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오늘 정훈 씨 말을 제법 예쁘게 하네.’“예쁘네요. 고마워요.”양시연은 진지하게 말했다.연정훈은 그녀가 정말 좋아하는 걸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뒤에 드레스도 있어. 내가...”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비서가 골랐어. 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양시연은 더욱 놀랐다.“옷도 준비했어요?”“응. 그냥 준비한 거야.”양시연은 몸을 숙여 뒤쪽에 있던 큰 상자를 끌어안아 열어 보았다.상자 안에는 연노란색 롱드레스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브랜드를 보고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뒷좌석에 놓인 정장을 흘깃 보았는데 같은 브랜드였다.그녀는 기억 났다. 얼마 전 부승희와 쇼핑하면서 VIP룸에서 이 두 벌을 본 적이 있었다. 일종의 ‘커플룩’이었다.그때 부승희가 옷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이 정장은 신사적이고 드레스는 우아해서 정말 잘 어울린다고 했다. 부승희의 남자친구에게는 잘 어울렸지만, 부승희는 우아한 스타일과 맞지 않았다며 포기했었다.그런데 연정훈이 먼저 이 옷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양시연을 흘끗 살폈다.“오늘 입은 옷도 예쁘네.”양시연이 말했다.“그냥 대충 입은 거예요.”사실 그녀는 옷장을 뒤적이며 한참 고민했었다.하지만 지금 이 연노랑색 롱드레스가 더 마음에 들었다.“앞쪽으로 차 좀 움직여 주세요. 드레스로 갈아입고 싶어요.”양시연의 말을 듣고 연정훈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 서툴렀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양시연은 상자를 꼭 안고 차가 움직이길 기다렸다.햇살은 점점 더 강해졌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땅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차를 나무 아래에 세우고 문을 열고 내렸다.양시연은 뒷좌석으로 돌아갔다.차 문이 닫히자 이른 아침의 소음과 시장 특유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차단됐다.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창문 필름 너머를
차 안에서 양시연은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며 움직였다.그녀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점검하고 옷매무새를 살피며 서류까지 확인했다.양시연은 긴장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큰일일 줄은 지금 이 순간에서야 실감한 것이다.문밖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너 오늘 결혼하는 거야?’‘응? 뭐라고? 아! 결혼한다고!’‘으악 미쳐버릴 것 같아!’오늘은 양시연이 결혼하는 날이다.그녀는 안전벨트를 꽉 쥐고 조용히 연정훈을 몇 번이나 흘깃 쳐다봤다.“우리 혹시 혼인 전 건강검진 안 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를 빠르게 한 번 보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지난달에 했어.”“근데 나는...”“인터참 프로젝트 끝날 때 너희 회사에서 단체로 건강 검진했잖아.”그는 양시연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멈칫하더니 헛웃음을 지었다.“아. 맞네요. 하하.”그러고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서툰 핑계가 재미있다는 듯 편안히 등을 기대며 기다렸다.몇 초 후 양시연은 또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정훈 씨 할아버지가 우리가 결혼하는 거 반대 안 해요?”연정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는 양시연이 더 강력한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반대든 찬성이든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순 없어.”“그러는 거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오늘 먼저 할아버지 댁에 가서 인사드리는 게 어때요?”“할아버지는 이미 준비하셨어. 오늘 저녁에 있을 우리의 혼인신고 축하 파티에 참석하시겠다고 하셨거든.”“...네.”양시연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묘한 패배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마치 좋은 핑계라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마침 신호등에 걸려 연정훈이 차를 멈췄고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말해봐.’양시연은
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이 결혼을 망설이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작은 위로나 배려를 보여주길 바랐다.연정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그의 손이 양시연의 손을 감싸는 순간 양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손에 땀이 차는 것이 느껴졌고 본능적으로 손을 뺄지 고민했지만, 연정훈은 가볍고도 단단하게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심장이 마치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연정훈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건조했다.그에 비해 양시연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돌리며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놀리지 않고 손에 힘을 살짝 조절하며 그녀를 안으로 이끌었다.양시연은 그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의 걸음은 느렸지만, 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속도에 자연스럽게 맞추었다.긴장이 잠시 풀리는 듯했지만, 혼인신고를 위해 문턱을 넘는 순간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그녀는 속으로 외쳤다.‘어떡해. 어떡해!’양시연은 속으로 긴장으로 가득했지만, 연정훈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고 싶어 미리 준비된 절차를 건너뛰었고 차분히 과정을 주도하며 완벽하게 진행해 나갔다.서류 확인하고 번호표를 뽑고, 사진 촬영까지 양시연은 마치 그의 뒤를 따라가며 이끌려 다니는 기분이었다.그녀에게 이 모든 과정은 마치 형벌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사진 촬영 전 두 사람은 잠시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그제야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아주었고 양시연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고개를 돌리니 연정훈이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왜요?”연정훈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너 계속 그렇게 수상한 눈빛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 사람들이 나를 의심할 거야. 하필 결혼식 날에 경찰서를 가야 할지도 몰라.”양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양시연에게 혼인신고를 한 날의 기분을 인터뷰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음...아찔하고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었어요.”그날 옆 커플이 결혼 서약을 낭독하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그 소리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왜 이런 절차가 있는 거죠?”양시연은 속으로 탄식했다.‘연정훈 씨, 제발...너무 민망하잖아.’내성적인 양시연에게 그런 절차는 그야말로 악몽 같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진심으로 흥미를 느끼는 듯 직원의 설명을 경청할 기세였다.결국 양시연은 서둘러 손을 들어 연정훈의 말을 가로막았다.“괜찮아요. 우리는 그런 절차 필요 없어요. 그냥 사진만 찍으면 돼요.”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연정훈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저희가 손댈 수 없는 상황이네요.’연정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진 촬영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 연정훈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베일을 쓴 여성이 한 커플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바로 알았다.그녀는 팔꿈치로 연정훈을 가볍게 쿡 찔렀다.“그런 건 안 할 거예요!”‘제발 좀 가만히 있어!’연정훈은 양시연이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그 말에 양시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직원이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고 알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하라고 했다.“여성분, 머리 왼쪽을 조금 더 빼주세요.”양시연은 웃으며 대답하고 머리를 정리하려 했다.하지만 서툴게 손을 놀리는 양시연을 보고 직원이 다시 말했다.“남편분이 도와주시면 더 좋겠어요.”‘남편?’양시연은 그 단어가 어쩐지 달콤하게 느껴져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 순간 연정훈의 팔이 조용히 양시연의 머리 주변을 지나갔다. 그는 정확하고 매끄럽게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네. 이제 딱 좋습니다.”직
“사람씩 가지잖아요. 영훈 씨 본인 것만 보관하면 안 돼요?”“부승원에게 줄 거야. 혼인신고서 사본이 필요해. 나중에 공증할 때 필요할 거야.”“어떤 공증을 말하는 거예요?”“잘 몰라. 부승원한테 물어봐.”양시연은 답답했고 빠른 걸음으로 연정훈을 따라갔다. 연정훈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증명서를 되찾을 기회도 없었다.정말 머리가 아프다....양씨 가문에서.양지원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고 양시연의 전화를 기다렸다.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그녀는 물었다.“같이 저녁 먹을래?”“좋아요.”“그러면 나중에 네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꼭 제시간에 갈게요.”...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자신만만하게 연씨 가문에서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 확신했다.그녀는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남산 저택에서.날이 저물기 전 양시연과 연정훈은 남산 저택에 도착했다.결혼식은 올리지 않고 혼인 증명서만 받았으며 그들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연씨 가문에 대한 인상도 썩 좋지 않았고 이렇게 빨리 식사 자리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건 예의를 지키는 일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 직면해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빨리 마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그녀는 양지원과 약속을 잡았고 연정훈도 가문 사람들을 초대했다.두 사람은 큰 방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5시 30분 양쪽 모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6시가 되어서도 여전히 소식은 없었다.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방은 고요했고 여전히 기다림만이 이어졌다.양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정말 배가 고팠다.하지만 그녀는 양지원의 상황을 이해했다. 양지원은 이미 도착해 있었지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연씨 가문의 사람들이 도착하면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현재 연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양지원이 방으로 들어오게 되면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양지원의 체면을 구기게
연씨 저택.표세연은 너무 초조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제 남편인 연재혁을 재촉했다.“오늘 손자 상견례 날에 어머님이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는 건 일부러 그러시는 게 아니겠어요?”연재혁도 골치가 아팠다.민수희는 정말 몸이 아주 불편한 건지 소식이 아예 끊겼고 게다가 연호민마저도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정훈은 이미 단호하게 태도를 보였고 계속 강행한다면 민수희와 연호민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그만 재촉해요. 양씨 집안 사람들도 아직 채모이지 않았잖아요.”표세연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그래도 양씨 집안은 신부 측이고, 우리는 신랑 측인데 우리 때문에 늦어진다면 정훈이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연재혁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그럼, 뭐 어떻게 할까요?”“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가요!”“...”“재혁 씨는 다른 방법 있어요? 난 정말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일단 진정해 봐요.”표세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도우미에게서 가방을 건네받았다.“안 갈 거면 나 혼자라도 갈 거예요! 내 아들 체면은 내가 챙겨줄 거라고요! 당신은 그냥 집이나 얌전히 지키다가 이틀 뒤 학동 시티로 돌아가는 대로 이혼해요!”연재혁의 표정이 굳어졌다.표세연은 농담이 아니었는지 가방을 챙기고 바로 밖으로 걸었다.그러자 연재혁도 별수가 없어졌다. 정말 표세연을 혼자 보내고 이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연재혁은 도우미를 시켜 간단하게 말을 전하게 하고 그 뒤를 따랐다.“기다려 봐요. 같이 가요!”아래층의 표세연과 연재혁이 막 집을 나설 때쯤, 머리가 희끗한 연호민이 민수희의 알약을 챙겨주며 덤덤하게 말했다.“시간도 많이 늦었고 우리도 이만 가요. 우리가 가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어요?”그 말을 들은 민수희는 병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두 눈을 마주하자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제 남편은 가문의 이익을 1순위로 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아 서러웠다.“난 그럴 힘
연정훈이 표세연을 발견하고 의아하다는 듯 살짝 표정을 구겼다.“여긴 어쩐 일이세요?”“...”‘내가 잘못 온 건가?’이미 반쯤 비워진 한 차림을 보며 표세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연재혁이 표세연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고 입을 열기도 전에 비워진 그릇부터 눈에 들어왔다.“...”양시연은 머쓱해져 빠르게 연정훈이 입가까지 가져온 고기를 마다하고 몰래 눈짓했다.사실 두 사람은 그리 많이 먹은 편이 아니었다. 겨우 배를 채운 정도였으나 남산 저택의 출장 뷔페는 미슐랭처럼 그릇에 담긴 양이 아주 적은 요리였다. 그러다 보니 얼마 먹지 않아도 빈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표세연과 연재혁을 자리로 안내했다.표세연은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이었다.연재혁이 표세연의 어깨를 톡 건드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양시연은 빠르게 입가를 닦고 인사를 올렸다.“이모, 삼촌, 안녕하세요.”양시연은 평소대로 호칭했지만, 듣는 사람은 그 호칭이 귀에 거슬렸다.표세연은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 남편을 향해 눈짓했다.‘호칭이 잘못된 거 아니에요?’‘그러니까 내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표세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두 사람 앞에서는 체면을 차려 덤덤하게 자리에 착석했다. 다시 요리를 주문하고 오늘 이 자리를 찾은 목적이 떠올랐다.“혼인 신고서는 무사히 등록을 마친 거니?”표세연의 질문에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신고서 작성은 모두 마쳤어요.”“다행이구나!”표세연도 기쁨을 숨기지 못했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양시연을 향했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표세연은 그제야 아차 싶었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오늘은 내가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따로 챙긴 게 없구나. 이제 날 잡고 너희 엄마랑 같이 주얼리 보러 가자꾸나. 내가 두 세트 해주마.”“그러실 필요 없으세요.”자신과 거리를 두는 양시연의 태도에 표세연은 조금
연호민은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이었지만 양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이어 양홍두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그런 말씀 마세요. 석진이 그 녀석은 속마음을 꽁꽁 숨기는 성격이라 얼마나 답답한데요.”연호민은 미소만 지을 뿐 말을 잇지 않았다.비즈니스계의 두 거물이 한자리에 모이고 두 사람은 먼저 예의를 갖춰 악수하더니 이어 가장 자리를 양보하는 ‘쟁탈’이 이어졌다.삽시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결국 양홍두가 가장자리를 연호민에게 양보했다.“오늘같이 좋은 날 우리끼리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뭐 있나요?”“한 식구가 될 예정인데 누가 앉든 뭐가 중요하겠어요.”양홍두가 말을 이었다.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양시연과 연정훈이었지만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양시연은 몰래 가문 두 어르신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참 웃기게도 방금까지 물잔을 들고 동동거리던 연정훈이 제 할아버지한테는 물 한 잔 따르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어르신이 얘기를 주고받든 뭐든 양시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려주느라 여념이 없었다.양시연은 밥을 먹는 내내 분위기를 조심스레 살폈다.연호민이 등장하고 식사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양홍두는 부드러운 군주라 칭할 수 있었는데 젊었을 적 많은 풍파를 겪고 현재는 진중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연호민은 달랐다. 아직도 세운시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인 실권자로 비록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그 세력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연호민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쳐 있었고 대체로 안하무인이었다.어느새 식사 자리는 연호민을 중심으로 흘러갔다.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연호민은 미소를 장착한 채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양시연은 양씨 가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호민과 같은 거물을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되고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며칠 전 정훈이 할머니가 널 찾아갔다고 들었어,”갑자기 연호민이 그 일을 꺼냈다.다른 사람들도 바짝 긴장한 채로 연호민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연정훈도 경계 가득한 얼굴로 살피고 있었다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