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입술을 꼭 깨문 유미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제하며 속으로 릴리를 수없이 욕했다.‘망할 계집애가 예의라곤 전혀 없어. 부잣집 딸은 교양이 없어도 되는 거야?”하지만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불만을 집어삼키는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릴리가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면 자기와 육경서와의 관계도 모를 것이고 그렇다면 아주 깨끗한 우정을 쌓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제가 이곳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탈의실까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주최 측에 드레스를 가져다 달라고 요구할 테니 바로 환복하고 나갈게요.”유미나는 서슴없이 릴리에게 요구를 제기했다.사실 유미나의 말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었다. 주최 측에 직접 드레스를 요구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다는 뜻으로 자기 신분이 낮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냈고 새 드레스로 갈아입더라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약속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드레스가 망가진 탓에 자기한테 폐를 끼쳤으니 릴리가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려는 뜻도 내포되었다. 다행히 상대는 그녀의 말뜻을 알아듣고 흔쾌히 승낙했다....탈의실로 가는 길에 릴리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수백 가지 가능성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 여자의 목적이 무엇일지 추측했다. 만일 릴리가 남자라면 유미나가 이런 저속한 수법으로 탈의실로 데려가 꼬리 쳐 홀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데 꽃다운 가녀린 여자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의심을 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유미나의 수법이 너무나 상투적이고 목적성이 뚜렷해 이마에 써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어릴 때부터 권력 중심에서 성장하면서 단련되다 보니 이보다 더 고급스러운 수법도 사실 릴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탈의실에 도착한 뒤 밖에서 유미나를 기다리며 릴리는 절친 단톡방에 현재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릴리: [...유미나가 대체 뭐 하려는 걸까?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릴리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더니 한층 밝은 모습으로 말했다.“드레스 한 벌뿐인데요. 괜찮아요.”대수롭지 않은 릴리의 말투와 유미나의 신중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유미나는 자신이 욕심 많은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거절했지만 돈 많은 부자들은 이런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저 보람 있는 소비인지, 소비를 해서 기분이 좋은지만을 추구했다.유미나는 계속해서 거절하면 오히려 속 좁은 사람으로 보여질까 봐 활짝 웃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저와 어울리긴 한 거 같아요. 안목이 있으시네요.”그러더니 이내 한마디 덧붙였다.“저녁에 혹시 시간 되세요? 시간 되시면 저와 함께 식사해요. 덕분에 제가 오늘 낭패를 안 봤어요.그러자 릴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유미나를 바라봤다.‘그래! 바로 이거였어. 역시 무슨 꿍꿍이가 있었어...’“저녁에는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남자 친구와 약속이 있어요.”릴리가 난처하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거절하자 유미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남자 친구와 함께 오셔도 돼요. 이 기회에 얼굴 익히면 좋잖아요.”그 말에 릴리는 도도한 표정으로 유미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더니 마치 네 따위가 뭔데 라는 뜻으로 빤히 쳐다보았다.“다른 뜻은 없어요. 이렇게 예쁘신데... 혹시 남자 친구를 빼앗길까 봐 그러세요?”유미나는 억지로 담담한 척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릴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제 남자 친구는 솔직한 사람라 여우 짓하는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해요.”“...”유미나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릴리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느릿느릿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그쪽이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발표회가 끝나면 다시 얘기하죠. 그때 가서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아직 모르잖아요.”릴리의 목소리는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았고 어떤 때는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들리다가 또 어떤 때는 아주 정중했다.릴리의 태도에 유미나는 혼돈스러웠지만 이내 의혹을 떨쳐버렸다.릴리같은 부잣집 자녀들은 어
“우리 헤어지자. 넌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23살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 올해 천강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빌고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은 강유리가 받은 문자메시지 내용이다.휴대폰을 바라보던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3년 동안 롱디라서 많이 섭섭했나? 그게 미안해서 금전적으로 어떻게든 뒷바라지 해줬던 건데. 그리고 그 동안 한 번도 이런 말 한 적 없었잖아.’일방적인 이별 통보였지만 그녀는 그저 오랜 롱디에 지친 남자친구의 귀여운 투정 정도라고 생각했기에 가장 빠른 항공편으로 귀국했다.당일 밤 11시.‘내가 자길 위해서 특별히 귀국했다는 걸 알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서프라이즈를 제대로 해주기 위해 강유리는 기나긴 채팅기록을 뒤져 언젠가 그가 알려주었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아냈다.“삑삑, 삐리릭.”문이 열리고...트렁크를 살며시 내려둔 채 살금살금 2층으로 올라가던 강유리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남자는 첫사랑 절대 못 잊는다던데. 이렇게 쉽게 헤어지는 거야?”“뭐래. 내 첫사랑은 너야. 강유리 걔는... 어디까지나 돈 때문에 좋아하는 척 하는 거였다고. 우리가 애도 아니고. 플라토닉 연애라니. 하여간 더럽게 비싸게 굴어요.”“뭐야. 그럼 스킨십하려고 나랑 만난다는 거야?”“자기도 즐겨놓고 왜 이래. 응?”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점점 야릇하게 변하고...밖에서 이 모든 걸 듣고 있던 강유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방으로 다가갔다.역시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서로 뒤엉킨 남녀의 모습이 보이고... 강유리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냈다.“찰칵.”휴대폰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방금 전까지 서로에게만 빠져있던 임천강, 성신영이 화들짝 놀란다.방 앞에 서 있는 강유리를 발견한 임천강이 일단 급한대로 이불로 비루한 몸뚱어리를 가려본다.“강유리? 네... 네가 어떻게 여길...”떨리는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났다.“그냥... 네가 원하는 게
화풀이를 끝낸 강유리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둘 다 뭘 잘했다고 이렇게 뻔뻔해? 무릎 꿇고 애원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지금 나만 이 상황 이해 안 가는 거야?”“너...!”“임천강, 나 늙어죽는 한이 있어도 너 같은 애랑 결혼 안 해. 네가 누굴 좋아하든 상관없는데 그럼 적어도 나랑 끝내고 만났어야지. 추잡하게 이게 뭐 하는 거야? 어쨌든... 오늘 이 치욕... 절대 이대로 못 넘어가. 어떻게든 복수할 거니까 두고 봐.”말을 마친 강유리가 자리를 뜨고 분노에 찬 임천강의 절규가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강유리, 너야말로 두고 봐! 내가 멍청이처럼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한편, 오피스텔을 나서며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던 강유리가 우뚝 멈춰 섰다.‘아니지. 여긴 내 집이잖아. 왜 내가 나가야 해?’휴대폰을 꺼낸 강유리는 바로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아, 502호 주인인데요. 3년 동안 집을 비웠더니 모르는 사람들이 무단침입해서 살고 있네요. 경찰에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어서 처리해 주세요.”늦은 밤, 강유리의 전화에 벌떡 일어난 관리인은 바로 경비원들과 함께 502호로 달려가기 시작한다...마지막 미션까지 마친 강유리는 트렁크를 끌며 새벽의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연인의 배신, 슬프다기 보다 짜증이 밀려왔다.그녀와 임천강은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고 수많은 남자들 중 임천강은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한때 열렬하게 그녀를 사랑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그런데... 오늘 밤 그녀가 목격했던 추잡한 장면은 지난 3년이란 시간을 그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애초에 날 좋아한 적도 없었잖아. 그냥 내 돈 보고 접근한 거였어?’“나쁜 자식들!”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짜증이 밀려들어 발에 닿는 조약돌을 퍽 차는 강유리다.하지만 다음 순간, 묘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조약돌이 길가에 주차된 차량에 부딪히며 캉 하고 맑은 소리를 낸다.“헉!”가까이 가보니 롤스로이스 한정판.방금 전
한편, 육시준 역시 갑자기 나타나 계약 결혼이네 한달에 천만 원이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강유리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그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그가 손을 내민 곳은 뒤쪽이었다.“자료 좀 주실래요?”어젯밤 차에 남긴 정보에 따라 비서가 이미 강유리의 뒷조사를 완벽히 끝낸 상태.무표정으로 태블릿 PC를 넘기던 육시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1000만원은 너무 적지 않나? 적어도 0 하나는 더 붙여야지. 그래야 육씨 집안 사모님이란 타이틀에 걸맞을 테니까.”목소리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강유리는 0 하나는 더 붙여야 한다는 말에 꽂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하이고? 요즘 호스트는 가격 흥정을 이렇게 하나? 하긴, 저 얼굴에 저 분위기에... 부잣집 사모님 한 명 제대로 잡으면 월에 억은 쉽게 받겠어. 하지만...’“5000만원, 이 정도에서 끝내지. 적당히 해.”해외에서 매달 임천강에게 용돈 명목을 부쳐준 돈이 겨우 2000만원 남짓, 강유리가 부자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일로 호구 잡힐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이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육시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런데... 5000만이든 1억이든 누가 누구한테 주는 거지?”“내가 그쪽을 고용했으니까 당연히 내가 주는 거지.”이에 육시준은 다시 강유리의 얼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얼핏 얼핏 보이는 요염함이 매력적인 정교한 얼굴, 지금까지 그의 돈에 빠져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던 여자들과는 달리 자신만만함을 넘어 어딘가 고고하기까지 한 눈빛...‘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좋아.”잠시 후 얘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선다.하지만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강유리는 우뚝 멈춰서더니 익숙한 롤스로이스에 시선이 꽂힌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강유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내가 저 차 주인한테 빚을 좀 진 게 있거든.”강유리를 보는 육시준의 눈이 또 묘하게 변하고...비서 역시 상황이 묘하게 변하고 있다 싶지만 육시준의
충격으로 일렁이는 육경서의 눈동자는 제발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듯했지만 육시준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비서에게 분부했다.“강유리, 그리고 그 집안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줘요.”3년 동안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가 귀국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강행하는 걸 보면... 뭐에 쫓기는 듯한데.육시준은 그 답이 그녀의 집안에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알겠습니다. 해외 유학생활에 대해서도 알아볼까요?”어제 비서가 급하게 구한 자료에선 그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3년 간 도피 유학을 떠났다는 정보가 전부, 그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다.“아니요.”‘그건 그 여자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하지만 육경서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다.여기 오면서 비서에게 대충 들은 바로는 어제 일부러 육시준 차에 스크래치를 내놓고 오늘 못 알아보는 척 결혼 제안을 한 여자라던데...‘아무리 생각해도 꽃뱀 같단 말이야. 뭔가 냄새가 나... 구린 냄새가...’“형, 그 여자 진짜 형 얼굴 모르는 거 맞아?”서울시에서 한정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육시준 한 사람뿐.그의 차가 곧 그의 얼굴이자 이름 같은 존재인데 아무리 갓 귀국했다지만 그걸 못 알아봤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동생의 질문에 잠깐 고민하던 육시준 역시 고개를 저었다.“글쎄..”“그런데 왜...”“내가 알아서 해.”동생의 말을 잘라버린 육시준이 말을 이어갔다.“아, 아주머니한테 내 짐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해 줘. 오늘부터 와이프랑 같이 살아야 하니까.”한편, 강유리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들른 뒤에야 집으로 향했다.마침 저녁 시간, 문 앞에 차를 댄 강유리는 검은색 철문 옆에 적힌 글씨를 보고 미간을 찌푸린다.“성홍주”강민영이 세상을 뜬 뒤로 성홍주는 강유리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재산을 전부 빼앗은 것도 모자라 첫사랑과 낳은 사생아까지 집안에 들였다.빨리 어른이 되
강유리의 말에 저택은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신영과 왕소영 모녀는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성홍주는 커다래진 눈으로 물었다.“너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진 거 아니었니? 그런데 오늘 바로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성홍주의 말에 강유리의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생물학적 아버지로서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연민마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하, 아빠도 제가 어제 헤어진 걸 알고 계셨네요. 제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딸이 자기 언니 남자친구를 빼앗은 것도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는데.”강유리의 팩폭에 성홍주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지만 곧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꾸짖기 시작했다.“가족끼리 그런 일로 꼭 얼굴을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니!”성홍주가 자기 편을 들어주자 의기양양해진 성신영이었지만 또다시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나랑 천강 오빠가 언니한테 잘못한 게 맞는걸.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 우린 그냥 언니가 상처를 받을까 봐 제대로 날 잡고 사과하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오해가 커질 줄은 몰랐어. 내가 맞아도 싸지 뭐.”눈시울을 붉히는 성신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성홍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성홍주의 눈에 성신영은 한없이 착하기만 한 예쁜 딸이었고 강유리는 자기 엄마를 꼭 닮아 강압적이고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딸이었기에 마음이 성신영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네가 이렇게 뻣뻣하게 구니까 남자가 도망가는 거 아니야. 네 동생 반만 닮아봐. 천강이가 바람을 피웠겠어?”“아빠, 죄송해요. 저한테 많이 실망하셨죠. 비록 신영이랑 제 남자친구가 저 몰래 바람을 피우긴 했지만 그래도 한 가족이니 축북해줬어야 했는데 맞죠? 그 집도 엄마가 저한테 남겨주신 주식까지 다 신영이한테 줄 걸 그랬어요.”강유리가 성신영의 말투와 표정을 따라하고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세 사람이 어벙한 표정을 짓는다.‘뭐? 집에 주식
하지만 임천강의 비아냥거림이 들리고 순간 스쳤던 빛이 후광이 와장창 깨져버린다.‘임천강, 너도 저 집에서 들어앉은 사람들이랑 다를 게 없어. 가식적이고 탐욕적이지. 역겹게...’임천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유리는 뭔가 결심한 듯 엑셀을 거세게 밟았다.순간 차량이 화살처럼 앞으로 발사되고... 방금 전까지 건방진 표정을 짓고 있던 임천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던 임천강은 다급한 나머지 자기 발에 걸려 대자로 넘어지지만 핸들을 잡은 강유리는 도무지 속도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오빠!”“강유리, 너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임천강을 마중나온 성신영 모녀는 비명소리만 꺅꺅 내지르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끼익...”그리고 그 순간 타이어가 무서운 마찰음을 내며 임천강과 단 한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드디어 멈춰 섰다.지잉...차 창문이 내려가고 운전석에 앉은 강유리가 고개를 쏙 내밀더니 여유로운 얼굴로 픽 웃었다.잔뜩 긴장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너나 잘하세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강유리의 스포츠카는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사라지고 매연에 세게 콜록거리던 임천강은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저 미친... 두고 봐.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아?’여느때와 다름없이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강유리는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도로를 한없이 달리기만 했다. 도로에 줄지어 선 가로등 불빛에 강유리의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이 어딘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클럽 죽순이에 걸레라... 그래도 한때 사귀었던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야? 됐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결국 치미는 짜증에 강유리가 자주 가는 바로 핸들을 꺾으려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어디야?”수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매력적이지만 낯선 목소리.발신인을 확인한 강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분명 모르는 번호인데... 누구지?’“누구세요?”“...”잠깐의 침묵 끝에 육시준은 한 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