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의 온도가 그 순간,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넋을 잃은 그녀는 옆 손잡이를 잡고 나서야 주저앉지 않고 비로소 버틸 수 있었다.한 달여 동안의 달콤함이 한순간에 전부 그녀의 일방적인 헛된 꿈으로 되고 말았다.환상도 이제 깨질 때가 된 것이다.아래층, 김세연은 아들의 답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언제 보낼 거냐?”“그건 제 일입니다.”“네 일은 무슨. 너 이제 스물아홉이야. 이제 서른이 코앞인데 하루빨리 혼사를 마련해야지.”아래층은 잠시 조용해졌고 김세연은 결국 한발 물러선 듯 말투를 누그러뜨렸다.“정훈아, 널 강요하는 게 아니야. 안시연 같은 여자는 마냥 응석받이로 지내게 할 순 없어. 네가 맨날 사랑을 퍼다 주면 어느 날 혼자 착각해서 한사코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어떡할래? 그땐 떼려야 뗄 수도 없어.”“시연이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요.”“그럼...”“시간이 되면 알아서 다 될 거예요.”연정훈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안시연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시간이 되면...하마터면 그들 사이에 기한이 지정된 계약이 있다는 것을 잊을 뻔했다.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연정훈에게 안시연의 존재는 잠깐 흥에 겨워 산 장난감일 뿐이었다. 기쁘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흥이 다하면 그녀를 멀리 보내서 깨끗하게 끊을 수도 있다.그런 연정훈과 진지하게 감정을 논하다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됐어, 일단 이렇게 하자. 어쨌든 너무 오래 곁에 두진 마.”김세연은 계속하여 잔소리를 해댔고 연정훈은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던 연정훈은 몸을 돌려 위층으로 걸어갔다.모퉁이에 몸을 숨긴 안시연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힘이 풀려버린 것인지 마치 넝쿨에 걸린 듯 아무리 애써도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렇게 안시연은 그대로 연정훈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다.당황한 안시연은 어쩔 줄 몰라 했고 연정훈도 순간 멈칫했다.한편, 김세연
안시연은 거의 도망치듯 강남시티를 떠났고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만감이 교차하는 시점, 운전기사가 그녀에게 목적지를 물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혀 듣지 못했다.“아가씨? 꼬마 아가씨!”운전기사가 언성을 높여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안시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 볼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얼굴 전체가 차갑고 촉촉한 자국으로 범벅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운전기사는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혹여나 사고라도 날까 봐 걱정되어 물었다.“아가씨, 119나 경철 불러줄까요?”그러자 안시연은 재빨리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경인 예술원으로 가주세요.”운전기사는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혹시라도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워 계속하여 백미러를 통해 안시연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휴대폰 벨 소리가 계속 울려댔는데 모두 연정훈의 전화였다.하지만 안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같은 시각, 운전기사는 연신 혀를 끌끌 차며 그녀에게 인생 조언을 건네주며 말을 걸었다.하지만 안시연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드디어 벨 소리가 멈추고 안시연은 시트에 기대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생기가 없는 눈으로 바라보니 바깥 풍경도 전부 시들어 보였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예술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길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조차 한 번도 들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를 불렀다.“시연 씨?”안시연은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속눈썹에 맺힌 땀방울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얼굴을 희미하게 바라보았다.“승희 씨...”부승희는 마침 오늘 놀러 나온 사람인데 조리, 핫팬츠, 크롭톱에 손에는 트렌디한 가방을 들고 있었다.게다가 그녀의 뒤에도 한 무리의 친구들이 따라다녔다.“정말 시연 씨였어요?”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대꾸했다.그러나 무서울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안시연
나무 아래.부승희는 아이스 밀크티 두 잔을 얼굴에 맞대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이, 시연 씨, 우리 제발 먼저 차에 타면 안 될까요? 나 더워 죽을 것 같단 말이야.”“승희 씨...”“거 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될까요? 난 이미 오빠와 약속했고 인제 와서 당신을 빼놓을 수 없다고요.”원래 무더위 때문에 짜증이 나는데 반쯤 죽은 듯 넋이 나간 안시연을 보고 있자니 더 짜증이 났다.“저기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느려빠지긴.부승희가 사람을 부르는 제스쳐를 취하자 안시연은 그제야 벤치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곳은 사람들이 왕래가 잦은 곳인지라 얼굴이 팔려서 좋을 건 없었다.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부승희는 다짜고짜 안시연의 팔을 잡고 바로 그녀를 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문이 열리고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아, 살 것 같다.”아가씨 부승희가 탄성을 내뱉으며 시원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안시연은 부승희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승희가 밀크티를 찔러 빨대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흡!”“...”안시연은 원체 온순한 성격이었고 게다가 상대방이 좋은 마음으로 건네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옳지. 이래야죠.”부승희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밀크티를 강제로 건네주고는 티슈도 한 봉지 던져주었다.“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부승희가 묻자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계속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는 씹고 있던 껌을 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오빠랑 싸웠죠?”“아니에요...”“어? 아직도 시치미 떼시네?”부승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발도 편하게 바람을 좀 쐴 수 있도록 해주었다.“지난번에 알아챘지만 시연 씨는 정말로 오빠를 진심으로 좋아하네요.”그러자 안시연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알고 보니 전 세계가 안시연이 연정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그럼 그들도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연
부승희가 다가와 안시연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시연 씨가 예쁘지만 않았다면 이런 말은 굳이 해주지도 않았을 텐데.”그 말을 들은 안시연은 순간 자신을 칭찬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오히려 못생겼다면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근데 오빠랑 싸운 이유가 뭐예요?”잠시 침묵이 흐르고 안시연이 꾹 다물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제가 멍청했어요.”“혹시 결혼하고 싶어요?”안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결국 묵인이었다.지난 한 달 동안, 안시연은 사실 단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연정훈이 준 부드러운 품속에 빠져 단지 그들도 일반적인 연인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정훈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잠깐 생각에 잠긴 부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나무랐다.“정말 정훈 오빠와 결혼하고 싶었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게 맞아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한쪽으로 가서 노래를 선곡하고 겸사겸사 그녀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아휴, 설마 아직도 연씨 집안이 어떤 개념인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그러자 안시연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답했다.“아뇨, 알고 있어요...”“알긴 무슨. 연정훈 오빠네 집 조상들은 정말 순수한 비상장주식이라니까요. 아버지는 현재 도시의 2인자고 할아버지는 세운에 계시는데 명목상으로는 물러났다지만 권세가 엄청나요. 게다가 오빠는 현재 정인 그룹의 대표이고.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정인 그룹은 단지 오빠가 기술을 연마하는 데 사용하는 것뿐이에요.”부승희는 몸을 벽에 기대더니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아마 마음만 먹고 몇 년만 더 단련하다 보면 아버지의 길을 걸을 수 있을걸요.”한편,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반바지 주머니에 손으로 꽂아 넣었다.“이렇게 말할게요. 당신뿐만 아니라 제가 거기 가도 어머님은 성에 안 차셨을 거예요. 임유정 알죠? 그 집
부승희는 계속하여 안시연에게 연정훈의 권세가 어떤 개념인지 설명하고 그녀와 연정훈은 완전히 두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룸 안에는 노랫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부승희는 탁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데 완전히 빠졌다--임연희의 다만 여자는 사랑에 빠지기 쉽고 항상 사랑에 시달릴 뿐이다.부승희가 부르는 노래 가사는 마치 안시연의 현재 모습을 그려주는 것만 같았다.소파에 앉아 계속하여 생각해보니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것 같았다.머릿속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난 한 달 사이의 추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망원경, 자동차를 가득 채운 꽃, 목걸이, 옥비녀, 그 집, 그리고 천문 전시회와 수없이 많은 밤낮...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반복적으로 고문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게다가 감정조차도 그녀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고 연정훈에게 있어 그녀는 기껏해야 물을 만난 물고기, 그리고 남녀 사이의 일시적인 욕망 해소제와도 같았을 것이다.이건 안시연이 선을 넘었다.독한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사레에 걸려 연신 기침을 했다.그러나 기침 소리에 안시연을 돌아본 부승희는 휴지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 계속하여 술잔을 기울이고 잔을 부딪쳤다.“마셔요, 푹 취하고 내일 깨서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고요.”안시연은 애처롭게 웃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벌하기라도 하는 듯 한 잔 또 한 잔 술잔을 기울였다.위는 금방 뒤집혔고 위보다 더 심한 건 뇌와 마음이었다.추억은 물밀 듯 밀려오고 마음은 한없이 저리고 아파졌다.“정훈 씨...”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반복했다.그러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얼굴이 점점 얼룩지기 시작했다.“아, 시연 씨 곧 잠들 것 같은데 내가 내려갈게.”그때, 어디선가 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여기 가만히 있어요
연 씨네 저택.작은 화원 안, 많은 사람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연정훈은 부승희로부터 여러 번 전화를 받았지만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끊고 자연스럽게 연재혁 등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그런데 그때, 부승희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연정훈, 제발 전화 좀 받아. 시연 씨가 양혁수 그놈들에게 납치당했다고.]그 순간, 연정훈의 눈동자가 흠칫 떨려 났다.그리고 곁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연제혁이 찻잔을 드는 틈을 타 연정훈에게 슬쩍 물었다.“급한 일이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혁수에게 일이 좀 생겼답니다.”그러자 연재혁이 눈살을 찌푸렸다.양씨네 이 녀석은 정말 사고뭉치가 따로 없네.“저녁 식사 후에 얘기하자.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위험합니다.”뭐?연재혁이 어리둥절해 하며 반응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듯한 기색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급한 일이 생겨서 당장 떠나야 한다며 공손히 사과를 드렸다.이는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었고 그의 행동 스타일에도 맞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연재혁은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마냥 윙윙거렸다.다행히도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은 잘 보이기 위해 참석한 연기 천재들이었기에 흔쾌히 그의 돌발행동을 이해해주며 보내주었다.“집안에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더군요.”연재혁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고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며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큰일이니 병문안을 하러 가는 게 도리이지요.”그 소리를 뒤로 한 채 연정훈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한편, 김세연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가지러 내려간 줄 알고 묻고 싶었지만 뜻밖에도 연정훈은 그녀에게 인사 한마디조차 하지 않은 채 바로 문을 나섰다.“정훈아!”아직 위층에 손님들이 있는지라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외쳤다.그러나 연정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저한테 있는데요. 왜요?”양혁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안시연은 사뭇 긴장한 모습이었다.“내가 데리러 갈게. 건드리지 마.”전화 건너편 연정훈이 한 말은 오직 이 두 마디였다.이에 양혁수가 실소를 터뜨렸다.“좋아요.”말을 마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맞은편, 안시연의 안색이 어딘가 좀 멍해 보였다.이에 양혁수는 그녀를 향해 턱을 끄덕여 보이고 물었다.“깼어?”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연정훈이 곧 이곳에 온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양혁수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비로소 자신의 옷이 반나체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옆에 놓여있는 외투에 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막기 위해 외투를 끌고 오려 했으나 양혁수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그는 대뜸 옷을 가져와 자신의 몸에 걸쳤다.안시연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뭐해? 내가 구해준 건데 이젠 옷까지 하나 더 바쳐야 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어쩔 수 없이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쯧쯧.가엾어라.양혁수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이 맞은편에 앉아 오히려 그녀의 낭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아 혹시 내 목걸이 네 손에 있어?”잠시 멈칫한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돌려줘.”“... 지금은 없어요.”“그래?”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곧바로 양혁수가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그럼 내 목걸이는?”“집에 놔두고...”“집 어디에?” 안시연의 눈망울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물어보는 거지...“화장대요...”그러자 양혁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됐어,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았으니 뭐.”이윽고 그는 또 유유히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하더니 보는 김에 한 번 더 훑기까지 했다.안시연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고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안시연은 마치 성추행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그리고 잠시 후 양혁수가 다시 물었다.“거
연정훈의 시선이 스치는 순간 안시연은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눈빛은 순간 그녀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양혁수에게 안겨있는지 상기시켜주었다.아마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오해할 것이다.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들어 양혁수를 노려보았다.양혁수는 분명 고의로 한 것이다.그러자 양혁수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고 살짝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엔 속 시원하다는 듯 쾌활함이 가득했다.저걸 두들겨 패면 안 되나.‘화나?’‘어디 한번 물어봐.’안시연은 당연히 그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그녀는 다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뜻밖에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만약 이번 일로 오해하고 안시연이 규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면 그녀를 버리면 된다.그들 사이는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짧은 정적 뒤.연정훈이 다가와 조금의 분노도 느낄 수 없는 평온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손 놔.”담담한 두 글자에는 압박감이 가득했다.양혁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유유히 손을 떼고는 자리까지 양보해주었다.안시연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녀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 두 남자에 갈 곳도 없었다.멍하니 있는 동안 그녀의 앞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안시연이 얼굴을 들자 곧바로 남자의 어둡고 그윽한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연정훈은 입고 있던 양복 재킷을 벗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몸에 걸쳐 주 고는 그 바람막이 재킷을 안에서 빼내어 내던져버렸다.양혁수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윽고 안시연은 남자에게 들려지더니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겨버렸다. 과거에도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목을 감쌌다가 뒤로 돌아선 뒤 뻣뻣하게 풀어버렸다.“혼자 갈 수 있어요.”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안시연의 시선은 구석을 스쳐 지나가다가 문득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순간 움찔하며 입을 벌렸으나 또다시 소리를
연정훈이 말했다.“왜 나한테 그래? 저 사람한테 물어봐.”이승우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에게 물었다.“안 그래요?”‘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양시연은 이승우를 노려보았다.변백호는 자연스럽게 연정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제가 시연이를 대신해서 연 대표님께 사과드릴게요.”연정훈은 아주 쌀쌀맞게 말했다.“그쪽이 대신 사과를 한다고요?”“네.”이승우가 말했다.“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훈이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건 어떻게 갚으려고요?”변백호가 대답했다.“아내를 갚아줄 수는 없어도 아이는 노력할 수 있죠. 저랑 시연이가 3년 안으로 아이 둘을 낳으면 연 대표님을 친 아빠처럼 모시라고 할게요. 그러면 어떨까요?”이승우가 웃음을 터뜨렸다.‘오. 꽤 치는데?’이승우가 다시 반격하려는데 연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요.”변백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난 어떻게든 내 사람 다시 데리고 올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는 못 살아서.”“와우.”이승우는 몰래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우리 연 대표님 절대 지지 않아.’그러나 부승원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연정훈은 말만 할 뿐이지. 어떻게 다시 양시연을 찾아오겠어?’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고 몰래 연정훈을 살폈다.‘그건 댁 마음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변백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연 대표님답네요.”“하지만...”변백호는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하나뿐인데 먼저 옆을 채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했다.“그건 저도 동의를 합니다.”그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그때!문이 활짝 열리더니 반우희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시연 언니, 왜 아직도 안 내려와요?”그리고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이승우는 반우희를 발견하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우희
“결혼식?”연정훈은 그 단어를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양시연을 바라보았다.“만난 지 1년 됐는데 벌써 결혼하려고요?”양시연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변백호가 먼저 한발 빨랐다.“1년이요?”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양시연에게 물었다.“우리가 만난 지 1년 되었던가요?”“6개월이요!”“그러니까요.”변백호는 미소를 지은 채로 연정훈과의 대화를 이어갔다.“연 대표님은 나이가 저희보다 많아 보이는데 이미 결혼하신 건가요?”“...”양시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져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연정훈의 상대로 변백호는 아주 제격이었다.연정훈은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덤덤하게 말했다.“미혼입니다.”“조급하지는 않으세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감히 그쪽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변백호는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저는 마음이 너무 급해지더라고요. 하루빨리 우리 시연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나 김세연은 죽상이 되었다.두 사람 사이 튀는 불꽃에 사람들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주시했다.이승우는 구경하러 들렀다가 마침 들리는 대화에 쯧쯧 혀를 찼다.‘우리 정훈이 불쌍하게 됐네.’그러다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이승우는 웨이터를 불러 몰래 말을 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웨이터는 양지원에게 걸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래 연회장 세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 회장님을 비롯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양지원은 그제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발견하고 사람들과 아래층으로 향했다.그러다가 양지원은 연정훈을 따로 부르며 말했다.“정훈아, 어린 녀석들이 연애하게 내버려둬. 마침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다는데 넌 나랑 손 회장님 만나러 가자.”마치 연정훈이 양시연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처럼 들렸다.김세연이 참다못해 한마디 거들었다.“오늘
어머니?양시연은 속으로 변백호의 연기에 박수를 쳤다.변백호는 자신보다도 더 쉽게 엄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양시연은 몰래 연정훈의 얼굴을 살폈다.‘누가 더 뻔뻔한지 보자는 거지?’‘흐흐.’‘자, 여기 너보다 더 뻔뻔한 사람 등장이야.’연정훈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하지만 김세연은 제 아들을 잘 알았다. 연정훈은 ‘강강약약’인 사람으로 사건이 복잡해질수록 더 이성적으로 변했다.변백호는 아예 그들의 앞으로 걸어왔다.양지원은 양시연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시연이는 잠시 저기로 가서 앉아. 우리 백호 여기 앉혀야지.”누군가는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역시 사위 아끼는 건 장모라고 벌써 딸은 찬밥 신세네요.”양지원이 더 활짝 미소를 지었다.변백호는 정장 차림이 아닌 편한 캐주얼 복장이었다. 검은색 선글라스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며 밝고 서글서글한 모습을 보였다.변백호의 등장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김세연도 몰래 손에 땀을 쥐며 연정훈에게 눈짓했다.‘아들, 큰일이야. 네 경쟁 상대가 많이 잘생긴걸?’“...”외모로 보았을 때 연정훈은 변백호에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으면 연정훈은 더 진중하고 짙은 남자의 매력이 흘렀다. 마치 방금 원목 상자처럼 우아한 기풍을 풍겼다.그러나 사모님들은 연정훈을 자주 봐왔고, 하필 변백호는 뉴페이스이자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이다 보니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렸다.변백호는 가볍게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어머니가 저 앉으라는 데 빨리 일어나요.”양시연이 힐끗 노려보았다.젊은 커플의 풋풋한 사랑놀이에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졌다.김세연은 찻잔을 또 비웠다.그렇게 변백호가 자리를 차지했다.양시연이 다른 자리를 찾아가려는데 변백호가 양시연의 손을 휙 잡아 허리를 감싸더니 의자 손잡이에 앉혔다.“어디 가려고요? 여기 앉으면 되잖아요.”“...”커플 연기이고 뭐고 떠나서 양시연은 얼굴이 붉어졌다.‘지금 뭐 하
양지원의 행동은 연정훈의 선물을 무시하는 의미였다.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의아해했다.‘두 가문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딸이 생기더니 두 가문 사이에 금이 간 거야?’김세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정말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다.살면서 이렇게 창피한 적은 없었다.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덤덤하게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다시 침착하게 제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오늘 지원 이모는 넘치는 선물을 받으셨을 텐데 제 선물은 시간이 되실 때 확인해 보셔도 괜찮아요.”“역시 우리 정훈이가 날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까.”양지원은 양시연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정훈이 네가 있으면 앞으로 시연이 부부가 경인에서 지내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연정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당연하죠.”그리고 고개를 돌려 양시연에게 물었다.“사귄 지는 얼마됐어요?”마치 친척이 아래 사람에게 물어보는 말투였다.양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말했다.“6개월 좀 넘었어요.”“오늘 이 자리에 오면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그 친구 곧 도착한대.”양지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아까 연락이 왔는데 연회장 앞까지 왔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빤히 바라봤다.‘엄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양지원은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엄마만 믿어.’“...”분위기는 살짝 어색하게 흘렀고 참석한 사람들은 꾸역꾸역 대화 주제를 돌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방금까지 양지원은 연회장으로 가야 한다며 연정훈의 선물을 확인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또 미래 사위를 기다린다며 자리에 편히 앉아 있었다.그때 양시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연정훈이 보내온 메시지였다.[남자 친구가 좀 늦는 모양인데 재촉하지 그래요?]양시연은 그 내용을 읽고 헛웃음을 터뜨렸다.[그쪽이 무슨 상관이시죠?][나한테 세컨드가 되어달라면서요. 세컨드가 되기 전에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죠.]양시연은 제 눈을 의
“엄마, ‘오빠’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귀띔했다.그러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온 김에 모자를 한번 제대로 혼내주자고.”“...”김세연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양시연이 연정훈을 오빠라고 부른다면 연정훈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가 눈에 선했다.‘그건 안되지!’잠시 고민하던 김세연은 체면이고 뭐고 상관없이 양지원을 향해 솔직하게 말했다.“오빠 동생 사이하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그러다가 내가 콱 물고 늘어져 사돈 하자고 매달리는 수가 있어. 네 딸을 내 며느리로 삼을 거라고!”“...”양지원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김세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아들을 생각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다른 사모님들도 김세연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을 거들었다.“그래요. 두 가문이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시연이랑 정훈이랑 맺어주면 되겠어요.”양시연은 덤덤한 얼굴이었다.그러자 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아쉽게도 그러기엔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김세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날 겁주지 마!’‘내 아들이 당장 여기로 오고 있는데 무슨 꿍꿍이야!’“연 대표님, 이쪽입니다.”그때 문밖에서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어 양지원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우리 시연이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곧 날 잡을 것 같아요.”김세연은 김이 빠져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양지원의 말을 들은 제 아들이 굳은 얼굴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다 필요 없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다른 사모님들이 연정훈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무슨 일로 우리 대표님이 다 걸음하셨을까?”연정훈은 옷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클래식한 턱시도였지만 연정훈에게 알맞게 제작되어 우아하고 타고난 귀족 분위기를 풍겼다.연정훈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지원 이모 생일인데 제가 와야죠.”그리고 슬쩍 양시연을
김세연은 양지원의 딸이라면 양민아밖에 몰랐다. 최근 몇 해 동안 양민아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지만 과거 양민아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있었다.그런데 양지원이 또 ‘새로운 딸’을 소개한다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양시연이 아래층에 있는 동안 사모님들은 이러쿵저러쿵 가십을 입에 올렸다. 누구 아들이 몰래 여자에게 스폰을 해주고, 누구 딸은 가난한 남자를 사랑해 가문에 난리가 났다고 했다.김세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다.“젊은 사람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리 같은 가문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한다니. 그게 가당키나 해요?”다른 사모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양지원은 미소를 지은 채로 묵묵히 상황을 주시했다.“양 대표님, 아가씨가 도착했습니다.”직원이 다가와 양지원에게 속삭였다.양지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말했다.“여기로 오라고 해요.”“네. 알겠습니다.”직원은 양시연을 위해 문을 열었다.큰 홀이다 보니 정문부터 사모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있었다.김세연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마시다가 양지원에게 몰래 안시연이라는 불여우가 돌아왔다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김세연은 두 눈을 의심했다.창가 자리라 햇빛에 눈이 부셨던 김세연은 손으로 해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시연은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양지원을 향해 엄마라 불렀고 다른 사모님들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김세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다들 양지원에게 양녀가 하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생긴 또 다른 딸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겉치레로 예쁘다는 칭찬만 늘려놨다.“자, 여기로 와서 앉아.”양지원은 양시연을 옆자리로 이끌었다.그러자 김세연은 입을 딱 벌렸고 어느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그러나 김세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양지원은 양시연의 손을 만지며 김세연에
양씨 가문에서.양시연이 퇴근하자마자 양지원이 웃으며 오후의 해프닝을 이야기했다.양지원은 김세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연정훈이 겨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또다시 너에게 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거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지원은 소파에 기대 턱을 괴고 물었다.“연정훈을 때렸다고 들었어.”양시연은 야식을 먹으며 대답했다.“정훈 씨가 자초한 일이에요.”양시연의 이런 모습에 양지원은 매우 만족스러웠다.양지원은 이제야 자신의 딸답다는 생각에 오후에 김세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김세연은 또 양시연이 어떤 남자에게 의지하는 거로 의심하다니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늘 밤 푹 자고 내일은 기운 차려야 해.”양지원은 양시연에게 당부했다.양시연은 알았다는 신호를 보이며 웃었다.며칠 동안 연정훈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아마 다친 걸 치료하느라 바쁜 듯했다.‘흥. 그래도 자존심은 있나 보네.’양시연은 방으로 돌아와 반우희에게 전화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생일 파티에 오라고 부탁했다.반우희가 말했다.“내일 승주도 생일이에요!”양시연은 답했다.“잘됐네요. 애들 데리고 와서 함께 놀고 나중에 우리끼리 승주 생일 파티도 해요.”“좋아요!”통화를 끝낸 후 양시연은 꿀잠에 빠졌다.다음 날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반우희가 먼저 도착했다.아이들이 키가 조금씩 자랐지만, 여전히 양시연을 ‘누나’라고 부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인사했다.양씨 가문은 인원이 적다 보니 집안이 이렇게 맑고 활기찬 목소리로 가득 차니 공기마저 상쾌해지는 듯했다.양지원은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보며 양혁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이 녀석, 자기 엄마 생일인데도 돌아오지 않는다니.’양시연은 아이들과 어울리다 문득 양지원의 쓸쓸한 표정을 눈치챘다. 그녀는 조용히 양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양혁수는 드물게 즉시 답장을 보냈다.[왜 나 보고 싶어?]양시연은 어이없었다.“…”[엄마가 널 보고 싶어 해!]잠시 정적이 흐
혹시 몰라서 양시연은 사장에게 자신의 신상을 밝히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계단에서 김세연과 마주쳤을 때도 양시연은 여전히 태연했다.하지만 김세연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했다.‘이게...’정오에는 연정훈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 줄 알았는데 오후에 양시연을 만났다.양시연이 귀국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혹시 연정훈의 새로운 여자도 양시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뭔가 이상했다.만약 정말 양시연이라면 연정훈이 자신에게 숨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전엔 분명 같은 편이었다.김세연은 계단 위에서 발끝을 들고 몇 번이나 아래를 내려다봤다.“이모, 왜 그래요?”같이 온 조카딸 연희가 물었다.김세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아무 일도 아니야. 우리 위층에 올라가 보자.”“좋아요.”아래층의 방에서 양시연은 유리창 너머로 위층을 잠깐 쳐다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물건이 많아 사장이 먼저 도감으로 보여주고 실물을 가져오기로 했다.“이걸로 할게요.”양시연은 핑크 다이아몬드로 된 플라밍고 모양 브로치를 골랐다.“네. 가져다드리겠습니다.”“네.”잠시 후 사장이 몇 가지 고급품을 가지고 내려왔지만, 양시연이 고른 브로치는 없었다.양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진 사장님, 제가 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아니면 제가 볼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자였고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양시연이 양씨 가문의 집사로부터 소개받은 손님이었기에 사장은 양시연을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런데도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저와 같은 제품을 고른 사람이 있네요.”사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방금 2층을 지나왔는데 김세연 씨와 함께 온 아가씨가 한눈에 반해 잠깐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곧 다시 가져다드릴 겁니다.”하하.집안에서 귀염받다 보니 상대방이 당연히 양보해 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양시연은
“세상에!”“너 누구랑 싸운 거야?”연정훈은 식탁 옆에 앉아 외투를 벗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밥 먹을 준비를 했다.집에는 그와 김세연 단둘뿐이었고 김세연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이건 긁힌 거지? 아니, 아니야. 이건 날카로운 걸로 베인 거 같은데!”김세연은 믿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연정훈의 얼굴에 이런 상처를 남겼는지 의문스러웠다.김세연이 의사를 부르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를 식탁 쪽으로 살짝 밀었다.“엄마, 밥이나 드세요.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요.”김세연은 어이가 없었다.“뭐라는 거야. 엄마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 이 멀쩡하던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 됐네!”그러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어떻게 된 거야. 어릴 때 말썽 피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가 네 얼굴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알지 않니?”연정훈은 무심하게 국물을 떠주며 다시 말했다.“밥이나 드세요.”김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아버지 승진한 후로 명절 때나 겨우 집에 돌아오고 나 혼자 남겨졌잖니. 너도 집에 안 오고.”연정훈은 김세연을 한 번 보며 말했다.“그러면 엄마도 아버지 따라 세운으로 가시면 되잖아요.”“싫어. 그곳은 너무 황량해서 경인처럼 살기 좋은 데가 아니야.”“그러면 뭔가 방법을 생각해서 아버지를 신고해요. 그러면 강등돼서 다시 경인으로 오겠죠.”김세연은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찌르며 웃음을 터뜨렸다.“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예전 그대로 철없기야.”김세연은 진지하게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솔직히 말해봐. 이 얼굴에 난 상처 혹시 여자한테 긁힌 거 아니야?”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반찬을 집어 들었다.“네.”김세연은 눈을 감고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드리며 속으로 외쳤다.‘세상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드디어 아들이 여자와 엮이기 시작한 것이다.몇 년 전 양시연이라는 아이가 떠나고 소현주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김세연은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