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아, 방금 한 말 다 들었어?"어머니의 유골이 고씨 가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생각이 복잡했던 탓에 염구준은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응, 내가 엿들었다고 탓하는 건 아니지?" 손가을은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사람마다 사생활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부부라도 엿듣는 것은 좋지 않았다.염구준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바보야, 집안 일인데 어떻게 너를 탓할 수 있겠어."이 말을 듣고 손가을은 기대에 부풀어 고개를 들었다."그럼 같이 고씨 가문에 가도 돼?""후.""그건 위험해."염구준은 길게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고씨 가문에는 강자가 많아 외갓집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조차도 무조건 안전하게 돌아올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괜찮아. 두렵지 않아."손가을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기세를 보아하니 마음을 이미 먹은 것 같았다.그녀가 이번에 가려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는데, 하나는 뵙지 못한 시어머니에게 효도 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염진이 술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걸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였다.염구준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며 잠시 곰곰히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알겠어. 같이 가자."그는 이미 속으로 어떻게 그녀를 보호해야 할지 전부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였다."이번만 내 멋대로 할게."손가을은 염구준의 품에 안겨 낮은 소리로 말했다."내 와이프는 언제든지 마음 가는대로 해도 돼. 뒤에 항상 내가 있는 걸."염구준도 손을 뻗어 손가을을 끌어안았다.이 말을 들은 손가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눈 앞에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이 언제든지 숨을 수 있는 대피소 같은 존재니까.아침에 일선천협곡에서 지프차 한 대가 멈추더니 곧 세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앞으로의 길은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반드시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일선천협곡을 통과하기만 하면 고씨 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이 세 사람은 바로 염구준과 손가을, 그리고 용필이었다. 다른
"원수를 갚아야 하긴 하지만 더러운 방법으로 할 생각은 없다."우두머리가 단호하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자 나머지 아홉 명은 찍소리도 하지 않고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염구준, 우리는 고씨 가문의 십검시다.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올라와 주기를 바란다."'계속 따라오더니 끝내 꼬리를 드러내는구나.'약하지 않은 기운의 파동을 느낀 염구준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잘 지키고 있으세요. 금방 만나고 올게요."그는 옆에 있던 용필에게 당부하며 가방들을 내려놓은 뒤 그 안에서 칼집을 꺼내 등에 멨다."알겠어."용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합금으로 된 막대기 두 개를 꺼내고는 경계태세에 진입했다."조심해." 손가을이 관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염구준은 말을 마친 후 두 발에 힘을 모아 'Z' 자를 그리며 양쪽의 절벽을 오가면서 위로 올라갔다.기술만 있다면 아무리 높은 절벽이라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처음 왔는데도 절벽을 잘 타는군. 지형을 파악하는 능력이 좋아."이 모습을 본 우두머리는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염구준은 위에 도착했고 제자리에 서 있는 열 명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부른 거지?"대부분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좋지 않았기에 그도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고씨 가문과 그 사이에는 원한도 있으니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했기 때문도 있고."당연히 죽은 조카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지." 한 사람이 화를 내며 검을 빼들었다."을아, 검을 거두어라!"그러자 선두에 선 우두머리가 큰소리 쳤다. 그는 부하가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단독 행동을 하는 게 불만스러웠다.'을?'이 호칭을 듣자마자 염구준은 매화검보 중의 한 검진을 떠올렸다."천간검진인가?"상대방의 신분을 추측해낸 그는 바로 물었다.천간검진은 열 명의 사람이 한 사람처럼 움직여야 하는 검진으로, 공격과 수비 능력을 모두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폭발해낼 수 있는 힘이 열 사람이 따로 낸 힘을
"공격하라!"갑의 명령에 맨 앞줄의 세 사람이 검을 들고 돌진했는데 검명까지 섞여있어 위력이 엄청났다.그러나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염구준한테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보호막을 만든 뒤 앞에 기력을 불어넣어 벽을 만들어 상대방의 공격을 막았다."힘은 괜찮지만 아직 부족해."염구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제 막 시작인데 급해하기는."을은 씩하고 웃었다. 그는 천간검진에 대해 자신감이 컸다. '오늘 여기서 염구준은 반드시 죽을 거다.'이때 두 번째 줄의 세 사람이 갑자기 땅을 밟고 뛰어오르더니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염구준을 향해 날아갔다.눈 깜짝할 사이에 세 사람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염구준은 손을 들어 조금 전보다 더 큰 방패를 만들어 공격을 막았다. 여섯 명의 전신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천간검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가 공격을 막아내자마자 곧바로 나머지 네명도 양측으로 갈라져 동시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하하. 재주가 있으면 팔 두개를 더 만들어내든가." 을이 큰소리로 비웃었다."방심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갑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방에 있던 여섯명이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다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그들은 염구준이 손이 모자라게 만들면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누가 너보고 허세 부리라고 했어? 누가 너보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피하지 말라했냐고! 넌 죽어도 할 말 없어."을이 계속 비웃었다."흡!"염구준은 짧게 공기를 들이마신 후 체내에서부터 강대한 힘을 내보내 뭇사람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깔끔한 기운이라니.'갑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계속 뒤로 밀려나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견뎌라. 나머지 애들이 공격에 성공하면 우리가 이기는 거다!"그의 격려하에 여섯 사람은 다시 힘을 내서 염구준을 막았다."좋은 계획이었지만 이미 늦었어."염구준은 말하면서 다시 강한 기운을 내보내 앞에 있는 여섯 명을 뒤로 물리친
여러 합을 겨룬 후 염구준의 주먹이 끝내 을의 얼굴에 닿았다. 정면으로 맞은 탓에 그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잔뜩 났고 이빨도 몇개 떨어졌다.순식간에 을은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다행히도 나머지 사람들이 동시에 염구준을 공격한 덕분에 을은 잠시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열 명이 힘을 합쳐도 염구준을 무찌를 수 없었기에 유효 데미지를 입히지 못하고 염구준이 공격하는 것을 그저 두고볼 수밖에 없었다."물러서!"갑이 고함을 지르자 열 명이 빠르게 후퇴해 염구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곧바로 진형을 다시 바꿨다."십검합일!"그의 명령에 따라 나머지 아홉 명은 검을 거두고 한 줄로 서서 앞사람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엄청난 진기가 손을 통해 그들의 앞사람에게 전달 되었고 곧 모두 갑의 체내에 흘러 들어갔다.천간검진 덕분에 갑은 대량의 강한 힘을 견딜 수 있었으며 기운도 계속 모을 수 있었다.'이게 최후의 수단이겠네.'그러자 염구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자검을 꺼내 칼끝이 전방의 열 명을 향하게 한 다음 검기를 모았다.하지만 검기가 기승을 부리는 탓에 주변의 돌멩이들마저 금세 부스러기가 되어버렸다. 모두 매화검보에서 비롯된 검법과 검진이기에 누가 이길 지는 누구의 실력이 더 강한지에만 달려있었다.'됐다!'기운을 다 모은 갑은 공격을 개시했고 나머지 아홉 명도 그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가서 부단히 진기를 전달했다.지금 이 열 명은 마치 한 사람처럼, 아니, 어쩌면 한 검처럼 염구준을 공격했다.놀라울 만큼의 검기 외에도 조금씩의 검의가 느껴졌다.갑은 십검시의 우두머리로서 검도에 대한 깨우침이 깊었다."매화검법, 쇄산!"염구준 역시 강한 술식으로 상대방을 공격했고 검명도 따라서 은은하게 울렸다. 그의 검의는 오연했다.공격을 할 때 상대방에게 유아독존의 느낌을 줄 정도로.쌍방의 거리가 끊임없이 가까워지면서 검끝이 곧 닿을 때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염구준은 힘을 3할 정도 거두었다. 상대방이 기세가 강하기는 했지만 힘에 대한 통
“아빠야? 나 너무 배고파. 우리한테 밥도 안 주고... 무서운 개랑 같은 데 가둬두고... 개한테 여러 군데 물리기까지 했어. 나 너무 아프고 무서워. 흑...”극북빙양, 거대한 전장에서 수많은 함선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그중 붉은색 드래곤이 코팅된 함선의 지휘실 수화기에서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하지만 아이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염구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잘못 거셨습니다.”“아니야! 우리 엄마가 날 속였을 리가 없어. 내 이름은 염희주야. 염구준의 딸 염희주라고! 엄마가 그렇게 말해 줬단 말이야.”쿠궁!행여라도 전화를 끊을가 싶어 다급하게 내뱉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염구준의 눈동자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한다.염희주?“정... 정말 내 딸이라고?”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 찢어질 듯한 따귀 소리와 여자아이의 처참한 비명소리였다.“이 계집애가, 발칙하게 몰래 전화를 걸어?”“아,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여자아이의 애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겨버리고 다시 걸어봐도 묵묵부답.딸이 위기에 처했음을 인지한 염구준은 다급한 마음에 붉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주군!”깔끔한 군복차림의 여자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하지만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친 염구준이 포효했다.“어서 전세기 준비해. 지금 당장 청해로 돌아간다!”“알겠습니다!”잠시 후, 거대한 전세기가 하늘을 뚫고 사라지고... 수많은 병사들이 수십 척의 함선갑판을 가득 메운 채 무릎을 꿇었다.“안녕히 가십시오, 주군!”다음 날, 청해 교외, 손씨 가문 저택.저택 밖에 선 염구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5년 전, 가문에서 쫓겨나고 킬러들에게 쫓기다 교통사고까지 당했던 순간, 우연히 길을 지나던 소녀 한 명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헤치고 중상을 입은 그를 구해냈었다.그녀의 정체는 바로 손씨 가문의 딸,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염구준은 기꺼이 데릴사위가 되는 조건
이에 다시 딸을 꼭 끌어안은 염구준이 아이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아니야. 엄마가 착각한 거야. 아빠 살아있어. 지금 바로 네 앞에 있잖아.”눈물의 부녀상봉을 마친 염구준이 물었다.“그런데 여기 말이야... 혹시 엄마가 보낸 거야?”염구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던 염희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아니야! 엄마가 날 이딴 곳에 보낼 리가 없잖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이모, 나쁜 이모가 날 여기 보낸 거야. 이모가 엄마랑 날 집에서 내쫓은 거라고...”‘이모?!’생각지 못한 단어에 염구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손혜린 그 여자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그럼...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누구지? 나랑... 손혜린이 낳은 딸... 아니었나?’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염구준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이모 이름이 뭐야?”“이모 이름은 손혜린. 우리 엄마 사촌언니랬어. 그런데... 나쁜 이모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래. 이모가 내 엄마래!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아저씨도 우리 아빠 아니지?”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던 염희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엄마가 그랬어. 아빠를 구하려다 성대를 다친 거라고. 그래서 말을 못 하는 거라고. 그래도 이건 가르쳐줬다?”염희주은 작은 손가락으로 염구준의 큰 손바닥에 삐뚤삐뚤하게 “염구준” 세 글 자를 적어보였다.“엄마가 가르쳐 준 거야. 아빠 이름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나 제대로 쓴 거 맞지?”한편, 염희주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염구준은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날 구하려다 성대를 다쳤다고? 그날 날 구한 게 손혜린 그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손혜린 그 여자는 분명 말을 할 줄 알았었지... 그럼 그날 밤, 나랑 첫날밤을 보냈던 그 여잔 도대체 누구야?’“희주야.”전장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며 살아남은 염구준이었지만 이 순간,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차마 숨길 수 없었다.“엄마 이름이 뭐야?”그러
혼인신고를 하고 맹세의 키스를 하고 서로의 부모님께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5년 동안 전장을 구르면서도 매일 밤 그리워했던 여자가 이 여자였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리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손혜린은 그녀의 사촌언니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다!결혼식마저 모두를 속이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했다!그는 이제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전신전 군주 염구준이다!그런 그가 이 하찮은 여자에게 5년을 속았다니!“지금… 뭐 하자는 거야?”잠시 당황한 손혜린은 옆에 있는 서재원의 팔을 꽉 잡고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네 신분을 망각하지 마. 넌 우리 가문 데릴사위야! 어디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내?”염구준은 낮게 으르렁거렸다.“말해! 왜 나를 속였어?”“5년 전 나와 결혼한 사람이 너 맞아? 손가을은 누구야? 빨리 해명해!”손혜린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설마… 다 알고 왔어?”알고 왔다니?염구준은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역시 그런 거였어!희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 결혼식은 가짜였다.손가을, 손씨 가문…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혜린아.”여태 말이 없던 서재원이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두려워할 것 없어. 저 자식이 진실을 알게 된들 뭘 할 수 있는데? 너 이제 곧 나랑 결혼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 저놈은 그냥 벌레야. 남한테 놀아난 줄도 모르는 가련한 버러지일 뿐이라고!”손혜린은 깔깔 웃더니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녀는 서재원의 품에 안기더니 염구준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너랑은 이혼할 생각이었으니까 거짓말할 필요도 없지! 넌 내가 널 살려준 은인인 줄 알았어? 내가 왜? 난 손가을처럼 멍청하지 않아!”과거, 손씨 가문은 데릴사위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4대째 내려온 가문은 이번 대에서 대가 끊길 위기에 직면했다. 손가을은 이 가문의 유일한 손녀였다. 결국 어르신은 친척인 손혜린을 호적에 입적시켰다. 손혜
“예전에 잘나갈 때 나도 잘해준다고 선물도 종종 가져다 주고 그랬는데 저 여자 나한테 시선 한번 안 주더라?”서석호는 두툼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도도하게 굴어도 어쩔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말을 마친 그는 손가을에게 손짓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거기, 여기 와서 앉아! 오늘은 오빠가 예뻐해 줄게!”피아노 박자가 다소 빨라지더니 손가을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휴게실에 있는 손님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서석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짓고는 손가락으로 의사를 표현했다.5년 전 사고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다가 뜨거운 일산화탄소에 성대가 손상되면서 다시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그 뒤로 그녀는 수화를 몸에 익혔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퇴근해야 해서요. 재밌게 놀다 가세요.]수화로 의사를 전달한 그녀는 다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그녀가 서석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애 보러 가는 거야?”그는 야비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아, 넌 아직 모르겠구나? 네 딸 희주 있잖아? 손혜린이 걔를 우리 조카한테 보내주기로 했어!”“우리 조카 알지? 우리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왕자님이잖아. 애가 좀 멍청하기는 해도 예쁜 여자애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더라고! 지난번에 걔랑 같이 놀라고 데려온 여자애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즉사했다지?”손가을은 움찔하며 충격 어린 표정으로 서석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소리 없이 흐느꼈다.서석호가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손혜린은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애였다.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딸 희주는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왜? 마음 아파?”서석호가 입술을 감빨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딸 살리고 싶어? 간단해! 내가 평소에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 거야! 여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