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진동이 이어졌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연정훈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통화를 걸어왔다.양시연은 그 어떤 것에도 답장하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내일 오후. 강남 시티에서 만나.]‘쳇. 무슨 상사가 명령하듯 구네.’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양시연은 침대 위를 한참이나 뒹굴뒹굴했다. 당연하게도 양시연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 채워지지 않은 허영심, 눈앞에 보이는 이득, 그동안의 서러움 등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무게의 추가 점점 연정훈을 향해 기울어졌다.지금 생각해 보니 엔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연정훈에게 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양시연은 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양시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인터참에 다녀왔고 경인에 있는 양씨 그룹 본부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일성 그룹의 마무리 작업까지 마쳤다.그렇게 바쁜 반나절을 보내고 운전하고 있는 양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조금 짜증이 올라올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는 연정훈.“여보세요?”“강남 시티로 와.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있어.”“...”그 말에 양시연은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았다.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유턴했다.‘그래. 가보는 거야. 뭐 두려운 것 있어?’강남 시티에 도착하자 마침 정오가 되었고 화창한 날씨에 양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정원 앞까지 걸어가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연정훈은 검정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매치해 입었고 간만에 힘을 뺀 차림이었다.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양시연의 가방을 받아 쥐고 허리 숙여 실내화를 꺼냈다.‘참, 몸 둘 바를 모르겠네.’양시연은 갑자기 부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무덤덤한 연정훈의 얼굴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연정훈이 고분고분 말을 따
앙시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에 앞서 여러 조건이 있어요.”그러자 연정훈의 눈에 빛이 반짝거렸다. 바로 고개를 쳐든 연정훈이 말했다.“말만 해.”“정말 뭐든지 말해요?”“그래.”“좋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조건은 총 다섯 가지가 있어요.”“말해봐.”“정인 그룹은 정훈 씨가 준다고 했지, 내가 달라고 한 건 아니였어요.”이게 첫 번째,연정훈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줄게.”양시연이 메모장의 첫 번째 동그라미에 체크를 눌렀다.다음 조건.“결혼하고 1년 동안의 기한을 줘요. 1년 뒤 정훈 씨가 별로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대답해요.”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뭐가 별로인데?”“...”양시연은 말을 바꿨다.“그냥 정훈 씨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거죠.”“내가 별로라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고?”연정훈은 인상까지 찌푸렸다.양시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톡 쏘아댔다.“연정훈 씨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고 불만이 생긴 경우라고 말을 고치죠!”“그래...”양시연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동의해요?”“응.”양시연은 또 체크를 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다음 조건은 그... 거기에 관한 내용이에요.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는 가지지 않을 거예요.”“플라토닉?”“가끔은... 귀찮을 때가 있다고요.”양시연은 꽤 당당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재산을 걸고 보기만 하고 닿을 수 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살라는 말이야?”양시연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결혼하지 말던가요.”연정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이 조건은 잠시 보류.”“안 돼요! 반드시 지금 대답해야 해요!”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는다면 곧 말을 바꿀 게 분명했다.별수 없어진 연정훈이 이렇게 말했다.“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난 너와 진심으로
왠지 연정훈이 억울한 것처럼 들렸다.조금 어이가 없어진 양시연이 말했다.“결혼식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데요. 굳이 형식대로 해야겠어요?”연정훈은 팔짱을 척 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나이를 먹을 만큼 먹다 보니 젊은 사람처럼 유행에 빠릿빠릿하지 못해. 나 같은 사람들은 클래식하게 가는 좋아. 뭐든지 제대로 해야지.”“...”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그리고 결혼식 얘기는 성공적으로 양시연의 잡생각을 치우게 했다. 양시연은 이제 어떻게 연정훈을 설득할지 고민했다.“스몰 웨딩으로 양가 친척, 친구들만 모시고 하면 안 돼요?”“우리 가문 친척, 친구들만 해도 식장 꽉 채워.”“...”‘하긴. 양씨 가문도 마찬가지야.’그리고 누굴 초대하고 누굴 초대하지 않을지 그 가늠도 참 어려웠다. 자칫하다가는 초대받지 못한 지인을 서운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양시연이 얼굴을 긁적이며 물었다.“예산은 얼마인데요?”“7천억.”양시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돈이 넘쳐난다는 거야?’“안돼요!”양시연이 바로 거절했다.연정훈이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은 빠르게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모장에 글을 적었다.“여섯 번째. 결혼식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양시연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리고 정인 그룹도 곧 내 소유가 될 텐데 정훈 씨 명의 아래 회사도 잘 정리해 봐요. 얼마 남지 않는 재산 아껴야죠.”연정훈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네가 날 먹여 살리면 되지. 내가 뭐 걱정할 게 있나?”“굶어 죽지는 않게 해줄 테지만 한번 준 재산은 다시 뱉어내지 않을 거예요.”연정훈은 결혼 후 양시연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상상을 해보았다. 용돈을 받을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양시연을 떠올리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빠듯하게 살지 뭐.’그러나 정인 그룹을 내어준다고 해도 이미 모아둔 재산은 평생 쓰지 못할 액수였다.양시연이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말했다.“예산은 2백억 안으로 하는 게 좋겠어요. 소박하게 해야 다른
벌써 혼인 신고?양시연이 인상을 찌푸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돌아가서 고민해 볼게요. 정해진 대로 알려줄게요.”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최대한 빨리 알려줘.”양시연이 입을 삐죽였다.‘뭐가 그렇게 급해?’양시연은 연정훈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양손으로 반듯하게 운전대를 잡았다.이에 연정훈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뒤로 물러서서 떠나는 양시연을 지켜봤다.양시연은 덜컥 혼사를 결정해 버렸고 미처 양지원에게 입장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소식은 날개를 타고 온 세상에 퍼져버렸다.인터참의 사람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진작 소식을 전해 들었다.집으로 끊이지 않는 전화가 걸려 왔고 저녁 늦게 방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는 양시연은 그제야 결혼을 실감했다.이튿날, 연정훈은 사람을 시켜 여러 웨딩 디자인을 양시연의 사무실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두 가문 가족을 모시고 상견례를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늦은 시간, 양시연은 인터참에서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밖에서 잠시 양혁수를 만나기로 했다.양시연은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양혁수는 집 문밖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동안 시선을 마주하다가 양시연이 먼저 말을 건넸다.“막 도착한 거야?”“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결혼 소식도 알리지 않으려고 했어?”양혁수가 비꼬듯 말했다.이에 양시연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랐다.양혁수는 바로 걸음을 옮겨 양시연의 좌수석에 올라탔다.양시연은 직접 양혁수에게 끝을 전해야 했다.차창이 모두 닫힌 차 안, 두 사람만 남겨진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세상 같았다.“왜 갑자기 결혼하는 거야?”양혁수가 무표정으로 물었다.잠시 고민하던 양시연이 정면을 주시한 채로 말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시기도 적당하고 상황이 다 알맞게 돌아가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어.”양혁수는 덤덤하게 말을 꺼내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그 사람 아직도 사랑하는 거지?”답이
“내가 성을 바꿀게. 그러니까 나랑 살자.”양시연은 두 눈을 감았다. 그동안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왔다.양시연은 양혁수가 행여나 이러한 말을 꺼낼까 늘 조마조마했다. 양시연은 결코 양혁수의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하지만 양혁수가 말을 꺼낸 이상 이젠 맺음을 제대로 해야 했다.“그런 말 하지 마. 넌 영원히 양혁수이고 성은 바꿀 수 없어.”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차창을 내렸다.“네가 날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난 널 오빠라고 생각하고 따르는걸.”양혁수는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남은 희망마저 사라져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창밖을 바라보는 양혁수의 눈가는 빨갛게 물들어버렸다.말을 꺼낸 이상 양혁수는 끝장을 보고 싶었다.그래서 양시연을 지그시 바라보며 지금껏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에든베타에서 나한테 한 번이라도 흔들린 적 있어?”양시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난 하루빨리 널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우린 매일매일 꼭 붙어 지냈는데 정말 단 한 번도...”그 말을 하는 양혁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끝내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인상을 찌푸린 양혁수는 북받치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이렇게 힘들어하는 양혁수를 보며 양시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양혁수에게 너무 많은 걸 빚진 것 같았다.그 시절 양시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양혁수와 잘 어울려 지냈다.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도 꼽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마음이 흔들렸다라... 두 사람은 늘 타이밍이 엇갈린 것 같았다.양혁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간에도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연정훈뿐이었다.그러다가 몰랐던 비밀이 드러나고 양시연은 양혁수를 집으로 돌려보내기에 급급했다. 이미 양시연에게 있어 양혁수는 가족과 다름이 없었고 양혁수가 소현정을 떠나보낸 뒤에는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그런데 그 뒤로 양혁수는 양시연에게서 사라졌다.양혁수를 향한 마음
양시연의 말에 양혁수가 손의 힘을 살짝 풀었다.양혁수는 여전히 양시연을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었고 차마 포기할 수 없어 손을 놓지 못했다.연정훈이 차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굳은 얼굴의 양혁수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양혁수가 차에서 내려 연정훈과 다툼이라도 벌릴까 걱정이 되었다.양시연도 빠르게 차에서 내렸고 연정훈에게 다가가려던 양혁수를 불러세웠다.양혁수는 잠시 그 자리에 주춤했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연정훈의 손에는 케이크가 쥐어져 있었는데 마치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처럼 무덤덤하게 케이크를 양시연에게 건넸다.양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공기 중에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고 있었고 누구도 먼저 굽히려 하지 않았다.그때.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비쳐왔다.양지원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양지원은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로 차에서 내려 기묘한 분위기의 세 사람을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다들 무슨 기력으로 이렇게 서 있는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양시연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못하고 양혁수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혁수야, 엄마를 도와 트렁크 물건 좀 옮겨줄래?”양혁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양지원에게 감동이라는 시선을 보냈다.양지원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양혁수가 양지원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고 양시연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손의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갑자기 웬 케이크예요?”“친구가 선물한 건데 먹어봤더니 맛이 좋더라고.”“그래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양시연의 말투가 아주 딱딱했다. 아까 양혁수가 얼굴을 만지려던 손길을 피했을 때는 연정훈은 몰래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양시연의 태도에 또 자신이 없어졌다.차마 양시연에게 양혁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을 수 없어 자신
양시연이 거실에 들어섰다. 양혁수는 아마 양지원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간 것 같았다.다시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에게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눕고 나니 연정훈이 사준 케이크가 눈에 들어왔다.작게 한입 베어 무니 다른 케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았다.그래서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양지원에게도 나눠주고 싶었다.방을 나서니 아래층에 앉아 있는 양혁수가 보였다. 양혁수는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양시연은 빠르게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손에 쥔 케이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양시연 고민 끝에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소파에 앉은 양시연은 연정훈이 물어본 ‘혼인 신고’가 떠올랐다.사실 양시연은 겁이 났다. 이렇게 섣부르게 혼인 신고를 하는 건 양시연의 계획을 벗어났다.똑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저예요. 아가씨.”집사였다.양시연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무슨 일이세요?”“혹시 잠시 후 데이트하러 가실 건가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아니요.”잠시 뜸을 들인 집사가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집 밖을 지키고 있어요.”양시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테이블 앞으로 돌아간 양시연은 양씨 저택 카메라 시스템을 클릭했다. 정문의 카메라를 확대해 보니 연정훈의 차량이 여전히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양시연은 연정훈이 무언가 오해했음을 알아차렸다.아래층에는 양혁수가 버티고 있고 집밖에는 연정훈이 지키고 있었다.이런 쪽으로는 참 죽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양시연은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카메라로 본 연정훈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번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었다.양시연도 핸드폰을 꺼내 대화창으로 들어갔다. 역시 1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도 보내지 못했다.그러다가 연정훈은 핸드폰을 좌수석
연씨 가문과 양씨 가문의 혼사에 온 세상이 떠들썩해졌다.양시연이 청혼에 응한 이튿날, 두 사람이 먼 세운에서 경인으로 돌아왔다.그날 아침, 부승원은 바삐 업무를 처리하는데 비서가 회의실로 부승원을 찾아왔다.“부승원 변호사님, 연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무슨 일이죠?”“아마도... 청첩장 때문인 것 같아요!”부승원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어이가 없네.’‘하루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에 글로벌 그룹 대표가 한가하게 청첩장이나 돌리고 있다니.’‘잠깐만.’부승원이 몸을 일으켜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연정훈이 보였다. 척 보아도 연정훈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결혼 확답을 받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청첩장이 나왔어?”부승원의 물음에 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놨다.“아니. 지금 너한테 주는 건 샘플이야.”아직 샘플에 불과했지만 충분히 정교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청첩장은 총 두 장.다른 한 장은 부승희의 것으로 생각했지만 연정훈은 콕 집어 이렇게 말했다.“그 한 장은 반우희 씨 몫이야. 네가 대신 전해줘.”“...”부승원은 그 청첩장을 연정훈의 앞으로 돌려주며 말했다.“네가 직접 전해. 양시연 씨를 향한 진심을 직접 보여주라고.”연정훈은 그런 농담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난 널 위해 그러는 거야.”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부승원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너나 양시연 씨한테 잘해. 네 연애사를 직접 지켜본 사람으로서 넌 누굴 이어줄 자격 없어.”“...”한참 티격태격하다가 부승원이 진지한 얘기를 꺼냈다.“회신 테크에서 소송을 제기했어. 그렇게 큰 손실이 생겼으니 끝까지 할 생각인가 봐.”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네가 있으니,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걸.”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전 여친에게 무한한 대시를 하다가 몸값이 반토막이 난 것도 모자라 고소까지 당하게 생겼는데도 이렇게 태평하다니.연정훈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뭐예요? 내가 여기 참석한 거로 부족하대요?”부승희의 말에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무료해진 부승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지 벌써 얼굴 못 본 지도 며칠 됐어요.”한참 열애 중인 젊은 커플이 한 도시에서 지내면서 며칠 동안 만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양시연은 입을 열려다가 연정훈 옆자리의 이승우를 슬쩍 훑었다.“승우 씨랑 같이 온 거예요?”양시연은 가볍게 물었고 부승희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네. 우리 오빠랑 약속이 있더라고요.”대화하는 사이 반우희는 벌써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더 먹을래요?”양시연의 질문에 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국수가 입맛에 맞네요.”그 뜻인즉 한 그릇 더 원한다는 의미였다.그러자 양시연과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부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우희의 배를 쓰다듬었다.“배에 거지가 들었나? 분명히 비행기 기내식을 먹었을 텐데 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부승희는 배를 조물딱거리다가 또 허리를 쓰다듬었다.간지러워진 반우희는 부승희의 손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승희 씨, 날 건드리지 마요. 간지러워요. 아!”반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양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부승희는 손을 거두더니 반우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우리 우희 씨 속이 꽉 찬 여자네요.”반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가 되어버렸다.‘뭐라는 거예요!’소란에 부승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외침이 반우희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아차린 부승원이 차갑게 말했다.“바로 앞이 장례식장인데 이렇게 떠들썩하게 굴면 어떡해!”그러자 반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부승원을 무시한 채로 몰래 부승희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승희에게 꼭 붙은 반우희는 부승원을 등진 채로 낮게 속삭였다.“변호사님은 하나도 승희 씨 오빠 같지 않아요.”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어디가 다른데요?”“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
양시연은 민지연 같은 철없는 아이에게 더 이상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민수희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연호민의 아내였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평범한 이들의 장례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정이 마련되자마자 조문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가 제사를 마치자 곧이어 양지원도 도착했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해 뒤쪽 휴게실로 안내했다.두 사람 모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고 양석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에 집중해.”연정훈은 떠났고 양시연은 남아 부모님께 차를 따라주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양지원은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그만하고 가서 연정훈 도와줘. 지금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잖아.”양시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뛰어나갔다.그녀가 떠난 뒤 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급히 시선을 피하자 양석진은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결혼한 것뿐인데 양씨 아가씨를 놀라게 해서 본가로 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체면이 있는가 봐.”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누가 놀랐다는 거예요?”“그러면 왜 도망쳤어?”양석진이 되물었는데 양지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무서워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을 뿐이었다. 양석진의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해서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아이고.”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잖아요. 석진 씨는 뭐 하러 온 거에요? 여기서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양석진은 침묵했다.“...”...연씨 가문은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기로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둘째 날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애도의
민수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양시연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항공편 문제로 그들은 바로 갈 수 없었고 연정훈은 오전 비행기를 예약하고 먼저 가서 양시연은 쉬게 하려고 했다.“괜찮아요. 나도 같이 갈 거예요.”양시연은 민수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때때로 밖에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체면을 차려야 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면 며느리가 장례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은 듣기에도 좋지 않다.게다가 만약 장례가 치러지면 양시연은 연정훈과 함께 안팎으로 도와야 한다.연정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가 밝기 전에 평소처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아침이 되어 두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결국 세운행 비행기에 올랐다.점심 전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고 연재혁 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민씨 가문 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병원 복도에 가득 서 있었다.연정훈이 병실에 들어가 상황을 확인하고 나오자 의사는 말했다.“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모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연재혁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민씨 가문 사람 중 몇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양시연과 표세연은 한쪽에 서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오후에 민수희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고 집 안에서는 간간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었다.양시연은 민수희의 병세가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아 의심스러웠고 표세연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이가 많아서 사실 넘어졌다가 겨우 회복되었는데 또 밤새 잠을 안 자고 연정훈 삼촌을 생각하며 정인의 일까지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힘든 걸 못 견디고 있는 거야.”연정훈 삼촌에 대해 양시연은 잘 알지 못했지만 민수희가 고령에 아들을 낳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의 죽음을 겪는 것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시연 두 사람
“나를 조사한다고?”“네. 못하게 하려고요?”연정훈은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했다.“마음대로 조사해.”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사실 양시연은 그렇게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정훈이 자신과 채팅하려고 다른 계정을 만들었다는 고도의 계산과 엉뚱한 발상이 놀라웠을 뿐이었다.양시연이 진지하게 조사하려 하자 연정훈은 개인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모든 계정과 관련된 정보를 솔직히 공개했다. “이메일! 이메일은요?”“세 개 있고 비밀번호는 다 똑같아.”연정훈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자 양시연은 그의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무릎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연정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양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고 더 붙잡으려 할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이건 개인용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이 마우스를 잡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며 직접 가이드를 해줬다.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하지만 반쯤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물었다.“그러면 전에 정훈 씨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이랑 소현주 씨가 관계를 확정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던 거.”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메일 아직 있어요?”“그 이메일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양시연은 실망한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정말 사랑했나 봐요. 그래서 그때의 편지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이메일까지 지운 거겠죠.”연정훈은 양시연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걸로 놀리지 마. 그냥 귀찮아서 정리한 거야.”양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정훈은 그녀가 진심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용히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를 건네며 말했다.“마음대로 해.”“쳇. 누가 궁금하다고 했어요.”양시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연정훈은 그녀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관심 없으면 됐어.
“다시 아니라고 해봐요.”서재에서 양시연은 책상을 향해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정훈 씨, 바로 당신이 엔이잖아요.”연정훈의 손은 아직 책상의 전원 버튼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고 양시연은 다시 켜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난 상태였다.연정훈이 또 변명을 꺼내려는 순간 양시연은 단호한 손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면 오늘 밤 침실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맞아. 나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아!’양시연은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정훈 씨, 정말 뻔뻔하네요.”연정훈은 등을 곧게 세운 채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단지 다른 방식으로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야.”“거짓말하지 마세요.”“...”“결혼 전 당신이 말했던 인생철학이나 도리는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핑계였잖아요. 이건 거의 사기 결혼 수준이죠.”‘정말 나쁜 놈. 다른 계정을 만들어서 결혼하자고 설득하다니.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연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논리와는 상관없이 기세를 세우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위급한 상황에는 위급한 방법이 필요한 법이야. 그때 넌 날 너무 밀어냈잖아. 선택지가 없었다고.”“듣기 싫어요.”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맞은편으로 돌아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냉전 중일 때도 당신 나랑 채팅했잖아요.”“...네가 너무 힘들까 봐.”양시연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를 비꼬았다.“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내가 외롭고 지쳐서 당신한테 개인 사진까지 보낸 거였나요?”연정훈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대답했다.“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양시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찾아 들었다. 마치 벽돌처럼 묵직해 보이는 책을 들어 올린 그녀는 연정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