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세연 씨! 당신 아들이 연씨 가문의 재산을 전부 털어가고 있어요. 요양 자금을 다 날리고 싶지 않으면 빨리 물건이나 가져가세요!”양씨 가문의 양지원이 처음으로 전화 속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그 반대편 표세연은 거실에 앉아 무표정하게 전화를 들고 있었다.표세연이 원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연정훈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말릴 수 없었다.거기에 세운의 그 여자는 문제가 터졌을 때 누구보다 신이 나더니 이제 와서 자기 차례가 되자 세운에서 나오지도 않고 양시연의 신분을 의심하며 양씨 가문과의 관계를 꺼리기까지 했다.‘문제가 있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표씨 가문은 이렇게 복잡한 일이 없었는데, 연정훈은 미친 짓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연정훈의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성격 때문이었다.“지원 씨, 제 말 좀 들어보세요.”“듣고 싶지 않아요! 당장 물건이나 가져가세요!”표세연은 차분히 침묵했다.“...”그는 큰 잔에 차를 가득 따르며 천천히 말했다.“예전에는 내 잘못이 있었지만, 그게 연정훈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정훈이는 절대 시연이가 출신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람을 깔본 건 나였지 내 아들은 아니에요.”양지원은 비웃듯 되물었다.“...연정훈이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고요? 연정훈은 단지 예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마음이 흔들린 것뿐이죠!”“아니에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표세연은 서둘러 아들을 변호하며 급히 덧붙였다.“소현주 일도 제 잘못입니다.”양지원은 조용히 쏘아붙였다.“소현주랑 표세연 씨가 사귀었어요?”양지원이 비꼬듯 말했다.“그건 아니죠...”표세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비위를 맞췄다.“당시 내가 사람을 보냈었어요...”...아래층에서 들리던 양지원의 목소리는 점차 부드러워졌다.한편 양시연은 침대에 엎드려 나비와 함께 과자 한 봉지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정상적이지 않은 연정훈 씨랑 같이 지내면서 그동안 참 힘들었을 거야.”나비는 과자를 천천히 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엄마.”“응?”양시연은 진지한 얼굴로 다가와 정색하며 물었다.“연정훈 씨, 혹시 무슨 숨겨진 병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양지원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딸과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연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연정훈,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그러게 말이다.”양지원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제정신이 아니니까 미친 듯이 너와 결혼하려고 하는 거겠지.”양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은 나비를 만지작거렸고 마음속은 복잡한 감정으로 어지러웠다.감동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단순한 허영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양시연은 스스로 생각했다.연정훈이 아니라도 권력 있고 우수한 누군가가 이렇게 간절히 다가왔다면 양시연은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양지원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딸의 입에 가져다주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네 마음은 어떠니?”양시연은 눈길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답했다.“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진심이니?”“그 사람 요즘 너무 성가셔요.”양지원은 한동안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그래도 결국은 네 선택이지.”양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아이고.’양시연에게 자기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거울을 하나 건네주고 싶었다. 그녀가 성가신 건지 아니면 부끄럽고 화가 난 건지 스스로 확인해 보라는 뜻에서였다.양지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혁수는 아마 희망이 없겠구나.’양시연은 옆으로 다가가 양지원을 살며시 껴안으며 작게 말했다.“저 정말 지금 결혼할 생각 없어요. 집에 온 건 뭔가 제대로 해보려고 결심한 거예요.”양지원은 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위로했다.“너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아니에요.”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딸이 아니라면 연정훈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아예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양지원은 단호히 말했다.“‘만약’
정인 그룹에서.연정훈은 방금 부승원을 배웅하고 돌아왔다.부승원은 초안을 훑어본 뒤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안 되겠다. 너희 엄마한테 부탁해서 무당이라도 불러야겠어. 넌 귀신 들린 게 틀림없어.”정인 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최대 주주의 변경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연씨 가문이 몇 대에 걸쳐 상업에서 쌓아온 자산을 고작‘혼수’로 내놓는다니 이건 완전히 풋내기나 할 법한 무모한 짓이었다.게다가 상대방이 이를 단번에 거절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굴욕적이었다.비서실장은 연정훈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충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춘 채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연정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서랍 깊숙한 곳에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이 반지는 예전에 양시연이 그에게 돌려보낸 것이었다.연정훈은 반지를 들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조심스레 반지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연정훈은 미친 게 아니고 단지 처음으로 자신감이 부족했을 뿐이었다.그래서 서둘러 승부수를 던졌다. 양시연을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고 싶었다.양시연은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녀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겨 있었다.양혁수는 양시연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점점 가까운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연정훈은 자신에게 뚜렷한 강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양시연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을 품을 때 관계를 확실히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후에는 매일 그녀와 함께하며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기회가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연정훈은 책상으로 돌아와 만약 양시연이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하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늘 그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지적했지만, 정작 연정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양시연이 거절할 때마다 연정훈의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고, 그는 그저
“반우희는 주스를 마시며 물었다.“부승희 씨, 연 대표님 편을 안 들어주시나요?”부승희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저는 항상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이에요. 이치에 맞는 걸 도울 뿐 가족 편은 들지 않죠.”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역시 부승희 씨다!’“그런데 말이에요.”부승희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며 양시연에게 시선을 돌렸다.“네가 연정훈의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이제 연정훈을 안 좋아해서야? 아니면 연정훈에 대한 앙금 때문이야?”양시연은 잠시 망설였다.그때 반우희가 손목시계를 흘끗 보며 재빨리 끼어들었다.“2초 이상 망설였어요!”부승희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양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부승희는 자신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멈췄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생각 중이었어요.”“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양시연은 고기를 한 입 먹으며 천천히 말했다.“너무 오랫동안 연애 문제를 멀리하다 보니 조금 서툴러졌나 봐요.”부승희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군요.”양시연은 헛기침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반우희는 털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정리했다.“아직 조금은 좋아하지만, 그렇게 많이 좋아하진 않는 거죠. 앙금도 조금은 있지만, 굳이 앙갚음할 마음은 없어요.”그렇게 말하고 나서 반우희는 자신만만하게 양시연에게 물었다.“제 말이 맞죠. 양시연 언니?”양시연은 말없이 달콤한 수프를 그녀 앞에 밀어놓았다.“많이 먹어. 이거 맛있어.”“네.”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음식을 맛보았다.“사실 이해는 가요. 전 애인이 쫓아오면 누구라도 망설이겠죠.”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불쑥 물었다.“이승우가 승희 씨한테 다시 대시하면 받아줄 거예요?”부승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양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
“됐거든요.”양시연이 숟가락을 쥐고 낮게 중얼거렸다.“돈이 많으니까 돈으로 날 사려는 것 같아요. 누가 누구를 잡아두는 건지도 모를 일이죠.”“오늘 아침이었어요.”그녀는 말하다가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우리 집에 선물 잔뜩 들고 와서 청혼한다고 하더니 내 앞에서는 여전히 뻔뻔하게 굴더라니까요.”부승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반박했다.“뻔뻔하다고 해서 초조하지 않다는 건 아니죠!”양시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초조해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요.”부승희는 양손을 뻗으며 말했다.“안 초조했으면 천천히 시연 씨를 설득했겠죠. 이렇게 대대적으로 단기전으로 나설 이유가 없잖아요?”양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연정훈의 행동이 분명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그녀는 부승희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잠깐만! 부승희 씨, 너 뭔가 스파이 같은 느낌이 있어요.”반우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뭔가 수상해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양시연은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연정훈 씨한테 뭔 얘기 듣고 날 부른 거 아니죠?”부승희는 의자를 바짝 당기며 허리를 곧게 펴더니 말했다.“무슨 소리예요. 난 그냥 옛 친구가 그리워서 온 거라고요!”부승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생각이 너무 많아졌네요. 역시 신분이 달라지더니 우리 같은 가난한 친구들은 다 의심부터 하네요.”양시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희는 양시연이 믿지 않는 걸 보자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며 말했다.“봐요. 직접 확인해요. 나랑 연정훈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건 정말 한참 전이었어요.”부승희는 양시연이 굳이 확인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확신했다.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막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양시연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면 연정훈과의 카톡 채팅
“그건 모르는 일이죠. 너무 심심해서 사서 고생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그러니까요. 고생하는 건 그 사람인데 뭘 그렇게 고민해요?”양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시연 씨는 쉽게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국내 최고 갑부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다가 오빠가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면 뻥 차버리면 되잖아요. 침대 밖으로 내쫓는 것처럼 간단한 일 아니에요?”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그런데 부승희가 한숨을 폭 내쉬며 말을 이었다.“이런 프러포즈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 시연 씨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 엄마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당장 비행기 타고 와서 시연 씨를 설득할 거예요.”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엄마는 결혼과 사랑은 다른 거라고 했어요.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사랑만 해서는 결혼이 안된대요. 부부는 파트너 같기도 해서 사랑도 하고 손발도 척척 맞아야 해요. 두 가지가 다 되는 인연을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죠.”부승희가 말을 마치고 양시연의 어깨를 다독였다.“정훈 오빠를 놓치면 더 좋은 사람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도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애틋한 사랑이라고 해도 결국 끝은 똑같아요.”양시연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씨답지 않은 얘기인걸요.”경인시에서 사랑에 파이팅넘치는 사람 하면 부승희였다.부승희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제 어리지도 않은데 어떻게 예전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어요?”그리고 부승희가 반우희를 향해 물었다.“우희 씨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둘이요.”그 말에 양시연과 부승희가 서로를 바라봤다.‘젊고 참 좋다.’‘부러워.’부승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쨌든 정훈 오빠랑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도 시연 씨 뭐라고 못해요. 다들 과하게 프러포즈한 정훈 오빠를 미친 사람 취급 할 걸요.”반우희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시연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날
부승희는 반우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기다렸다.그러자 반우희가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놨다.“과일 도시락이에요. 부승원 변호사님이 다른 변호사한테 나눠주시고 마지막으로 저한테 주셨는데 저는 그냥 평범한 도시락인 줄 알고 그냥 가지고 있었어요.”부승희가 빠르게 질문을 이어갔다.“무슨 과일이었는데요?”“딸기요!”“또 거짓말! 우리 오빤 딸기 안 먹어요. 엄마가 딸기를 싸주셨을 리가 없어요!”“...”반우희는 또 제 발등을 찍었다.양시연은 그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부승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부승원은 딸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반우희가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양시연은 제 코가 석 자였으니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 노래방에서 한 곡 하고 나오니 어느새 저녁 10시가 넘었다.“우리 3차 가요!”부승희가 말을 꺼냈다.그러나 양시연과 반우희는 체력이 바닥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두 사람 정말 체력 키워야겠어요.”부승희는 두 사람을 이끌고 신호등 앞에 섰다.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길가에 서 있는데 버스가 지나치고 맞은편의 한 무리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양시연은 경인시가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렇게 좁을 수가 없었다.경인시로 막 돌아온 양시연이 우연히 연정훈을 만나고, 먼 해외에서 돌아온 부승희가 길가에서 이승우를 마주칠 확률은 대체 얼마나 높을까?차 한 대가 지나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부승희의 긴 머릿결을 흩트렸다. 그렇게 시야가 조금 가려지고 부승희는 눈앞의 사람이 흐릿하게 보였다.이승우는 하얀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를 반쯤 접어 올렸으며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가 훤히 드러났고, 웃으면 고개가 뒤로 살짝 젖혀지는 습관까지 기억 속과 다를 게 없었다.양시연은 바로 부승희를 살폈다. 부승희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이승우를 향해 미소 지었다.이승우 주변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
부승희의 말이 끝나고 양시연은 왠지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이승우가 깜짝 놀라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그렇게 벌써 남자 친구가 생겼어?”“덕분에.”부승희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오늘은 짧게만 얘기하고 다음에 자리 한번 마련할게. 프로그래밍하는 사람인데 오빠랑 얘기가 통할 거야.”“그래...”“이만 가요.”양시연과 반우희를 향해 말했다.부승희가 먼저 앞장을 서고 두 사람은 조용히 이승우의 앞을 지나쳤다.그렇게 그들은 또 큰길 하나 사이 두고 멀어졌다.부승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나 양시연은 이승우를 몰래 살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부승희가 멀어지고 나서야 이승우는 몰래 그곳을 슬쩍 살피다가 몸을 돌렸다.반우희가 작게 중얼거렸다.“승희 씨 정말 멋있지 않아요?”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부러웠다.세 사람은 앞쪽 사거리에서 헤어져 각자 차에 올랐다.양시연은 본가로 향했고 정원에 양석진이 자주 타던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어제저녁부터 양혁수의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집안으로 들어선 양시연은 양지원과 양석진을 찾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 아주머니가 내려와 양시연에게 말했다.“시연 씨, 어르신이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양홍두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되었다. 연정훈이 그렇게 많은 걸 내주었으니 양홍두의 마음이 흔들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양지원과 양석진의 얼굴을 보아 섣불리 말을 꺼내지는 못할 것이다.똑똑똑.양시연이 문을 두드렸다.“들어오거라.”양시연이 안으로 들어섰다.양홍두의 방은 본가에서도 가장 큰 방이었고 인테리어에 많은 신경을 썼었다. 방 안의 공기는 아주 쾌적했으며 잘 정돈이 된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 찾으셨어요?”양홍두는 어항의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고 있었다. 양시연을 확인한 양홍두는 양시연을 옆으로 부르더니 물고기 밥을 넘겨주었다.“오늘
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뭐?”반우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잠에서 깨려고 애썼다. 그리고 등 뒤의 문과 부승원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다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긴 제 방인데 변호사님이 갑자기 나타나셨죠.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허. 드디어 상황 판단이 됐나 보네.’그리고 반우희의 시선을 읽은 부승원은 또 침묵을 지켰다.‘어쭈? 나랑 해보자는 건가?’예상대로 반우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어설픈 연기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이건 주택...”그러나 말을 절반하고 무슨 죄인지 잊은 듯 말을 버벅거렸다.“주택...”“주택 침입.”“아니에요!”반우희는 빠르게 부승원의 말을 반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여긴 제 집이 아니지만 짧은 시간 거주하는 동안 이 공간에 대한 사용 권리가 있어요!”부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어쩌다가 반우희도 옳은 말을 할 때가 있었다.부승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계속 말해 봐. 이건 무슨 죄인데?”반우희는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분명히 외운 적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에 떠오르지 않았다.반우희가 머리를 긁적거리자 부승원이 입을 열었다.“아무리 긁적여봤자 떠오르는 건 없을 거야.”“...”반우희는 고개를 살짝 들어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부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덤덤하게 말했다.“불법 주거 침입.”“아, 맞아요!”반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은 불법 주거...”“침입.”부승원이 말을 보태줬다.“그래요. 침입. 당신은 불법 주거 침입 죄예요!”그리고 호기롭게 부승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찰에 신고?”“아니요. 그럴 리가요.”반우희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경찰까지 가입하면 안 되죠.”“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반우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떠보듯 물었다.“사
방안은 어두컴컴했고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을 의식한 부승원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지금 이 거리를 유지한 채로 대체 여긴 누구의 방인지 물으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반우희는 가장 먼저 방의 전등을 모두 켜버렸다.“...”그러자 눈앞의 광경은 바로 초고화질로 변해버렸다. 반우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열었다.“변호사님, 아무리 제 사장이라고 해도 야밤에 사람을 깨우는 건 아니지 않나요?”“...”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결론에 감탄했다.이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가 방에 나타났는데 내린 결론이 겨우 이거란 말인가?반우희는 부승원에 비해 생각이 많지 않았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것도 귀신인 줄 알고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밤중에 갑자기 숨소리가 들려오니 깜짝 놀라버렸다.게다가 민소매에 반바지 차림에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이런 차림으로 편의점도 다녀오는데 부승원의 앞이라도 부끄러울 게 없었다.부승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우희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다시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드러냈다.“아직 볼일이 남았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졸려 죽겠네.’부승원은 말다툼할 여력도 없었고 이 방이 누구의 방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방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그래. 넌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나 자.”‘뭔 소리야?’반우희는 어리둥절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뒤돌아서는 부승원을 가만히 쳐다봤다.부승원이 외투를 손에 쥐고 두 걸음 정도 내딛다가 몸을 돌려 침대 위의 사람을 향해 물었다.“네 방 키는 어디 있어?”반우희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고분고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키를 찾으려 했다.부승원의 시선이 반우희를 향하고 민소매가 말려 허리의 속살이 보이는 찰나 부승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반우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이불에 몸을 쏙 넣었다.“협탁 위에 있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시.부승원을 보내고 연정훈과 양시연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양시연은 밤새 푹 잘 수 있었지만 연정훈은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거의 눈을 붙일 수 없었다.마음이 아파진 양시연은 서둘러 연정훈을 쉬게 했다.“내가 지킬 테니 눈 좀 붙여요. 내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요.”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이 따뜻해진 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날 지켜줘.”“좋아요.”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무드등을 어둡게 조절하고 고개를 돌려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빨리 눈 감고 쉬어요.”연정훈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장착하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양시연은 연정훈의 옆을 지키다가 잠이 든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향했다.다른 한편 연씨 저택 밖.부승원이 나서자마자 부승희가 호텔 주소를 보내왔다.[오빠, 방 잡아뒀어. 2541호, 비밀번호는 9916이야.][그래.]부승원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부승원도 조금 지쳐버렸다.호텔에 도착하고 바로 침대에 누울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났다.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반우희가 여길 따라온 게 떠올렸다.‘정말 멍청하긴.’부승희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러 온 건데 놀러 오라는 말에 반우희가 쪼르르 찾아왔다.비행기 타는 일도 꽤 힘들 텐데 반우희는 국수 두 그릇에 만족한 것 같았다.그 생각에 부승원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반우희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물으려다가 썼던 문자를 다시 지웠다.‘본인이 원해서 온 건데 어디에서 지내든지 뭔 상관이야.’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부승원은 부승희가 보낸 방으로 향했다.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주 순조롭게 방안에 들어섰다.방은 수면 모드로 돌려져 있었는데 부승원은 부승희가 신경을 써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등을 켜지 않고 물건만 내려두고 털썩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피곤한 몸을 잠시 충전하고 있는데 이불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부승원은 깜짝 놀라버렸다.
“뭐예요? 내가 여기 참석한 거로 부족하대요?”부승희의 말에 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무료해진 부승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요즘 많이 바쁜지 벌써 얼굴 못 본 지도 며칠 됐어요.”한참 열애 중인 젊은 커플이 한 도시에서 지내면서 며칠 동안 만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양시연은 입을 열려다가 연정훈 옆자리의 이승우를 슬쩍 훑었다.“승우 씨랑 같이 온 거예요?”양시연은 가볍게 물었고 부승희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네. 우리 오빠랑 약속이 있더라고요.”대화하는 사이 반우희는 벌써 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더 먹을래요?”양시연의 질문에 반우희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국수가 입맛에 맞네요.”그 뜻인즉 한 그릇 더 원한다는 의미였다.그러자 양시연과 부승희는 웃음이 터졌다.부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우희의 배를 쓰다듬었다.“배에 거지가 들었나? 분명히 비행기 기내식을 먹었을 텐데 또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 게 말이 돼요?”부승희는 배를 조물딱거리다가 또 허리를 쓰다듬었다.간지러워진 반우희는 부승희의 손길을 피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승희 씨, 날 건드리지 마요. 간지러워요. 아!”반우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양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부승희는 손을 거두더니 반우희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우리 우희 씨 속이 꽉 찬 여자네요.”반우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토마토가 되어버렸다.‘뭐라는 거예요!’소란에 부승원을 비롯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그리고 그 외침이 반우희의 목소리였다는 걸 알아차린 부승원이 차갑게 말했다.“바로 앞이 장례식장인데 이렇게 떠들썩하게 굴면 어떡해!”그러자 반우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부승원을 무시한 채로 몰래 부승희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승희에게 꼭 붙은 반우희는 부승원을 등진 채로 낮게 속삭였다.“변호사님은 하나도 승희 씨 오빠 같지 않아요.”부승희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물었다.“어디가 다른데요?”“승희 씨는 좋은 사람이
양시연은 민지연 같은 철없는 아이에게 더 이상 화낼 기운조차 없었다.민수희는 특별한 신분을 지닌 연호민의 아내였기에 그녀의 장례식은 평범한 이들의 장례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영정이 마련되자마자 조문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다음 날 오후에 도착했다. 그가 제사를 마치자 곧이어 양지원도 도착했고 연정훈과 양시연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해 뒤쪽 휴게실로 안내했다.두 사람 모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고 양석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에 집중해.”연정훈은 떠났고 양시연은 남아 부모님께 차를 따라주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양지원은 이마를 가볍게 톡톡 쳤다.“그만하고 가서 연정훈 도와줘. 지금 사람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잖아.”양시연은 민망하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곧바로 뛰어나갔다.그녀가 떠난 뒤 양지원이 고개를 들어 양석진과 눈이 마주쳤고 급히 시선을 피하자 양석진은 태연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결혼한 것뿐인데 양씨 아가씨를 놀라게 해서 본가로 가게 만들다니 내가 좀 체면이 있는가 봐.”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입술을 오므리며 대꾸했다.“누가 놀랐다는 거예요?”“그러면 왜 도망쳤어?”양석진이 되물었는데 양지원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무서워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을 뿐이었다. 양석진의 생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끌림이 느껴졌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정답을 찾지 못해서 전략적인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히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아이고.”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지금 장례를 치르고 있잖아요. 석진 씨는 뭐 하러 온 거에요? 여기서 결혼 얘기를 꺼내다니.”양석진은 침묵했다.“...”...연씨 가문은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기로 했고 마지막 날에는 화장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둘째 날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애도의
민수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양시연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었고 연정훈은 전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빴다. 항공편 문제로 그들은 바로 갈 수 없었고 연정훈은 오전 비행기를 예약하고 먼저 가서 양시연은 쉬게 하려고 했다.“괜찮아요. 나도 같이 갈 거예요.”양시연은 민수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때때로 밖에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체면을 차려야 할 때가 있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면 며느리가 장례가 끝난 후에 가는 것은 듣기에도 좋지 않다.게다가 만약 장례가 치러지면 양시연은 연정훈과 함께 안팎으로 도와야 한다.연정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가 밝기 전에 평소처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양시연은 그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아침이 되어 두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결국 세운행 비행기에 올랐다.점심 전 드디어 병원에 도착했고 연재혁 부부는 이미 도착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민씨 가문 사람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병원 복도에 가득 서 있었다.연정훈이 병실에 들어가 상황을 확인하고 나오자 의사는 말했다.“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모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연재혁은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민씨 가문 사람 중 몇 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양시연과 표세연은 한쪽에 서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오후에 민수희는 퇴원해 집으로 돌아갔고 집 안에서는 간간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 없었다.양시연은 민수희의 병세가 너무 빠르게 진행된 것 같아 의심스러웠고 표세연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나이가 많아서 사실 넘어졌다가 겨우 회복되었는데 또 밤새 잠을 안 자고 연정훈 삼촌을 생각하며 정인의 일까지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힘든 걸 못 견디고 있는 거야.”연정훈 삼촌에 대해 양시연은 잘 알지 못했지만 민수희가 고령에 아들을 낳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식의 죽음을 겪는 것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연정훈과 양시연 두 사람
“나를 조사한다고?”“네. 못하게 하려고요?”연정훈은 웃으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말했다.“마음대로 조사해.”양시연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사실 양시연은 그렇게 화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정훈이 자신과 채팅하려고 다른 계정을 만들었다는 고도의 계산과 엉뚱한 발상이 놀라웠을 뿐이었다.양시연이 진지하게 조사하려 하자 연정훈은 개인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모든 계정과 관련된 정보를 솔직히 공개했다. “이메일! 이메일은요?”“세 개 있고 비밀번호는 다 똑같아.”연정훈이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자 양시연은 그의 책상에서 일어나 그의 무릎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들어갔다.연정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양시연이 자신을 신경 쓰고 더 붙잡으려 할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묘한 기쁨이 피어올랐다.“이건 개인용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이 마우스를 잡은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으며 직접 가이드를 해줬다.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하지만 반쯤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들어 물었다.“그러면 전에 정훈 씨가 말했던 거 기억나요? 당신이랑 소현주 씨가 관계를 확정하기 전에 꽤 오랫동안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던 거.”연정훈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응.”“그 이메일 아직 있어요?”“그 이메일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양시연은 실망한 듯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정말 사랑했나 봐요. 그래서 그때의 편지도 다시 보지 않으려고 이메일까지 지운 거겠죠.”연정훈은 양시연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런 걸로 놀리지 마. 그냥 귀찮아서 정리한 거야.”양시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연정훈은 그녀가 진심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용히 이메일 계정과 비밀번호를 건네며 말했다.“마음대로 해.”“쳇. 누가 궁금하다고 했어요.”양시연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연정훈은 그녀의 옆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말했다.“관심 없으면 됐어.
“다시 아니라고 해봐요.”서재에서 양시연은 책상을 향해 단호하게 손바닥을 내리쳤다.“정훈 씨, 바로 당신이 엔이잖아요.”연정훈의 손은 아직 책상의 전원 버튼 위에 머물러 있었다. 방금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 전원을 꺼버렸고 양시연은 다시 켜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난 상태였다.연정훈이 또 변명을 꺼내려는 순간 양시연은 단호한 손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면 오늘 밤 침실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세요.”연정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맞아. 나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아!’양시연은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며 방 안을 서성였다.“정훈 씨, 정말 뻔뻔하네요.”연정훈은 등을 곧게 세운 채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단지 다른 방식으로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야.”“거짓말하지 마세요.”“...”“결혼 전 당신이 말했던 인생철학이나 도리는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한 핑계였잖아요. 이건 거의 사기 결혼 수준이죠.”‘정말 나쁜 놈. 다른 계정을 만들어서 결혼하자고 설득하다니.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네.’연정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지만 논리와는 상관없이 기세를 세우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위급한 상황에는 위급한 방법이 필요한 법이야. 그때 넌 날 너무 밀어냈잖아. 선택지가 없었다고.”“듣기 싫어요.”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 연정훈의 맞은편으로 돌아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우리가 냉전 중일 때도 당신 나랑 채팅했잖아요.”“...네가 너무 힘들까 봐.”양시연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흘리며 그를 비꼬았다.“정말 내가 걱정돼서 그랬어요? 내가 외롭고 지쳐서 당신한테 개인 사진까지 보낸 거였나요?”연정훈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로 대답했다.“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양시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찾아 들었다. 마치 벽돌처럼 묵직해 보이는 책을 들어 올린 그녀는 연정
아직 침실로 가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이미 서재의 소파에서 웃음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양시연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넘기며 가쁜 숨을 고르고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정훈 씨, 정말 너무해요. 나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다고요.”연정훈은 양시연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미소 띤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 끈을 들어 건네주었다.양시연은 대충 머리를 묶으며 연정훈의 손에서 머리 끈을 받아 든 후 퉁명스럽게 말했다.“저 목말라요. 가서 물 떠와요.”연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시연의 뒤로 손을 뻗어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겼다.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그의 팔을 몇 번 때렸다.연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가까운 곳에서 물을 가져와 양시연에게 먼저 건넸다. 양시연은 시원하게 마신 뒤 소파에 누워서 연정훈은 다시 물을 따라와 그녀 맞은편에 앉아 마시기 시작했다.양시연은 옆으로 누워 그에게 물었다.“정훈 씨, 할머니 건강은 좀 어때요?”“별로 좋지 않아.”“네?”양시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연정훈의 태도를 보고 적어도 할머니가 당분간은 괜찮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연정훈은 말했다.“나이가 많으셔서 생로병사는 자연스러운 일이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서 할머니에 대한 큰 애정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도 연정훈은 단지 교양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손자 역할을 간신히 다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들고 그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응?’양시연은 속으로 의문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떴다.방금 연정훈과 장난을 치느라 어깨를 덮은 진한 색 잠옷 상의 단추가 풀려 쇄골이 살짝 보였고 양시연이 앉은 위치에서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그의 뛰어난 턱선이 잘 보였다.‘잘생기긴 했지만...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지?’양시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맞은편에서 연정훈은 영문도 모른 채 정색하며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꺼내려 했다.“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