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 뒤, 소채은이 짐 정리를 마치고 방에서 걸어 나왔다.기억 상실인 척하는 윤구주는 자연스럽게 목석처럼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저기, 기억 잃으신 분, 이제 갑시다.”소채은은 이렇게 말하더니 윤구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짐가방을 들고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집안의 오해를 사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제 집에 가서 뭐라고 설명해요?”소채은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가방을 끌고 밖에 세워둔 하얀색 미니 쿠퍼로 향했다.짐가방을 트렁크에 실은 후 소채은이 말했다.“타요.”기억을 잃은 척 연기 중인 윤구주는 “네”라는 간단한 대답과 함께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차 안은 핑크로 장식했고 향기로웠다.앉자마자 소채은이 말했다.“아주 복받은 사람이네. 이 차에 한 번도 남자를 태워본 적이 없는데.”윤구주는 속으로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내로 갑시다.”소채은은 차에 시동을 걸었고 집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소채은은 운전하면서 노래를 들었다.옆에 앉은 윤구주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몸 안의 기운을 움직여 온몸에 난 상처를 천천히 치유하고 있었다.소채은은 드문드문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를 돌아봤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진한 눈썹과 맑은 눈동자, 어쩜 콧대도 높았다.‘기억을 잃지만 않았어도 진짜 남신이 따로 없는데. 이런 남자가 내 남친이면 진짜 괜찮겠다.’남자 친구는 무슨, 가족의 도구로서 곧 중해 그룹의 바람둥이와 결혼을 앞둔 마당에 자기의 행복을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소채은은 씁쓸하게 웃더니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차는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여기서 강성시까지 가려면 적어도 5시간은 걸렸다. 고속도로에 다 와 가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 앞쪽 엔진에서 큰 소음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차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뭐야? 어떻게 된 거지?”소채은은 깜짝 놀라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내려서 검사했다.보닛을 열자 까만 연기가 엔진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소채은은
그는 까만 연기를 뿜어내는 엔진과 회로판 내에서 전해지는 탄 냄새를 맡고는 바로 뭐가 문젠지 알아냈다.화진의 유일한 구주왕으로서 차가 퍼진 문제는 그에게 너무나도 작은 문제였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트렁크 쪽으로 걸어가 차에 상비된 스패너를 꺼내 나사를 뽑고 엔진 커버를 열었다.전화를 치던 소채은은 기억을 잃은 사람이 자신의 차 앞에서 이것저것 만지고 있으니 잠시 넋을 잃었다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뭐 하는 거예요?”소채은이 걸어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엔진 커버를 따는 윤구주를 쳐다봤다.“잉?”“지금 차 정비하는 거예요?”소채은이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윤구주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없이 차만 만졌다.2분 뒤 윤구주는 안에서 끊어진 두 개의 전선을 연결하고 말했다.“됐어요.”소채은은 더 멍한 표정으로 윤구주를 쳐다보며 물었다.“이렇게 빨리... 고쳤다고요? 진짜?”윤구주가 그저 “네”하고 대답만 할 뿐이었다.기억을 잃은 남자가 차를 고칠 줄 안다니, 소채은은 의문이 들었다.의문을 가진 채 소채은은 빠르게 차로 돌아가 시동을 걸었고 아니나 다를까 차는 시동이 걸렸다. 아까 엔진에서 나던 이상한 소리도 사라지고 더 이상 연기도 나지 않았다.확실히 고쳐진 차를 보며 소채은은 기뻐했다.“하하, 몰랐는데 차도 고칠 줄 아네요?”“혹시 전에 차량 정비하던 사람인가?”“?”윤구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에 차량 정비공이었나보네.”소채은은 윤구주의 예전 신분을 거의 확정하듯 말했다. 윤구주는 어이가 없었다.그렇게 차는 윤구주에 의해 완전히 고쳐졌다.소채은은 다시 기분 좋게 운전해 윤구주를 데리고 시내로 향했다.가는 길에 소채은은 윤구주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진짜 기술이 괜찮은데요?”윤구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천하의 9주 군신이 차를 정비하는 엔지니어로 불리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림이었다.고속도로를 타자 소채은의 차는 속도가 붙었다.이때 뒤에서 패기 넘치는 군용차가
윤구주가 남부 부대의 차량을 보며 감개무량해하는데 소채은이 윤구주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물었다.“기억을 잃은 윤구주 씨, 뭘 그렇게 열심히 봐요?”윤구주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근데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다고?”소채은이 다시 캐물었다.“그냥 익숙해서 뚫어져라 보는 거겠죠.”“익숙하다고요?”“기억을 잃은 사람이 남부 창용부대 차량을 보고 익숙할 게 뭐가 있어요. 혹시 전에 군인이었어요?”소채은이 캐물었다.그 물음에 윤구주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군인만 한 게 아니었다.윤구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채은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내가 봤을 때 당신은 그냥 차량 정비 엔지니어였을 거예요.”“시내로 돌아가면 꼭 큰 병원으로 데려가서 기억상실증 고쳐줄게요.”“기억 돌아오면 꼭 차 자주 고쳐주면서 보답해야 해요.”소채은의 말을 들으며 윤구주는 쓴웃음을 지었다.3시간 뒤, 드디어 소채은은 윤구주를 데리고 강성시로 돌아왔다.주변에 즐비하게 서 있는 고층 빌딩을 보며 윤구주는 침묵을 유지했다.소채은은 시내로 돌아오자 서란의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채은아, 지금 어디야?”전화를 받자마자 서란이 냉큼 물었다.“베프”의 전화에 소채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 이미 강성시로 돌아왔어. 서란아, 하나 물어볼게. 우리 집안과 아빠가 어떻게 내가 옛 본가로 간 일을 알고 있지? 혹시 네가 일러바친 거야?”소채은은 바보가 아니었다.“베프”와 통화를 하고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빠가 사람을 데리고 옛 본가에 나타났다. 이걸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수화기 너머의 서란이 이걸 듣더니 다급히 해명했다.“채은아, 미안해. 아버님이 계속 보채서 말할 수밖에 없었어... 채은아, 내 탓 하는 거 아니지?”서란은 전화에 대고 불쌍한 척해댔다.소채은은 원래 화가 잔뜩 나 있었지만 “베프”가 먼저 승인하자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됐어. 이번 일은 이렇게 넘기자. 네 탓한 적 없어.”“고마워, 채
소채은은 “베프” 서란과 통화를 마치고는 윤구주를 데리고 스카이가든으로 향했다.이 곳은 소채은이 세를 들어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어릴 때부터 가족의 미움을 받고 지내던 그녀는 진작에 이사를 나와 자취하고 있었다.“드디어 돌아왔네.”소채은은 단지 안까지 운전해 한 별장 앞에 세우고는 차에서 내렸다.윤구주도 따라서 내렸다. 눈앞에 우뚝 솟은 단독 별장을 보고는 괜찮은 집이라고 생각했다.“저기, 기억 잃은 윤구주 씨, 잘 들어요. 집에 아직 남자를 들인 적이 없어요.”“그러니 이따 들어가면 아무데나 돌아다니면 안돼요. 알았죠?”윤구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채은은 그렇게 짐가방을 들고 윤구주와 별장으로 들어갔다.별장의 도어락을 열자마자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소채은을 향해 덮쳤다.윤구주는 순간 표정이 변했고 손을 쓰려는데 소채은이 그 까만 물건을 안으며 즐겁게 불렀다.“까망아, 나 왔다.”소채은이 안고 있는 건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를 가진 체형이 거대한 검은 강아지였다.아니, 까만색 마스티프였다.마스티프는 소채은의 품에 안겨 머리를 부비적대더니 멍멍 짖기까지 했다.이 사나운 마스티프가 소채은에게만은 매우 친절하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까망아, 두날이나 못 봤는데 나 안 보고 싶었어?”소채은은 마스티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승냥이보다도 사납다는 마스티프는 지금 소채은의 품에 안긴 채 온순한 장난감 같았다.하지만 소채은의 뒤에 서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성질을 내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대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노려봤다.까망이가 윤구주를 향해 으르렁대자 소채은이 재빨리 그를 당겼다.“까망아, 안돼. 저 사람은 우리 친구야. 알았지?”이 마스티프는 사람 말을 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주인이 이렇게 말하자 다시 차가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노려보더니 낮은 소리로 으르렁대며 머리를 숙였다.소채은은 조금 더 까망이와 놀아주다가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됐어. 이제 알아서 놀아.”이렇게 말하자 마스
윤구주는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서 세상에서 공격성이 제일 강한 견종인 마스티프를 쳐다봤다.마스티프는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음침한 두 눈은 언제든 윤구주를 덮칠 것만 같았다.하지만 윤구주는 꼼짝하지 않고 그저 실눈을 뜨고 마스티프를 지켜봤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윤구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그 기운이 나타나자 방 전체가 갑자기 흔들렸다. 그러자 세상에서 공격성이 제일 강한 마스티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거대한 몸체를 자기도 모르게 뒤로 빼기 시작했다.마치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까망아, 무서워하지 마.”“나는 널 해치지 않아.”윤구주는 마스티프가 무서워하자 미소를 지으며 걸어갔다.그러자 마스티프는 너무 놀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머리도 쳐들지 못했다.윤구주는 마스티프의 목덜미를 살살 주무르며 말했다.“가자, 산책 좀 하자.”이렇게 윤구주는 마스티프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소채은이 샤워하고 핑크색 츄리닝을 입고 나왔다.윤구주가 얌전히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오자 윤구주가 보이지 않았다.“기억도 잃은 사람이 어디 갔대?”“설마, 길 잃은 건 아니겠지?”윤구주가 아직 기억을 잃은 상태기도 했고 낯선 곳에 금방 왔으니 소채은은 냉큼 밖으로 뛰쳐나가 윤구주를 찾았다.밖으로 나가자마자 어이없는 장면이 소채은의 눈앞에 펼쳐졌다.햇빛 아래 그녀가 반년을 넘게 길들인 까망이가 온순한 양처럼 윤구주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윤구주는 단지에 설치한 정자 안에 앉아 즐겁게 볕 쪼임을 하고 있었다.‘미친 거 아니야?’이 광경을 목격한 소채은은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그렇게 사납고 공격성이 강하던 까망이가 기억을 잃은 사람 발밑에 엎드려 있다니, 말도 안 되었다.“윤구주 씨!”소채은이 재빨리 달려와 윤구주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소리를 들은 윤구주가 잘생긴 얼굴을 돌려 소채은을 향해 웃어 보였다.“기억도 잃은 사람이 이렇게 막 나오면 어떡해요?”“말해봐요. 만약에 당신 잃어버리면 어떡
고급 승용차 네 대가 소채은의 별장에 멈춰서더니 슈트를 입은 건장한 보디가드가 줄지어 내렸다.그중 제일 먼저 차에서 내린 건 중해 그룹 도련님 조성훈이었다.차에서 내린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채은이 사는 별장을 훑어보더니 부하에게 지시했다.“일단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이렇게 말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별장을 향해 걸어왔다.“딩동!”전자 초인종이 울렸다. 방 안에 있던 소채은이 소리를 듣고는 자기의 “베프”가 온 줄 알고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서...”문을 연 소채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베프” 서란인줄 알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의 약혼남이었다.“조... 조... 성훈 씨?”소채은이 넋을 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조성훈이 그런 소채은을 힐끔 보더니 차갑게 웃었다.“소채은 씨, 나를 보고 많이 놀랐나요?”소채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소채은 씨, 두 날만 지나면 결혼하는데, 약혼 상대를 보고도 들어와 앉으라고 하지 않는 건가요?”소채은은 더욱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눈앞에 서 있는 조성훈은 이미 명의상 약혼남이 맞았다.하지만 방안에는 윤구주도 있었다.소채은은 조금 고민하다가 황급히 대답했다.“아... 아니...”“지금은 좀 불편해요.”조성훈이 음침하게 웃으며 물었다.“불편하다니, 집에 외간 남자라도 숨긴 건 아니죠?”조성훈은 이렇게 말하며 바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소채은은 막아보고 싶었지만 아예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성훈은 안까지 쳐들어왔다.별장 안.윤구주는 거실에 떡하니 서 있었다.억지로 쳐들어온 조성훈은 당연히 한눈에 잘생긴 윤구주를 발견했다.중해 그룹 도련님인 조성훈도 잘생기고 돈이 많은 편이었다.하지만 지금 아우라도, 체격도, 얼굴도 자기보다 훨씬 낳은 윤구주를 보고 조성훈의 얼굴은 세게 어두워졌다.“소채은 씨, 이 남자는 누군지 말해줄래요?”조성훈은 손가락으로 윤구주를 가리키며 물었다.소채은이 황급히 달려와 설명했다.“성훈 씨, 오해하지 말아요. 그냥
윤구주였다.그는 무쇠와도 같은 팔로 조성훈의 팔을 부여더니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털끝이라도 건드려 봐. 죽여버릴 테니까.”“나를 죽인다고?”팔을 잡힌 조성훈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을 터트렸다.“젠장, 네가 뭔데 나한테...”조성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구주는 팔을 들더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중해 그룹 도련님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사람은 저만치 튕겨 나갔다.튕겨 나간 몸은 문에 부딪혀 문을 구멍 내고는 바깥으로 떨어졌다.이 광경을 목격한 소채은은 넋을 잃었다.밖에 서 있던 보디가드조차 전부 눈이 휘둥그레졌다.“성훈 도련님!”조성훈이 피투성이로 튕겨 나오자 그들은 다급하게 앞으로 다가가 부축했다.조성훈의 입은 피범벅이었고 너무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졌다.부축을 받고 일어난 조성훈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화를 냈다.“개 같은 자식,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다 붙어. 저 잡것을 내가 오늘 무조건 죽이고 만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조성훈 옆에 서 있던 여섯 일곱 명의 보디가드가 일제히 윤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별장에서 “쿵, 쿵, 쿵”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왔다.자세히 보니 다 조성훈이 데려온 경호원였다.재수 없는 놈들은 전부 손이 부러지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졌다.그들을 그렇게 튕겨 나가 바닥에 쓰러진 채 비명을 질렀다.자기가 데려온 여섯 일곱 명의 보디가드가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다 심하게 맞고 튕겨 나오자 이번엔 조성훈이 넋을 잃었다.별장 안에 있는 소채은도 이미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소채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과도 같은 윤구주를 쳐다봤다.‘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지? 기억을 잃은 차량 정비 엔지니어 맞아?’소채은이 아직 답답해하고 있는데 윤구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무서워하지 마요. 내가 있는 한 당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이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바깥으로 나왔다.소채은도 몇초 멍해 있더니 곧장 따라서 나왔다.그
“아빠, 내 말 좀 들어봐요. 진짜 그런 적 없어요...”소채은은 다시 한번 오해를 받을까 봐 최대한 해명했다.“아직도 설명할게 남았어? 그럼 말해봐. 이 남자 도대체 누구야? 왜 너와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냈는지, 지금은 왜 너희 집에 있는 건지 말이야.”소청하가 손가락으로 윤구주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소채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망할 놈의 계집애, 잘 들어. 엄마는 너 때문에 어제 저녁만 해도 두 번이나 쓰러졌어.”“그리고 소 씨 집안도 너 때문에 중해 그룹과 완전히 틀어졌고.”“만약 아직도 소씨 성을 쓰고 싶으면 당장 고분고분 따라와.”“만약 계속 이 외간 남자와 있겠다고 한다면 다시 소 씨 집안 문턱을 밟을 생각을 말거라.”소청하는 이렇게 호통을 치더니 자리를 떴다.소채은은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윤구주를 보더니 결국 눈물을 뚝뚝 떨구며 가족들과 떠나려고 했다.“잠깐만요.”이때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윤구주가 갑자기 말하자 소 씨 집안사람들이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돌아봤다.“너 이 새끼 뭐 하자는 거야?”소청하는 윤구주를 보며 화를 주체하지 못해 치를 떨었다.윤구주가 천천히 걸어오더니 물었다.“뭘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왜 아버지가 돼서 딸에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협박하는 거예요?”이 말을 들은 소청하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네가 뭔데 여기서 날 교육하려 들어?”“내가 뭔지 알 필요는 없어요.”“그냥 이 말만 해주고 싶어요. 몇 푼도 안 되는 돈을 바라거나 집안을 위한답시고 딸의 행복을 망친다면 언젠간 후회하게 될 거라고요.”윤구주가 천천히 말했다.소청하가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뭘 안다고 지껄여? 우스워서 정말.”“채은아, 가자.”소청하는 소채은을 끌고 억지로 차에 오르려 했다.소채은도 핍박에 못 이겨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
“너도 억울해할 필요 없어. 네가 화진을 위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적으로 구주왕에 대한 충성심 위에 쌓인 것일 뿐이야. 앞으로 네가 성장하면 윤구주도 널 통제하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널 제거하려 할 거다.”말이 끝나자 청현은 순식간에 수천 미터를 날아 수비영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삼척청봉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 검 끝은 백호를 정확히 겨눴다.날카로운 검의 울림은 수 킬로미터 안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 진동하며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지껄이지 마. 죽이려면 날 죽여. 내 형제들을 어떻게 죽였지? 그리고 여긴 어딘 줄 아나? 이곳은 화진 서울이야.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백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고 상공엔 살기가 짙게 뭉쳐 수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그 위압감은 실로 섬뜩할 정도였다.솔직히 이런 백호의 모습은 정말 마인으로 오해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그는 윤구주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윤구주만이 아니었다.구주의 전우와 화진의 백성들 그 모든 이들이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행보는 그를 점점 인간 요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래? 지금은 네가 그들을 인정하고 있어도 언젠가 네가 마인으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의지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난 간다. 미리 경고했으니 후회하지 마. 내게 자비란 없다.”슈욱!청현은 한 자루 검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잔상처럼 백호를 향해 돌진했다.한 줄기 칼날의 섬광이 나타나며 수천 개의 검기가 일제히 백호에게 쏟아졌다.쾅! 쾅! 쾅!각 칼날 하나하나가 구오지존 초입의 수련자를 가볍게 썰어버릴 위력이었지만 백호의 몸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대부분의 검기는 튕겨 나갔고 일부는 살을 파고들었지만 뼈에 닿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휙!강풍이 맹렬히 불어치는 가운데 청현은 백호의 천령개를 향해 칼을 날카롭게 휘둘렀다.슉!백호는 머리를 살짝 비켜 피했지만 칼은 그의 어깨를 정확히 내리꽂
화진의 외곽에서 청룡의 흔적을 추적하던 빙신전 전주는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했다.“늙은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뭔가 감지된 거야?”현모와 주작은 즉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몇 번을 말해. 난 황보웅이라고.”빙신전 전주가 차갑게 대답했다.“헛소리 작작 해. 널 신발이라 안 부른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청룡은 찾았어?”성질 더러운 주작은 그에게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아니. 백호한테 걸어둔 천술이 강제로 해제됐어.”황보웅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뭐라고?”현모와 주작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서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현모와 주작은 즉시 위성 전화로 서울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근처 도시에 연락한 결과 서울에 이상 상황이 발생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다.그들은 이미 서울로 인원을 파견했다고 전했다.“젠장! 진동왕 그 늙은 놈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청해는 더 말할 것도 없고!”주작은 크게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현모는 차분하게 말하며 주작을 진정시켰다.황보웅은 무관심하게 말했다.“진동왕 임성진이야 고작 구오 경지에 불과해서 그가 뭘 하든 별 소용없어. 청해는... 그놈은 이제 더 이상 반역하지 않을 거야. 곤륜 구역은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거든. 구주왕은 더 말할 것도 없고.”현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웅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설령 서울에 큰 위기가 닥쳤다 해도 이곳에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걱정하지 마. 국주도 서울에 있고 왕이 말했듯이 국주가 이제 최고급 신급에 올랐으니 진형만 유지하고 주변 도시에 원군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현모는 힘차게 말했다. 이어서 두 사람에게 청룡 추적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황보웅은 서울의 사상자 수에는 무관심했고 윤구주만 무사하면 대국에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그리하여 세 사람은 다시 깊은 산과 밀림으로 들어가서 청룡을 추적했다.한
청해는 모든 일을 마무리한 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다.청의 검객은 그의 곁을 무심히 지나가며 담담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네가 곤륜 구역의 사술사긴 해도 화진 백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충성이라 할 만하다. 윤국주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켰군. 내가 굳이 너를 죽일 필요는 없어. 정리할 게 있다면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라.”청해의 마지막 충성을 보고 청의 검객은 그를 살려두었다.그리고 얼음 진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청해가 온 힘을 다해 짜놓은 얼음 결계는 한 번에 산산조각 나버렸다.“이 미친놈. 차이가 너무 크잖아. 고급 신급뿐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력할 수 있지?”청해는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악물었다.그래도 자신이 오늘 죽으면 화진을 위해 싸운 셈이니 윤구주가 자신을 잘 묻어주고 이름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다.평생 신령으로 살아온 청해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되새기며 웃고 있었다.멀리서 진동왕 일행이 도착했지만 그는 발을 디디기도 전에 칼날 같은 살의와 검의 기운에 압도당했다.바로 그 순간 그는 미친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임정설이 올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백호의 생명은 위태로웠다.그는 얼음 속에 갇혀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백호 네 안에는 살기가 너무 많다. 성수의 피를 융합한 이상 언젠가는 인간계의 마인으로 폭주할 것이다. 윤국주는 결코 너를 죽일 수 없겠지만 내가 대신 끝내주마.”청현의 검 끝에서 한 줄기 서늘한 빛이 뻗어 나와 얼음 결계를 뚫고 백호의 단전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청의 검객인 청현은 이미 그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성스러운 짐승의 피를 깨뜨린다면 백호는 죽을 운명이었다.진동왕은 숨을 삼킨 채 그 칼끝을 노려보고 있었다.하지만 구주군은 더는 참지 못했다.“대장님을 구하라. 돌격.”수천 명의 구주군이 함성을 지르며 청현을 향해 돌진했다.하지만 청현은 단 한 번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더니 순식간에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아 손바닥
진짜 부처의 금빛 광채가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수많은 불빛이 만불종의 보도자항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그의 육신이 타들어 가며 내면의 음험한 영혼과 사악한 기운이 드러나자 그동안 그에게 속아왔던 이들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그는 진정한 부처가 아니라 불교의 이름을 악용해 사술을 부리는 사악한 존재였음을. 불빛은 순식간에 희미해졌고 하늘의 황금 형상은 다시 검은 구름에 삼켜졌다.지상에 남은 금빛 실루엣도 점차 사라지며 그 자리에는 누더기 법복을 입은 한 스님의 모습이 드러났다.그는 바로 공수이의 스승인 미친 스님이었다.최고급 신급에 근접한 존재였다.“역시 스승님. 평소에는 미친 척하시더니 제대로 할 땐 정말 대단하시네요.”공수이는 온몸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미친 스님? 200년 전 풍화산의 불동 주지 스님 이름이 뭐였더라?”진동왕 임성진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불은 본래 형상이 없으니 내가 불을 닦는다면 이름 자체가 무의미하지요.”미친 스님은 아미타불을 외우며 몇 개의 단약을 꺼내 진동왕과 공수이에게 먹였다.하지만 은용위의 부대는 이미 요승 불경의 손에 전멸한 후였다. 미친 스님은 그들을 위해 자리에 앉아 초혼 의식을 치렀다.“스님 지금은 초혼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백호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요. 청해도 위험한 상황일 겁니다. 부디 백호를 구해주십시오.”진동왕은 숨을 고르자마자 미친 스님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은 상황이 너무나 긴급했기 때문이었다.그 말을 들은 미친 스님은 안타깝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내 도행은 보도자항과 팽팽한 대결 수준입니다.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건 수련이 아니라 운 때문이었습니다. 백호에게 닥친 이 재앙은 그의 운명에 이미 각인된 것입니다.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뭐... 뭐라고요?”곤륜 구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고인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진동왕은 충격을 받았다.“어서 말하거라.
“미친놈. 이 가짜 스님아, 당장 꺼져.”공수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혈액을 인으로 새겼다.그의 피는 놀랍게도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십장 금불인이 발동되었다.공수이가 모든 힘을 다해 불러낸 공격은 보도자항이 소환한 금불상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네 놈이 고작 불법 몇 년 수련했다고 대단한 줄 아느냐? 서방여래는 만불지존이다. 네가 감히 뭐로 나와 겨룬단 말이냐. 깨져라.”보도자항은 냉소를 띠며 금불상의 양손을 모았다. 그러자 손끝에서 번개 같은 금뢰가 튀어나와 공수이의 금강불인을 산산이 부수었다.그 충격에 공수이는 완전히 쓰러졌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설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문득 공수이는 이것이 정말 여래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찮은 요귀가 어찌하여 참불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세상 이치인가? 내가 배운 불법은 전부 거짓인가? 아니면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건가?”그 순간 하늘을 가르며 천지의 정기를 품은 무지갯빛 호연정기가 짙은 기운을 가르며 쏟아졌다.“금강인 불문을 열어라. ”거대한 메아리 같은 음성이 하늘을 울렸고 곧이어 백장 금인이 칠색 구름을 타고 서울 상공에 강림했다.“뭐라고?”보도자항의 표정이 굳었다.그 압도적인 기운은 그의 숨조차 막히게 했다.“불.”백장 금인이 왕부로 내려오자마자 뱉은 한마디에 보도자항이 펼쳤던 모든 사술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안돼... 나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군. 이 세상에 아직도 대승 불법을 익힌 자가 남아 있었다니.”보도자항은 이를 갈며 몸을 떨었다.그는 질투에 사로잡혔다.왜 자신은 만불종 종주임에도 이런 참된 불법의 정수를 얻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불본무도 심성위령. 일념으로 도를 향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희 같은 자들은 마음을 그르쳐 불을 왜곡하고 형상 없는 불을 우상화해 신처럼 떠받들었다. 만불종은 불타의 이름을 빌려 사익을 취했고 종교를 가장해 세상을 속였으며 그 어떤 정의로운 종
“너 혹시 내 금강인을 노리는 거야? 이 썩을 놈아. 이 빌어먹을 스님아. 금강인은 불문의 최고 금의인데 너 같은 가짜 스님한테 줘봤자 쓸모없어. 멍청이야.”공수이가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보도자항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네 이놈. 네놈 같은 자는 죽여야 해.”보도자항이 눈을 부릅뜨며 불문의 비기를 펼쳤다.하지만 그의 동작은 도저히 정통 도술로 보이지 않았다.몸 전체에서는 사악한 기운과 요기가 넘실대고 있었다.“요승아, 내 공격을 받아라.”공수이는 다시 한번 금강인을 펼쳤다.그를 감싼 금강불인은 보도자항의 사기를 완전히 차단했고 강렬한 공격이 연속으로 날아들어 보도자항을 계속해서 밀어냈다.보도자항은 억울함을 느꼈다.그의 눈에 공수이는 그저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공수이는 물론 공씨 가문 전체가 나서더라도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임 씨 초대 국주 임세현이 돌아와도 자신 앞에 무릎 꿇을 것이라 확신했다.하지만 금강인만은 보도자항의 모든 사기 무공을 정면으로 제압하는 천적이었다.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보도자항은 속이 타들어 갔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수이는 보도자항을 몰아붙이며 집요하게 공격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동왕은 속이 다 시원했다.“공수이, 본때를 보여줘. 더 세게 패.”공수이는 보도자항의 머리 위로 올라가 정통으로 내리쳤고 보도자항이 머리를 감싸자마자 바로 아래로 파고들어 극한의 회음부 공격을 퍼부었다.퍽! 퍽! 빗발치는 주먹이 급소에 꽂히자 아무리 경지 높은 보도자항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이 썩을 놈 물러가라.”보도자항은 사기를 폭발시키며 공수이를 멀리 내던졌다.하지만 공수이는 금강인의 보호를 받고 있어 공격을 맞아도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보도자항은 양손을 합장하더니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전신에 흑기가 치솟았다.“요승아, 너 또 그 짓거리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런 사술은 통하지 않아
“우습군. 이런 조잡한 칼 한 자루로 어쩌겠다고? 설령 임세현이 직접 나타나도, 내가 제압할 방법은 있다. 하물며 너 같은 놈은? 애초에 수련 자질도 없으면서 평소엔 그저 인생을 낭비하다가 위기에 처하니 발버둥 치는 거야. 정말 한심하군.”“너 같은 놈은 그냥 처박혀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해. 부처님 말씀에 이르길, 부처는 인연 없는 자는 구하지 않느니라. 너는 불문과 인연이 없으니, 지옥에서 고통이나 받는 게 어울리지.”“고해무변. 네가 돌아갈 곳은 지옥뿐이다.”“하하하!”보도자항은 한 손으로 불인을 그리며 마력을 응축해 진동왕의 명문을 향해 내리찍었다.“젠장! 이제 끝이군.”진동왕 임성진의 눈에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그 말이 맞았던 거다.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막상 상황이 닥치자 그는 평화롭게 죽지 못할 운명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 돼!”임성진의 절규는 하늘을 갈라놓을 만큼 강렬했다.“뭐, 뭐야?”보도자항은 진동왕이 그런 힘을 낼 리 없다며 비웃었지만, 그때였다.하늘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뭐야, 이놈은?”보도자항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이어 그 검은 그림자가 땅에 내리꽂히자 바닥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진동왕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내가 소리쳤다고 사람이 떨어진다고? 혹시 구주왕이 돌아온 건가?’하지만 그건 아니었다.구주왕은 저리 허접하게 등장할 인물이 아니었다.임성진이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 순간 완전히 넋이 나갔다.떨어진 이는 바로 공씨 가문의 세자 공수이였다.“네... 네가 왜 여기에... 공씨 가문에서 보낸 게 고작 이 하찮은 놈이라고?”진동왕은 절규했다.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 순간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던 공수이는 허접하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허접? 지금 누굴 보고 하는 소리야, 이 늙은이야!”“내 이름은 공수이! 공씨 가문의 세자지. 법호는 널 죽여주마다!
구주군이 진동왕을 따라 돌격하려는 순간 진동왕은 단호하게 외쳤다.“물러서! 전원 후퇴하라. 저자는 만불종의 종주다. 너희가 가다간 전멸할 것이다.”진동왕은 자신의 권한으로 구주군의 진격을 막았고 홀로 왕부 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진동왕,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네 목숨은 내 것이고 왕궁 밖 구주군의 국운 또한 내 차지다.”보도자항은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였고 진동왕은 이를 악물고 금도를 휘둘러 필사적으로 맞섰다.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실로 용맹했지만 사실상 그의 목숨을 스스로 갈아내는 싸움이었다.온 힘을 다했지만 그의 어떤 공격도 보도자항의 몸에 미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한편 다른 전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청의 검객은 서요산 검종 종주의 제자였다. 그의 검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고 곤륜 구역의 수련자들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청해는 지금 자신의 음혼을 불태우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서울 상공에 먹구름이 짙게 깔렸고 그 먹구름은 서서히 거대한 해골의 형상으로 변해갔다.마치 서울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였다.하늘은 먹구름에 뒤덮였고 땅에는 귀기 어린 안개가 스며들었다.서울 전역이 거대한 안개에 휩싸였고 그 안에서 쉬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악몽에 갇혔다.그 누구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임을 인지한 이들조차 가위에 눌린 듯 깨어나지 못했다.깨어 있던 이들마저 갑자기 정신이 붕괴된 듯 헛소리를 내뱉으며 광기에 휩싸였다.서요산 검종의 산속 검각에는 종주의 폐관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피처럼 붉은 달이 떠오르고 동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무겁게 몰려 있었다. 그 위로는 거대한 형체가 아득히 떠다니고 아래로는 온갖 귀물이 들끓고 있었다.“마기가 짙어지고 있군. 누군가 화진의 국운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자색 도포를 입은 중년 남성이 재빠르게 날아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
“신령의 기운이 너무 약해졌어. 안 돼. 저놈은 백호 대수령을 노리고 온 거야.”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은용위는 즉시 서울 본부에 상황을 보고했다.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서울 본부와의 모든 통신이 완전히 끊기었다는 점이었다.서울 본부 빌딩에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천 명의 왕실 금위군 역시 모두 피 웅덩이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해당 지역은 거대한 결계로 봉쇄되어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더욱 충격적인 문제는 왕궁 내부 고수들이 전멸했다는 것이다.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왕궁 바로 아래 거주하던 왕실 직계 가족들은 무사했다.왕궁 외곽에서 상황을 전해 들은 견배영은 교외에서 급히 돌아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그는 원래 용맥 경계에서 방어 임무 중이었지만 사태가 긴급해지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무력했다.진동왕과 신령도 그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사태를 수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어쩌지... 현모와 주작은 해외에 있고 구주왕은 곤륜 구역에 갔는데. 서요산 검종도 내부 사정으로 정신이 없어서 당장은 도움을 받을 수 없어.”견배영은 고심 끝에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은용위와 구주군, 금위군을 총동원해 대규모 군사력으로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즉시 대군이 소집되었고 동시에 진동왕부와 수비영을 향해 출동했다.그중 백 명의 은용위 선봉대가 가장 먼저 진동왕부에 도착했다.이들이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진동왕을 고문 중이던 보도자항이 눈을 가늘게 떴다.“호오... 역시 임씨 가문의 국운이 약해졌다고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군. 하지만 이번에 막아냈다고 해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지.”보도자항은 싸늘하게 웃었다.“전원 돌격!”백 명의 은용위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그들은 하사받은 금도를 뽑아 들었고 검날에서는 은은한 광휘가 번쩍였다.금도는 왕실의 보검이자 정식 법기였다.평소엔 집안 제단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