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요. 다 당신 어머니가 일으킨 소란이잖아요!”표세연은 화난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와 연재혁의 어깨를 몇 번 세게 두드렸다.연재혁은 골치가 아팠다. 아들은 엉망이고 아내는 요즘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그는 몸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연정훈도 이제 서른이 넘었는데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하다니. 당신이 좀 훈계라도 해야죠!”“훈계요? 훈계할 게 뭐가 있어요? 연정훈이 지금까지 고생한 게 모자라요? 밖에서 뼈 빠지게 일만 했잖아요. 전에 양시연 출신이 별로라고 나도 당신처럼 연정훈이 발목 잡힐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 양시연은 양씨 가문의 딸이 되었잖아요. 게다가 우리 가문과 양씨 가문은 오래된 교제가 있는데 뭐가 문제예요?”연재혁은 반박하지 못했다.사실...연재혁도 이 결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래도 그렇게 충동적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정훈이 충동적이지 않았다면 양시연이 이렇게 쉽게 수락했겠어요?”연재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상식적으로는 양시연 쪽에서도 이미 결혼을 수락했을 텐데 왜 연정훈이 저런 모습이지?”표세연도 같이 한숨을 쉬었다.짜증이 몰려왔다.표세연은 조만간 다시 점쟁이를 찾아가 한 번 더 점을 봐야겠다고 결심했다....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은 방 안에 틀어박혀 엎드린 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보통 이런 일이 있으면 연정훈이 무슨 반응을 보일 만도 한데 오늘은 조용했다.‘쯧. 내일 정말 구청으로 가야 하나?’위층에서 쿵쿵거리는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릉 쾅쾅, 양혁수가 내는 소음이었다.양혁수는 그날 밤 그녀를 진지하게 붙잡으려 했던 행동을 제외하면 다음 날부터는 다시 제멋대로인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가 혼인 신고를 하겠다고 하자 양혁수는 온갖 말썽을 부리며 떠들썩하게 굴었다.양홍두는 마치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집 안팎을 오가며 몇 번이나 그녀와 마주쳤다. 양홍두는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삼키는
양시연이 차창을 두드렸다.유리가 내려가자 아니나 다를까 연정훈이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연정훈은 운전석에 기대어 앉아 전날보다 한결 나아 보이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처음 결혼하는 거라 긴장돼서.”양시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경험 없을 수도 있죠. 이해해요.”둘은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어제의 어색함을 덜어냈다.연정훈이 말했다.“차에 타. 아침 먹으러 가자.”양시연은 차를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뭐 먹고 싶어요?”“뭐 먹고 싶어?”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연정훈은 잠시 멈칫했다.양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긴 숨을 내쉬며 갑자기 밀려온 긴장감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닭고기 만둣국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도로가에 작은 가게가 있는데 맛이 꽤 좋아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좋아.”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양시연은 문득 차 뒷좌석을 흘끗 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조용했고 둘은 아침 식당으로 향했다.아직 붐비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빈자리는 그리 많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앉아 있으라고 하며 직접 주문하러 갔다.“제 가방 좀 봐줘요.”그녀가 당부하자 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의 가방을 흘끗 쳐다봤다.양시연은 안심하고 주문하러 갔다.연정훈에게 대접하는 의미에서 또 오늘 같은 중요한 날이니 통 크게 닭고기 일 인분을 더 추가하여 주문했다.테이블에 앉고 나니 주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여름 아침의 작은 가게였고 주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치마를 입고 있던 양시연도 더운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정장 차림의 연정훈을 보니 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땀이 날 것 같았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만둣국을 포장해 가기로 결심했다.연정훈은 그녀의 결정을 따르며 포장된 만둣국을 받아 차에서 막기로 했다.뚜껑을 열자 닭고기가 듬
연정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오늘 정훈 씨 말을 제법 예쁘게 하네.’“예쁘네요. 고마워요.”양시연은 진지하게 말했다.연정훈은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걸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뒤에 드레스도 있어. 내가...”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비서가 골랐어.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양시연은 더욱 놀랐다.“옷도 준비했어요?”“응. 그냥 준비한 거야.”양시연은 몸을 숙여 뒤쪽에 있던 큰 상자를 끌어안아 열어 보았다.상자 안에는 연노란색 롱드레스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브랜드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뒷좌석에 놓인 정장을 흘깃 보았는데 같은 브랜드였다.그녀는 기억 났다. 얼마 전 부승희와 쇼핑하면서 VIP룸에서 이 두 벌을 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커플룩’이었다.그때 부승희가 옷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이 정장은 신사적이고 드레스는 우아해서 정말 잘 어울린다고 했다. 부승희의 남자친구에게는 잘 어울렸지만, 부승희는 우아한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며 포기했었다.그런데 연정훈이 먼저 이 옷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양시연을 흘끗 살폈다.“오늘 입은 옷도 예쁘네.”양시연이 말했다.“그냥 대충 입은 거예요.”사실 그녀는 옷장을 뒤적이며 한참 고민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연노랑색 롱드레스가 더 마음에 들었다.“앞쪽으로 차 좀 움직여 주세요. 드레스로 갈아입고 싶어요.”양시연의 말을 듣고 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렀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양시연은 상자를 꼭 안고 차가 움직이길 기다렸다.햇살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땅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차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문을 열고 내렸다.양시연은 뒷좌석으로 돌아갔다.차 문이 닫히자 이른 아침의 소음과 시장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차단됐다.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창문 필름 너머를
차 안에서 양시연은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며 움직였다.그녀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점검하고 옷매무새를 살피며 서류까지 확인했다.양시연은 긴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큰일일 줄은 지금 이 순간에서야 실감한 것이다.문밖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너 오늘 결혼하는 거야?’‘응? 뭐라고? 아! 결혼한다고!’‘으악 미쳐버릴 것 같아!’오늘은 양시연이 결혼하는 날이다.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쥐고 조용히 연정훈을 몇 번이나 흘깃 쳐다봤다.“우리 혹시 혼인 전 건강검진 안 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빠르게 한 번 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지난달에 했어.”“근데 나는...”“인터참 프로젝트 끝날 때 너희 회사에서 단체로 건강 검진했잖아.”그는 양시연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멈칫하더니 헛웃음을 지었다.“아. 맞네요. 하하.”그러고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서툰 핑계가 재미있다는 듯 편안히 등을 기대며 기다렸다.몇 초 후 양시연은 또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정훈 씨 할아버지가 우리가 결혼하는 거 반대 안 해요?”연정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는 양시연이 더 강력한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반대든 찬성이든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순 없어.”“그러는 거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먼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요?”“할아버지는 이미 준비하셨어. 오늘 저녁에 있을 우리의 혼인신고 축하 파티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셨거든.”“...네.”양시연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묘한 패배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마치 좋은 핑계라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마침 신호등에 걸려 연정훈이 차를 멈췄고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말해봐.’양시연은
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이 결혼을 망설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작은 위로나 배려를 보여주길 바랐다.연정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그의 손이 양시연의 손을 감싸는 순간 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손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고 본능적으로 손을 뺄지 고민했지만, 연정훈은 가볍고도 단단하게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심장이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연정훈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건조했다.그에 비해 양시연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며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놀리지 않고 손에 힘을 살짝 조절하며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양시연은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걸음은 느렸지만, 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속도에 자연스럽게 맞추었다.긴장이 잠시 풀리는 듯했지만, 혼인신고를 위해 문턱을 넘는 순간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그녀는 속으로 외쳤다.‘어떡해. 어떡해!’양시연은 속으로 긴장으로 가득했지만, 연정훈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어 미리 준비된 절차를 건너뛰었고 차분히 과정을 주도하며 완벽하게 진행해 나갔다.서류 확인하고 번호표를 뽑고, 사진 촬영까지 양시연은 마치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이끌려 다니는 기분이었다.그녀에게 이 모든 과정은 마치 형벌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사진 촬영 전 두 사람은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그제야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고개를 돌리니 연정훈이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요?”연정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너 계속 그렇게 수상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할 거야. 하필 결혼식 날에 경찰서를 가야 할지도 몰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양시연에게 혼인신고를 한 날의 기분을 인터뷰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음...아찔하고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었어요.”그날 옆 커플이 결혼 서약을 낭독하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그 소리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이런 절차가 있는 거죠?”양시연은 속으로 탄식했다.‘연정훈 씨, 제발...너무 민망하잖아.’내성적인 양시연에게 그런 절차는 그야말로 악몽 같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 듯 직원의 설명을 경청할 기세였다.결국 양시연은 서둘러 손을 들어 연정훈의 말을 가로막았다.“괜찮아요. 우리는 그런 절차 필요 없어요. 그냥 사진만 찍으면 돼요.”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연정훈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저희가 손댈 수 없는 상황이네요.’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진 촬영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연정훈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베일을 쓴 여성이 한 커플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바로 알았다.그녀는 팔꿈치로 연정훈을 가볍게 쿡 찔렀다.“그런 건 안 할 거예요!”‘제발 좀 가만히 있어!’연정훈은 양시연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그 말에 양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직원이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고 알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라고 했다.“여성분, 머리 왼쪽을 조금 더 빼주세요.”양시연은 웃으며 대답하고 머리를 정리하려 했다.하지만 서툴게 손을 놀리는 양시연을 보고 직원이 다시 말했다.“남편분이 도와주시면 더 좋겠어요.”‘남편?’양시연은 그 단어가 어쩐지 달콤하게 느껴져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 순간 연정훈의 팔이 조용히 양시연의 머리 주변을 지나갔다. 그는 정확하고 매끄럽게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네. 이제 딱 좋습니다.”직
“사람씩 가지잖아요. 영훈 씨 본인 것만 보관하면 안 돼요?”“부승원에게 줄 거야. 혼인신고서 사본이 필요해. 나중에 공증할 때 필요할 거야.”“어떤 공증을 말하는 거예요?”“잘 몰라. 부승원한테 물어봐.”양시연은 답답했고 빠른 걸음으로 연정훈을 따라갔다. 연정훈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증명서를 되찾을 기회도 없었다.정말 머리가 아프다....양씨 가문에서.양지원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고 양시연의 전화를 기다렸다.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그녀는 물었다.“같이 저녁 먹을래?”“좋아요.”“그러면 나중에 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꼭 제시간에 갈게요.”...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자신만만하게 연씨 가문에서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그녀는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남산 저택에서.날이 저물기 전 양시연과 연정훈은 남산 저택에 도착했다.결혼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 증명서만 받았으며 그들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연씨 가문에 대한 인상도 썩 좋지 않았고 이렇게 빨리 식사 자리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건 예의를 지키는 일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직면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마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그녀는 양지원과 약속을 잡았고 연정훈도 가문 사람들을 초대했다.두 사람은 큰 방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5시 30분 양쪽 모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6시가 되어서도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방은 고요했고 여전히 기다림만이 이어졌다.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정말 배가 고팠다.하지만 그녀는 양지원의 상황을 이해했다. 양지원은 이미 도착해 있었지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연씨 가문의 사람들이 도착하면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현재 연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양지원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양지원의 체면을 구기게
연씨 저택.표세연은 너무 초조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제 남편인 연재혁을 재촉했다.“오늘 손자 상견례 날에 어머님이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는 건 일부러 그러시는 게 아니겠어요?”연재혁도 골치가 아팠다.민수희는 정말 몸이 아주 불편한 건지 소식이 아예 끊겼고 게다가 연호민마저도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정훈은 이미 단호하게 태도를 보였고 계속 강행한다면 민수희와 연호민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그만 재촉해요. 양씨 집안 사람들도 아직 채모이지 않았잖아요.”표세연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그래도 양씨 집안은 신부 측이고, 우리는 신랑 측인데 우리 때문에 늦어진다면 정훈이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연재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그럼, 뭐 어떻게 할까요?”“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가요!”“...”“재혁 씨는 다른 방법 있어요? 난 정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일단 진정해 봐요.”표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도우미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았다.“안 갈 거면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내 아들 체면은 내가 챙겨줄 거라고요! 당신은 그냥 집이나 얌전히 지키다가 이틀 뒤 학동 시티로 돌아가는 대로 이혼해요!”연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표세연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가방을 챙기고 바로 밖으로 걸었다.그러자 연재혁도 별수가 없어졌다. 정말 표세연을 혼자 보내고 이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연재혁은 도우미를 시켜 간단하게 말을 전하게 하고 그 뒤를 따랐다.“기다려 봐요. 같이 가요!”아래층의 표세연과 연재혁이 막 집을 나설 때쯤, 머리가 희끗한 연호민이 민수희의 알약을 챙겨주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고 우리도 이만 가요. 우리가 가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어요?”그 말을 들은 민수희는 병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두 눈을 마주하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제 남편은 가문의 이익을 1순위로 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 서러웠다.“난 그럴 힘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뭐예요? 내가 여기 참석한 거로 부족하대요?”부승희의 말에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무료해진 부승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지 벌써 얼굴 못 본 지도 며칠 됐어요.”한참 열애 중인 젊은 커플이 한 도시에서 지내면서 며칠 동안 만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양시연은 입을 열려다가 연정훈 옆자리의 이승우를 슬쩍 훑었다.“승우 씨랑 같이 온 거예요?”양시연은 가볍게 물었고 부승희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네. 우리 오빠랑 약속이 있더라고요.”대화하는 사이 반우희는 벌써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더 먹을래요?”양시연의 질문에 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국수가 입맛에 맞네요.”그 뜻인즉 한 그릇 더 원한다는 의미였다.그러자 양시연과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부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우희의 배를 쓰다듬었다.“배에 거지가 들었나? 분명히 비행기 기내식을 먹었을 텐데 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부승희는 배를 조물딱거리다가 또 허리를 쓰다듬었다.간지러워진 반우희는 부승희의 손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승희 씨, 날 건드리지 마요. 간지러워요. 아!”반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양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부승희는 손을 거두더니 반우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우리 우희 씨 속이 꽉 찬 여자네요.”반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가 되어버렸다.‘뭐라는 거예요!’소란에 부승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외침이 반우희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아차린 부승원이 차갑게 말했다.“바로 앞이 장례식장인데 이렇게 떠들썩하게 굴면 어떡해!”그러자 반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부승원을 무시한 채로 몰래 부승희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승희에게 꼭 붙은 반우희는 부승원을 등진 채로 낮게 속삭였다.“변호사님은 하나도 승희 씨 오빠 같지 않아요.”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어디가 다른데요?”“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
양시연은 민지연 같은 철없는 아이에게 더 이상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민수희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연호민의 아내였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평범한 이들의 장례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정이 마련되자마자 조문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가 제사를 마치자 곧이어 양지원도 도착했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해 뒤쪽 휴게실로 안내했다.두 사람 모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고 양석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에 집중해.”연정훈은 떠났고 양시연은 남아 부모님께 차를 따라주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양지원은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그만하고 가서 연정훈 도와줘. 지금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잖아.”양시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뛰어나갔다.그녀가 떠난 뒤 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급히 시선을 피하자 양석진은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결혼한 것뿐인데 양씨 아가씨를 놀라게 해서 본가로 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체면이 있는가 봐.”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누가 놀랐다는 거예요?”“그러면 왜 도망쳤어?”양석진이 되물었는데 양지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무서워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을 뿐이었다. 양석진의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해서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아이고.”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잖아요. 석진 씨는 뭐 하러 온 거에요? 여기서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양석진은 침묵했다.“...”...연씨 가문은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기로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둘째 날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애도의
민수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양시연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항공편 문제로 그들은 바로 갈 수 없었고 연정훈은 오전 비행기를 예약하고 먼저 가서 양시연은 쉬게 하려고 했다.“괜찮아요. 나도 같이 갈 거예요.”양시연은 민수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때때로 밖에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체면을 차려야 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면 며느리가 장례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은 듣기에도 좋지 않다.게다가 만약 장례가 치러지면 양시연은 연정훈과 함께 안팎으로 도와야 한다.연정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가 밝기 전에 평소처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아침이 되어 두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결국 세운행 비행기에 올랐다.점심 전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고 연재혁 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민씨 가문 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병원 복도에 가득 서 있었다.연정훈이 병실에 들어가 상황을 확인하고 나오자 의사는 말했다.“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모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연재혁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민씨 가문 사람 중 몇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양시연과 표세연은 한쪽에 서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오후에 민수희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고 집 안에서는 간간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었다.양시연은 민수희의 병세가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아 의심스러웠고 표세연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이가 많아서 사실 넘어졌다가 겨우 회복되었는데 또 밤새 잠을 안 자고 연정훈 삼촌을 생각하며 정인의 일까지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힘든 걸 못 견디고 있는 거야.”연정훈 삼촌에 대해 양시연은 잘 알지 못했지만 민수희가 고령에 아들을 낳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의 죽음을 겪는 것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시연 두 사람
“나를 조사한다고?”“네. 못하게 하려고요?”연정훈은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했다.“마음대로 조사해.”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사실 양시연은 그렇게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정훈이 자신과 채팅하려고 다른 계정을 만들었다는 고도의 계산과 엉뚱한 발상이 놀라웠을 뿐이었다.양시연이 진지하게 조사하려 하자 연정훈은 개인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모든 계정과 관련된 정보를 솔직히 공개했다. “이메일! 이메일은요?”“세 개 있고 비밀번호는 다 똑같아.”연정훈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자 양시연은 그의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무릎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연정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양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고 더 붙잡으려 할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이건 개인용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이 마우스를 잡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며 직접 가이드를 해줬다.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하지만 반쯤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물었다.“그러면 전에 정훈 씨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이랑 소현주 씨가 관계를 확정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던 거.”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메일 아직 있어요?”“그 이메일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양시연은 실망한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정말 사랑했나 봐요. 그래서 그때의 편지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이메일까지 지운 거겠죠.”연정훈은 양시연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걸로 놀리지 마. 그냥 귀찮아서 정리한 거야.”양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정훈은 그녀가 진심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용히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를 건네며 말했다.“마음대로 해.”“쳇. 누가 궁금하다고 했어요.”양시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연정훈은 그녀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관심 없으면 됐어.
“다시 아니라고 해봐요.”서재에서 양시연은 책상을 향해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정훈 씨, 바로 당신이 엔이잖아요.”연정훈의 손은 아직 책상의 전원 버튼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고 양시연은 다시 켜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난 상태였다.연정훈이 또 변명을 꺼내려는 순간 양시연은 단호한 손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면 오늘 밤 침실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맞아. 나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아!’양시연은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정훈 씨, 정말 뻔뻔하네요.”연정훈은 등을 곧게 세운 채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단지 다른 방식으로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야.”“거짓말하지 마세요.”“...”“결혼 전 당신이 말했던 인생철학이나 도리는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핑계였잖아요. 이건 거의 사기 결혼 수준이죠.”‘정말 나쁜 놈. 다른 계정을 만들어서 결혼하자고 설득하다니.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연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논리와는 상관없이 기세를 세우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위급한 상황에는 위급한 방법이 필요한 법이야. 그때 넌 날 너무 밀어냈잖아. 선택지가 없었다고.”“듣기 싫어요.”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맞은편으로 돌아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냉전 중일 때도 당신 나랑 채팅했잖아요.”“...네가 너무 힘들까 봐.”양시연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를 비꼬았다.“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내가 외롭고 지쳐서 당신한테 개인 사진까지 보낸 거였나요?”연정훈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대답했다.“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양시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찾아 들었다. 마치 벽돌처럼 묵직해 보이는 책을 들어 올린 그녀는 연정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