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응?”양시연은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정색하며 물었다.“연정훈 씨, 혹시 무슨 숨겨진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양지원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딸과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연정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그러게 말이다.”양지원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제정신이 아니니까 미친 듯이 너와 결혼하려고 하는 거겠지.”양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은 나비를 만지작거렸고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감동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단순한 허영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양시연은 스스로 생각했다.연정훈이 아니라도 권력 있고 우수한 누군가가 이렇게 간절히 다가왔다면 양시연은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양지원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딸의 입에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네 마음은 어떠니?”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진심이니?”“그 사람 요즘 너무 성가셔요.”양지원은 한동안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그래도 결국은 네 선택이지.”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양시연에게 자기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거울을 하나 건네주고 싶었다. 그녀가 성가신 건지 아니면 부끄럽고 화가 난 건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뜻에서였다.양지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혁수는 아마 희망이 없겠구나.’양시연은 옆으로 다가가 양지원을 살며시 껴안으며 작게 말했다.“저 정말 지금 결혼할 생각 없어요. 집에 온 건 뭔가 제대로 해보려고 결심한 거예요.”양지원은 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아니에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딸이 아니라면 연정훈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아예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양지원은 단호히 말했다.“‘만약’
정인 그룹에서.연정훈은 방금 부승원을 배웅하고 돌아왔다.부승원은 초안을 훑어본 뒤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안 되겠다. 너희 엄마한테 부탁해서 무당이라도 불러야겠어. 넌 귀신 들린 게 틀림없어.”정인 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최대 주주의 변경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연씨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상업에서 쌓아온 자산을 고작‘혼수’로 내놓는다니 이건 완전히 풋내기나 할 법한 무모한 짓이었다.게다가 상대방이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굴욕적이었다.비서실장은 연정훈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충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춘 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연정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서랍 깊숙한 곳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이 반지는 예전에 양시연이 그에게 돌려보낸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지를 들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조심스레 반지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연정훈은 미친 게 아니고 단지 처음으로 자신감이 부족했을 뿐이었다.그래서 서둘러 승부수를 던졌다. 양시연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고 싶었다.양시연은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겨 있었다.양혁수는 양시연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연정훈은 자신에게 뚜렷한 강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양시연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을 품을 때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후에는 매일 그녀와 함께하며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연정훈은 책상으로 돌아와 만약 양시연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하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늘 그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적했지만, 정작 연정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양시연이 거절할 때마다 연정훈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고, 그는 그저
“반우희는 주스를 마시며 물었다.“부승희 씨, 연 대표님 편을 안 들어주시나요?”부승희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저는 항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에요. 이치에 맞는 걸 도울 뿐 가족 편은 들지 않죠.”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역시 부승희 씨다!’“그런데 말이에요.”부승희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양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네가 연정훈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이제 연정훈을 안 좋아해서야? 아니면 연정훈에 대한 앙금 때문이야?”양시연은 잠시 망설였다.그때 반우희가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재빨리 끼어들었다.“2초 이상 망설였어요!”부승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승희는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멈췄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생각 중이었어요.”“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먹으며 천천히 말했다.“너무 오랫동안 연애 문제를 멀리하다 보니 조금 서툴러졌나 봐요.”부승희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군요.”양시연은 헛기침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반우희는 털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아직 조금은 좋아하지만, 그렇게 많이 좋아하진 않는 거죠. 앙금도 조금은 있지만, 굳이 앙갚음할 마음은 없어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반우희는 자신만만하게 양시연에게 물었다.“제 말이 맞죠. 양시연 언니?”양시연은 말없이 달콤한 수프를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많이 먹어. 이거 맛있어.”“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음식을 맛보았다.“사실 이해는 가요. 전 애인이 쫓아오면 누구라도 망설이겠죠.”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물었다.“이승우가 승희 씨한테 다시 대시하면 받아줄 거예요?”부승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양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
“됐거든요.”양시연이 숟가락을 쥐고 낮게 중얼거렸다.“돈이 많으니까 돈으로 날 사려는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잡아두는 건지도 모를 일이죠.”“오늘 아침이었어요.”그녀는 말하다가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우리 집에 선물 잔뜩 들고 와서 청혼한다고 하더니 내 앞에서는 여전히 뻔뻔하게 굴더라니까요.”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박했다.“뻔뻔하다고 해서 초조하지 않다는 건 아니죠!”양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초조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부승희는 양손을 뻗으며 말했다.“안 초조했으면 천천히 시연 씨를 설득했겠죠. 이렇게 대대적으로 단기전으로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양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연정훈의 행동이 분명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부승희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잠깐만! 부승희 씨, 너 뭔가 스파이 같은 느낌이 있어요.”반우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수상해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연정훈 씨한테 뭔 얘기 듣고 날 부른 거 아니죠?”부승희는 의자를 바짝 당기며 허리를 곧게 펴더니 말했다.“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옛 친구가 그리워서 온 거라고요!”부승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생각이 너무 많아졌네요. 역시 신분이 달라지더니 우리 같은 가난한 친구들은 다 의심부터 하네요.”양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희는 양시연이 믿지 않는 걸 보자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며 말했다.“봐요. 직접 확인해요. 나랑 연정훈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정말 한참 전이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이 굳이 확인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확신했다.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막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면 연정훈과의 카톡 채팅
“그건 모르는 일이죠. 너무 심심해서 사서 고생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그러니까요. 고생하는 건 그 사람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시연 씨는 쉽게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국내 최고 갑부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다가 오빠가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면 뻥 차버리면 되잖아요. 침대 밖으로 내쫓는 것처럼 간단한 일 아니에요?”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그런데 부승희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런 프러포즈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 시연 씨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 엄마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당장 비행기 타고 와서 시연 씨를 설득할 거예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엄마는 결혼과 사랑은 다른 거라고 했어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사랑만 해서는 결혼이 안된대요. 부부는 파트너 같기도 해서 사랑도 하고 손발도 척척 맞아야 해요. 두 가지가 다 되는 인연을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죠.”부승희가 말을 마치고 양시연의 어깨를 다독였다.“정훈 오빠를 놓치면 더 좋은 사람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고 해도 결국 끝은 똑같아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씨답지 않은 얘기인걸요.”경인시에서 사랑에 파이팅넘치는 사람 하면 부승희였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제 어리지도 않은데 어떻게 예전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어요?”그리고 부승희가 반우희를 향해 물었다.“우희 씨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둘이요.”그 말에 양시연과 부승희가 서로를 바라봤다.‘젊고 참 좋다.’‘부러워.’부승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쨌든 정훈 오빠랑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도 시연 씨 뭐라고 못해요. 다들 과하게 프러포즈한 정훈 오빠를 미친 사람 취급 할 걸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시연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날
부승희는 반우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그러자 반우희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놨다.“과일 도시락이에요. 부승원 변호사님이 다른 변호사한테 나눠주시고 마지막으로 저한테 주셨는데 저는 그냥 평범한 도시락인 줄 알고 그냥 가지고 있었어요.”부승희가 빠르게 질문을 이어갔다.“무슨 과일이었는데요?”“딸기요!”“또 거짓말! 우리 오빤 딸기 안 먹어요. 엄마가 딸기를 싸주셨을 리가 없어요!”“...”반우희는 또 제 발등을 찍었다.양시연은 그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부승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부승원은 딸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반우희가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양시연은 제 코가 석 자였으니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 노래방에서 한 곡 하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10시가 넘었다.“우리 3차 가요!”부승희가 말을 꺼냈다.그러나 양시연과 반우희는 체력이 바닥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두 사람 정말 체력 키워야겠어요.”부승희는 두 사람을 이끌고 신호등 앞에 섰다.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길가에 서 있는데 버스가 지나치고 맞은편의 한 무리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양시연은 경인시가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렇게 좁을 수가 없었다.경인시로 막 돌아온 양시연이 우연히 연정훈을 만나고, 먼 해외에서 돌아온 부승희가 길가에서 이승우를 마주칠 확률은 대체 얼마나 높을까?차 한 대가 지나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부승희의 긴 머릿결을 흩트렸다. 그렇게 시야가 조금 가려지고 부승희는 눈앞의 사람이 흐릿하게 보였다.이승우는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렸으며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가 훤히 드러났고, 웃으면 고개가 뒤로 살짝 젖혀지는 습관까지 기억 속과 다를 게 없었다.양시연은 바로 부승희를 살폈다. 부승희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이승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이승우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부승희의 말이 끝나고 양시연은 왠지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승우가 깜짝 놀라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그렇게 벌써 남자 친구가 생겼어?”“덕분에.”부승희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짧게만 얘기하고 다음에 자리 한번 마련할게. 프로그래밍하는 사람인데 오빠랑 얘기가 통할 거야.”“그래...”“이만 가요.”양시연과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부승희가 먼저 앞장을 서고 두 사람은 조용히 이승우의 앞을 지나쳤다.그렇게 그들은 또 큰길 하나 사이 두고 멀어졌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양시연은 이승우를 몰래 살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부승희가 멀어지고 나서야 이승우는 몰래 그곳을 슬쩍 살피다가 몸을 돌렸다.반우희가 작게 중얼거렸다.“승희 씨 정말 멋있지 않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세 사람은 앞쪽 사거리에서 헤어져 각자 차에 올랐다.양시연은 본가로 향했고 정원에 양석진이 자주 타던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양혁수의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집안으로 들어선 양시연은 양지원과 양석진을 찾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 아주머니가 내려와 양시연에게 말했다.“시연 씨, 어르신이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홍두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연정훈이 그렇게 많은 걸 내주었으니 양홍두의 마음이 흔들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지원과 양석진의 얼굴을 보아 섣불리 말을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똑똑똑.양시연이 문을 두드렸다.“들어오거라.”양시연이 안으로 들어섰다.양홍두의 방은 본가에서도 가장 큰 방이었고 인테리어에 많은 신경을 썼었다. 방 안의 공기는 아주 쾌적했으며 잘 정돈이 된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 찾으셨어요?”양홍두는 어항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양시연을 확인한 양홍두는 양시연을 옆으로 부르더니 물고기 밥을 넘겨주었다.“오늘
양시연은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양홍두의 방에서 나왔다. 마음속에는 또 걱정이 늘었다.거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그곳을 확인했다. 양지원과 양석진이 함께 있었다.양시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깡충깡충 뛰며 외쳤다.“엄마!”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빨리 와. 엄마 쿠키 구웠어!”고개를 끄덕인 양시연이 폴짝폴짝 내려갔다.양지원은 이런 양시연이 익숙했지만 양석진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양시연은 늘 양석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양시연이 양석진에게 다가가 물었다.“오늘은 다른 일정 없어요?”예전처럼 호칭은 생략되었다.양석진은 소파 등받이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응. 그래서 집에 들렀어.”“그렇군요.”양지원은 쿠키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신경을 써서 만들어도 쿠키가 자꾸 부서졌다.양시연이 말했다.“설탕을 많이 넣어서 그래요.”“정말?”양지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걸어가 다음 쿠키를 체크했다.양석진은 테이블 위로 올려 둔 조각난 쿠키를 대수롭지 않게 입에 넣었다.한 입만 먹어도 너무 단데 양석진은 그 쿠키가 별미라도 된 것처럼 자꾸 입에 넣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조각 다시 맛보았다.“...”‘음... 내 미각이 잘못된 건 아니군.’양시연은 몰래 물을 반 컵이나 들이켰다.양석진은 이런 양시연을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음식은 한 번도 차려본 적이 없던 네 엄마가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성장인 거야.”“...”‘네네. 당연히 그렇겠죠.’“엄마가 만든 쿠키가 맛은 좋은데 시간이 많이 늦어 당이 올라갈 수 있으니 오늘 밤엔 적당히 드시는 게 좋겠어요.”양석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부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양석진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정훈이가 프러포즈했다면서?”양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정확히 말하면 프러포즈는 아니죠.”“그래. 혼사 얘기를 꺼냈지.
퇴근 시간이 되어 양시연은 저녁 약속 장소로 갔다. 연정훈에게서 여전히 연락이 없었지만 양시연은 마음을 다잡고 미팅에 집중하기로 했다.3개월 동안 임신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조언을 받긴 했지만 당연히 술자리에서는 숨기지 않았다.이사회는 이미 양시연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술은 양시연 쪽으로 오지 않았고 겉으로는 꽤 배려심 있어 보였다.그러나 몇 차례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누군가 입을 열었다.“양 대표님 임신 중이시라면 집에서 푹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인 그룹도 이렇게 오래 걸어왔고 인재도 넘쳐나지 않습니까. 연 대표님이 남긴 유능한 인재들뿐만 아니라 부 변호사도 돕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맞아요.”“안 되면 우리 같은 이 늙은이들이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겉치레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여러분께서 뒤에서 버텨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런 때에 어떻게 감히 임신했겠어요. 앞으로도 여러분께 의지할 일이 많을 겁니다. 지금은 아직 힘들지 않으니 괜히 짐을 더 드리지는 않겠습니다.”그러면서 양시연은 잔을 들고 말했다.“제가 술 대신 차로 여러분께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말에 응했다.양시연은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그녀 주변 사람들은 마실 수 있었다. 연정훈이 남겨둔 사람들이 있는 데다 부승원은 최근 그녀의 절친 동맹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많은 일을 부승원이 처리해 주었기에 이사회 사람 중 일부는 부승원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자연스럽게 술잔이 부승원 쪽으로 몰렸다.다행히 참석한 양쪽 인원 모두 적지 않았고 양시연은 뻔뻔한 면모도 갖추고 있어 누군가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하면 과일 주스를 들고 그 사람에게 단독 건배를 제안했다.“이렇게 하죠. 제 체면을 봐서 저는 원샷 할 테니 편하게 드세요.”“아니에요. 그건 안 되죠.”‘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 배 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텐데!’결국 임원들은 조금 자제할 수밖에
‘내가 반우희를 화나게 한 거야?’부승원은 드디어 천지가 뒤집힌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그가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것을 본 양시연은 손을 들어 밑으로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그냥 상황 좀 파악해 보려던 거예요. 보세요 반우희가 아직 어린애 같은 면이 있잖아요. 가끔 기분 상할 때도 있는 거죠.”부승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이런 사소한 일은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청소해 줄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부 대표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부승원은 양시연의 말에 관심 없다는 듯 서류를 집으려 손을 뻗자 양시연은 서류를 건네주며 가볍게 말했다.“반우희가 그러던데요. 요즘 부 대표님이 너무 잘생겨 보인대요. 자꾸 보고 싶어진다고요.”부승원은 당황해 순간 멈칫했다.???양시연은 펜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잠시 후에 오 회장님과 저녁 약속 있잖아요. 부 대표님은 먼저 하실 일 하세요. 약속 시간이 되면 같이 내려가요.”말을 마친 양시연은 서랍을 열어 아무렇지 않은 척 잉크를 꺼냈다.“만년필은 계속 잉크를 채워 넣어야 하는 게 정말 불편하네요.”부승원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고개를 들어 의아한 척 물었다.“어? 아직 뭐 할 말 있으세요?”부승원은 잠시 망설이며 방금 자기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했지만 다시 묻기도 애매해 결국 못 들은 척하며 얼굴을 굳히고 문을 나섰다.양시연은 뒤에서 목을 쭉 빼고 고개를 내밀었다.‘흥. 고상한 척은 잘해.’양시연은 부승원의 말투를 흉내 내며 중얼거렸다.“내가 뭐 청소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연정훈 씨랑 똑같네. 어쩐지 서로 친구가 되었구나.’그녀는 문득 연정훈이 오늘 오후에 돌아온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하지만 아직도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문밖에서 부승원은 복도에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있었다. 반우희가 요즘 자신을 대놓고 피하는 것도 모자라 양시연한테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생각하니 부승원은
“왜 갑자기 청소하고 싶지 않아졌어요?”양시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반우희가 이렇게 높은 급여를 마다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반우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요즘 조금 불편한 일이 있어서요.”양시연은 반우희의 집에 세 아이 중 누가 또 사고를 친 건 아닌지 떠올리며 부드럽게 물었다.“혹시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건가요?”반우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흐리며 잠시 머뭇거렸고 아무래도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눈치였다.양시연은 눈동자를 굴리며 자기도 골치거리가 많지만 반우희의 사정이 궁금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반우희 씨, 저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저한테도 얘기 안하고요.”반우희는 얼굴을 붉히며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그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요.”양시연은 손짓으로 반우희를 불렀다.‘여기로 와요.’“나한테만 얘기해요.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 안 할게요.”반우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의자에 앉아 양시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고 두 손을 단정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숨을 쉬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부 대표님이 또 괴롭힌 거예요?”“그건 아니에요.”“그러면 뭐죠?”반우희는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연속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부 대표님 저...요즘 다시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어요.”‘푸.’다행히 양시연은 차를 마시지 않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차를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속으로 흥미가 생겼고 반우희의 팔을 살짝 찌르며 물었다.“왜요?”반우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이 내리던 날 부승원이 그녀를 안아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반우희는 몸을 숙여 손으로 턱을 괴고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석양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냥 모르겠어요. 그런데 요즘 자꾸 멋있어 보여요. 하...”양시연은 잠시 침묵했다.“...”‘우희 씨 참 솔직하네요. 만약 내가 우희 씨라면 이런 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거야.’“부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출근할 때 너무 무리하지 마. 힘들면 집에 와서 쉬어.”연정훈은 옷을 갈아입으며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생필품을 캐리어에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캐리어를 닫으며 마치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보여주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정훈 씨도 무리하지 마세요. 밖에서 조심하세요."연정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양시연을 힐끗 바라봤고 그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살짝 흘겼다.“시간 끌지 말고 빨리 가세요.”재촉하는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출발 직전 그는 양시연을 살짝 끌어당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현주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마. 임성원에게 확인했는데 일을 아주 깔끔히 처리했대.”그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양시연의 얼굴이 조금 풀리며 한층 부드러워지더니 연정훈에게 물었다.“병원을 신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요?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 소현주 씨의 사고를 발견하고 병원까지 옮길 수 있었죠?”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결국 알아낼 수 있을 거야.”그 말은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천천히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서두르면 상대방이 계획적으로 만든 함정에 걸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양시연은 그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대비책이 준비된 상태라면 차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소현주 씨 상태는 어때요?”“사람은 깨어났는데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가요?”“지금은 그런 상태야. 병원 의사들이 그렇게 진단했어.”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에휴. 이제 당분간 이 골칫거리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네. 골치 아프게 되었어.’아이까지 가진 몸으로 남편의 전 여자친구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양시연은 불만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해지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몰라요. 난 신경 안
새벽 3시에 양시연은 연정훈의 긴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겨우 다시 눕기로 했지만 등을 돌린 채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연정훈은 뒤에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려 했다.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양시연도 일을 모두 연정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소현주를 처리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연정훈이 양시연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도 임신 중인 그녀가 너무 걱정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그가 양원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 양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특히 세운에 다녀온 이후 연정훈의 삼촌과 관련된 위험한 일들을 알게 된 뒤부터 그녀는 그가 처한 자리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체감했다.연정훈이 이미 양원에서 안정된 위치를 잡았다면 괜찮았겠지만 그는 이제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양시연은 그가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딜까, 걱정이 앞섰다.“더 이상 생각하지 마. 이번 일은 큰일이 아니야.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일은 훨씬 많아. 소현주 일로 겁먹으면 나중에 더 큰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너한테 말하기 더 힘들어질 것 같아.”‘큰일이 아니야.’연정훈의 말을 들은 양시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연정훈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은 정말 손가락을 까딱해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문제였다.하지만 양시연은 아직 그런 여유가 없었고 그렇게 담담하지도 못했다.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나한테 말하지 마요. 정훈 씨 혼자 다 감당해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혼자서 잘살아 봐요.”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뒤통수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숨기려던 게 아니야. 그냥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지금 내게 어떤 일도 작은 일일 뿐이고 네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정훈은 자신이 양시연의 약점을
‘꿈이야. 꿈이었어.’양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악몽 속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연정훈도 그녀의 움직임에 깨지 않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연정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곧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녀를 온몸으로 오싹하게 만들었다.‘아니다.’소현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것을 양시연도 알고 있었고 연정훈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폭탄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자살... 소현주 씨가 정말 자살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소현주 씨가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을까? 그런데 이번에 임성원이 굳이 연정훈 씨에게 보고했고 심지어 병원을 옮긴다는 말을 강조했어.’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고 벽에 걸린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한참이 지난 후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연정훈이 깨어난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쯤 감긴 눈으로 양시연의 등을 바라보며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하며 몸을 일으켜 그녀를 감쌌다.“무슨 일이야?”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은 그녀의 이마에 땀이 맺힌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돌아서기 전에 양시연의 입에서 먼저 질문이 나왔다.“소현주 씨가 자살한 거예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양시연은 눈을 감으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잡고 말을 이었다.“소현주 씨가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없었어요? 3년 동안 정말 얌전히 있었단 말이에요? 왜 하필 오늘 임성원 씨가 갑자기 전화한 거죠?”연정훈은 얼굴에 평정을 유지한 채 양시연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시연아,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마.”“나를 속이고 있잖아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손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임성원 씨는 당신이 지시한 일을 처리한 거죠? 맞아요? 다만 임성원 씨가 일이 망쳐서 오늘 당신에게 보고하러 전화를 한 거죠.”‘아니. 그뿐만이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소현주의 일을 숨긴 이유는 그녀가 현재 임신 중이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시연은 이런 문제를 겪어본 적이 없어 연정훈이 사용하는 어떤 수단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양시연이 이미 눈치챘으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괜히 의심을 사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히 말했다.“소현주가 자살 시도를 했는데 실패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있어.”양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쪽에서 왜 당신한테 바로 연락한 거예요?”“내가 계속 소현주의 동향을 주시하라고 했거든. 혹시라도 소현주가 나와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킬까 봐.”연정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소현주라는 여자가 몇 년 동안 정신병원에 있었던 걸로 갑자기 나아질 리는 없었다.아마 소현주는 양시연과 연정훈을 이미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면 소현주 씨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에요?”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소현주 씨가 계속 이렇게 미친 짓을 하고 가끔 자살 시도를 한다고 해도 당신이 소현주 씨를 평생 책임질 거예요?”연정훈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내가 질투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이 소현주 씨 문제에 계속 얽히다 보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사고를 치고 누군가가 조사하면 당신이 연결될 가능성도 있잖아요. 그리고 예전에 소현주 씨와 공휘 일도 있고요. 공휘는 당신 어머니 쪽 집안사람이고 소현주 씨가 찍은 영상은 당신조차 속일 만큼 완벽했어요. 그 영상이 증거로 쓰이기라도 하면 어느 날 소현주 씨가 세상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당신 어머니를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연정훈은 이미 이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고려해 두었었고 만약 오늘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벌써 소현주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을 것이다.양시연이 말한 것처럼 소현
양시연은 집에 도착한 후에도 사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땅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그냥 연기하는 건 아닌 것 같던데요.”남자들끼리라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연정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피를 조금 흘려야 동정을 얻는 법이지.”“됐어요. 부승희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더라고요. 이승우 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어요.”양시연은 외투를 벗고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했다. 연정훈은 그녀가 배고플까 봐 간식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샤워를 마친 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간식을 맛있게 즐겼다. 중간에 연정훈이 샤워하러 간 틈을 타 그녀는 서재로 가서 영어 소설 두 권을 골라 들었다.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책상 서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함께 지낸 시간이 꽤 되었기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사용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중요한 전화는 그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다른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서랍을 열어보려고 했으나 잠겨 있었다.연정훈은 평소 양시연에게 비밀을 두지 않았기에 그녀가 물어보면 암호나 열쇠를 알려주곤 했다.양시연은 전에 그가 알려준 곳에서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열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저장된 이름은 없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네자 상대방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혹시 사모님이세요?”“네 저예요. 임성원 씨죠?”“맞습니다.”“무슨 일인가요?”“도... 도련님을 찾고 있습니다.”양시연은 순간 의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어떤 일이기에 나에게는 말을 안 하는 거지?’“급한 일인가요? 급하면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아니요 급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 도련님께 나중에 전화하라고 전해주셔도 괜찮습니다.”양시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연정훈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임성원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승희는 점점 멀어져 갔지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여보세요?”부승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너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부승희는 당황해서 발신자를 보니 이승우였다.‘헐. 이 멍청이.’그녀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걸음 더 걷자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이번엔 받지 않았다.휴대폰이 잠잠해졌고 그녀가 십자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뒤를 돌아보니 이승우의 모습은 이미 희미해져 있었다.얼핏 보니 이 재수 없는 놈이 일어나긴 했지만 차 뒷부분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죽으려고 그러나? 피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거야?’부승희는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돌아섰고 입구를 지나 몇 걸음 걷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부승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그래도 친구 사이인데 내가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네가 죽든 말든 난 이미 너 안 보이는데 죽는 거 지켜볼 일이 없어.”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좋아. 부승희. 네가 이겼어.”이승우는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승희는 전화를 내려다보며 한참 미간을 찌푸렸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몇 걸음 물러나 그가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보기로 했다.바닥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고 이승우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부승희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지만 곧 깨달았다.‘하. 죽은 척하는 거지?’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승우는 받지 않았고 그가 이미 기절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그 순간 부승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고 가슴 깊은 곳에서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오늘 이승우가 여기서 정말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가 자초한 일이었고 자신에게서 돈을 뜯어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두 집안 간의 관계를 떠올리며 그녀는 결국 이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 안녕하세요.”“승희야, 무슨 일이야?”“이승우가 길가에서 기절해서 곧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 보내서 데려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