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요!"청용은 곁눈질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몰래 손을 쓰는 것을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사실 염구준은 그가 이렇게 할 줄 알았다. 주의를 돌린 것도 바로 상대를 속게 하기 위해서이다. 상대방이 정말 흑풍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이다.상대방이 손을 쓰는 것을 염구준은 상대가 흑풍이라 확신했다."흑풍!"그 사악한 눈빛. 세상을 싫어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조롱하는 눈빛.외침을 듣자, 상대는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그리고 자리에서 차갑게 얼굴을 막고 있던 검은 스카프를 위로 올렸다."하하, 가릴 필요 없어. 네가 재가 되어도 난 널 알아봐!"상대방은 경멸의 눈빛을 내뿜으며 염구준의 말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허허, 나를 알아볼 수 있을 줄 몰랐네. 예상 못 한 건 아니야!""내 실력에 대한 인정인가?"상대방은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오늘 왜 이곳에 왔는지 난 다 알고 있어. 충고하자면, 그때도 넌 나한테 졌고 오늘도, 앞으로도 그럴 거야!""하하,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너도 변했구나. 이렇게 수다쟁이처럼 말이 많아지다니. 큰코다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말하려는 거야?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할 테니까?"상대는 망토에서 두 손을 내밀었다. 해골 같은 손위에는 가죽이 뼈와 살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그리고 손을 따라 손목까지 보니, 팔에는 살이 별로 없었다. 마치 정신이 위축된 마약 중독자와도 같았고 보름 동안 굶은 것처럼 피골이 상접하고 뼈만 앙상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상대의 기운은 아주 강했다.‘왜 몸이 이렇게 변했을까?’염구준은 바로 등골이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설마, 이 녀석이 수련하는 공법에 부작용이 있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지금 상태로 보아 오랫동안 버텼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몸이 이렇게 허약해지지도 않았겠지.’‘그리고 흑풍이 내뿜는 기운은 완전히 달라졌어. 비록 강한 억압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우월감을 뿜고 있어. 이 녀석이 왠지 꿍꿍이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얘기는
그 빛이 번쩍인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염구준의 실력이 어느정도 경지에 도달했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이 강력한 압도감에 옆에서 싸우고 있던 청용과 주작, 그리고 흑풍이 데려온 두 사람 모두 동작을 멈추고 염구준을 바라보았다. “이런, 전신께서 폭발하려 한다!”“빨리, 저놈들이 정신이 팔렸을 때 처리해버려야 해. 이렇게 계속 상대하다 보면 우리 체력이 바닥날 거야!”청용과 주작은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의 뒤로 다가갔다.염구준은 힘을 모은 후 흑풍과 맞섰다.하지만 이번에는 흑풍이 염구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염구준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자 심히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자신이 우세한 듯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흑풍은 전력을 다해 염구준과 싸우려 했지만, 고민 끝에 이를 포기했다. 여기서 모든 힘을 다 쓰면 다음 전투가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흑풍이 염구준의 옆에서는 청용과 주작이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 “비열한 놈들!”청용과 주작은 한 손으로 상대의 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단검을 들고 상대의 뒷목을 강하게 찔렀다.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두 사람은 즉시 청용을 떼어냈다. “이겼어!”청용의 얼굴에서는 땀이 흘렀고 손으로 땀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주작은 일어나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내 주작은 분노에 찬 전사가 자신의 등에서 단검을 뽑아내고칼끝에 묻은 핏물을 혀로 핥는 것을 보았다.“정말 달군!”“세상에, 정말이지 지겹다. 왜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지?”염구준은 빛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는 청용에게 말했다. “저 놈은 지금 홍노 상태야. 너희 공격이 상처를 입힐 수는 있지만 통증을 느끼게 할 수는 없어. 피를 흘리게 해야 해!”염구준의 설명을 들을 새도 없이, 상대가 공격을 해왔다. 한 손으로 길이 3미터가 넘는 테이블을 잡고 청용을 향해 내던졌다. 청용은 재빨리 일어나 도망쳐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주작은 청용이 공격을 당하자 순간 크게 동요하였다. 그는 진행 중인 공격을 멈추고 청용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그러나 주작이 방심한 틈을 타 전장이 기회를 엿보았다. 전장은 주작의 발을 붙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강력한 힘에 의해 주작은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주작은 손쓸 새 없이 전장의 몸에 부딪혔다. 기둥에 부딪힌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전해졌다.주작은 고통을 참고 복수를 하려 했으나 전장의 공격은 주작의 공격 속도와 견줄 만큼 빠르고 강력했다.전장은 또다시 강한 악력을 이용해 주작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양손을 사용해 주작의 옷을 찢으려 했다.여성으로서 주작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작은 상대의 힘을 이기지 못했고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하하, 이제 기억나냐? 내가 말했지, 너는 그냥 파리일 뿐이라고. 네가 나를 몇 번 괴롭혔다지만 내가 너를 잡는 순간 너는 끝나는 거야! 너를 제대로 모욕해주지!”그 말과 함께 홍노 상태의 전장은 자신의 커다란 입을 쭈욱 내밀어 주작에게 입맞춤을 하려 했다.그 모습은 마치 고릴라와 같았다. 무서운 게 아니라, 오히려 역겨운 모습이었다.“죽고 싶은 거구나!”천둥 같은 외침과 함께 염구준의 힘이 손바닥에 집중되었고, 흑풍을 향해 밀어붙였다.방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흑풍은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방어하려 했지만 강력한 충격파에 수십 미터 밖으로 날려버렸다.비록 흑풍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지만 흑풍이 멀리 떨어져 나간 덕분에 염구준이 주작을 구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염구준은 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으로 다가와 손쉬운 한 방으로 전장의 갈비뼈를 세게 가격했다. 그러자 전장은 순간적으로 멀리 튕겨 나갔다.튕겨 나간 몸은 공중에서 폭발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홀 안의 공기는 마치 피처럼 붉게 물든 듯했다.고성 안을 가득 메운 피비린내가 바깥으로까지 퍼져 나갔다.한편 고성 밖.앨리스와 그 일행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
“하하, 이런 무식한 놈들!”절대적인 힘 앞에서 돌연변이의 특수 능력은 무용지물이었다.염구준이 코 앞까지 왔을 때, 상대는 도망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방어는 염구준의 공격의 천 분의 일도 막지 못했다.한 방 만으로 상대의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염구준은 그의 심장을 손으로 움켜잡았고, 상대는 즉사했다!매우 참혹한 죽음이었다. 심장은 염구준의 손에 의해 살아있는 채로 꺼내졌고, 이를 본 청용과 주작은 깜짝 놀랐다. 그들도 훈련을 받고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을 직접 손으로 꺼내는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그렇게 흑풍의 수하 두 명 모두 처치된 뒤, 세 사람은 흑풍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흑풍은 극도로 지쳐 보였다. 그는 심장이 뽑혀 나가는 걸 본 뒤부터 발이 떨려오기 시작했다그의 눈빛에는 전례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잠시 뒤, 흑풍은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고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까지 벗었다. 염구준의 예상대로, 그의 얼굴에는 살이 거의 없었다. 이마에는 푸른 혈관과 근육이 드러나 있었고, 특히 입술 주변은 마치 사람 가죽을 덮어 놓은 해골처럼 보였다! “너희가 내 소중한 부하를 죽였으니, 나도 너희를 죽이겠다!” “하하, 그래? 너 하나로 가능할 것 같아? 난 혼자서도 너를 죽일 수 있어. 하물며 우린 지금 셋인데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복수하겠어!”흑풍의 목소리가 전과는 달랐다. 그는 원래 예전의 패배로 염구준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유능한 부하들이 죽어가는데도 그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한다면 부하들은 헛되이 죽게 된 것과 다름없었다.갑자기 흑풍의 뒤에서 보라색과 검은색이 섞인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천천히 전체 고성을 감싸기 시작했다. “조심해! 연기에 독이 있을지도 몰라!”흑풍의 눈은 검은 동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이내 눈에
“전신, 저 자를 왜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그냥 죽여버리면 안되는 겁니까?”청용이 들어와 물었다.염구준은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아까 왜 홍노 상태의 사람을 죽이려면 피를 빼야 한다고 했는지 알아?”청용과 주작은 염구준의 질문에 답을 알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홍노 상태에서는 신체 구조가 변화해서 몸 전체가 각성 상태가 돼. 이 상태에서 상대는 싸울수록 강해지지. 전체적인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어떤 강한 사람이라도 패할 수밖에 없어!”주작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싸우지 않으신 겁니까? 우리가 저자의 부하들을 이미 죽이지 않았습니까?”염구준은 멀리 사라지는 흑풍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계속 싸운다면 너네가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 저놈이 자폭이라도 하면 너네 중 최소 한 명은 다치겠지. 최대한 신중히 행동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저놈을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 나는 저놈과 수 백번 겨루어 보아서 알아. 저놈은 이제 과거의 흑풍이 아니야. 너희 두 명의 힘을 합쳐도 부족할 거라고!” “전신, 그럼 저 자와 전신의 실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합니까?” 팍!“아!”좌절을 맛본 흑풍이 문 쪽으로 가던 중 주작이 물었다. “앨리스랑 일행들은 어디 있죠?” “안 돼!”염구준이 외치는 순간, 고성의 대문이 열리며 앨리스와 몇 명의 청년들이 함께 들어왔다. 흑풍이 밖으로 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앨리스와 청년들은 흑풍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걸어오는 해골을 바라보았다.공포 영화의 한 장면과 같았다.하지만 이내 주위를 의식한 앨리스는 정신을 되찾았다. 이내 그녀는 그의 복장을 보고 그가 바로 문 뒤에 숨어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왜 그 사람이 이렇게 변했는지, 그리고 지금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에 대해 생각했다.“그 자에게서 멀리 떨어지세요!”염구준은 이 말과 동시에 앨리스를 향해 미친 듯이 달
“빨리 구해! 뭘 멍하니 서 있어?”염구준은 다급해졌다. 염구준은 수많은 계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가 이 시점에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앨리스가 흑풍을 마주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흑풍을 보고도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몰랐던 걸까?염구준은 마음속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앨리스에 대한 걱정과 원망이 뒤섞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두 가지 감정을 뒤로 하고 앨리스를 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앨리스를 살펴본 결과, 염구준은 그녀의 몸속에 차가운 기운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기운은 그녀가 맞은 부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기다 신체의 활동성도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전신, 이리 오셔서 얼굴 좀 보세요!”염구준이 시선을 돌리자, 앨리스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마치 산 송장의 얼굴처럼 보였다! 보기만해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염구준은 아래 쪽으로 시선을 이동했고 앨리스의 입술은 중독으로 인해 자주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주색은 매우 선명했고, 이는 독이 극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암시했다.중독의 증상을 살핀 염구준은 이 독이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전신, 중독입니다. 빨리 해독제를 주세요!”주작도 다가왔다. 그녀는 중독된 앨리스를 보고, 여성으로서의 동정심이 폭발했다.최고의 무술 고수라는 사람이 무방비 상태의 여성에게 손을 대다니, 정말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제가 그놈을 죽여버릴 거예요!”주작은 얼굴을 찡그린 채 흑풍이 떠난 문 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멈춰! 너의 실력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어. 그자의 실력이면 너 정도는 일도 아닐거야!” “그럼 설마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으실 겁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앨리스의 몸속 독소를 빨리 제거하는 거야! 그 놈은 원래 인간 말종이었어. 앨리스가 타이밍이 안 좋았던 거지.”모두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앨리스를 방으로
염구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힘들어졌다. 기운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몸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며 염구준은 확실히 힘에 부쳤다.다행히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 치료도 끝이 났다. 앨리스의 부상은 물리적인 타박상으로 생긴 멍을 제외하고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염구준은 기운이 절반 이상 빠져나가면서 몸이 매우 허약해졌다. 다행히 청용과 다른 이들이 곁에서 그를 지켜주었다.모든 일이 끝난 뒤, 염구준은 다시 몸을 회복하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고, 청용은 그를 보살피기 위해 계속 곁에 머물렀다. "너희 둘도 쉬어. 전투에서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어." "저는 안 됩니다. 대표님을 보호해야 해요. 흑풍이 기회를 노리고 공격해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전신께서 다치시도록 할 수는 없어요!"청용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그 말이 염구준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염구준이 여러 번 만류했지만 청용은 절대로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주작과 함께 번갈아 가며 지키도록 하였다. 한편, 앨리스는 몸이 회복된 후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뻣뻣한 몸을 움직였다. 이때 몸에서 뼈가 뚝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렇게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뻐근한거야?” 통증으로 허리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내려오던 앨리스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검은 얼굴의 사람과 마주친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왜 아무 이유 없이 잠에 들었던 걸까?그때 밖에서 족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족장의 긴장된 표정을 본 앨리스는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다가가 물었다. “족장님, 무슨 일 있어요?”“아, 세상에, 드디어 깨어났구나. 몸은 괜찮은게냐?” “괜찮냐고요? 저한테 무슨 일 있었나요?”“기억이 안 나니?”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아주 먼 길을 걸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매우 피곤했다. 방금 깨어났는데도 잠을 잔 것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 상황에서는 저 역시 반응이 늦었을 거예요.”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청용은 여전히 불만을 표했다. “만약 저 사람이 안 들어왔다면, 전신께서도 이렇게 심각하게 다치지 않았을 테죠.” “됐어. 이미 벌어진 일이야. 과거의 일만 계속 따지면 우리끼리 단결할 수 없어. 아무 의미가 없다고!”청용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무시하였다.이후 주작이 청용 대신 그 자리를 지켰다. 앨리스는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작의 옆에 함께 있었다.시간이 흘러, 방 안에서 맑고 또렷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주작의 눈이 반짝였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염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전신께서 거의 회복하신 것 같아요. 소리로 봤을 때 아마 완전히 나으셨을 겁니다.”정말로 잠시 뒤 방 문이 열리며 염구준이 방에서 나왔다. “전신, 회복하셨습니까?”주작이 기대에 차 물었다.염구준은 먼저 앨리스를 바라보다가 주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많이 나아졌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어. 마치 내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 흡수된 것 같은 느낌이야. 단기간 내에 회복은 어려울 것 같군.” “네? 기운이 흡수됐다고요? 사람의 기운을 침식시키는 독도 있나요?”염구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 질문에는 그도 답할 수 없었다. 염구준 역시 이런 기술을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확실한 것은 흑풍의 실력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역시 분명히 음모가 있어서 일 것이다.또한 흑풍의 숨겨진 실력은 염구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가 전력을 다한다면 아마 염구준마저도 막기 힘들 것이다. “모르겠어. 하지만 그를 만만하게 여겨서는 안돼. 모두 조심해야겠어. 무모하게 굴다가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특히 너, 청용! 네 무모한 성격 좀 고쳐! 네가 어떻게 내 시험을 통과했는지 도통 모르겠다!”청용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그도 최근에 자신이 쉽게 화를 낸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이 시작되었다.종목들은 정말 신나고 하나같이 감탄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암퇘지가 철사슬 위로 걸어가고, 곰이 외발자전거를 타는 장면을 본 아이들이 깔깔 웃으면서 연신 박수를 쳤다.방금 일로 염구준은 자꾸 주변을 살펴보며 경계했다.여러 종목이 끝난 후, 광대 진행자가 나와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존경하는 여러분, 이어서 저희 피날레 종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활인을 할 텐데 어느 분이 게스트로 올라오시겠습니까?”그 말에 현장이 조용해지고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어떤 아이들은 자기가 나가겠다고 했지만 부모가 한사코 입을 막으면서 말렸다.“나가면 안 돼. 이 서커스단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야.”“나도 들었어요. 인근 도시에서 발생했는데 게스트가 계약서까지 작성했대요.”“무서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서커스 공연은 재미있지만 이 종목은 다들 뒤로 물러나며 지켜보기만 했다.“아빠, 내가 나가도 돼요?”그때 염희주가 말했다.“가지 마. 나중에 내가 믿을 만한 마술사를 불러서 체험하게 해 줄게.”옆에서 하는 말을 들었으니 딸을 위험하게 내보낼 수 없었다.“알았어요.”염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무룩해 있었다.곧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공연장의 불빛이 어두워지며 한 줄기 전등만 광대를 비추었다.“여러분, 제가 행운 게스트를 뽑으면 전등이 그분을 비출 겁니다. 물론 나올지 말지는 그분이 결정하면 되겠습니다.”서커스의 수법은 한번 또 한 번 곤란한 상황으로 밀어붙였다.정말 게스트로 당첨된다면 체면 때문이라도 무대에 올라갈 것이다.“감격스러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광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전등이 현장을 누비며 빠르게 움직였다.“멈추세요!”한참 뒤, 광대의 말에 전등이 멈추었다.게스트로 염구준이 당첨되었다.이번에야말로 현장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었다.역시 나름 계획이 있었다.염구준은 방금 몰래 감시하던 사람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했다.“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협조해 주
당황한 조련사가 긴 막대기를 들고 사자의 머리를 누르며 뒤로 물리쳤다.탁!사자가 손바닥으로 막대기를 쳐서 부러트리고 아이에게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우와아아앙!”깜짝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아이가 높은 소리로 울수록 사자는 더 흥분되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드러냈다.“저기 누가 들어가고 있어요.”그때 한 그림자가 갑자기 철창 앞에 나타났다.바로 염구준이었다.“으아아아악!”염구준이 두 손으로 철창을 잡고 힘을 주자 단단한 쇠가 구부러지며 양쪽으로 휘었다.그리고 구멍을 통해 철창 안에 들어가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았다.“울지 마. 이제 괜찮아.”“으르렁!”사자는 먹잇감이 빼앗기자 입을 크게 벌리고 으르렁거리며 덮쳤다.“죽어!”염구준이 강력한 기운을 발사하자 사자는 뒤로 튕겨 구석에 나가떨어졌다.그가 살의를 뿜어냈다.동물은 워낙 살의에 예민했다.사자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작은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렸다.그 동작은 서커스단에서 배운 것이다.염구준은 아이를 안고 철창에서 나와 아이 엄마에게 넘기며 신신당부했다.“앞으로 아이 손을 꼭 잡고 다니세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아이 엄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염구준 가족은 경악해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계속 동물을 구경했다.“아빠는 슈퍼맨이에요?”방금 장면을 떠올리던 염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사자가 아버지 앞에서 고양이처럼 말을 잘 들어서 깜짝 놀랐다.“하하하. 방금 아빠가 마술을 부려서 그래.”염구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어떤 일은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마술? 이따가 마술쇼도 있는데 가르쳐줄 수 있어요?”염희주는 두 눈을 깜빡이며 염구준을 봐라봤다.그 말에 염구준은 난감했다.마술을 할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됐어. 마술은 나중에 배워. 이제 곧 마술쇼 시작이야. 들어가서 앉아야지.”손가을이 나서서 남편을 도와줬다.“시작했어요? 그럼 빨리 들어가요!”염희주는 빨리 들어
용필과 하윤나는 초고속으로 이튿날에 바로 미니 결혼식을 올렸다.정식 결혼식은 나중에 다시 성대하게 올리려고 했다.쌍방 부모님들이 모두 도착했다.하동철과 김연주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염구준이 두 사람에게 손씨 그룹에서 일하면 월급을 200만씩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하동철은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경호 대장인 용필과 함께 일하고 김연주는 청소부에 취직했다.용필을 봐서 두 노인과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이렇게 안배한 것이다.어차피 앞으로 한 식구로서 자주 만날 텐데,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물러날 때는 이득을 주는 방식으로 두 사람을 탄복하게 만든 것이다.재미있는 것은 하동철이 출근하면 회사에서 용필을 대장이라 부르고 퇴근하면 용필이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한다는 것이다.미니 결혼식은 무사하게 진행되어 두 사람은 드디어 부부가 되었다.이 모든 것은 다 염구준이 추진한 덕분이라 두 사람은 엄청 고마웠다.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지나, 어느덧 서커스단이 공연하는 날이 다가왔다.염희주가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세 사람은 아침 댓바람부터 공연장에 도착했다.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아직 공연장 문이 열리지 않았다.밖에 철창을 몇 개를 놓고 안에 맹수들을 가둔 것이 보였다.독수리, 호랑이, 원숭이 등등 동물들을 관람용으로 놓은 것이었다.이곳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가 있는 가족들이었다.다들 신기해서 감탄을 금지 못했다.“아빠는 사자를 본 적이 있어요?”염희주가 궁금해하며 물었다.“봤기도 했고 먹어도 봤어. 근데 맛이 없었어.”염구준은 딸을 속일 필요가 없어 솔직하게 대답했다.전에 흑주 벌판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팀과 연락을 잃어서 먹을 것이 없었다.그래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잡는 족족 배를 채웠다.“아빠는 왜 맨날 거짓말만 해요? 내가 나쁜 것만 배우면 어떡해요?”염희주는 아예 믿지 않았다.사자는 사나운 짐승이고 초원의 패권자이자 흑주의 우두머리인데 그것을 잡아 먹었다니믿어지지 않았
“시작.”오백하는 ‘시’자를 말할 때부터 얼마되지도 않는 힘을 손에 넣었다.억지가 따로 없었다.그러나 용필의 손은 꿈쩍하지도 않았다.힘으로 똘똘 물친 용필과 힘을 겨룬다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힘을 준다. 합!”용필이 한마디 하더니 오른팔에 힘을 주어 가볍게 상대방의 손목을 꺾었다.그런데 테이블까지 부숴버렸다.겨우 이 정도에 진 것이다.“악!”왼쪽 팔이 탈구된 오백하는 귀가 찢어지는 비명소리를 질렀다.어려서부터 다친 적이 없이 곱게 자랐으니 이런 고통을 감당할 리가 없었다.“안 된다고 했는데 뭐 하러 용필 오빠한테 개기냐?”하윤나가 말하면서 용필의 팔을 끌어당겼다.참지 못하고 상대방을 해칠까 봐 그런 것이다.솔직히 그녀는 용필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가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윤나야, 나 정말 힘을 쓰지 않았어.”용필이 억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나도 알아.”하윤나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팔씨름에서 졌으니 오백하는 패배하고 유일한 선택은 용필밖에 없었다.“꺼져. 설마 남아서 밥 먹고 가게?”염구준은 아직도 아파서 바닥에서 뒹구는 오백하에게 싸늘하게 내뱉았다.“이놈들 잡아 쳐!”열받은 오백하는 경호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쿵!경호원들이 다가가려고 할 때 염구준이 기운을 펼치며 그들을 문밖으로 몰아냈다.봐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퍽!그리고 오백하를 발로 뻥 차서 밖으로 쫓아냈다.룸 안이 드디어 조용해졌다.글로벌 호텔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오백하 일행을 들어 호텔 밖으로 내쫓았다.이 과정은 고작 몇 분만에 진행되었다.“사돈 어르신, 두 사람 이제 결혼해도 됩니까?”두 노인은 염구준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그럼요. 저희도 찬성해요.”하동철과 김연주는 깜짝 놀라며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원래 사위 후보가 2명이었는데 한 명이 도망쳤으니 이제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그럼 두 사람 먼저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하고 나중에 결혼
“진정하세요. 많지도 않습니다.”염구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이게 많지 않다니 두 사람은 경악했다.최근 청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땅값이 점점 올라 제일 저렴한 별장도 20억 이상이었다.“염 선생님, 그쪽과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오백하가 못마땅 해하며 물었다.손씨 그룹이 끼어들면 그는 뒷배인 회사를 내세워도 대항할 수 없었다.“용필 형, 나를 뭐라고 부르죠?”염구준이 옆을 보며 물었다.“내 매제지.”용필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들었어요? 나랑 상관 있죠?”염구준이 되물었다.상대방이 기어코 끼어들겠다고 하니 오백하는 심란하여 계속 머릿속을 굴렸다.‘어떡하지, 어떡하지?...’돈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하지만 적어도 52억은 있어야 상대방과 싸울 수 있었다.평소 그는 돈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즐겼는데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 돈으로 억압당할 줄은 몰랐다.인과로 보복을 당하니 매우 불쾌했다.“저기요. 왜 예물값을 올리지 않나요?”염구준은 그가 대답하지 않자 주의를 주었다.‘올리긴 뭘 올려?’오백하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겉으로 애써 웃었다.돈으로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면으로 능력을 보여서 자신의 우세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저 멍청한 놈은 윤나를 지킬 자격이 없어요. 두 분 신중하게 생각해 보세요.”오백하가 갑자기 흠집을 내기 시작했다.“그게…”하동철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무조건 가격을 올리라는 속셈이었다.“주먹다짐을 비교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되죠.”염구준이 분명하게 말했다.종사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한 녀석이 감히 용필 앞에서 나대다니 속으로 우스웠다.능력이 안 되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 되었다.“안 돼.”갑자기 하윤나가 용필을 부둥켜안으면서 싸우지 못하게 붙잡았다.하지만 오백하의 눈에는 그녀가 용필을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다.그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펄쩍 뛰었다.“남자라면 나랑 겨루자. 지면 알아서
“아씨, 저 새끼가 내 물건을 훔쳤어. 다음에 눈에 띄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목소리에서 상대방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도련님, 어서 오세요.”하윤나의 부모님은 목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염구준은 그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방금 용필이 들어올 때 쳐다보지도 않더니 지금은 개처럼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당당한 사람이 되는 게 좋지 않은가?“네.”오백하는 한 글자로 답하고 당연하듯이 주석에 앉아 거만하게 행동했다.그리고 눈에 불을 켜고 용필과 하윤나를 노려보았다.염구준 부부도 봤지만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도련님, 무슨 일로 늦게 오셨어요?”하동철이 차를 따르면서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말도 마세요. 오는 길에 미친놈을 만났는데 내가 윤나한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을 도둑맞았어요. 차로 뒤쫓아도 잡지 못했어요.”오백하는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무슨 인간이 그렇게 빨리 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초상비.’염구준과 용필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챘다.‘의리 있는 사람이네. 앞으로 잘 지내야겠어.’용필 입장에서 초상비가 오백하를 죽이지 않고 그냥 방해한 것만으로도 형제로서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다.“분명 비싼 물건이겠죠.”하동철의 관심은 언제나 돈이었다.“그렇게 비싸지도 않아요. 2억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요.”오백하가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어쨌든 물건을 찾아오지 못했으니 가격을 20억, 200억을 불러도 누구도 따지지 않을 것이다.“아쉽게 됐네요. 제가 경찰에 신고할까요?”하동철이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냈다.“됐어요. 이따가 가서 다시 살게요.”오백하는 손을 들어 하동철을 제지시켰다.그는 허풍이 들통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솔직히 하윤나와 연인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선물할 리가 없었다.“됐어요. 허풍은 그만 떨고 본론으로 갑시다.”염구준은 귀가 썩을 것 같아서 대화를 끊어버렸다.오늘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될 텐데 체면을 줄 필요도 없었다.
하윤나는 먼저 시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나중에 부모님들에게 말하려고 했다.그런데 부모님들이 눈치를 챘는지 자꾸 방해를 하는 것이다.보다 못한 김연주가 나서서 말렸다.“됐어. 그만 싸워. 이따가 두 사람 다 오니까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해.”듣기에 공평한 것 같지만 실은 오백하를 두둔하고 있었다.용필의 상황으로는 경쟁할 가치도 없고 그냥 망신만 주려고 생각한 것이다.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염구준 일행이 들어왔다.방금 세 식구가 한 말을 밖에서 다 들은 것이다.용필의 안색이 퍼렇게 질려서 보기 흉했다.“들어오세요.”하동철이 이내 표정을 바꾸고 반갑게 맞이했다.지금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만약 오백하라면 추태를 보여주지 않았나 은근 걱정이 되었다.끼익!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용필이 들어오면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아버님, 어머님. 제가 왔습니다.”그를 본 하동철의 웃던 얼굴이 바로 굳어져버졌다.“앉아.”모든 말이 얼굴에 써져 있었다.“오빠, 이쪽으로 와서 앉아.”하윤나는 앞으로 다가가 용필의 팔을 잡아당겨 자기 옆에 앉혔다.두 사람은 깨알이 쏟아질 정도로 다정했다.그 장면을 본 하동철은 혈압이 슬슬 올라왔다.“형님, 안목이 있네요.”염구준이 장난을 치며 손가을과 함께 룸으로 들어왔다.병원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다.그런데 오늘 가까이서 봤더니 하윤나의 외모는 경국지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뻤다.“어머, 손 대표님, 염 선생님이 오실 줄은 몰랐어요. 어서 앉으세요.”하동철은 얼른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했다.얼굴 표정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적응되지 않았다.“편하게 말씀하세요.”염구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는 아내와 함께 용필의 옆자리에 앉았다.세력과 재부에 눈이 멀어 아부하는 소인배를 용필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하하하.”하동철은 뻘쭘해서 헛웃음을 지었다.돈만 준다면 그를 어떻게 대해도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세 사람이
“지금 윤나 부모님들도 이 금액을 요구하고 있어. 근데 나 돈이 없잖아. 어르신이 오후에 글로리 호텔에서 만나면 답변을 준댔어. 말로는 오백하도 온대.”용필은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감히 어머니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건장한 몸으로 반보천인 고수와 싸울 수 있지만 돈 앞에서 한결 작아졌다.하지만 돈은 확실히 만능인 물건이었다.“간단해. 내가 가서 오백하 놈을 죽여버릴게. 그럼 누구도 방해하지 않아.”초상비가 화끈한 제안을 했다.그는 강호에서 여러 해를 굴러먹어서인지 겁이 없고 수법이 거칠었다.“안 돼. 윤나가 폭력으로 해결하지 말랬어.”용필은 고개를 저으며 입구를 막았다.혹시나 방심한 사이에 초상비가 뛰쳐나갈까 봐 미리 방지한 것이다.보안실 경호원들 중에서 실력이 가장 약한 초상비도 정신지상 실력이니, 평범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염구준이 잠시 중얼거리더니 계속 물었다.“그 외에 다른 조건이 있어요?”용필은 생각하면서 말했다.“그리고 연봉이 높은 직장을 찾으래.”지금 그는 매달 월급 300만으로 청해시에서 수입이 중상 레벨이지만 부잣집 자식들과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일도 아니죠.”염구준이 일어나더니 용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경고를 줄 필요가 있었다.아니면 앞으로 용필만 힘들게 될 것이다.“무슨 뜻이야?”돈이 없는 용필은 어리둥절했다. “돈이 필요하면 내가 낼게요. 호텔에 나와 가을도 함께 갈게요.”염구준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정말이야?”갑작스러운 행복에 용필은 어쩔 줄 몰랐다.“정말이죠. 거짓이겠어요?”그가 엄숙하게 대답했다.글로리 호텔 입구에 핑크색 포르쉐가 멈추더니 염구준 일행이 내렸다.“손 대표님, 저한테 맡기세요. 안전하게 주차하겠습니다.”입구에 있던 종업원은 거물이 오자 바로 달려왔다.“수고하세요.”손가을은 한마디하면서 팁으로 현금까지 쥐어 주었다.그리고 세 사람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용필은
“맞아!”“얼마 전에 용필 오빠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었잖아?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오빠를 간호해 준 간호사 윤나 씨랑 정이 들어서 지금 결혼 얘기까지 오간 상태야.”“그런데 문제는 저 오백하라는 사람이 해외에서 돌아온 후 중학교 동창회에서 윤나 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려서 미친 듯이 쫓아다니고 있다는 거야.”손가을은 상황의 전말을 설명했다. 친척의 일이기도 해서 그녀는 유독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그럼 형님과 윤나 씨의 사이는 어떤데?”염구준은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남녀 간의 감정은 억지로 이어질 수 없는 법이었다. 만약 하윤나가 과거의 인연에 흔들려 마음이 변했다면, 그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아주 좋아. 근데 문제는 오백하가 윤나 씨 부모님께 돈을 줘서 두 분이 둘의 관계를 반대하고 있어.”손가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수작을 부렸네.’염구준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시간 나면 형님과 얘기 좀 해봐야겠어.”용필은 그의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해준 사람이라 그도 이번엔 상대방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오백하가 돈을 얼마를 줬대도 상관 없었다. 돈은 어차피 그가 더 많을 테니까 말이다.그 후, 가족들은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 아쿠아리움에 들렀고, 저녁에는 어린이 영화를 관람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한편, 손태석과 진숙영이 여행을 떠난 탓에 집안은 조금 썰렁했다.‘역시 사람이 많아야 시끌벅적하구나.’다음 날, 염구준은 딸을 학교에 데려다 준 뒤 손씨 그룹 본사로 향했다.건물 입구에서 경비복을 입은 채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용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전투 인형으로 만들어졌다가 염구준에게 구출된 이후로, 그가 이렇게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남자는 쉽게 울지 않는 법이었다. 진짜로 슬플 때는 빼고 말이다.용필이 뇌 손상을 입긴 했지만 단지 정상인보다 지력이 낮을 뿐이지, 바보는 아니었다. “왜 그래요? 돈이라도 잃어버렸어요?”염구준은 농담하며 말을 걸었다.“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