.그를 달래주진 않아도 사실을 정확히 알려서 말도 안 하고 떠난 육시준이 자기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이런저런 생각에 장편 문자를 작성한 강유리가 전송을 눌렀지만 한참이 지나도 문자가 전송되지 않았다.눈살을 확 찌푸리던 강유리가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가 터지지 않았다.“네 휴대폰은 통화 가능해? 신호 터져?”그녀가 고개를 든 채 문기준에게 묻자 문기준은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아니요.”억수로 쏟아지는 폭우에 빗방울이 여기저기 튀고 있었으며 빗속을 달리는 벤 안에서는 창밖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호텔에서 배치해 준 운전기사는 두 사람의 대화에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이쪽은 개발 구역이라 경제 발전이 다른 곳에 비해 뒤떨어졌습니다. 특히 비 오는 날에는 항상 신호가 잘 안 터집니다. 이곳만 벗어나면 괜찮을 겁니다.”살짝 짜증이 난 강유리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문기준은 기사를 힐끔 쳐다보다가 눈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한편, 목적지
한편, 밴에 앉아있던 강유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느낌이 이상했다. 주변의 풍경이 낯선 것도 모자라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묵고 있었던 반산 호텔 주변에는 산과 물을 등지고 있었으며 조금만 내려오면 산길을 지나긴 해야 하지만 그 산길은 평평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이런저런 가게들도 많았다.하지만 지금 그들이 가는 길은 한 시간이나 넘게 운전했는데도 점점 더 가파르기만 했다.“기사님, 서울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는 건가요? 내비게이션을 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당연히 잘 알고 있죠! 이 길은 제가 자주 가는 길입니다. 조금 외진 길이기는 해도 큰길보다 30분 정도 빨리 도착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기사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강유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물었다.“날씨도 안 좋은데 안전한 길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희가 시간이 급한 건 아니니까요.”“육 회장님께서 시간이 급하다고 하셨습니다.”기사가 말을 얼버무리자 강유리가 날카롭게 물었다.“어떤 육 회장님이요?”기사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지만 대신 운전 속도를 점점 더 올리기 시작했으며 밴은 곧 사고라도 날 듯이 빠르게 달렸다.두려운 마음에 입을 닫은 강유리는 백미러를 통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문기준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뒷좌석에 앉아있던 강유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에서 마취 주사를 발사했고 그 주사는 정확하게 기사의 목에 꽂혔다.숨을 크게 들이마신 운전기사는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채자마자 마지막 남은 힘으로 핸들을 확 꺾어버렸고 차는 빠르게 가드레일을 향해 달려갔다.이와 동시에 곁에 있던 문기준이 핸들을 빼앗은 뒤, 다른 한 손은 브레이크를 잡았다.절체절명의 순간, 까만색 밴은 외진 길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마지막 순간 벼랑 끝에서 멈추었고 앞바퀴는 그대로 길을 따라 굴러갔다.힘들게 차에서 내린 강유리는 곁에 놓여 있던 우산까지 들고 있었고 밖에 서서 긴장한 듯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던 문기
”여기서 그 사람들이 확인하러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상대방은 내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도 않을 거잖아?”“이건 도박입니다. 위험해요.”문기준은 강유리에게 경고하긴 했지만 눈빛은 어느새 반짝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그는 명문 가문들 사이의 싸움이 소꿉장난처럼 느껴졌으며 특히 여자를 상대하는 짓이 지겹기도 했다.육시준이 반드시 강유리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라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망가려고 했던 것일 뿐, 그 이유만 아니면 문기준의 특수한 신분, 전쟁에 최적화된 피가 흐르는 그는 절대 걸어오는 이 싸움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그의 생각을 눈치챈 강유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자극했다.“겁나면 너 먼저 가도 돼.”그녀의 자극이 먹히긴 했지만 문기준은 또 다른 걱정이 생겼다.“만약 상대방이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들통날까 봐 안 나타나면 어떡할 거예요?”“그럼 구세주를 기다리는 거라고 치지 뭐! 너희 육 회장님이 질투도 많고 쪼잔하긴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어. 싸우더라도 부부 사이의 애정을 보여주는 것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거든.”점심시간이 됐으니 그는 평소대로 그녀에게 점심을 먹었는지 전화할 것이고 연결이 되지 않는 지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들을 찾으려고 갖은 방법을 쓸 것이다.문기준은 자신의 옛 보스를 보잘것없이 평가하는 강유리의 말에 백 번이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모시고 있는 현 대표님의 말과 행동에 무조건 찬성하는 건 보디가드로서의 직업적 도덕이었기 때문이다.벼랑 끝에 매달려 휘청거리는 차에는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우산을 쓴 채 길가에 서 있었다.한 시간 정도 지난 지금,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고 뚫어진 우산 안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어느새 강유리의 앞머리는 흥건히 젖어버렸고 축축하게 이마에 붙은 머리 탓에 그 모습은 유난히 비참해 보였지만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쭉 펴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같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