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서.양석진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쿠키 포장에 몰두했다.양지원이 소파에 앉아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정훈이가 그렇게 좋은가? 왜 잊어버리질 못하는 걸까요?”“콩깍지라는 게 다 그렇지 뭐.”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의 얼굴만 떠올려도 양지원은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그러자 양석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딸아이가 좋다잖아.”“...”양지원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정훈이 성격도 성격이지만 머리가 너무 좋은 게 문제예요. 시연이에게 프러포즈한다고 그전부터 계약 문제로 혼을 쏙 빼놓더니 일성 그룹에도 손을 대잖아요. 프러포즈할 때가 되니 혁수 사업에 트러블을 만들어 혁수까지 보내버리고!”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렸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나비는 가만히 그 옆을 지켰다. 그릇에 담긴 쿠키는 거의 비워졌다. 대부분 부서진 쿠키는 양석진이 차를 마시며 천천히 먹어버렸다.양석진이 맛있게 먹어주자 양지원은 자신감이 늘었다.그래서 마지막 두어 개 남은 쿠키를 먹지 못하게 막아섰다.“그만 먹어요. 나비한테도 줄 거예요.”그러더니 양지원이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양지원은 아주 당당하게 나비의 입에 쿠키를 쏙 넣었다.나비는 질겅질겅 씹더니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퉤하고 뱉었다.“...”양석진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나비는 뱉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테이블을 향해 몇 번이고 침을 뱉었다. 마치 입안에 작은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양지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양석진은 입꼬리를 꾹꾹 눌렀고 한 움큼의 쿠키를 가리키며 말했다.“나비가 많이 좋아하네. 이거 다 나비 줘.”“...”‘이게 다 연정훈이 버릇없게 키워서 그래!’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해 결국 지식인을 뒤적였다.자신의 고민을 특정 사항만 지우고 서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사람들
역시 사업하는 남자는 연애도 일처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 사람이 허락할 리가 없어요.]엔이 말했다.[그래도 현재 주동권은 그 쪽한테 있으니까 시도해 봐요. 변호사 꼭 대동하고요.]양시연은 고민에 잠겼다.그러는데 엔의 상태가 오프로 바뀐 게 보였다.양시연은 마지막으로 엔에게 즐거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대화방을 나왔다.창밖으로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마도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양시연은 창문을 열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따끈한 차를 들고 폭풍전야의 세상을 구경했다.그런데 양시연은 왠지 헛웃음이 나갔다.많은 게 변했다.이젠 결혼이 가져올 이득까지 고려하게 되다니.양시연은 침대에 철퍼덕 누워 늦은 밤 불어오는 추위를 느꼈다. 두 눈을 감으면 연정훈과 같은 집에서 지내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눈이 오면 연정훈은 양시연은 껴안고 창가 의자에 앉는 걸 좋아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사계절 중 여름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 여름날 시원한 저녁, 한가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아직 연정훈이 좋은 건가?’여러 고민을 해봤지만 사실 아직 이 문제를 진지하게 직시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다시 눈을 뜨고 창밖의 잘 정돈된 정원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을 향한 마음은 사랑과 원망이 얼기설기 섞인 미묘한 감정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연정훈이 걸어온 전화였다.“여보세요?”상대의 핸드폰 너머로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연정훈도 양시연처럼 창밖 풍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아직 안 자고 있었네?”양시연은 허공을 힐끗 노려봤다.“그쪽이 보낸 물건 정리하느라 잘 시간도 없네요.”“내가 대신해 줄까?”“...”양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엿처럼 들러붙긴...”“오전에 보낸 선물 박스에 엿은 없지만 꿀은 있어. 빨간색 박스에 든 게 꿀이니까 먹고 싶으면 찾아서 먹어.”“...”양시연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창가에 앉아 물
핸드폰 진동이 이어졌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연정훈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통화를 걸어왔다.양시연은 그 어떤 것에도 답장하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내일 오후. 강남 시티에서 만나.]‘쳇. 무슨 상사가 명령하듯 구네.’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양시연은 침대 위를 한참이나 뒹굴뒹굴했다. 당연하게도 양시연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 채워지지 않은 허영심, 눈앞에 보이는 이득, 그동안의 서러움 등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무게의 추가 점점 연정훈을 향해 기울어졌다.지금 생각해 보니 엔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연정훈에게 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양시연은 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양시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인터참에 다녀왔고 경인에 있는 양씨 그룹 본부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일성 그룹의 마무리 작업까지 마쳤다.그렇게 바쁜 반나절을 보내고 운전하고 있는 양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조금 짜증이 올라올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는 연정훈.“여보세요?”“강남 시티로 와.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있어.”“...”그 말에 양시연은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았다.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유턴했다.‘그래. 가보는 거야. 뭐 두려운 것 있어?’강남 시티에 도착하자 마침 정오가 되었고 화창한 날씨에 양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정원 앞까지 걸어가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연정훈은 검정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매치해 입었고 간만에 힘을 뺀 차림이었다.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양시연의 가방을 받아 쥐고 허리 숙여 실내화를 꺼냈다.‘참, 몸 둘 바를 모르겠네.’양시연은 갑자기 부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무덤덤한 연정훈의 얼굴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연정훈이 고분고분 말을 따
앙시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에 앞서 여러 조건이 있어요.”그러자 연정훈의 눈에 빛이 반짝거렸다. 바로 고개를 쳐든 연정훈이 말했다.“말만 해.”“정말 뭐든지 말해요?”“그래.”“좋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조건은 총 다섯 가지가 있어요.”“말해봐.”“정인 그룹은 정훈 씨가 준다고 했지, 내가 달라고 한 건 아니였어요.”이게 첫 번째,연정훈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줄게.”양시연이 메모장의 첫 번째 동그라미에 체크를 눌렀다.다음 조건.“결혼하고 1년 동안의 기한을 줘요. 1년 뒤 정훈 씨가 별로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대답해요.”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뭐가 별로인데?”“...”양시연은 말을 바꿨다.“그냥 정훈 씨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거죠.”“내가 별로라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고?”연정훈은 인상까지 찌푸렸다.양시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톡 쏘아댔다.“연정훈 씨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고 불만이 생긴 경우라고 말을 고치죠!”“그래...”양시연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동의해요?”“응.”양시연은 또 체크를 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다음 조건은 그... 거기에 관한 내용이에요.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는 가지지 않을 거예요.”“플라토닉?”“가끔은... 귀찮을 때가 있다고요.”양시연은 꽤 당당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재산을 걸고 보기만 하고 닿을 수 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살라는 말이야?”양시연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결혼하지 말던가요.”연정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이 조건은 잠시 보류.”“안 돼요! 반드시 지금 대답해야 해요!”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는다면 곧 말을 바꿀 게 분명했다.별수 없어진 연정훈이 이렇게 말했다.“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난 너와 진심으로
왠지 연정훈이 억울한 것처럼 들렸다.조금 어이가 없어진 양시연이 말했다.“결혼식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데요. 굳이 형식대로 해야겠어요?”연정훈은 팔짱을 척 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이를 먹을 만큼 먹다 보니 젊은 사람처럼 유행에 빠릿빠릿하지 못해. 나 같은 사람들은 클래식하게 가는 좋아. 뭐든지 제대로 해야지.”“...”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그리고 결혼식 얘기는 성공적으로 양시연의 잡생각을 치우게 했다. 양시연은 이제 어떻게 연정훈을 설득할지 고민했다.“스몰 웨딩으로 양가 친척, 친구들만 모시고 하면 안 돼요?”“우리 가문 친척, 친구들만 해도 식장 꽉 채워.”“...”‘하긴. 양씨 가문도 마찬가지야.’그리고 누굴 초대하고 누굴 초대하지 않을지 그 가늠도 참 어려웠다. 자칫하다가는 초대받지 못한 지인을 서운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양시연이 얼굴을 긁적이며 물었다.“예산은 얼마인데요?”“7천억.”양시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돈이 넘쳐난다는 거야?’“안돼요!”양시연이 바로 거절했다.연정훈이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모장에 글을 적었다.“여섯 번째. 결혼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양시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리고 정인 그룹도 곧 내 소유가 될 텐데 정훈 씨 명의 아래 회사도 잘 정리해 봐요. 얼마 남지 않는 재산 아껴야죠.”연정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네가 날 먹여 살리면 되지. 내가 뭐 걱정할 게 있나?”“굶어 죽지는 않게 해줄 테지만 한번 준 재산은 다시 뱉어내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결혼 후 양시연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상상을 해보았다. 용돈을 받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양시연을 떠올리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빠듯하게 살지 뭐.’그러나 정인 그룹을 내어준다고 해도 이미 모아둔 재산은 평생 쓰지 못할 액수였다.양시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말했다.“예산은 2백억 안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소박하게 해야 다른
벌써 혼인 신고?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돌아가서 고민해 볼게요. 정해진 대로 알려줄게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대한 빨리 알려줘.”양시연이 입을 삐죽였다.‘뭐가 그렇게 급해?’양시연은 연정훈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양손으로 반듯하게 운전대를 잡았다.이에 연정훈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뒤로 물러서서 떠나는 양시연을 지켜봤다.양시연은 덜컥 혼사를 결정해 버렸고 미처 양지원에게 입장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소식은 날개를 타고 온 세상에 퍼져버렸다.인터참의 사람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진작 소식을 전해 들었다.집으로 끊이지 않는 전화가 걸려 왔고 저녁 늦게 방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 양시연은 그제야 결혼을 실감했다.이튿날, 연정훈은 사람을 시켜 여러 웨딩 디자인을 양시연의 사무실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가문 가족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늦은 시간, 양시연은 인터참에서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잠시 양혁수를 만나기로 했다.양시연은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양혁수는 집 문밖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막 도착한 거야?”“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어?”양혁수가 비꼬듯 말했다.이에 양시연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양혁수는 바로 걸음을 옮겨 양시연의 좌수석에 올라탔다.양시연은 직접 양혁수에게 끝을 전해야 했다.차창이 모두 닫힌 차 안, 두 사람만 남겨진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았다.“왜 갑자기 결혼하는 거야?”양혁수가 무표정으로 물었다.잠시 고민하던 양시연이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시기도 적당하고 상황이 다 알맞게 돌아가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어.”양혁수는 덤덤하게 말을 꺼내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그 사람 아직도 사랑하는 거지?”답이
“내가 성을 바꿀게. 그러니까 나랑 살자.”양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양시연은 양혁수가 행여나 이러한 말을 꺼낼까 늘 조마조마했다. 양시연은 결코 양혁수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혁수가 말을 꺼낸 이상 이젠 맺음을 제대로 해야 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넌 영원히 양혁수이고 성은 바꿀 수 없어.”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차창을 내렸다.“네가 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난 널 오빠라고 생각하고 따르는걸.”양혁수는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희망마저 사라져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는 양혁수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어버렸다.말을 꺼낸 이상 양혁수는 끝장을 보고 싶었다.그래서 양시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지금껏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에든베타에서 나한테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 있어?”양시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난 하루빨리 널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우린 매일매일 꼭 붙어 지냈는데 정말 단 한 번도...”그 말을 하는 양혁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인상을 찌푸린 양혁수는 북받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이렇게 힘들어하는 양혁수를 보며 양시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양혁수에게 너무 많은 걸 빚진 것 같았다.그 시절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양혁수와 잘 어울려 지냈다.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도 꼽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마음이 흔들렸다라... 두 사람은 늘 타이밍이 엇갈린 것 같았다.양혁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간에도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연정훈뿐이었다.그러다가 몰랐던 비밀이 드러나고 양시연은 양혁수를 집으로 돌려보내기에 급급했다. 이미 양시연에게 있어 양혁수는 가족과 다름이 없었고 양혁수가 소현정을 떠나보낸 뒤에는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그런데 그 뒤로 양혁수는 양시연에게서 사라졌다.양혁수를 향한 마음
양시연의 말에 양혁수가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양시연을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손을 놓지 못했다.연정훈이 차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의 양혁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양혁수가 차에서 내려 연정훈과 다툼이라도 벌릴까 걱정이 되었다.양시연도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연정훈에게 다가가려던 양혁수를 불러세웠다.양혁수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했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연정훈의 손에는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처럼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양시연에게 건넸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었고 누구도 먼저 굽히려 하지 않았다.그때.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양지원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차에서 내려 기묘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다들 무슨 기력으로 이렇게 서 있는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양시연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양혁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혁수야, 엄마를 도와 트렁크 물건 좀 옮겨줄래?”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양지원에게 감동이라는 시선을 보냈다.양지원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양혁수가 양지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양시연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손의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갑자기 웬 케이크예요?”“친구가 선물한 건데 먹어봤더니 맛이 좋더라고.”“그래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양시연의 말투가 아주 딱딱했다. 아까 양혁수가 얼굴을 만지려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연정훈은 몰래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양시연의 태도에 또 자신이 없어졌다.차마 양시연에게 양혁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수 없어 자신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