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너무 아파.. 아플 뿐이야? 불에 덴 느낌이야. 다들 정말 고마운데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어.’“괜찮은 거야?”소지석이 다정히 묻는 목소리에 강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현실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입을 열었다.“뭐 큰일이라고 다들 모였어? 누가 말해준 거야?”강 감독은 불만스럽게 그녀를 쏘아보면서 말했다.“우리한테 말 안 할 작정이었어? 우리가 그럴 사이야?”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 뭐 좋은 일이라고 창피하게 다 알려.”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했다.소지석은 의자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강유리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뭐가 창피하다는 거야? 넌 피해자야. 창피해야 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쪽이라고!”3년 전에 나돌았던 음탕한 소문으로 인해 강유리의 평판이 아주 나빠졌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던 강유리는 종래로 명성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터라 이런 상처를 창피하게 생각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소지석은 차가운 목소리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육 씨 집안에서 말하지 못하게 막은 거야?”육경서는 손사래를 치며 생각을 말했다.“그럴리가요. 육 대표님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명성을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면, 어제 육경민한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거예요!”소지석은 고개를 돌려 육경서를 바라보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렇게 네 형을 잘 알아?”“……”육경서는 마음속으로는 형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소지석의 단호한 눈빛에 말문이 막혔다.숨 막힐 정도로 조용함이 감도는 가운데 소안영이 침묵을 깼다.“검사 결과 다 봤어. 호텔 CCTV도 다 확보했고. 네가 책임을 묻고 싶다고 하면, 내가 도와줄게.”신주리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우리 오빠 엄청 능력 있고 정직한 경찰이야. 그런 사람들은 콩밥 좀 먹어봐야 해. 아무 수도 쓸수 없게 해야 한다고!”조보희는 어떻게든 강유리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이어 나갔다. “나 간호사
육경서는 난처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남의 일에 관심조차 없던 그녀가 이토록 민감한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가 머리를 쥐어짜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를 때, 마침 강유리가 잽싸게 감사함을 전하고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다 바쁘지? 나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꼭 연락할게!”강유리의 말에 육경서는 그 기회를 빌려 맞장구를 쳤다.“그래. 우리 다 먼저 나가요. 좀 쉬게 하는 게 좋겠어요.”모든 사람이 나가고 육경서가 맨 뒤에 섰다. 그는 감히 신주리의 눈동자를 쳐다보지 못하고 도망치려는데, 강유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도련님, 잠시만요. 물어볼 게 있어요.”“……”‘역시 우리 형수님이야!’육경서는 재빨리 문을 닫고 그녀의 앞에 섰다.굳게 닫힌 방문을 보며 신주리는 의문이 들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작은 소리로 소안영한테 말을 건다.“육경서 이상하지 않아?”“뭐가?” 신주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유리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엄청나게 보호하는 느낌이던데? 방금 육 씨 집안 경호원들도 물리쳤잖아. 무엇보다 아까 유리를 형수님이라고 부른 게 정말 이상해……”“육 대표 친동생이잖아. 형수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그 말을 듣고 신주리는 깜짝 놀라 사색이 되었고, 옆에 있던 소지석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래서 방금 육 대표 편을 그렇게 들었구나……’신주리는 그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어떻게 알았어?” 소안영은 은근히 자랑하며 말했다.“유리 남편이 누군지 알고 나서 바로 육 씨 집안에 대해 알아봤지? 그때 알아냈구나.”“……”‘의리도 없이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그들은 아래층에 내려긴 뒤 각자 흩어져 제 갈길 갔다. 소지석이 떠나기 전에 소안영을 불러 육 씨 집안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자 그녀는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갸우뚱하더니 입을 열었다.“육 씨 집안 상황은 왜 알고 싶은 거야?”소지석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육경서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형이 무슨 일이 있을 리가요. 육경민 그 개새끼가 일이 있어야죠! 아버지가 다 가족이니까 일 키우지 말자고 저녁에 집에서 다시 얘기하자고 하셨어요.”“오늘 집에 간다고요?”“네. 형이 얘기 안 했어요?”육경서는 실언했다고 생각하고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이 빌어먹을 익숨함. 데자뷰 인가? 저번에도 내가 함부로 말해버렸는데 이번에도 형이 먼저 말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말했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집에 간다고요?”그녀의 말에 육경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했다.“지금 상황이 뭐 문제 있어요? 왜 집에 가면 안 되는 건가요?”“……”저녁 무렵, 노을이 천천히 하늘을 물들이고, 색이 깊고도 옅어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검은색 롤스로이스 자동차가 정원에 들어섰다.강유리는 아직 망연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남의 집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녀가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몸이 안 좋아. 아무래도 다른 날로 잡는 게 좋겠어.”육시준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차디찬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말했다시피 우리 집은 그 집이랑 아무런 관계도 없고, 왕래도 없어. 우리 부모님께 밉보이지 말자. 응?”“……”강유리의 눈이 파르르 떨렸지만, 육시준의 큰 손을 잡자,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투는 자상하고 상냥했으며,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그녀는 얇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이 일로 여보가 형제들이랑 등을 지면, 부모님은 나한테 화풀이 할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강유리는 종래로 자신만만한 사람이었고, 절대 자기 자신을 비천한 위치에 놓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육시준에 대한 일에서는 예외였다. 그가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해도 그녀는 각별히 조심했다. 그가 존경하는 어른들 앞에서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더욱 걱정했다. “화풀이하면 나한테 하시겠지. 그
강유리는 자리에 앉았다가 그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일어났다.육시준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다독여 안심하라는 표시를 했다. 육시준의 어머니는 다가와서 앉으려고 할 때 그 둘의 행동을 힐끗 보고는 의외라는 생각을 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어제 저녁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지 않았다면, 내 며느리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거야.”육시준의 부모님은 육시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육경서가 한 말도 있었기에 그 둘이 협력 관계 이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강유리가 진심으로 사과했다.“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더 일찍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생각이 짧은 걸 알기는 하네?”“……”강유리는 고개를 푹 숙였고, 육시준이 그녀의 편을 들어줬다.“엄마, 유리 금방 퇴원했어요. 놀래키지 말아요.” 육시준의 말은 쓸모가 있었다. 육시준 어머니는 잠시 멈칫하더니 강유리한테 손짓하면서 말했다.“이리 와. 내 옆에 앉아.” 강유리는 그녀의 안색이 여전히 언짢고 기세가 강한 것을 보고는 육시준을 힐끗 보았고, 육시준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걸어가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강유리의 옷차림을 살펴 보았다. 강유리는 꽃무늬 치마에 플랫슈즈를 신고 매우 예쁘게 치장을 했다. 그녀가 자신의 차림을 살펴보는 것을 발견하고 강유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더욱 조심스럽게 앉았다.“어디서 새댁 코스프레야? 내가 너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줄 알아?” 강유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그렇다면, 내숭 따위는 부리지 않겠습니다.”강유리는 다리를 꼬고는 소파에 기대 앉아 턱을 괴고 말했다.“이 일이 모두 제 탓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이가 못 오게 한 거예요.”“……”육시준의 어머니는 갑자기 변해버린 강유리의 태도에 당황한 듯 했고,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지켜보는 세 남자의 얼굴 표정도 제각각이었는데, 오직 육시준만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한미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분명 경민이가...”“사과는 이미 했습니다.”육시준이 불쑥 끼어들었다.물론 오늘 점심 아버지 육지원이 노발대발하지 않았다면, 병실 문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뭐?”시원스러운 대답에 한미연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고집이라면 세계 1위인 아들이 사과라니...이제라도 철이 든 건가 싶었지만... 바로 이어지는 한 마디에 그녀의 환상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사과하러 간 건데... 자꾸 화를 돋구길래 몇 대 더 때려주긴 했지만요. 사실 오늘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됐네요.”뻔뻔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육시준의 모습에 육지원도 한미연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니까 더 이상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하루라도 더 빨리 퇴원하길 바라신다면요.”“너...!”참다 못한 육지원이 찻잔을 쾅 하고 내려놓자 한미연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화제를 돌렸다.“일, 일단 밥부터 먹자. 유리야, 요즘 많이 바빴나 봐? 다들 살 빠진 것 좀 봐.”육경서도 거들었다.“엄마도 참. 오늘 형수 처음 보시는 거잖아요. 살 빠진 건 또 어떻게 아셨대?”“어머, 얘 좀 봐. 사진으로 다 봤지. 해외에서 지내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은 거 아니야?”하지만 이어지는 한 마디에 식탁 분위기는 또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한편, 식사 내내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육지원을 바라보며 강유리는 몰래 혀를 찼다.다들 행복한 결혼생활의 최대의 적은 고부갈등이라고 하기에 어떻게든 한미연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거늘...가장 큰 복병이 육지원일 줄이야.‘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나?’식사 후, 육시준은 아버지의 호출에 서재로 향하고 육경서는 전화 통화를 위해 베란다로 나간 터라 강유리 혼자 덩그러니 거실에 남게 되었다.그리고 잠시 후 나타난 한미연의 손에는 봉투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앉은 그녀가 강유리에게 봉투를 건넸다.흠칫
강유리가 진지하게 묻자 인자한 미소만 짓고 있던 한미연의 표정 역시 조금 어두워졌다.소파에 살짝 몸을 기댄 그녀가 대답했다.“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마음에 드네 마네 하는 말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단다. 오히려 괜한 집안싸움만 되는 꼴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나도, 시준 아빠도, 시준이를 믿고 그 아이의 뜻을 존중해. 그러니 당연히 널 우리 집안 며느리로 받아들일 거다.”진솔한 대답에 왠지 모르게 강유리의 고개는 더 숙어졌다.“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저에 대해 조사는 해보셨을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 소문에 대해서도 아실 테고요.”“그 소문들 정말 사실이니?”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강유리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아, 아니요.”“아니면 된 거 아니야? 재벌가... 다들 고상한 척, 깨끗한 척 하지만, 어찌 보면 시궁창보다 더 더러운 게 이 바닥이야. 그저 다들 돈과 권력으로 애써 더러운 허물을 숨기는 능할 뿐이지. 나도 이 나이까지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많이 봐왔어. 적어도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가릴 수 있는 분별력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정말로 현명한 인생 선배 같은 한미연의 말에 강유리는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진짜 이런 시어머니도 있구나...’“그리고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어머니로선 당연히 네가 시준이의 대외적인 명예와 입장을 생각해 주길 바라지만, 너와 같은 여자로선 시준이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기 여자도 제대로 못 지키는 놈이랑 결혼을 왜 해? 그리고 그런 자식이 다른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어?”“그럼 어머니로서의 생각과 여자로서의 생각 중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리시는데요?”고개를 갸웃하던 강유리가 다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글쎄? 솔직히 말하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는 질문이구나.”“네?”“인생 선배로서 조언하는데 너도 괜히 그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그러지 마. 그런 건 육씨네 부자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자고. 우리 이
“이 수표는... 받지 않을래요. 물론 새 작품도 어머님을 위해 남겨둘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단순하지만 강유리의 좌우명 같은 말이었다.게다가 시어머니라는 애매한 사이에서 괜히 신세를 지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행여나 이것이 LK그룹의 돈을 보고 육시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테스트가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도 없었기에 덥썩 받는 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다.‘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내 힘으로 얻어야 제맛이지.’한편, 2층 서재의 분위기는 훨씬 더 무거운 모습이다.워낙 보수적인 육지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효심이었으므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할아버지 화 많이 나신 거 뻔히 알면서 달래드릴 생각은 안 하고 불난 데 기름을 부어? 우리 가문에 불효자는 필요없다. 계속 네 멋대로 하고 살 거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가만히 안 있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너야 뭐...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강유리, 그 정도는 이 아비가 건드려 볼만 하지 않겠니?”육지원의 입에서 강유리의 이름이 나오자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육지원, 육시준.살가운 부자사이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는 일도 드물었다.보통은 효도네 뭐네 하는 레파토리가 나올 때쯤이면, 육시준이 먼저 타협하곤 했었지만, 강유리까지 건드린 이상, 그도 절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괜히 나 때문에 유리가 더 위험해지는 건 싫어.’“사실 저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요.”“무슨 방법?”육지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유리가 사고를 쳐서 할아버지 심기를 건드린 것도 삼촌과 아버지 사이가 껄끄러워진 것도 사실이니... 차라리 이혼하겠습니다.”이에 차분한 육시준과 달리 육지원이 발끈했다.“내가 제대로 사과하라고 했지 언제 너더러 이혼까지 하랬어?”“이혼이 더 쉽고 깔끔하죠. 그리고 제 성격 아시잖아요? 잘못한 게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까지 할 만큼 멍청하지
약 30분 뒤, 육시준 부자가 차례로 서재에서 나왔다.여유로운 얼굴의 육시준과 달리 육지원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 이었지만 말이다.한미연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하룻밤이라도 집에서 재우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육지원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2층으로 불렀다.그렇게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아들 부부를 떠나 보낸 한미연이 안방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아니,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아들 부부가 처음 집에 온 거잖아요. 살가운 시아버지까진 아니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표정은 다 썩어서는!”아내의 말에 육지원이 흠칫했다.“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았나?”뻔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한미연이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그 복잡한 집안 사정, 난 이해하길 포기한 지 오래예요. 그리고 난 유리가 마음에 드니까 괜히 반대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당신 아들한테 화를 내세요! 괜히 시댁까지 와서 잔뜩 기죽어 있는 애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수십 년간 부부로 살다보니 이제 척하면 척.한미연은 딱 봐도 아들과의 말싸움에서 한방 먹은 게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였다.‘하여간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들어.’“그래.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나도 마음에 드는 것 같아.”육지원이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식... 최대한 빨리 올리라고 해. 당신이 애들 준비 좀 도와줘.”남편이 갑자기 이 결혼에 이렇게 적극적인 데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 한미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따져물었다. “아니, 식사 내내 뚱해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변덕이에요? 솔직히 말해 봐요. 아까 시준이랑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예요?”“...”의심 가득한 아내의 질문에 육지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다른 것도 아니고 우리 아들이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아니, 나도 유리 마음에 든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결혼식 올리라고 해. 최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