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을 바꿀게. 그러니까 나랑 살자.”양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양시연은 양혁수가 행여나 이러한 말을 꺼낼까 늘 조마조마했다. 양시연은 결코 양혁수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혁수가 말을 꺼낸 이상 이젠 맺음을 제대로 해야 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넌 영원히 양혁수이고 성은 바꿀 수 없어.”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차창을 내렸다.“네가 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난 널 오빠라고 생각하고 따르는걸.”양혁수는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희망마저 사라져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는 양혁수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어버렸다.말을 꺼낸 이상 양혁수는 끝장을 보고 싶었다.그래서 양시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지금껏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에든베타에서 나한테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 있어?”양시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난 하루빨리 널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우린 매일매일 꼭 붙어 지냈는데 정말 단 한 번도...”그 말을 하는 양혁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인상을 찌푸린 양혁수는 북받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이렇게 힘들어하는 양혁수를 보며 양시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양혁수에게 너무 많은 걸 빚진 것 같았다.그 시절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양혁수와 잘 어울려 지냈다.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도 꼽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마음이 흔들렸다라... 두 사람은 늘 타이밍이 엇갈린 것 같았다.양혁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간에도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연정훈뿐이었다.그러다가 몰랐던 비밀이 드러나고 양시연은 양혁수를 집으로 돌려보내기에 급급했다. 이미 양시연에게 있어 양혁수는 가족과 다름이 없었고 양혁수가 소현정을 떠나보낸 뒤에는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그런데 그 뒤로 양혁수는 양시연에게서 사라졌다.양혁수를 향한 마음
양시연의 말에 양혁수가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양시연을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손을 놓지 못했다.연정훈이 차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의 양혁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양혁수가 차에서 내려 연정훈과 다툼이라도 벌릴까 걱정이 되었다.양시연도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연정훈에게 다가가려던 양혁수를 불러세웠다.양혁수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했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연정훈의 손에는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처럼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양시연에게 건넸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었고 누구도 먼저 굽히려 하지 않았다.그때.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양지원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차에서 내려 기묘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다들 무슨 기력으로 이렇게 서 있는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양시연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양혁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혁수야, 엄마를 도와 트렁크 물건 좀 옮겨줄래?”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양지원에게 감동이라는 시선을 보냈다.양지원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양혁수가 양지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양시연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손의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갑자기 웬 케이크예요?”“친구가 선물한 건데 먹어봤더니 맛이 좋더라고.”“그래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양시연의 말투가 아주 딱딱했다. 아까 양혁수가 얼굴을 만지려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연정훈은 몰래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양시연의 태도에 또 자신이 없어졌다.차마 양시연에게 양혁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수 없어 자신
양시연이 거실에 들어섰다. 양혁수는 아마 양지원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것 같았다.다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눕고 나니 연정훈이 사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작게 한입 베어 무니 다른 케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그래서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양지원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방을 나서니 아래층에 앉아 있는 양혁수가 보였다. 양혁수는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양시연은 빠르게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손에 쥔 케이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양시연 고민 끝에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소파에 앉은 양시연은 연정훈이 물어본 ‘혼인 신고’가 떠올랐다.사실 양시연은 겁이 났다. 이렇게 섣부르게 혼인 신고를 하는 건 양시연의 계획을 벗어났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저예요. 아가씨.”집사였다.양시연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세요?”“혹시 잠시 후 데이트하러 가실 건가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아니요.”잠시 뜸을 들인 집사가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집 밖을 지키고 있어요.”양시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테이블 앞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양씨 저택 카메라 시스템을 클릭했다. 정문의 카메라를 확대해 보니 연정훈의 차량이 여전히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아래층에는 양혁수가 버티고 있고 집밖에는 연정훈이 지키고 있었다.이런 쪽으로는 참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양시연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카메라로 본 연정훈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번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양시연도 핸드폰을 꺼내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역시 1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그러다가 연정훈은 핸드폰을 좌수석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혼사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양시연이 청혼에 응한 이튿날, 두 사람이 먼 세운에서 경인으로 돌아왔다.그날 아침, 부승원은 바삐 업무를 처리하는데 비서가 회의실로 부승원을 찾아왔다.“부승원 변호사님, 연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무슨 일이죠?”“아마도... 청첩장 때문인 것 같아요!”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이가 없네.’‘하루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글로벌 그룹 대표가 한가하게 청첩장이나 돌리고 있다니.’‘잠깐만.’부승원이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연정훈이 보였다. 척 보아도 연정훈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결혼 확답을 받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청첩장이 나왔어?”부승원의 물음에 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놨다.“아니. 지금 너한테 주는 건 샘플이야.”아직 샘플에 불과했지만 충분히 정교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청첩장은 총 두 장.다른 한 장은 부승희의 것으로 생각했지만 연정훈은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그 한 장은 반우희 씨 몫이야. 네가 대신 전해줘.”“...”부승원은 그 청첩장을 연정훈의 앞으로 돌려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전해. 양시연 씨를 향한 진심을 직접 보여주라고.”연정훈은 그런 농담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난 널 위해 그러는 거야.”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부승원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너나 양시연 씨한테 잘해. 네 연애사를 직접 지켜본 사람으로서 넌 누굴 이어줄 자격 없어.”“...”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부승원이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회신 테크에서 소송을 제기했어. 그렇게 큰 손실이 생겼으니 끝까지 할 생각인가 봐.”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네가 있으니,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걸.”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전 여친에게 무한한 대시를 하다가 몸값이 반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는데도 이렇게 태평하다니.연정훈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정인 그룹.연정훈이 지분을 양도한다는 소문이 이미 업계에 돌고 있었다. 여러 주주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지만 비서들이 모두 막아섰고 더 이상 막아서는 건 무리였다.연정훈은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주주총회에서 직접 발표할 겁니다.”비서들은 할 말이 없었다.점심시간, 민수희가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연정훈과 마침 엇갈려 만나지 못했다.연정훈이 자리에 돌아오자 비서가 USB 하나를 넘겼다.“여사님께서 USB를 꼭 확인하고 다시 결정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연정훈은 덤덤하게 USB를 바라보며 말했다.“알겠으니까 이만 나가보세요.”“네.”비서가 떠나고 연정훈은 USB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회사를 양시연에게 넘기는 것을 반대했고 이 USB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충분히 예상이 갔다.“정인 그룹을 처리하려면 많은 방법이 있지만 이렇게 양씨 가문에 넘길 필요는 없어!”연정훈은 정인 그룹을 처리하고 싶어 양시연에게 양도하는 게 아니었다.그냥 주고 싶어 그렇게 결정했을 뿐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일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버렸고 정인 그룹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면 그 가치가 충분했다.연정훈은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양시연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 준비했다.결혼하기로 했으니 빨리 관계 회복을 해야 했다.그때.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를 확인한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렸다.“할머니.”민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보낸 건 확인했느냐?”“네.”“...”“확인했지만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민수희는 바로 눈치를 챘다.“아직 확인하지 않았구나.”연정훈은 익숙하게 계약서에 싸인을 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정인 그룹은 제 소유이고 어떻게 처리할지는 저에게 달렸어요. 불만이 있으시면 직접 빼앗아 가세요. 그러면 저도 포기할 테니까요.”민수희는 너무 화가 나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민수희는 애써 호흡을 고르게 했다.“정훈아, USB 확인해 봐
저녁에 양혁수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양시연에게 불평했다.“너 왜 이렇게 매운 양파를 샀어? 너무 매워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야!”양시연은 정원에서 강아지를 목욕시키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바보야. 양파 자를 땐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있으면 안 맵다고!”“왜?”“그건...”“뭐 복어 흉내 내면 양파에 면역이라도 생기냐?”“...”아침이었다.양혁수는 티셔츠를 입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양시연은 작은 가방을 메고 손에 장난감 하나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야, 양혁수! 이 인형 망가진 것 같아. 소리가 안 나!”“그거 만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벌써 고장 냈냐?”“원래 고장 난 거였겠지! 우리가 사기당한 거야.”양혁수는 들고 있던 채소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거기 둬. 좀 있다가 내가 봐줄게.”“응. 알겠어.”아침 다른 시간대에 양혁수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방에서 나왔다.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옷 입어!”“뭘 호들갑이야. 너한테 복지를 주는 거야.”“아...”양혁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안목 없긴. 밖에 나가서 우리 가문 딸이라고 하지 마!”...늦은 밤이었다.둘은 마당에서 각자의 의자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과일과 간식이 놓여 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너 언제 집에 들어올 거야?”양혁수는 코코넛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내가 집에 들어가면 너랑 재산 분쟁 싸움 할까 봐 두렵지 않아?”양시연은 숨을 고르고 진지하게 말했다.“집에 들어와. 난 재산 안 가질 거야. 다 너 줄게.”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다시 다짐했다.“정말이야. 나 재산 가지고 너랑 싸우지도 않을 거야.”양혁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됐어.”“왜?”“그게 더 위험한 거거든.”양시연은 놀라며 되물었다.“위험해?”양혁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내가 재산을 차지하면 할아
양시연은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요즘 양시연은 양혁수를 마주칠 때마다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오후에 두 명의 국제적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양시연에게 연락했다. 연정훈은 이미 예약하였고 그녀의 취향을 알고 싶어 했다.그러나 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민수희가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연정훈은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연정훈의 할머니 민수희가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가 결혼을 고집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황을 피하고자 양시연은 연정훈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야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연정훈이 짧게 응답했다.양시연은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쳇. 혹시 할머니에게 혼났나?’양시연의 부유한 남편감이 사라질지도 있다.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따르며 오후에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들이 물어본 사항을 꺼냈다.잠시 침묵이 지나고 연정훈이 물었다.“어떤 스타일이 좋아?”양시연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잠시 고민한 뒤 대답했다.“간단한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맞춤 없이 해도 괜찮아요. 시간을 아낄 수 있으니까요.”반대편 사무실에서 연정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차분한 표정으로 양시연의 말을 듣고 있었다.결혼은 연정훈이 억지로 성사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할 만했다.그러나 방금 본 영상이 그의 마음속 질투심을 자극하며 그것을 억누를 수 없게 만들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고르면 돼. 지금 당장 생각이 안 나도 괜찮아. 드레스는 디자이너들이 야근하며 완성할 거야.”양시연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기에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게 싫었다.게다가 양시연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듣기로는 정훈 씨 할머니가 우리 결혼을 반대하신다고 하던데요.
깊은 밤이었다.양민아는 한 남자를 대문 밖까지 배웅한 뒤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욕실로 향해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도 내내 혐오감이 가슴 속 깊이 치밀었다.몇 년 전, 양지원이 그녀를 양씨 가문에서 쫓아내며 자유까지 빼앗았다. 양민아는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몇십 살이나 많은 정호덕과 관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그 관계는 그녀에게 더더욱 구역질 나는 족쇄가 되어 갔다.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양시연의 성공과 양시연이 연정훈과 결혼하는 것도 그냥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었다.양민아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깊은 좌절 속에서 미쳐가는 것 같았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와인 한 잔이라도 마시며 복잡한 감정을 달래려 했다.쾅!갑자기 저택의 문이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순간 놀란 양민아는 몸을 움츠린 채 경계심을 품고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다.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긴장이 조금 풀린 그녀는 숨을 고르며 거실로 돌아왔다.하지만 바로 그 순간 위층에서 느껴지는 낯선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서 몸을 돌리기도 전에 강한 충격이 그녀의 등을 강타했고 양민아는 앞으로 쓰러지며 앞에 놓인 화병 위로 넘어졌다.산산조각 난 화병의 파편 위에서 몸부림치던 그녀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땅을 짚었지만, 날카로운 조각들이 손끝을 찔러 통증이 온몸으로 퍼졌다.그 순간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파편 위에 강제로 얼굴을 눌렀다.“으아!”비명을 지르는 사이 남자는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그녀를 거칠게 내던졌고 남자는 다시 양민아 앞에 서 있었다.바닥에 나뒹군 그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를 느끼게 한 것은 얼굴에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이었다.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손가락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났다. 그러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