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연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차분하게 말했다.“듣자 하니 제 어머니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으신 것 같네요.”민수희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양시연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조롱과 경멸로 가득했다.“네 어머니의 행동은 대담하다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그리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겠구나.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너의 존재가 생길 일도 없었겠지.”민수희는 과거 연정훈이 양민아와 결혼하기를 바랐다.그 결혼이야말로 연씨 가문에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훈이 양시연을 데려왔고 그로 인해 가문이 큰 손해를 보게 될 상황이니 양시연 모녀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민수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연정훈은 너와 달라. 연정훈은 연씨 가문의 두 세대가 온 정성을 다해 키워낸 인재야. 하지만 너와 어울리면서 점점 충동적인 실수만 반복하더군. 어쩌면 너는 그런 연정훈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한마디 하자면 모든 일에는 자중하는...”쾅!양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놨다.민수희는 놀라 눈이 커진 채로 말을 멈췄다.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갑게 말했다.“보아하니 할머니 정말 나이가 드셨군요. 3년 전만 해도 품위를 지키시는 척이라도 하셨는데 오늘은 어쩌다 이렇게 경솔해지셨나요?”민수희가 입을 열려는 찰나 양시연이 말을 이어갔다.“사람은 나이가 들면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죠. 특히 평생 떠받들어져 온 사람은 말이에요. 할머니도 그 꿈속에서 아직 못 깨신 것 같네요. 혹시 제가 연정훈 씨에게 매달려 결혼해달라고 애원이라도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할머니,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제가 양씨라는 성을 가지고 어떤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것 같으세요?”“너...!”민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평생 후배에게 이렇게 대놓고 반박당한 적이 없는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양시연은 물 한 모금을 천천히 마시며
민수희는 속으로 만족스러워하며 자신만만해하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연정훈이 양시연에게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데려다줄게.”???민수희는 연정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화난 기색이 있나 찾아보려 했지만, 흔적조차 없었다.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연정훈...”“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민수희에게 말하며 깔끔하게 자리를 정리했다.민수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어쩔 수 없이 민수희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정훈이 지금 당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단지 체면을 지키기 위한 행동일 뿐 곧 돌아와 자신에게 무언가 설명해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결국 민수희는 두 눈으로 연정훈이 양시연을 배웅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문밖으로 나선 양시연은 앞장서 걸었고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속으로 난감함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너무 어색해.’그녀는 뭔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연정훈의 표정이 감정 없이 차분하게 비어 있어 더욱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그 표정이 양시연에게 눈치를 주는 느낌은 아니었다.입가에 맴돌던 말은 끝내 삼켜지고 말았다.왜냐하면 굳이 변명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애초부터 연정훈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고 정인 그룹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솔직히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다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양시연이 연정훈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자신의 차를 몰고 왔지만 결국 연정훈의 차에 올라탔다.연정훈이 직접 운전하며 데려다주는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양시연은 몇 번 그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그의 눈 아래엔 옅은 다크서클이 드러났고 분명 요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요즘 많이 바빠요?”“...응.”연정훈의 반응을 보고 양시연은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듣고
민수희는 가슴이 답답하고 통증을 느꼈다. 연정훈이 이렇게 변한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가가 붉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시 너는 아직 어렸고 충동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원한을 샀어. 그 조작된 차 사고도 너를 노린 것이었고 결국 너희 삼촌이 대신 희생됐어. 그런데 오늘 너는 이렇게까지 나를 화나게 하다니!”연정훈은 차분히 대답했다.“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마치 그날 제가 사고를 당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들리네요.”민수희는 말문이 막혔다.사실 민수희의 작은 아들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존재였다. 연서명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오랫동안 연정훈을 원망했다.연정훈은 죄책감 때문에 수년간 민수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다.민수희는 이 상황이 자신이 죽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그런데 지금 양시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민수희의 속은 뒤집혔다. 만약 아무런 변수가 없었다면 정인 그룹은 민수희의 작은아들에게 남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연서명이 살아 있었다면 그가 예비 신부에게 정인 그룹을 예물로 준다고 해도 민수희는 한 마디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하필이면...“정인 그룹은 너희 삼촌의 유산이야!”연정훈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삼촌이 정인 그룹을 맡기 전에는 그 내부 구조가 복잡해서 실질적인 권한은 연씨 가문의 완전한 소유가 아니었어요. 삼촌이 회사를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고가 일어났고 결국 제가 회사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아니었으면 정인 그룹은 연씨라는 이름을 달지 못했을 거예요. 그걸 유산이라고 부르는 건 좀 억지 아닌가요?”민수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잠시 후 민수희는 서글프고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할아버지는 년세가 있으시고 네 아버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더 큰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너도 다 컸다는 뜻이구나.”연정훈은 냉정하게 대답했다.“그걸 아셨다면 세운에서 편히 노년을 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민수희는 어이없었다.“...”
“보세요. 다 당신 어머니가 일으킨 소란이잖아요!”표세연은 화난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와 연재혁의 어깨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재혁은 골치가 아팠다. 아들은 엉망이고 아내는 요즘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그는 몸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연정훈도 이제 서른이 넘었는데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다니. 당신이 좀 훈계라도 해야죠!”“훈계요? 훈계할 게 뭐가 있어요? 연정훈이 지금까지 고생한 게 모자라요? 밖에서 뼈 빠지게 일만 했잖아요. 전에 양시연 출신이 별로라고 나도 당신처럼 연정훈이 발목 잡힐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 양시연은 양씨 가문의 딸이 되었잖아요. 게다가 우리 가문과 양씨 가문은 오래된 교제가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연재혁은 반박하지 못했다.사실...연재혁도 이 결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래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정훈이 충동적이지 않았다면 양시연이 이렇게 쉽게 수락했겠어요?”연재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상식적으로는 양시연 쪽에서도 이미 결혼을 수락했을 텐데 왜 연정훈이 저런 모습이지?”표세연도 같이 한숨을 쉬었다.짜증이 몰려왔다.표세연은 조만간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 한 번 더 점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은 방 안에 틀어박혀 엎드린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연정훈이 무슨 반응을 보일 만도 한데 오늘은 조용했다.‘쯧. 내일 정말 구청으로 가야 하나?’위층에서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릉 쾅쾅, 양혁수가 내는 소음이었다.양혁수는 그날 밤 그녀를 진지하게 붙잡으려 했던 행동을 제외하면 다음 날부터는 다시 제멋대로인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가 혼인 신고를 하겠다고 하자 양혁수는 온갖 말썽을 부리며 떠들썩하게 굴었다.양홍두는 마치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집 안팎을 오가며 몇 번이나 그녀와 마주쳤다. 양홍두는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삼키는
양시연이 차창을 두드렸다.유리가 내려가자 아니나 다를까 연정훈이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연정훈은 운전석에 기대어 앉아 전날보다 한결 나아 보이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처음 결혼하는 거라 긴장돼서.”양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경험 없을 수도 있죠. 이해해요.”둘은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제의 어색함을 덜어냈다.연정훈이 말했다.“차에 타. 아침 먹으러 가자.”양시연은 차를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뭐 먹고 싶어요?”“뭐 먹고 싶어?”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멈칫했다.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긴 숨을 내쉬며 갑자기 밀려온 긴장감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닭고기 만둣국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도로가에 작은 가게가 있는데 맛이 꽤 좋아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좋아.”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양시연은 문득 차 뒷좌석을 흘끗 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조용했고 둘은 아침 식당으로 향했다.아직 붐비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빈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며 직접 주문하러 갔다.“제 가방 좀 봐줘요.”그녀가 당부하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의 가방을 흘끗 쳐다봤다.양시연은 안심하고 주문하러 갔다.연정훈에게 대접하는 의미에서 또 오늘 같은 중요한 날이니 통 크게 닭고기 일 인분을 더 추가하여 주문했다.테이블에 앉고 나니 주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여름 아침의 작은 가게였고 주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치마를 입고 있던 양시연도 더운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정장 차림의 연정훈을 보니 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땀이 날 것 같았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만둣국을 포장해 가기로 결심했다.연정훈은 그녀의 결정을 따르며 포장된 만둣국을 받아 차에서 막기로 했다.뚜껑을 열자 닭고기가 듬
연정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오늘 정훈 씨 말을 제법 예쁘게 하네.’“예쁘네요. 고마워요.”양시연은 진지하게 말했다.연정훈은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걸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뒤에 드레스도 있어. 내가...”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비서가 골랐어.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양시연은 더욱 놀랐다.“옷도 준비했어요?”“응. 그냥 준비한 거야.”양시연은 몸을 숙여 뒤쪽에 있던 큰 상자를 끌어안아 열어 보았다.상자 안에는 연노란색 롱드레스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브랜드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뒷좌석에 놓인 정장을 흘깃 보았는데 같은 브랜드였다.그녀는 기억 났다. 얼마 전 부승희와 쇼핑하면서 VIP룸에서 이 두 벌을 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커플룩’이었다.그때 부승희가 옷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이 정장은 신사적이고 드레스는 우아해서 정말 잘 어울린다고 했다. 부승희의 남자친구에게는 잘 어울렸지만, 부승희는 우아한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며 포기했었다.그런데 연정훈이 먼저 이 옷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양시연을 흘끗 살폈다.“오늘 입은 옷도 예쁘네.”양시연이 말했다.“그냥 대충 입은 거예요.”사실 그녀는 옷장을 뒤적이며 한참 고민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연노랑색 롱드레스가 더 마음에 들었다.“앞쪽으로 차 좀 움직여 주세요. 드레스로 갈아입고 싶어요.”양시연의 말을 듣고 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렀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양시연은 상자를 꼭 안고 차가 움직이길 기다렸다.햇살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땅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차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문을 열고 내렸다.양시연은 뒷좌석으로 돌아갔다.차 문이 닫히자 이른 아침의 소음과 시장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차단됐다.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창문 필름 너머를
차 안에서 양시연은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며 움직였다.그녀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점검하고 옷매무새를 살피며 서류까지 확인했다.양시연은 긴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큰일일 줄은 지금 이 순간에서야 실감한 것이다.문밖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너 오늘 결혼하는 거야?’‘응? 뭐라고? 아! 결혼한다고!’‘으악 미쳐버릴 것 같아!’오늘은 양시연이 결혼하는 날이다.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쥐고 조용히 연정훈을 몇 번이나 흘깃 쳐다봤다.“우리 혹시 혼인 전 건강검진 안 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빠르게 한 번 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지난달에 했어.”“근데 나는...”“인터참 프로젝트 끝날 때 너희 회사에서 단체로 건강 검진했잖아.”그는 양시연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멈칫하더니 헛웃음을 지었다.“아. 맞네요. 하하.”그러고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서툰 핑계가 재미있다는 듯 편안히 등을 기대며 기다렸다.몇 초 후 양시연은 또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정훈 씨 할아버지가 우리가 결혼하는 거 반대 안 해요?”연정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는 양시연이 더 강력한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반대든 찬성이든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순 없어.”“그러는 거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먼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요?”“할아버지는 이미 준비하셨어. 오늘 저녁에 있을 우리의 혼인신고 축하 파티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셨거든.”“...네.”양시연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묘한 패배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마치 좋은 핑계라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마침 신호등에 걸려 연정훈이 차를 멈췄고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말해봐.’양시연은
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이 결혼을 망설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작은 위로나 배려를 보여주길 바랐다.연정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그의 손이 양시연의 손을 감싸는 순간 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손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고 본능적으로 손을 뺄지 고민했지만, 연정훈은 가볍고도 단단하게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심장이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연정훈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건조했다.그에 비해 양시연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며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놀리지 않고 손에 힘을 살짝 조절하며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양시연은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걸음은 느렸지만, 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속도에 자연스럽게 맞추었다.긴장이 잠시 풀리는 듯했지만, 혼인신고를 위해 문턱을 넘는 순간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그녀는 속으로 외쳤다.‘어떡해. 어떡해!’양시연은 속으로 긴장으로 가득했지만, 연정훈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어 미리 준비된 절차를 건너뛰었고 차분히 과정을 주도하며 완벽하게 진행해 나갔다.서류 확인하고 번호표를 뽑고, 사진 촬영까지 양시연은 마치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이끌려 다니는 기분이었다.그녀에게 이 모든 과정은 마치 형벌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사진 촬영 전 두 사람은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그제야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고개를 돌리니 연정훈이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요?”연정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너 계속 그렇게 수상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할 거야. 하필 결혼식 날에 경찰서를 가야 할지도 몰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는 더
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렸다.“주지혁이요?”연정훈은 몸을 바로 세우더니 본인이 직접 셔츠 자락을 정리했다. 그러다가 얼굴을 휙 가까이 가져다 대며 양시연의 표정을 살폈다.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왜 이래요!”그러자 연정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이 몸을 돌려서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뒤로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동안 양혁수한테 질투한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겠어.”양시연이 째려보며 말했다.“그걸 지금 안 거예요?”“양혁수는 그래도 명의상 네 오빠니까 너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무려 시연이 약혼자였던 사람이라고.”양시연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반쯤 돌려 연정훈의 두 볼을 쭉 잡아당겼다.“자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해봐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이젠 그 사람한테 아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으니 나도 안심이야.”꽤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도 웃음이 터졌다.농담을 마치고 양시연은 두 손을 연정훈의 목에 걸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이 정훈 씨 아래 직원이에요?”“그래. 내가 직속 상사야.”“그럼 꼭 조심해요.”양시연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주지혁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몇 년 전에 확실하게 알아차렸어요. 그 사람은 목적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정훈 씨가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주지혁이 태클을 걸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어요. 곁에 소인배를 둘 필요는 없으니 기회를 봐서 다른 팀으로 보내버려요. 괜히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게요.”본인을 걱정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이상한 만족감을 느꼈고 고개를 숙여 양시연의 입술에 뽀뽀했다.“내가 그 사람한테 잡아먹힐까 봐 걱정돼?”연정훈은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고 그 말투에서 주지혁을 가소롭게 여긴다는 게 느껴졌다.양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여전히 연정훈의 목에 손을 건 채로 말했다.“정훈 씨가 주지혁을 대처하는 건 아주 간
이튿날.새벽 종소리가 울리고 민수희의 발인 시간이 되었다.연정훈은 밤새 바삐 움직였고 양시연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발인 전 양시연이 위층으로 올라가 연호민의 아침을 차려주려는데 집사가 급히 달려오는 게 보였다.옆자리에 같이 있던 표세연이 물었다.“무슨 일이죠?”집사가 대답했다.“양원 그룹 조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러자 표세연이 갑자기 얼굴을 팍 찌푸리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왜 온 거래요?”“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 대표님의 정체를 몰래 추측했다.연정훈의 삼촌이 의문의 사고사를 당한 건 두 세력의 다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조재민의 가문은 바로 그해 연씨 가문의 경쟁 상대였고 조재민의 형이 사고의 주도자였다. 이 사건으로 바로 사형에 처하고 조씨 가문도 뿌리째 뽑혀 버렸으나 조재민은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 다른 친척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지금껏 양원 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며칠 뒤 연정훈도 양원 그룹에서 일을 시작할 걸 떠올리며 양시연은 조금 고민하다가 표세연을 다독이며 말했다.“제가 내려가 볼 게요.”양시연이 곁에 있으니 표세연은 한결 안심이 되었다.“그래. 네가 정훈이 좀 말려줘.”“네. 알겠어요.”양시연은 대답하고 홀로 향했다.조재민은 아주 미묘한 시간대에 방문했다. 발인 당일 추모하러 오다니 추모가 목적이 아니라 딴짓을 거려고 온 게 틀림없었다.양시연은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으나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조재민은 태연하게 인사를 올렸고 검은 정장을 입은 연정훈은 차가운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에 다가가 섰다.조재민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와 말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조재민은 연정훈을 바라보다가 양시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채로 끝말을 마쳤다.양시연은 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뒤뜰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조재민은 별다른 말 없이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그렇게 작은 헤프닝이 끝나고
부승원은 새 방으로 잡고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샤워를 마치니 더위가 가셨지만, 짜증 나는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방금 샤워하는 내내 반우희 생각만 해 오히려 더 짜증이 치솟았다.그리고 몇 년 전 어이가 없던 그 사건이 떠올랐다.그때의 반우희는 고작 19살이었는데 승주 사건으로 처음 반우희와 엮기게 되었다. 그 일을 뒤로 하고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또 반우희를 만나게 되었다.지금 생각해도 막 스무 살이 되던 녀석이 왜 그렇게 겁이 없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부승원은 미니 바 앞으로 걸어가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때 그 일을 다시 차근차근 떠올렸다.그날 부승원은 약물 때문에 이성을 잃었고 처음 몇 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아주 고분고분 말을 따랐던 것만 기억이 났다.그렇게 새벽이 되고 부승원의 이성은 차차 돌아왔지만 품 안의 사람을 확인하고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뭐가 쓰인 것처럼 그 사람을 탐하고 또 탐했으며 가시지 않은 술기운을 핑계로 밤새 멈추지 않았다.상대는 온밤 시달리다가 지쳐 반항을 멈췄다. 그러다가 힘을 주어 부승원의 어깨를 밀어내며 힘들다고 칭얼거리고 점점 소리를 높였다.부승원은 바로 그 입술에 키스하며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고 품 안으로 가뒀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더 저돌적으로 몰아붙였다.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과정도, 결말도 참 어이가 없었다.반우희가 약을 먹는 걸 확인하지 않아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갈 뻔했다.그리고 더 말이 되지 않는 건 부승원이 이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쾅.부승원은 컵을 세게 내려놓고 굳은 얼굴로 소파로 걸어갔다.설마 자신도 연정훈처럼 저급 취미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불쌍한 처지에 놓인 예쁜 여자를 보면 마음이 동해 구해준다는 허울로 탐하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방안은 아주 조용했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이런저런 생각으로 자기합리화하려고 했으나 자
‘짜증 나!’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놓고 멍청하다고 말하자 반우희는 잠이 확 깨었다. 그래서 허리에 양손을 척 올리고 반격을 시도했다.“그래요. 난 멍청해요! 그래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부승원은 일말의 타격도 없었다.“네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의무는 없어.”“나도 내가 똑똑한 건 아니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변호사님 팀에도 자주 실수하는 인턴 직원들이 있잖아요. 그래도 한 식구로 인정해 주셨으면서!”“그 애들은 인서울 법대 출신이야. 잠재력이 숨겨져 있는데 넌 내세울 게 뭐가 있어?”반우희는 말문이 막혔다.얼굴은 점점 뜨거워지고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그러나 부승원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네가 양시연 씨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내가 편의를 봐줘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결과를 넌 왜 노력도 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는 거지?”반우희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승원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 세상에 인맥으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 혼자도 아닌데 왜 나만 뭐라 해요?”“그리고 나도 내 실력으로 쌓은 인맥이지. 아무렇게나 얻은 게 아니라고요!”반우희가 꽤 진심으로 나오자 부승원은 그날 사무실에서 반우희가 뱉았던 말이 떠올랐다.그래서 얼굴을 더 굳히며 말했다.“넌 평생 그런 식으로 살아. 내 팀은 쓸모없는 사람 필요 없으니 정인 그룹 들어가고 싶으면 양시연 씨한테 직접 부탁해!”그리고 몸을 휙 돌려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반우희는 살살 눈치를 살폈는데 이번만큼은 부승원이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문고리가 돌려지고 반우희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당황한 나머지 반우희는 한 손으로 외투를 쥐고 있던 부승원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셔츠 앞자락에 손을 올렸다.“변호사님!”자기 행동이 너무 빨랐다는 걸 인지한 부승원은 방금 부딪혔던 걸 떠올리며 손의 힘을 조금 풀었다.고개를 숙이니 자기 셔츠 자락을 잡은 반우희가 고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뭐예요? 내가 여기 참석한 거로 부족하대요?”부승희의 말에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무료해진 부승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지 벌써 얼굴 못 본 지도 며칠 됐어요.”한참 열애 중인 젊은 커플이 한 도시에서 지내면서 며칠 동안 만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양시연은 입을 열려다가 연정훈 옆자리의 이승우를 슬쩍 훑었다.“승우 씨랑 같이 온 거예요?”양시연은 가볍게 물었고 부승희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네. 우리 오빠랑 약속이 있더라고요.”대화하는 사이 반우희는 벌써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더 먹을래요?”양시연의 질문에 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국수가 입맛에 맞네요.”그 뜻인즉 한 그릇 더 원한다는 의미였다.그러자 양시연과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부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우희의 배를 쓰다듬었다.“배에 거지가 들었나? 분명히 비행기 기내식을 먹었을 텐데 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부승희는 배를 조물딱거리다가 또 허리를 쓰다듬었다.간지러워진 반우희는 부승희의 손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승희 씨, 날 건드리지 마요. 간지러워요. 아!”반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양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부승희는 손을 거두더니 반우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우리 우희 씨 속이 꽉 찬 여자네요.”반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가 되어버렸다.‘뭐라는 거예요!’소란에 부승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외침이 반우희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아차린 부승원이 차갑게 말했다.“바로 앞이 장례식장인데 이렇게 떠들썩하게 굴면 어떡해!”그러자 반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부승원을 무시한 채로 몰래 부승희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승희에게 꼭 붙은 반우희는 부승원을 등진 채로 낮게 속삭였다.“변호사님은 하나도 승희 씨 오빠 같지 않아요.”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어디가 다른데요?”“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
양시연은 민지연 같은 철없는 아이에게 더 이상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민수희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연호민의 아내였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평범한 이들의 장례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정이 마련되자마자 조문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가 제사를 마치자 곧이어 양지원도 도착했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해 뒤쪽 휴게실로 안내했다.두 사람 모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고 양석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에 집중해.”연정훈은 떠났고 양시연은 남아 부모님께 차를 따라주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양지원은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그만하고 가서 연정훈 도와줘. 지금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잖아.”양시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뛰어나갔다.그녀가 떠난 뒤 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급히 시선을 피하자 양석진은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결혼한 것뿐인데 양씨 아가씨를 놀라게 해서 본가로 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체면이 있는가 봐.”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누가 놀랐다는 거예요?”“그러면 왜 도망쳤어?”양석진이 되물었는데 양지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무서워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을 뿐이었다. 양석진의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해서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아이고.”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잖아요. 석진 씨는 뭐 하러 온 거에요? 여기서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양석진은 침묵했다.“...”...연씨 가문은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기로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둘째 날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애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