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혼인 신고?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돌아가서 고민해 볼게요. 정해진 대로 알려줄게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대한 빨리 알려줘.”양시연이 입을 삐죽였다.‘뭐가 그렇게 급해?’양시연은 연정훈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양손으로 반듯하게 운전대를 잡았다.이에 연정훈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뒤로 물러서서 떠나는 양시연을 지켜봤다.양시연은 덜컥 혼사를 결정해 버렸고 미처 양지원에게 입장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소식은 날개를 타고 온 세상에 퍼져버렸다.인터참의 사람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진작 소식을 전해 들었다.집으로 끊이지 않는 전화가 걸려 왔고 저녁 늦게 방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 양시연은 그제야 결혼을 실감했다.이튿날, 연정훈은 사람을 시켜 여러 웨딩 디자인을 양시연의 사무실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가문 가족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늦은 시간, 양시연은 인터참에서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잠시 양혁수를 만나기로 했다.양시연은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양혁수는 집 문밖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막 도착한 거야?”“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어?”양혁수가 비꼬듯 말했다.이에 양시연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양혁수는 바로 걸음을 옮겨 양시연의 좌수석에 올라탔다.양시연은 직접 양혁수에게 끝을 전해야 했다.차창이 모두 닫힌 차 안, 두 사람만 남겨진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았다.“왜 갑자기 결혼하는 거야?”양혁수가 무표정으로 물었다.잠시 고민하던 양시연이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시기도 적당하고 상황이 다 알맞게 돌아가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어.”양혁수는 덤덤하게 말을 꺼내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그 사람 아직도 사랑하는 거지?”답이
“내가 성을 바꿀게. 그러니까 나랑 살자.”양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양시연은 양혁수가 행여나 이러한 말을 꺼낼까 늘 조마조마했다. 양시연은 결코 양혁수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혁수가 말을 꺼낸 이상 이젠 맺음을 제대로 해야 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넌 영원히 양혁수이고 성은 바꿀 수 없어.”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차창을 내렸다.“네가 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난 널 오빠라고 생각하고 따르는걸.”양혁수는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희망마저 사라져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는 양혁수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어버렸다.말을 꺼낸 이상 양혁수는 끝장을 보고 싶었다.그래서 양시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지금껏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에든베타에서 나한테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 있어?”양시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난 하루빨리 널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우린 매일매일 꼭 붙어 지냈는데 정말 단 한 번도...”그 말을 하는 양혁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인상을 찌푸린 양혁수는 북받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이렇게 힘들어하는 양혁수를 보며 양시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양혁수에게 너무 많은 걸 빚진 것 같았다.그 시절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양혁수와 잘 어울려 지냈다.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도 꼽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마음이 흔들렸다라... 두 사람은 늘 타이밍이 엇갈린 것 같았다.양혁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간에도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연정훈뿐이었다.그러다가 몰랐던 비밀이 드러나고 양시연은 양혁수를 집으로 돌려보내기에 급급했다. 이미 양시연에게 있어 양혁수는 가족과 다름이 없었고 양혁수가 소현정을 떠나보낸 뒤에는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그런데 그 뒤로 양혁수는 양시연에게서 사라졌다.양혁수를 향한 마음
양시연의 말에 양혁수가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양시연을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손을 놓지 못했다.연정훈이 차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의 양혁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양혁수가 차에서 내려 연정훈과 다툼이라도 벌릴까 걱정이 되었다.양시연도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연정훈에게 다가가려던 양혁수를 불러세웠다.양혁수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했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연정훈의 손에는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처럼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양시연에게 건넸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었고 누구도 먼저 굽히려 하지 않았다.그때.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양지원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차에서 내려 기묘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다들 무슨 기력으로 이렇게 서 있는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양시연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양혁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혁수야, 엄마를 도와 트렁크 물건 좀 옮겨줄래?”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양지원에게 감동이라는 시선을 보냈다.양지원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양혁수가 양지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양시연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손의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갑자기 웬 케이크예요?”“친구가 선물한 건데 먹어봤더니 맛이 좋더라고.”“그래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양시연의 말투가 아주 딱딱했다. 아까 양혁수가 얼굴을 만지려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연정훈은 몰래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양시연의 태도에 또 자신이 없어졌다.차마 양시연에게 양혁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수 없어 자신
양시연이 거실에 들어섰다. 양혁수는 아마 양지원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것 같았다.다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눕고 나니 연정훈이 사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작게 한입 베어 무니 다른 케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그래서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양지원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방을 나서니 아래층에 앉아 있는 양혁수가 보였다. 양혁수는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양시연은 빠르게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손에 쥔 케이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양시연 고민 끝에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소파에 앉은 양시연은 연정훈이 물어본 ‘혼인 신고’가 떠올랐다.사실 양시연은 겁이 났다. 이렇게 섣부르게 혼인 신고를 하는 건 양시연의 계획을 벗어났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저예요. 아가씨.”집사였다.양시연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세요?”“혹시 잠시 후 데이트하러 가실 건가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아니요.”잠시 뜸을 들인 집사가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집 밖을 지키고 있어요.”양시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테이블 앞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양씨 저택 카메라 시스템을 클릭했다. 정문의 카메라를 확대해 보니 연정훈의 차량이 여전히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아래층에는 양혁수가 버티고 있고 집밖에는 연정훈이 지키고 있었다.이런 쪽으로는 참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양시연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카메라로 본 연정훈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번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양시연도 핸드폰을 꺼내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역시 1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그러다가 연정훈은 핸드폰을 좌수석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혼사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양시연이 청혼에 응한 이튿날, 두 사람이 먼 세운에서 경인으로 돌아왔다.그날 아침, 부승원은 바삐 업무를 처리하는데 비서가 회의실로 부승원을 찾아왔다.“부승원 변호사님, 연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무슨 일이죠?”“아마도... 청첩장 때문인 것 같아요!”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이가 없네.’‘하루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글로벌 그룹 대표가 한가하게 청첩장이나 돌리고 있다니.’‘잠깐만.’부승원이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연정훈이 보였다. 척 보아도 연정훈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결혼 확답을 받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청첩장이 나왔어?”부승원의 물음에 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놨다.“아니. 지금 너한테 주는 건 샘플이야.”아직 샘플에 불과했지만 충분히 정교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청첩장은 총 두 장.다른 한 장은 부승희의 것으로 생각했지만 연정훈은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그 한 장은 반우희 씨 몫이야. 네가 대신 전해줘.”“...”부승원은 그 청첩장을 연정훈의 앞으로 돌려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전해. 양시연 씨를 향한 진심을 직접 보여주라고.”연정훈은 그런 농담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난 널 위해 그러는 거야.”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부승원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너나 양시연 씨한테 잘해. 네 연애사를 직접 지켜본 사람으로서 넌 누굴 이어줄 자격 없어.”“...”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부승원이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회신 테크에서 소송을 제기했어. 그렇게 큰 손실이 생겼으니 끝까지 할 생각인가 봐.”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네가 있으니,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걸.”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전 여친에게 무한한 대시를 하다가 몸값이 반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는데도 이렇게 태평하다니.연정훈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정인 그룹.연정훈이 지분을 양도한다는 소문이 이미 업계에 돌고 있었다. 여러 주주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지만 비서들이 모두 막아섰고 더 이상 막아서는 건 무리였다.연정훈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주주총회에서 직접 발표할 겁니다.”비서들은 할 말이 없었다.점심시간, 민수희가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연정훈과 마침 엇갈려 만나지 못했다.연정훈이 자리에 돌아오자 비서가 USB 하나를 넘겼다.“여사님께서 USB를 꼭 확인하고 다시 결정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연정훈은 덤덤하게 USB를 바라보며 말했다.“알겠으니까 이만 나가보세요.”“네.”비서가 떠나고 연정훈은 USB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회사를 양시연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했고 이 USB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정인 그룹을 처리하려면 많은 방법이 있지만 이렇게 양씨 가문에 넘길 필요는 없어!”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처리하고 싶어 양시연에게 양도하는 게 아니었다.그냥 주고 싶어 그렇게 결정했을 뿐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버렸고 정인 그룹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면 그 가치가 충분했다.연정훈은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양시연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 준비했다.결혼하기로 했으니 빨리 관계 회복을 해야 했다.그때.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를 확인한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할머니.”민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보낸 건 확인했느냐?”“네.”“...”“확인했지만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민수희는 바로 눈치를 챘다.“아직 확인하지 않았구나.”연정훈은 익숙하게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정인 그룹은 제 소유이고 어떻게 처리할지는 저에게 달렸어요. 불만이 있으시면 직접 빼앗아 가세요. 그러면 저도 포기할 테니까요.”민수희는 너무 화가 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민수희는 애써 호흡을 고르게 했다.“정훈아, USB 확인해 봐
저녁에 양혁수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양시연에게 불평했다.“너 왜 이렇게 매운 양파를 샀어? 너무 매워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야!”양시연은 정원에서 강아지를 목욕시키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바보야. 양파 자를 땐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면 안 맵다고!”“왜?”“그건...”“뭐 복어 흉내 내면 양파에 면역이라도 생기냐?”“...”아침이었다.양혁수는 티셔츠를 입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양시연은 작은 가방을 메고 손에 장난감 하나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야, 양혁수! 이 인형 망가진 것 같아. 소리가 안 나!”“그거 만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고장 냈냐?”“원래 고장 난 거였겠지! 우리가 사기당한 거야.”양혁수는 들고 있던 채소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거기 둬. 좀 있다가 내가 봐줄게.”“응. 알겠어.”아침 다른 시간대에 양혁수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방에서 나왔다.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옷 입어!”“뭘 호들갑이야. 너한테 복지를 주는 거야.”“아...”양혁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안목 없긴.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 딸이라고 하지 마!”...늦은 밤이었다.둘은 마당에서 각자의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과일과 간식이 놓여 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너 언제 집에 들어올 거야?”양혁수는 코코넛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내가 집에 들어가면 너랑 재산 분쟁 싸움 할까 봐 두렵지 않아?”양시연은 숨을 고르고 진지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와. 난 재산 안 가질 거야. 다 너 줄게.”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다시 다짐했다.“정말이야. 나 재산 가지고 너랑 싸우지도 않을 거야.”양혁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됐어.”“왜?”“그게 더 위험한 거거든.”양시연은 놀라며 되물었다.“위험해?”양혁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재산을 차지하면 할아
양시연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요즘 양시연은 양혁수를 마주칠 때마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오후에 두 명의 국제적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양시연에게 연락했다. 연정훈은 이미 예약하였고 그녀의 취향을 알고 싶어 했다.그러나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민수희가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연정훈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연정훈의 할머니 민수희가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가 결혼을 고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황을 피하고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연정훈이 짧게 응답했다.양시연은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쳇. 혹시 할머니에게 혼났나?’양시연의 부유한 남편감이 사라질지도 있다.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따르며 오후에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들이 물어본 사항을 꺼냈다.잠시 침묵이 지나고 연정훈이 물었다.“어떤 스타일이 좋아?”양시연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간단한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맞춤 없이 해도 괜찮아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반대편 사무실에서 연정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차분한 표정으로 양시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결혼은 연정훈이 억지로 성사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할 만했다.그러나 방금 본 영상이 그의 마음속 질투심을 자극하며 그것을 억누를 수 없게 만들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고르면 돼.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도 괜찮아. 드레스는 디자이너들이 야근하며 완성할 거야.”양시연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게 싫었다.게다가 양시연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듣기로는 정훈 씨 할머니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 하던데요.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