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양혁수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양시연에게 불평했다.“너 왜 이렇게 매운 양파를 샀어? 너무 매워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야!”양시연은 정원에서 강아지를 목욕시키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바보야. 양파 자를 땐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면 안 맵다고!”“왜?”“그건...”“뭐 복어 흉내 내면 양파에 면역이라도 생기냐?”“...”아침이었다.양혁수는 티셔츠를 입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양시연은 작은 가방을 메고 손에 장난감 하나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야, 양혁수! 이 인형 망가진 것 같아. 소리가 안 나!”“그거 만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고장 냈냐?”“원래 고장 난 거였겠지! 우리가 사기당한 거야.”양혁수는 들고 있던 채소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거기 둬. 좀 있다가 내가 봐줄게.”“응. 알겠어.”아침 다른 시간대에 양혁수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방에서 나왔다.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옷 입어!”“뭘 호들갑이야. 너한테 복지를 주는 거야.”“아...”양혁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안목 없긴.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 딸이라고 하지 마!”...늦은 밤이었다.둘은 마당에서 각자의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과일과 간식이 놓여 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너 언제 집에 들어올 거야?”양혁수는 코코넛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내가 집에 들어가면 너랑 재산 분쟁 싸움 할까 봐 두렵지 않아?”양시연은 숨을 고르고 진지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와. 난 재산 안 가질 거야. 다 너 줄게.”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다시 다짐했다.“정말이야. 나 재산 가지고 너랑 싸우지도 않을 거야.”양혁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됐어.”“왜?”“그게 더 위험한 거거든.”양시연은 놀라며 되물었다.“위험해?”양혁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재산을 차지하면 할아
양시연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요즘 양시연은 양혁수를 마주칠 때마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오후에 두 명의 국제적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양시연에게 연락했다. 연정훈은 이미 예약하였고 그녀의 취향을 알고 싶어 했다.그러나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민수희가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연정훈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연정훈의 할머니 민수희가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가 결혼을 고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황을 피하고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연정훈이 짧게 응답했다.양시연은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쳇. 혹시 할머니에게 혼났나?’양시연의 부유한 남편감이 사라질지도 있다.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따르며 오후에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들이 물어본 사항을 꺼냈다.잠시 침묵이 지나고 연정훈이 물었다.“어떤 스타일이 좋아?”양시연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간단한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맞춤 없이 해도 괜찮아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반대편 사무실에서 연정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차분한 표정으로 양시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결혼은 연정훈이 억지로 성사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할 만했다.그러나 방금 본 영상이 그의 마음속 질투심을 자극하며 그것을 억누를 수 없게 만들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고르면 돼.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도 괜찮아. 드레스는 디자이너들이 야근하며 완성할 거야.”양시연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게 싫었다.게다가 양시연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듣기로는 정훈 씨 할머니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 하던데요.
깊은 밤이었다.양민아는 한 남자를 대문 밖까지 배웅한 뒤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욕실로 향해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도 내내 혐오감이 가슴 속 깊이 치밀었다.몇 년 전, 양지원이 그녀를 양씨 가문에서 쫓아내며 자유까지 빼앗았다. 양민아는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몇십 살이나 많은 정호덕과 관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그 관계는 그녀에게 더더욱 구역질 나는 족쇄가 되어 갔다.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양시연의 성공과 양시연이 연정훈과 결혼하는 것도 그냥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었다.양민아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깊은 좌절 속에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와인 한 잔이라도 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달래려 했다.쾅!갑자기 저택의 문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놀란 양민아는 몸을 움츠린 채 경계심을 품고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긴장이 조금 풀린 그녀는 숨을 고르며 거실로 돌아왔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위층에서 느껴지는 낯선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서 몸을 돌리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그녀의 등을 강타했고 양민아는 앞으로 쓰러지며 앞에 놓인 화병 위로 넘어졌다.산산조각 난 화병의 파편 위에서 몸부림치던 그녀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지만, 날카로운 조각들이 손끝을 찔러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파편 위에 강제로 얼굴을 눌렀다.“으아!”비명을 지르는 사이 남자는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그녀를 거칠게 내던졌고 남자는 다시 양민아 앞에 서 있었다.바닥에 나뒹군 그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은 얼굴에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이었다.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손가락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그러
금요일이 가까워지며 양시연의 초조함은 점점 더 커졌다.결혼을 앞둔 불안감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짐이었다.몇 번이나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하지 말자고 말할지 고민했다.막상 휴대폰을 들어 올릴 때마다 생각을 접고 말았다. 양시연은 원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번 결혼을 위해 연정훈이 보여준 노력과 성의는 분명 눈에 띄었다. 그는 양시연 없이는 안 된다는 태도로 마음을 다해 설득했고 여러 가지 제안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결혼을 취소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도 비도덕적이라고 느껴졌다.‘아. 답답해.’양시연은 목요일 오후 사무실을 서성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때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보고했다.“양 대표님, 어떤 남성분이 대표님을 만나 뵙겠다고 하십니다.”“누구신데요?”“본인을 연 할머니의 비서라고 소개했습니다.”양시연은 잠시 멈춰 섰다.역시나 이 결혼이 순조롭게 진행될 리 없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민수희가 연정훈을 설득하지 못하자 결국 양시연을 직접 상대하려는 모양이었다.양시연이 민수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은 표세연보다도 더 안 좋았다. 특히 완벽하게 손질된 짧은 웨이브 머리와 값비싼 은테 안경이 더해진 그녀의 모습은 차갑고 위압적이었다. ‘쳇.’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연정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정훈 씨 할머니께서 날 찾아오셨어요.]하지만 연정훈은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마 바쁜 듯했다.그 사이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분이 계속 재촉하고 계십니다.”양시연의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역시, 권력자 곁의 사람들은 대부분 거만한 법이다.양시연은 평소 권력을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연정훈의 체면을 위해 민수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만만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차를 대접하세요. 그리고 내가 바쁘니 기다리라고 전하세요.”비서는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던 양시연에게서는 보기 드문 반응이
“민수희 씨는 네 부모가 누구인지 반드시 파헤치려고 할 거야.”양시연의 머릿속에 양지원의 예리한 예측이 떠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 지으며 양지원의 통찰력에 감탄했다.양시연은 민수희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았다.“연정훈 씨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나요?”“연정훈이 말한 건 연정훈의 일이고 나는 네가 하는 얘기를 직접 듣고 싶다.”“이미 알고 계실 텐데 왜 굳이 물으시는 거죠?”민수희의 눈에 예리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양시연의 젊고 당당한 모습을 바라보며 몇 년 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녀는 민수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응했다.“다 알고 있는 얘기인데 왜 굳이 돌려 말하니?”그녀는 양시연에게 되물었다.양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께서 저에게 에둘러 말씀하시니 저도 본보기 삼아 따라 한 거예요.”민수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곧 다시 차갑고 권위적인 태도를 되찾으며 말했다.“듣자 하니 네가 연정훈에게 정인 그룹을 요구했다더구나?”양시연은 천천히 케이크를 떠먹으며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민수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연정훈의 결혼 소식을 들은 뒤 정인 그룹의 주인이 바뀔 가능성에 대한 소문으로 밤잠을 설친 지 오래였다.그녀는 신분조차 명확하지 않은 양시연이 연씨 가문의 역사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한 척하며 양시연의 대답을 기다렸다.마침내 양시연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제가 요구했어요.”민수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얼굴을 굳혔다.조심스레 생각을 정리한 뒤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현재 신분으로 연정훈과 결혼한다는 건 이미 억지로 맞춘 퍼즐 같아. 연정훈이 혼전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받아들일 수 있다. 결혼 후 너희가 부부로서 함께 노력하는 건 나도 인정할 수 있겠지. 하지만 정인 그룹을 네가 단순히 가져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양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차분하게 말했다.“듣자 하니 제 어머니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으신 것 같네요.”민수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양시연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조롱과 경멸로 가득했다.“네 어머니의 행동은 대담하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그리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겠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너의 존재가 생길 일도 없었겠지.”민수희는 과거 연정훈이 양민아와 결혼하기를 바랐다.그 결혼이야말로 연씨 가문에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훈이 양시연을 데려왔고 그로 인해 가문이 큰 손해를 보게 될 상황이니 양시연 모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민수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은 너와 달라. 연정훈은 연씨 가문의 두 세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워낸 인재야. 하지만 너와 어울리면서 점점 충동적인 실수만 반복하더군. 어쩌면 너는 그런 연정훈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한마디 하자면 모든 일에는 자중하는...”쾅!양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놨다.민수희는 놀라 눈이 커진 채로 말을 멈췄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갑게 말했다.“보아하니 할머니 정말 나이가 드셨군요. 3년 전만 해도 품위를 지키시는 척이라도 하셨는데 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경솔해지셨나요?”민수희가 입을 열려는 찰나 양시연이 말을 이어갔다.“사람은 나이가 들면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죠. 특히 평생 떠받들어져 온 사람은 말이에요. 할머니도 그 꿈속에서 아직 못 깨신 것 같네요. 혹시 제가 연정훈 씨에게 매달려 결혼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할머니,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제가 양씨라는 성을 가지고 어떤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 같으세요?”“너...!”민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평생 후배에게 이렇게 대놓고 반박당한 적이 없는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양시연은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민수희는 속으로 만족스러워하며 자신만만해하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데려다줄게.”???민수희는 연정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화난 기색이 있나 찾아보려 했지만, 흔적조차 없었다.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연정훈...”“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민수희에게 말하며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했다.민수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어쩔 수 없이 민수희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정훈이 지금 당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단지 체면을 지키기 위한 행동일 뿐 곧 돌아와 자신에게 무언가 설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결국 민수희는 두 눈으로 연정훈이 양시연을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문밖으로 나선 양시연은 앞장서 걸었고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속으로 난감함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너무 어색해.’그녀는 뭔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연정훈의 표정이 감정 없이 차분하게 비어 있어 더욱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그 표정이 양시연에게 눈치를 주는 느낌은 아니었다.입가에 맴돌던 말은 끝내 삼켜지고 말았다.왜냐하면 굳이 변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애초부터 연정훈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고 정인 그룹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양시연이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자신의 차를 몰고 왔지만 결국 연정훈의 차에 올라탔다.연정훈이 직접 운전하며 데려다주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몇 번 그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그의 눈 아래엔 옅은 다크서클이 드러났고 분명 요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요즘 많이 바빠요?”“...응.”연정훈의 반응을 보고 양시연은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듣고
민수희는 가슴이 답답하고 통증을 느꼈다. 연정훈이 이렇게 변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가가 붉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시 너는 아직 어렸고 충동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원한을 샀어. 그 조작된 차 사고도 너를 노린 것이었고 결국 너희 삼촌이 대신 희생됐어. 그런데 오늘 너는 이렇게까지 나를 화나게 하다니!”연정훈은 차분히 대답했다.“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마치 그날 제가 사고를 당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들리네요.”민수희는 말문이 막혔다.사실 민수희의 작은 아들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존재였다. 연서명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오랫동안 연정훈을 원망했다.연정훈은 죄책감 때문에 수년간 민수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다.민수희는 이 상황이 자신이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그런데 지금 양시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민수희의 속은 뒤집혔다. 만약 아무런 변수가 없었다면 정인 그룹은 민수희의 작은아들에게 남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연서명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예비 신부에게 정인 그룹을 예물로 준다고 해도 민수희는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하필이면...“정인 그룹은 너희 삼촌의 유산이야!”연정훈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삼촌이 정인 그룹을 맡기 전에는 그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실질적인 권한은 연씨 가문의 완전한 소유가 아니었어요. 삼촌이 회사를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났고 결국 제가 회사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니었으면 정인 그룹은 연씨라는 이름을 달지 못했을 거예요. 그걸 유산이라고 부르는 건 좀 억지 아닌가요?”민수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민수희는 서글프고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할아버지는 년세가 있으시고 네 아버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더 큰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너도 다 컸다는 뜻이구나.”연정훈은 냉정하게 대답했다.“그걸 아셨다면 세운에서 편히 노년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민수희는 어이없었다.“...”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