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모르는 일이죠. 너무 심심해서 사서 고생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그러니까요. 고생하는 건 그 사람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시연 씨는 쉽게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국내 최고 갑부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다가 오빠가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면 뻥 차버리면 되잖아요. 침대 밖으로 내쫓는 것처럼 간단한 일 아니에요?”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그런데 부승희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런 프러포즈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 시연 씨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 엄마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당장 비행기 타고 와서 시연 씨를 설득할 거예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엄마는 결혼과 사랑은 다른 거라고 했어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사랑만 해서는 결혼이 안된대요. 부부는 파트너 같기도 해서 사랑도 하고 손발도 척척 맞아야 해요. 두 가지가 다 되는 인연을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죠.”부승희가 말을 마치고 양시연의 어깨를 다독였다.“정훈 오빠를 놓치면 더 좋은 사람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고 해도 결국 끝은 똑같아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씨답지 않은 얘기인걸요.”경인시에서 사랑에 파이팅넘치는 사람 하면 부승희였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제 어리지도 않은데 어떻게 예전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어요?”그리고 부승희가 반우희를 향해 물었다.“우희 씨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둘이요.”그 말에 양시연과 부승희가 서로를 바라봤다.‘젊고 참 좋다.’‘부러워.’부승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쨌든 정훈 오빠랑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도 시연 씨 뭐라고 못해요. 다들 과하게 프러포즈한 정훈 오빠를 미친 사람 취급 할 걸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시연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날
부승희는 반우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그러자 반우희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놨다.“과일 도시락이에요. 부승원 변호사님이 다른 변호사한테 나눠주시고 마지막으로 저한테 주셨는데 저는 그냥 평범한 도시락인 줄 알고 그냥 가지고 있었어요.”부승희가 빠르게 질문을 이어갔다.“무슨 과일이었는데요?”“딸기요!”“또 거짓말! 우리 오빤 딸기 안 먹어요. 엄마가 딸기를 싸주셨을 리가 없어요!”“...”반우희는 또 제 발등을 찍었다.양시연은 그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부승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부승원은 딸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반우희가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양시연은 제 코가 석 자였으니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 노래방에서 한 곡 하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10시가 넘었다.“우리 3차 가요!”부승희가 말을 꺼냈다.그러나 양시연과 반우희는 체력이 바닥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두 사람 정말 체력 키워야겠어요.”부승희는 두 사람을 이끌고 신호등 앞에 섰다.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길가에 서 있는데 버스가 지나치고 맞은편의 한 무리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양시연은 경인시가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렇게 좁을 수가 없었다.경인시로 막 돌아온 양시연이 우연히 연정훈을 만나고, 먼 해외에서 돌아온 부승희가 길가에서 이승우를 마주칠 확률은 대체 얼마나 높을까?차 한 대가 지나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부승희의 긴 머릿결을 흩트렸다. 그렇게 시야가 조금 가려지고 부승희는 눈앞의 사람이 흐릿하게 보였다.이승우는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렸으며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가 훤히 드러났고, 웃으면 고개가 뒤로 살짝 젖혀지는 습관까지 기억 속과 다를 게 없었다.양시연은 바로 부승희를 살폈다. 부승희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이승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이승우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부승희의 말이 끝나고 양시연은 왠지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승우가 깜짝 놀라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그렇게 벌써 남자 친구가 생겼어?”“덕분에.”부승희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짧게만 얘기하고 다음에 자리 한번 마련할게. 프로그래밍하는 사람인데 오빠랑 얘기가 통할 거야.”“그래...”“이만 가요.”양시연과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부승희가 먼저 앞장을 서고 두 사람은 조용히 이승우의 앞을 지나쳤다.그렇게 그들은 또 큰길 하나 사이 두고 멀어졌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양시연은 이승우를 몰래 살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부승희가 멀어지고 나서야 이승우는 몰래 그곳을 슬쩍 살피다가 몸을 돌렸다.반우희가 작게 중얼거렸다.“승희 씨 정말 멋있지 않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세 사람은 앞쪽 사거리에서 헤어져 각자 차에 올랐다.양시연은 본가로 향했고 정원에 양석진이 자주 타던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양혁수의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집안으로 들어선 양시연은 양지원과 양석진을 찾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 아주머니가 내려와 양시연에게 말했다.“시연 씨, 어르신이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홍두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연정훈이 그렇게 많은 걸 내주었으니 양홍두의 마음이 흔들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지원과 양석진의 얼굴을 보아 섣불리 말을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똑똑똑.양시연이 문을 두드렸다.“들어오거라.”양시연이 안으로 들어섰다.양홍두의 방은 본가에서도 가장 큰 방이었고 인테리어에 많은 신경을 썼었다. 방 안의 공기는 아주 쾌적했으며 잘 정돈이 된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 찾으셨어요?”양홍두는 어항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양시연을 확인한 양홍두는 양시연을 옆으로 부르더니 물고기 밥을 넘겨주었다.“오늘
양시연은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양홍두의 방에서 나왔다. 마음속에는 또 걱정이 늘었다.거실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오자 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그곳을 확인했다. 양지원과 양석진이 함께 있었다.양시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깡충깡충 뛰며 외쳤다.“엄마!”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향해 미소 지었다.“빨리 와. 엄마 쿠키 구웠어!”고개를 끄덕인 양시연이 폴짝폴짝 내려갔다.양지원은 이런 양시연이 익숙했지만 양석진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양시연은 늘 양석진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양시연이 양석진에게 다가가 물었다.“오늘은 다른 일정 없어요?”예전처럼 호칭은 생략되었다.양석진은 소파 등받이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응. 그래서 집에 들렀어.”“그렇군요.”양지원은 쿠키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신경을 써서 만들어도 쿠키가 자꾸 부서졌다.양시연이 말했다.“설탕을 많이 넣어서 그래요.”“정말?”양지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다시 주방으로 걸어가 다음 쿠키를 체크했다.양석진은 테이블 위로 올려 둔 조각난 쿠키를 대수롭지 않게 입에 넣었다.한 입만 먹어도 너무 단데 양석진은 그 쿠키가 별미라도 된 것처럼 자꾸 입에 넣었다.양시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조각 다시 맛보았다.“...”‘음... 내 미각이 잘못된 건 아니군.’양시연은 몰래 물을 반 컵이나 들이켰다.양석진은 이런 양시연을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음식은 한 번도 차려본 적이 없던 네 엄마가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성장인 거야.”“...”‘네네. 당연히 그렇겠죠.’“엄마가 만든 쿠키가 맛은 좋은데 시간이 많이 늦어 당이 올라갈 수 있으니 오늘 밤엔 적당히 드시는 게 좋겠어요.”양석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부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양석진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정훈이가 프러포즈했다면서?”양시연은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정확히 말하면 프러포즈는 아니죠.”“그래. 혼사 얘기를 꺼냈지.
거실에서.양석진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쿠키 포장에 몰두했다.양지원이 소파에 앉아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정훈이가 그렇게 좋은가? 왜 잊어버리질 못하는 걸까요?”“콩깍지라는 게 다 그렇지 뭐.”양지원이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의 얼굴만 떠올려도 양지원은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그러자 양석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딸아이가 좋다잖아.”“...”양지원이 한숨을 폭 내쉬며 말했다.“정훈이 성격도 성격이지만 머리가 너무 좋은 게 문제예요. 시연이에게 프러포즈한다고 그전부터 계약 문제로 혼을 쏙 빼놓더니 일성 그룹에도 손을 대잖아요. 프러포즈할 때가 되니 혁수 사업에 트러블을 만들어 혁수까지 보내버리고!”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렸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나비는 가만히 그 옆을 지켰다. 그릇에 담긴 쿠키는 거의 비워졌다. 대부분 부서진 쿠키는 양석진이 차를 마시며 천천히 먹어버렸다.양석진이 맛있게 먹어주자 양지원은 자신감이 늘었다.그래서 마지막 두어 개 남은 쿠키를 먹지 못하게 막아섰다.“그만 먹어요. 나비한테도 줄 거예요.”그러더니 양지원이 그릇을 들고 일어섰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양지원은 아주 당당하게 나비의 입에 쿠키를 쏙 넣었다.나비는 질겅질겅 씹더니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퉤하고 뱉었다.“...”양석진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나비는 뱉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테이블을 향해 몇 번이고 침을 뱉었다. 마치 입안에 작은 부스러기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양지원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양석진은 입꼬리를 꾹꾹 눌렀고 한 움큼의 쿠키를 가리키며 말했다.“나비가 많이 좋아하네. 이거 다 나비 줘.”“...”‘이게 다 연정훈이 버릇없게 키워서 그래!’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해 결국 지식인을 뒤적였다.자신의 고민을 특정 사항만 지우고 서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사람들
역시 사업하는 남자는 연애도 일처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 사람이 허락할 리가 없어요.]엔이 말했다.[그래도 현재 주동권은 그 쪽한테 있으니까 시도해 봐요. 변호사 꼭 대동하고요.]양시연은 고민에 잠겼다.그러는데 엔의 상태가 오프로 바뀐 게 보였다.양시연은 마지막으로 엔에게 즐거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대화방을 나왔다.창밖으로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마도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양시연은 창문을 열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따끈한 차를 들고 폭풍전야의 세상을 구경했다.그런데 양시연은 왠지 헛웃음이 나갔다.많은 게 변했다.이젠 결혼이 가져올 이득까지 고려하게 되다니.양시연은 침대에 철퍼덕 누워 늦은 밤 불어오는 추위를 느꼈다. 두 눈을 감으면 연정훈과 같은 집에서 지내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눈이 오면 연정훈은 양시연은 껴안고 창가 의자에 앉는 걸 좋아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사계절 중 여름을 같이 보내지 못했다. 여름날 시원한 저녁, 한가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아직 연정훈이 좋은 건가?’여러 고민을 해봤지만 사실 아직 이 문제를 진지하게 직시하지 못했다.양시연은 다시 눈을 뜨고 창밖의 잘 정돈된 정원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을 향한 마음은 사랑과 원망이 얼기설기 섞인 미묘한 감정이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연정훈이 걸어온 전화였다.“여보세요?”상대의 핸드폰 너머로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연정훈도 양시연처럼 창밖 풍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아직 안 자고 있었네?”양시연은 허공을 힐끗 노려봤다.“그쪽이 보낸 물건 정리하느라 잘 시간도 없네요.”“내가 대신해 줄까?”“...”양시연이 입술을 꽉 깨물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엿처럼 들러붙긴...”“오전에 보낸 선물 박스에 엿은 없지만 꿀은 있어. 빨간색 박스에 든 게 꿀이니까 먹고 싶으면 찾아서 먹어.”“...”양시연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창가에 앉아 물
핸드폰 진동이 이어졌다.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연정훈은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면 통화를 걸어왔다.양시연은 그 어떤 것에도 답장하지 않았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내일 오후. 강남 시티에서 만나.]‘쳇. 무슨 상사가 명령하듯 구네.’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양시연은 침대 위를 한참이나 뒹굴뒹굴했다. 당연하게도 양시연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 채워지지 않은 허영심, 눈앞에 보이는 이득, 그동안의 서러움 등 모든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무게의 추가 점점 연정훈을 향해 기울어졌다.지금 생각해 보니 엔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연정훈에게 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양시연은 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대로 자리를 잡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다. 양시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인터참에 다녀왔고 경인에 있는 양씨 그룹 본부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일성 그룹의 마무리 작업까지 마쳤다.그렇게 바쁜 반나절을 보내고 운전하고 있는 양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았다.조금 짜증이 올라올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수신자는 연정훈.“여보세요?”“강남 시티로 와. 네가 좋아하는 갈비찜 있어.”“...”그 말에 양시연은 갑자기 배가 고픈 것 같았다.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유턴했다.‘그래. 가보는 거야. 뭐 두려운 것 있어?’강남 시티에 도착하자 마침 정오가 되었고 화창한 날씨에 양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정원 앞까지 걸어가는데 문이 먼저 열렸다.연정훈은 검정 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매치해 입었고 간만에 힘을 뺀 차림이었다.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연정훈은 자연스럽게 양시연의 가방을 받아 쥐고 허리 숙여 실내화를 꺼냈다.‘참, 몸 둘 바를 모르겠네.’양시연은 갑자기 부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무덤덤한 연정훈의 얼굴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연정훈이 고분고분 말을 따
앙시연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결혼에 앞서 여러 조건이 있어요.”그러자 연정훈의 눈에 빛이 반짝거렸다. 바로 고개를 쳐든 연정훈이 말했다.“말만 해.”“정말 뭐든지 말해요?”“그래.”“좋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하나둘 세기 시작했다.“조건은 총 다섯 가지가 있어요.”“말해봐.”“정인 그룹은 정훈 씨가 준다고 했지, 내가 달라고 한 건 아니였어요.”이게 첫 번째,연정훈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너 줄게.”양시연이 메모장의 첫 번째 동그라미에 체크를 눌렀다.다음 조건.“결혼하고 1년 동안의 기한을 줘요. 1년 뒤 정훈 씨가 별로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대답해요.”연정훈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뭐가 별로인데?”“...”양시연은 말을 바꿨다.“그냥 정훈 씨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를 말하는 거죠.”“내가 별로라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고?”연정훈은 인상까지 찌푸렸다.양시연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톡 쏘아댔다.“연정훈 씨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고 불만이 생긴 경우라고 말을 고치죠!”“그래...”양시연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동의해요?”“응.”양시연은 또 체크를 하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다음 조건은 그... 거기에 관한 내용이에요. 내가 원하지 않는 관계는 가지지 않을 거예요.”“플라토닉?”“가끔은... 귀찮을 때가 있다고요.”양시연은 꽤 당당하게 대답했다.연정훈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재산을 걸고 보기만 하고 닿을 수 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살라는 말이야?”양시연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결혼하지 말던가요.”연정훈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이 조건은 잠시 보류.”“안 돼요! 반드시 지금 대답해야 해요!”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는다면 곧 말을 바꿀 게 분명했다.별수 없어진 연정훈이 이렇게 말했다.“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 난 너와 진심으로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양지원이 집에 있는 탓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화서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워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그녀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양지원에게 밥그릇을 건넸다.변여름은 젓가락을 가만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식탁에 앉은 양혁수는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양지원이 눈빛으로 놀려대지 않도록 일부러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양지원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일부러 찾아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오성호 문제로 힘들어할 아들이 걱정돼서였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오랜 세월 동안 양혁수는 한강시에 홀로 있었고 양지원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를 소개해 줬지만 단 한 번도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그녀에게 소중한 딸이었고 양혁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만약 연정훈이 없었다면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하늘의 장난일 뿐이었다.그러던 중 나타난 변여름은 친한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양혁수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는 기뻤지만 양혁수가 또다시 그 기회를 흘려보낼까 걱정스러웠다.두 사람 사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혁수야.”“네?”양혁수가 고개를 들었다.“게살 좀 발라줘.”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갑자기?’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부탁들을 곧잘 들어주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살을 발라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집에서 식사할 때면 새우나 게 같은 음식은 늘 손질된 상태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고 도구를 들었다.변여름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능숙했고 그의 손끝에서 게 껍데기는 깔끔
사실 양혁수는 변여름이 허예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차 안에서 심심했던 그는 무심코 몇 마디 물었고 변여름은 처음에는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질문이 계속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오빠 혹시 허예나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어떤 스타일?”“착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양혁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렸다.변여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여름이보다 더 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변여름은 순간 멍해졌다.자신이 착하거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혁수는 그녀를 ‘우리 여름이’라 불렀다. 그 순간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변여름이 얼굴을 숙여 식어가는 열기를 숨기자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질투쟁이.”그는 혀를 찼다.“내가 허예나랑 같이 지낸 적도 없는데 걔가 착하고 여성스럽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착하긴...너랑 붙어 다니며 사기나 치고 말 몇 마디로 사람 현혹해서 네 돈까지 빼갔잖아.”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허예나 씨는 사람을 말로 속이거나 현혹하지 않아요. 언제나 진실만 말해요.”허예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기분 좋게 집에 도착한 그는 마치 익숙한 일인 양 가정부 앞에서 자연스럽게 변여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쪽에서 일부러 낸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양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장난기 어린 양지원의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양지원은 그들의 손을 흘긋 본 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돌아왔구나?”양혁수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거기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신발 끈 풀렸네.’변여름은 빨대를 문 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는 양혁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양혁수가 한쪽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려 하자 변여름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이쪽도 풀렸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신발 끈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이젠 완전히 맛 들였나? 나 부려 먹는 재미라도 붙였나 보지?’그는 다른 쪽 신발 끈도 풀어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그가 일어서자 변여름은 곧바로 그에게 레몬티를 건네며 말했다.“오빠, 날씨 추워요. 오빠도 좀 마셔요.”양혁수는 빨대를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기대어 담담히 말했다.“너희 집에 전화했어. 설날에 안 간다고.”변여름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양혁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어차피 너희 집은 설날 크게 챙기지도 않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어.”그는 늘 핵심을 돌려 말했고 변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걸 싫어했다.그녀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왜?”변여름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오빠, 나를 한강시에 데려가 줄 거예요?”양혁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고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나와 같이 한강시에 가서 설 보내고 싶어?”“...”변여름은 드물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끝내 표정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손을 들어 그녀의 두 볼을 잡고 좌우로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강시에 안 데려가면 널 여기 두고 가야 하잖아. 근데 너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데. 또 한강시까지 쫓아와서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변여름은 예전에도 세 번 미래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첫 번째는 그가 진실을 알기 전날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고 두 번째는 그가 멕하든을 떠나던 날 비행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