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한 치도 오차 없이 계획했다고 해도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육시준은 나중에 신하균의 전화를 받아서야 릴리와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우신 오빠가 데리러 와서 제가 궁금해하던 화제를 꺼내길래...”릴리는 우물쭈물 속았던 과정을 상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마침 강유리가 궁금했던 것도 다른 부분이었다.“그 사람이랑 갔는데 하균 씨가 뭐라고 안 해?”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픽업하러 온 사람이 있어서 데리러 올 필요 없다고 문자 보냈거든요.”“이 좋은 기회를 잡지 그랬어.”바론 공작도 강유리의 의도를 알고 물었다.“아니, 제가 한 말이 사실이라니까요! 관심이 없다는 데 왜 다들 안 믿는 거예요?”릴리가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하균 씨도 저를 좋아하지 않아요.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다니까요.”“...”잠깐 침묵의 시간이 다가왔다.강유리는 그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릴리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긴 해도 마음이 식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달랐다...강유리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마음이 맞는다는 그 사람이랑은 정말 남녀 사이의 관계인 거야? 만약 하균 씨가 너를 좋아한다고 해도 포기할 거야?”릴리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더욱이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저는 진짜로 벌어질 일도 아닌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궁금해하지 말라고요. 다른 얘기 좀 해봐요. 어젯밤 고한빈 씨가 하는 행동을 보면 무조건 외국에 손잡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빠는 언제 돌아가려고요?”총명한 릴리는 화제를 바론에게 돌렸다.바론이 여기 남아있는 이유는 훤히 보였다. 그래서 바론과 강유리가 더는 침묵하지 말고 문제를 직시하라고 일부러 끄집어냈다.고개 숙여 밥먹고 있던 강유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여느 때와 같이 이 일은 자신과 아무런
정확하고 냉정한 대답에 바론 공작은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분위기가 다시 처지기 시작하자 강철우가 수습해 보려고 했다.“그만하고, 밥부터 먹자고. 릴리가 무사하면 됐지. 아니면 엄마랑 아빠가 죽을 때까지 자책할 뻔했어.”“왜 자책하는 건데요?”릴리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는 억지 부리지 않고 할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갔다.“왕소영이랑 성한일이 Y 국에 간 걸 진작에 알고 있었어. 최근에 계좌에 큰돈이 들어갔는데도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어.”“...”릴리는 믿기지 않는 듯이 물었다.“계좌에 큰돈이 들어왔다고요? 저는 왜 확인하지 못했죠? 그러니까 제가 확인한 것은 고성 그룹에서 일부러 저한테 보여준 거네요?”“고정철은 몇 년 동안 서울에서 몰래 지내고 있으면서 그래도 아는 사람이 많아. 너는 아직 잘 몰라서 당하기 일쑤지.”강철우가 위로했다.릴리는 그제야 반응하면서 육시준을 쳐다보았다.“그 회사에 계좌 이체한 내역을 찾아내지 않기를 원했겠네요? 그래서 상대방이 눈치챌까 봐 더는 확인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윤시준은 강유리에게 국물을 떠주더니 대답했다.이미 예상했던 반응인 것만 같았다.세상이 아무리 시끄럽다고 해도 그저 강유리에게 국물을 떠주고 싶은 모양이었다.릴리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와이프를 끔찍이 생각하는 남자가 몰래 이렇게 큰일을 벌였다는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당사자인 릴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엮여 들였다니.릴리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육시준은 그녀가 충격을 받았을까 봐 위로했다.“할아버지 말씀이 맞아. 고정철은 서울에서 세력이 막강해. 너는 아직 잘 몰라서 그 사람한테 져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인생 후배한테 이런 가르침을 주는 것은 괜찮았지만 밥상머리에서 어른들이 있는 앞에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특히 바론과 강미영은 어제부터 이 일을 묻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미루기로 한 것이다.언급된 이상 끝까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다음부터 이런 중
툭.육시준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 들어 강미영을 차갑게 쳐다보았다.“작은이모 말씀이 맞으세요. 한집안 식구끼리 숨기는 거 있으면 안 되죠. 제가 비밀로 하면 안 되었어요.”강미영은 한숨을 내뱉더니 부드러운 말투로 변했다.“내 뜻을 알아줘서 고마워...”“그런데 저는 예전에는 이런 도리를 모르고 계실 줄 알았어요.”“...”강미영은 무언가 깨달은 듯 표정이 확 변했다.병원에서 싸웠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 순간 역할이 바뀐 듯했다.속은 사람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하지만 속은 사람은 언제나 불공평하다고 느꼈다.강유리는 우두커니 육시준을 바라보았다.육시준은 바론 공작을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이 일은 릴리가 피해를 보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순 없죠. 속였던 건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아버님께 곧 귀국해야 하는 어려움을 떠안겨 드리고 싶지도 않았고요. 이해되시겠어요?”아주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바론 공작은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귀국할지 말지든 더 자세히 고민해봐야 했다.‘나를 위해서 그랬다고 해도 일부러 안 알려줄 일은 아니잖아?’바론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뻥긋하자 육시준이 먼저 물었다.“할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강철우는 겪을 만큼 겪어본 나이라 그의 말뜻을 모를 수가 없었다.그는 바로 반응하면서 늘 그랬듯이 어영부영 넘어갔다.“그럼! 다 너의 아버님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 모든 걸 이해하실 거야!”바론 공작이 강미영과 강유리에게 설명할 때도 은근슬쩍 바론의 편을 들어준 그였다.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때 강유리를 도와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애써 좋은 할아버지로 남고 싶었다.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누구라도 바론을 도와줬을 것이다.바론은 이해하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이해는 하는데 우리를 속인 건 받아들일 수 없어! 날
“어디 말씀해 보세요. 뭐가 다른지.”육시준은 여유가 가득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바론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불쾌해 있던 강유리는 육시준이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비록 육시준은 늘 강유리의 편이었지만 지난번에 싸울 때 아무런 의견도 내지 않고 둘만 있을 때 위로할 뿐이었다.어른을 상대로 따지기 어려워서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와서 보니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다...체면을 중히 여기는 바론 공작이 한동안 아무 말도 없자 강유리가 말했다.“그만해. 약자는 원래부터 알 권력이 없었어. 절대적인 공평이라는 것도 없었고.”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는 다 먹었어요. 오후에 회사에 나가봐야 해서 먼저 일어날게요.”“잠깐만!”바론 공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강유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바론 공작은 난처한지 머뭇거리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난 너희를 약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 처음부터 숨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야. 확실히 잘못된 선택이라는 거 인정해. 너한테도 상처를 준 것 같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면 잘 반성하고 고치도록 할게.”강유리는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녀는 고집이 센 아버지가 아무리 자신의 불만을 느꼈다고 해도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잘못을 인정할 줄 몰랐다.기껏 해 잘해줘봤자 선물이나 주고, 묵묵히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잘못을 만회할 줄 알았다.그런데...강유리는 놀란 나머지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그저 간단히 대답하고는 뒤돌아 2층으로 올라갔다.주방은 조용했고 오직 릴리만이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었다.그러면서 눈알을 굴리면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쩝쩝거리지 않고 먹으면 안 돼? 먹다죽은 귀신이 붙었어? 밥상머리 예절을 어떻게 배운 거야!”바론 공작은 온갖 불만을 릴리에게 토해냈다.릴리는 밥 먹다가 욕먹을 줄 몰랐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강철우가 먼저 분노했다.“잘못했으면 잘못한 거지. 우리 손녀딸
“응.”이라는 대답은 뒤끝이 긴 것이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바론 공작은 릴리를 째려보고는 시선을 육시준에게 돌렸다.“나 여기서 잘 건데 방 좀 하나 내줘.”육시준이 머뭇거렸다.“유리가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며칠만 있으면 갈 거야. 내가 방해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리고 난 네가 우리 딸한테 잘하는지 지켜봐야겠어! 난 무조건 여기서 지낼 것이니 알아서 유리를 설득해 봐.”바론 공작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육시준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말해볼게요.”바론 공작이 위엄있는 말투로 말했다.“꼭 설득시켜야 해. 실패는 없어.”...오후가 되었을 때, 도씨 가문은 물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육시준의 부모도 함께 찾아왔다.세 집안은 이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펼쳤다.다 같이 육경원이 참여한 정도를 말해보기로 했다.엄숙한 분위기 속에 가끔 강유리의 상태도 물어보곤 했다...할 일이 없는 릴리는 자신이 입원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고성 그룹에 답장 주지 않은 것으로 암묵적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 기회에 좀 쉬려고 했다.저녁 식사 후,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월계만으로 향했다.여름 저녁은 습하고 무더운 것이 정신이 안 났다.릴리는 긴 원피스를 입고 얼굴을 가리려고 모자를 꾹 눌러썼다.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층수를 누르고는 벽에 기대 잠깐 휴식했다.어제저녁 너무 긴장했다가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인지 맥을 추지 못했다.강유리한테 잘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기쁜 한편 쓸쓸하기도 했다.갑자기 생각해 보니 늘 혼자였던 것이다.어제저녁에는 어차피 살지도 못할 바에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기로 했다.심지어 정말 죽어버리면 슬퍼할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몸을 일으키고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꽃다운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도 물려받을 수 있겠다. 거기다 서울 4대 명문가까지. 인생 승리자와 다름없잖아!’그녀는 집 앞에 도착해
릴리는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물러났다.다시 자세히 쳐다보니 방금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그는 벌거숭이 상체에 반바지만 입고 있었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신하균을 몰래 쳐다본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자세히 쳐다본 적은 없었다.이 몸매... 이 복근...릴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왜 옷을 안 걸치고 있어요! 저는 이런데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고요!”아까는 너무 긴장해서 잘 보지 못해 다시 힐끔 쳐다보았다.‘옷을 입었을 때는 약해 보였는데 근육이 장난 아니네...’“남자가 밖에서 자신을 잘 보호해야죠! 이렇게 쉽게 보여주면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거란 말이에요.”릴리는 급히 고개를 돌리면서 진지하게 나무랐다.그녀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던 신하균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저는 밖이 아니라 제 집에 있는 건데요?”릴리는 고개를 홱 돌려 눈을 크게 뜨고 째려보았다.“신하균 씨!”“왜요?”“왜 그렇게 염치가 없어요? 제 집이 왜 신하균 씨 집이 된 거예요? 아무리 제가 전에 신하균 씨한테 호감이 있었다고 해도 저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죠! 그리고 그것도 옛날 일이라 지금은 다르다고요! 계속 이러는 거... 염치없는 짓이에요!”“...”릴리는 화가 나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거기다 당황했는지 횡설수설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분명 부끄러우면서 일부러 괜찮은 척 남을 가르치다니...신하균은 벽에 기대어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말했다.“방 번호부터 확인해 보실래요?”릴리는 멈칫하면서 고개를 쳐들었다.“여긴 한 층에 한 가구만 있어 저희가 이웃일 일도 없어요. 같은 동일 수는 있겠는데 같은 층 이웃일 리는 없겠죠?”“...”릴리는 고개를 쳐든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러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초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집은 분명 14층인데 왜 13층에서 내린 거지?’신하균은 뻘쭘한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
“잠깐만요.”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릴리는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취소하고 고개 돌려 그를 보고 얘기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신하균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불쾌한 말들은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기분 안 좋아요?”“하균 씨라면 금방 납치됐다가 풀려났는데 기분 좋겠어요? 트라우마가 안 생기겠어요?”릴리는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의 문에 기대있었다.“...”새벽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릴리를 보호하라는 명분으로 보낸 자신의 부하에게 일부러 물었었다. 수다쟁이인 그 부하는 신하균이 한마디 묻자 그때의 상황을 빠짐없이 다 말했다. 그 부하는 말하면서도 점점 흥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때까지 이 정도로 반전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방금까지도 연약한 모습으로 있다가 바로 포위를 뚫는 작은 맹수처럼 돌변하였다. 녹이 슨 무딘 칼로 그녀는 최대의 공격치를 끌어냈고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겁먹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얕보는 것을 역이용하여 최고의 타이밍을 잡아 빠르고 정확하고 잔인하게 반격했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고 군더더기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돌아보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그렇게 열세에 놓였다면 그 정도로 냉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못 내렸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다 듣고 난 신하균은 놀랍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자신이 소홀하지 않고 그녀가 고우신을 따라가게 두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런 것들을 홀로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신하균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트라우마 생기죠.”릴리는 눈을 깜빡이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하균 씨 납치된 적 있어요?”신하균은 릴리를 보면서 말했다.“릴리 씨, 너무 이상한 쪽에 관심을 두는 거 아니에요?”“...”‘이상한 건가?’“식사했어요? 안 했으면 같이 할래요?”신하균은 다시 대화를 시도하며 화제를 돌렸다. 릴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지금 나랑 데
‘이 남자 건망증이 있는 거 아니야? 지금 뭐라는 거야, 분명히 자기가 먼저 오라고 했으면서!’“중식을 주문할 거예요. 생선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매운 게 좋아요, 안 매운 게 좋아요?”신하균은 자연스레 식사했다는 그녀의 말을 건너뛰고 휴대폰을 보면서 또 물었다. 그를 보는 릴리의 시선이 더 미묘해졌다.“누구한테 들었어요?”신하균의 손가락이 살짝 멈칫하더니 그 자세 그대로 눈을 치켜뜨면서 그녀를 보았다. 깊은 눈동자는 시커멨고 그녀가 알수 없는 감정들이 내포되어 있었다.“매운 거요! 매울수록 좋아요!”릴리가 대답했다.“날씨가 더운데 매운 거 많이 먹으면 탈 나요.”“...”릴리는 매운 걸 먹기도 전에 화끈거리는 느낌을 느꼈다. 쓸데없이 그의 말에 대답했고 쓸데없는 호기심 때문에 쪼르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아마도 자신이 시끌벅적한 은하타운에서 나와 쓸쓸한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게 그에게는 불쌍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배달을 기다리면서 신하균은 과일을 깎으러 갔고 릴리는 1인용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은 많이 움직이지 않았고 시선은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 게 아마도 어떤 소식을 보고 있는 듯했다. 신하균은 시선을 내려서 그녀를 보았다. 눈앞의 이 여자는 몸매가 아담하고 팔다리도 가녀린데 이렇게 연약한 여자가 부하의 얘기 속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고마워요. 거기 두세요.”고개를 든 릴리는 그의 손에 들린 접시를 보고 친절하게 말했다. 신하균은 허리를 숙여 접시를 그녀의 앞에 놓았다. 소파에 책상다리하고 앉아있다가 살짝 움직이자 릴리의 치마가 살짝 위로 들렸다. 살짝 굳어진 신하균의 시선이 그녀의 오른쪽 무릎과 종아리에 고정되었다. 거기에는 멍이 크게 들어있었는데 매끄러운 종아리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그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무른 탓인지 릴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 다시 아래로 숙였다. 이를 눈치챈 릴리는 아무렇지 않게 치마를 정리하면서 무릎에 난 멍을 가렸다.“저기요, 그렇게
신주리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난 최근에 일이 많지 않아 괜찮지만 다음 달에 곧 새로운 촬영을 시작할 거야.”육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음 달에 돌아가면 촬영 일정을 맞출 수 있어요.”육경서는 그들이 두어 마디 말로 일정안배를 끝내가 다급하게 입장을 밝혔다.“나도 있어! 주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나도 안 돌아갈래!”신주리는 흘겨보며 물었다.“넌 바쁘지 않아?”“마침 이 영화가 촬영을 마감할 예정이야. 기타 활동은 중요한 건 뒤로 미루고 중요하지 않은 건 매니저더러 거절하게 하면 돼.”육경서는 미처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했다.강유리는 반대하지 않고 귀띔했다.“강덕준 감독이 널 죽일 수도 있어.”육경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괜찮아. 한 달뿐이잖아. 설마 날 따라 여기까지 오겠어?”강덕준이 그를 죽일지는 둘째치고, 어쨌든 지금 바론 공작은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그는 그저 예의상 딸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게 했을 뿐인데 결국 딸아이가 다음 달 귀국하는 일정을 안배하게 되다니?병원에서 육시준이 비아냥거리던 말을 그는 실행할 계획이었다. 단계마다 다른 이유로 딸을 만류하고 싶었고 시름 놓고 이곳에서 편히 안태하게 하고 싶었다.그러나 사위는...만약 자기 일을 다 처리했다면 남아있어도 괜찮았다. 부양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덤으로 두 사람이 더 생겼고 또 이 두 사람은 시간 맞춰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재촉당할 것이 뻔하다.“두 분이 바쁘면 굳이 남지 않아도 돼. 유리는 지금 손님 접대하는 게 불편하거든.”그는 정색해서 다시 말했다.그러자 여러 가지 눈빛이 삽시에 바론 공작을 향했다......신주리와 강유리는 제작팀과 반나절만 휴가를 냈기 때문에 오후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오전 시간만으로 두 친구가 얘기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강유리는 직접 감독에게 전화해 하루 연장했다.점심시간.신주리는 육시준의 자리에 앉아 강유리의 옆에 누워 계속 절친끼리 이야기를 했다.강유리는 이번에 단도직입적
저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상대방도 자신만큼 놀란 모습을 상상하며 육경서는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었다.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송미연은 놀랐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유리 찾으러 갔어? 프로그램을 녹화한다며 왜 그들을 찾으러 갔어? 거기는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아? 이맘때면 유리는 잠을 잘 자지도 못했을 건데...”송미연은 육경서가 철이 없이 강유리가 잘 쉬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그러나 그녀의 말은 한 가지 중요한 소식을 알렸다.“진작 알고 있었어요?”“물론이지!”송미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며느리가 임신했는데 이렇게 큰 소식을 어떻게 바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어? 경고하는데 너무 떠들지 마. 네 형수님을 화나게 하면 안 돼! 그냥 녹화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주리가 널 용서했어? 왜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를 알아내려고 해! 이번에 돌아와서 주리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넌 아예 돌아오지도 마!”...화제가 자신을 욕하는 방향으로 변해버리자 육경서의 열정은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목소리도 누그러들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원한 줄 아세요? 이것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잖아요...”“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쌤통이야!”“...”“섬에서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넌 주리를 잘 돌봐야 해. 난 실시간으로 라이브 방송을 살펴보고 있을 테니 넌 주리 괴롭히지 마.”송미연이 또 당부했다.육경서는 머뭇거리다가 정색해서 대답했다.“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송미연은 또 몇 마디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육경서는 어두워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잘됐어. 아빠 엄마가 다 주리를 좋아하니 나중에 언제든지 주리는 억울함 당하는 일이 없을 거야. 적어도 내가 있는 한 억울함 당하지 않을 거야...”...점심은 빌라의 셰프가 만든 영양식이다. 맛은 좋지만 오래 먹으면 질릴 수 있어 강유리는 이 음식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
그러나 앉은 자리가 아직 따뜻해지기도 전에 육경서는 흥분된 듯 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뭐? 임신했다고?” 바론 공작은 짜증 섞인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놀라!” 그는 지금까지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실 소식을 들었을 땐 당황하고 흥분했던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육경서는 입을 막으며 어색하게 다시 앉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이며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드러났다. ‘나 이제 삼촌 된다! 삼촌 된다!’ “의사가 말하기를 첫 3개월은 불안정하니까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도 이 소식을 공개하지 말고 태아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바론 공작은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그는 그 말을 끝내며 신주리를 한번 훑어봤다. “그래서 나는 유리를 위해 사람들을 안배해 가까이서 돌보게 한 거다.” 그의 시선을 느낀 신주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공작을 한 번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강유리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한번 만져보고 싶은 듯했지만 참았다. 그녀의 눈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육경서와 같이 흥분과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강유리의 아랫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안에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는 거야?” “맞아.” 강유리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신주리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눈 속에 담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만져봐도 돼?” 육경서도 순간 정신을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안 돼!” “안 돼!” 두 명의 목소리가 동시에 차갑게 외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바로 거절했다. 강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두 남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에게 체면을 차리지 않았고 대신 신주리에게만 속삭였다. “조금 있다가 방에 들어가면 만져도 돼.” 육시준과 바론 공작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우리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나?’ 육경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강유리를
육경서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채 입을 열려던 순간 정원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유창한 한국어로 두 사람에게 따뜻하게 인사했다. “이쪽이 둘째 도련님이랑 신주리 씨 맞으시죠? 강유리 아가씨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 부탁드려요.” 신주리가 부드럽고 예의 있게 대답했다. 육경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왜 이렇게 때맞춰 나타나는 거지? 다른 때는 왜 안 오고, 바로 이때 오냐고!’ “잠깐만요. 저희 형수 말고 일단 먼저 빌라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안내하는 집사를 붙잡았다. 집사는 그의 눈을 한 번 쳐다본 뒤 다소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멈췄다. 신주리는 미소를 띤 채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낯을 가려서 그래요.” 육경서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낯을 가린다고? 왜 그렇게 갑자기...’ 집사는 이해한 듯 웃으며 공작님도 그들의 방문을 매우 기쁘게 생각해 오늘 특별히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육경서는 그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았고 눈앞의 신주리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주리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너무 쉽게 대답해서 다시 부정하려는 건가?’ 그들이 정원으로 들어섰고 이곳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쪽에서 차와 다과가 준비된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강유리는 햇볕을 가린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육시준이 전화를 끊고 있었다. 바론 공작이 불만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그 전화기 들고 있으면 안 돼! 그렇게 바빠? 전자기기 방사선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 첫 세 달은 불안정하다고, 푹 쉬어야 한다고!” 육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난달에 돌아갔으면 이미 처리했을 일인데요.” 바론 공작은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일이라는 게 끝날 수 있나? 돌아가면 내 딸과 시간을 제대로 보낼 수 있을까 몰라!” 육시준이 말하려던 순간 강유
감독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게 반박하지도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규정에 따르면 녹화 중에는 제작진 팀을 이탈하면 안 됩니다.” 역시나 신주리는 가볍게 되물었다. “녹화 시작할 때 그런 규정은 없었잖아요? 갑자기 추가된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럼 우리를 일부러 견제하려는 건가요? 그럼 그냥 프로그램 안 하면 되죠?”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첫 번째 시즌에서 육경서가 사고를 당한 이후로 그는 이미 이 두 사람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조건을 협상하든 규칙을 정하든 이 둘이 하겠다고 하면 다행이고 안 하겠다고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그는 포기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두 분 다 제가 졌습니다! 하지만 어디 가든 꼭 행선지를 알려주시고 제작진 팀에서 두 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점심 먹고 바로 돌아올게요!” 신주리가 대범하게 말했다. ‘점심도 먹고 온다고?’ 하지만 그가 불만을 표현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이미 유유히 그의 앞을 지나쳐 나가버렸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감독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강 대표님, 경서 씨랑 주리 씨가 지금 강 대표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런데 프로그램 효과를 위해서 행선지에 대한 건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강유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만약 제가 발설하면요?” 감독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우리 회사의 프로그램 아니었나? 이렇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청률이 안 오르면 강 대표님에게도 손해 아닌가?’ 감독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든 이 대형 회사를 설득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강유리는 그의 말을 끊으며 다시 말했다. “농담이에요.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
비행기에 오를 때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음 날 새벽이었다. 제작진 팀은 미리 준비한 차를 타고 그들을 예약된 호텔로 보냈다. 해변가에 위치한 경치가 아름다운 5성급 호텔이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제작진 팀 정말 큰돈 쓴 거네! 이게 진짜 여행 같아!” “그렇지. 갑작스러운 느낌도 있지만 일정은 꽤 합리적이네!” “응, 또 감사한 건 처음에 우리 주리랑 경서에게 그 사건이 터진 후로 대우가 점점 더 좋아졌다는 거야. 그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얻은 거라니까!” 모두가 웃으며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그때 감독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은 섬으로 갑니다.” 모두들 당황했다. ‘그래서 목적지는 여기가 아닌가?’ “목적지는 반대편에 있는 작은 관광 섬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관광업이 급성장했습니다. 얼마 전 이 섬의 소유자가 바뀌어서 다시 한번 큰 화제를 일으켰죠.” 감독이 그렇게 말하자 신주리는 점점 더 익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바론 공작이 유리에게 선물한 섬이죠?”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육경서는 감탄하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우리 형수를 설득했어요?” 감독 팀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지 않았다. 실시간 채팅창에서는 감탄이 이어졌다. [유리 언니가 이번 프로그램을 위해 진짜 대규모로 투자한 거네!] [하하하, 유리 언니가 투자한 건 아니야. 그냥 완전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 덕분에 도련님과 미래의 동서가 혜택을 보는 거고!” “나도 섬 주인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유리 언니 우정 출연할지 궁금하다!” 아침 식사 후 모두 방으로 돌아가 시차를 맞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카메라는 잠시 쉬어갔다. 신주리는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였기에 이제는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호텔 방을 몰래 빠져나
심지어 원피스까지 캐리어 하나에 다 준비해 놨다. “안 믿을지 몰라도 내가 쇼핑 리스트까지 작성했어. 엄마한테도 참고를 부탁했거든! 원피스는 엄마가 골랐어. 안심해, 눈썰미는 진짜 좋아!” 말을 하면서 그는 정말로 쇼핑 리스트를 꺼내서 신주리에게 보여줬다. 신주리는 그 리스트를 보지 않아도 이미 믿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놀랐다. “너 그럼 네 짐은 어쩌고? 얼마나 챙겨왔어?” “짐 하나야. 나중에 필요하면 제작진 팀에 부탁할 거야!” 육경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신주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너무 오랫동안 육경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던 신주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육경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신주리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려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많아?” 육경서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건 아니야. Y 국에 있는 우리 회사 지사에서 몇 가지 더 준비해 줬거든...” 그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칫했다. 불필요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신주리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 목적지는 네가 제작진 팀에 요청한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 육경서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 “네가 그런 사람 아닌가?” 육경서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백했다. “맞아, 그런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아니야! 사실 내가 쓴 목적지는 원래 해변이었어. 이런 건 결국 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잖아.” 신주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아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진태와 소지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진태는 진지하게 소지석에게 도씨 가문의 그 양성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 계획은 너무나도 비상식적이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완전히 그들
[하하하, 이게 무슨 이상한 조합이야? 어쩐지 묘하게 어울리기도 하고 또 웃기기도 하네!] [처음부터 차 안에서 자리싸움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았겠지.] [우리 지원 언니 한마디로 모든 흐름이 뒤집혔어!] [강미영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우리 지석이를 일부러 피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지석 팬들 너무 이기적이지 마! 누구든 미영 언니에게 다가갈 수 있고 미영 언니는 모두를 거절할 권리가 있어!] 좌석이 정리되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하자 라이브 방송은 일시적으로 종료되었다. 이런 24시간 라이브 촬영 프로그램에서도 이렇게 잠깐 동안만은 각자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강미영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된 뒤 의아한 표정으로 한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왜 한지원이 굳이 자신과 함께 앉으려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같이 앉자고 했어도 마다하지는 않았겠지만... “미영 언니, 난 저 커플 팬이야.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그러니까 제발 내 최애 커플 깨지지 않게 도와줘!” 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이유를 털어놓았다. 강미영은 살짝 멍해지더니 결국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앞으로 네 최애 커플 잘 지켜주도록 할게.” 한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 최애 커플이 마음 편히 연애할 수 있게 됐어!” 강미영은 눈가를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걔네 둘의 팬이 된 거야? 그리고 지금 걔네 둘 관계 꽤 안정적이던데 내가 굳이 뭐 하러 그걸 망치겠어?” 한지원은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영 언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이런 카메라 밖에서의 달달한 순간들이지.” 강미영은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혹시 영감이라도 떠오른 거야?” 한지원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의 작은 호의 하나가 한 명의 유명 만화가를 탄생시킬 수도 있어!” 강
그는 단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강미영에게 그를 좀 더 이해할 기회를 주고 소지석에게는 그가 혼자서만 밀어붙이지 않도록 눈에 띄게 하려 했다. 그러나 이 행동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 팬들은 그를 오해하거나 비판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서진태는 너무 경계가 없지 않나요? 경쟁하고 싶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해야 하나요? 왜 꼭 같이 앉아야만 하는 거죠?] [맞아요! 강미영 언니는 분명히 불편해 보였고 바로 피해서 조수석에 앉았잖아요!] [좋아한다고 해도 좀 경계를 두고 해야죠.] [근데 소지석 팬들 너무 이중잣대 아니에요? 오빠가 같이 앉고 싶으면 직설적으로 다가가도 ‘멋지다, 드디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서진태가 다가가면 ‘경계가 없다’고 비판하잖아요?] [맞아요. 서진태는 사실 강미영 언니와 앉고 싶은 것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댓글창은 점점 떠들썩해졌다. 신주리와 육경서의 강미영에 대한 이해도는 완벽했다. 감정상에서 경쟁이 시작되면 그녀는 주저 없이 피할 것이다. 강미영은 감정을 물건처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격의 프로그램에서는 남성들끼리의 경쟁이나 여성들끼리의 경쟁이 감정을 더 순수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외적인 압박이 감정을 더 강화시키는 효과가 생기게 된다. 사실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지는 걸 참지 못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고정남의 관계도 그랬다. 주위에서 반대할수록 더 진지하게 여겨졌던 그 감정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엉망이 된 감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네가 졌으니까 내 선물 잊지 말고 사 와.” 신주리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서는 그 결과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돌아서서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엔 네가 이겼어.” 신주리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번? 그럼 다음에도 나랑 내기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