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가 다가와 안시연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허심탄회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시연 씨가 예쁘지만 않았다면 이런 말은 굳이 해주지도 않았을 텐데.”그 말을 들은 안시연은 순간 자신을 칭찬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오히려 못생겼다면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근데 오빠랑 싸운 이유가 뭐예요?”잠시 침묵이 흐르고 안시연이 꾹 다물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제가 멍청했어요.”“혹시 결혼하고 싶어요?”안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결국 묵인이었다.지난 한 달 동안, 안시연은 사실 단 한 번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연정훈이 준 부드러운 품속에 빠져 단지 그들도 일반적인 연인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정훈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잠깐 생각에 잠긴 부승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를 나무랐다.“정말 정훈 오빠와 결혼하고 싶었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게 맞아요.”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한쪽으로 가서 노래를 선곡하고 겸사겸사 그녀에게 조언을 건네주었다.“아휴, 설마 아직도 연씨 집안이 어떤 개념인지 모르는 거 아니에요?”그러자 안시연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며 답했다.“아뇨, 알고 있어요...”“알긴 무슨. 연정훈 오빠네 집 조상들은 정말 순수한 비상장주식이라니까요. 아버지는 현재 도시의 2인자고 할아버지는 세운에 계시는데 명목상으로는 물러났다지만 권세가 엄청나요. 게다가 오빠는 현재 정인 그룹의 대표이고.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정인 그룹은 단지 오빠가 기술을 연마하는 데 사용하는 것뿐이에요.”부승희는 몸을 벽에 기대더니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아마 마음만 먹고 몇 년만 더 단련하다 보면 아버지의 길을 걸을 수 있을걸요.”한편, 안시연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부승희는 그녀 쪽으로 다가가 반바지 주머니에 손으로 꽂아 넣었다.“이렇게 말할게요. 당신뿐만 아니라 제가 거기 가도 어머님은 성에 안 차셨을 거예요. 임유정 알죠? 그 집
부승희는 계속하여 안시연에게 연정훈의 권세가 어떤 개념인지 설명하고 그녀와 연정훈은 완전히 두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룸 안에는 노랫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부승희는 탁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데 완전히 빠졌다--임연희의 다만 여자는 사랑에 빠지기 쉽고 항상 사랑에 시달릴 뿐이다.부승희가 부르는 노래 가사는 마치 안시연의 현재 모습을 그려주는 것만 같았다.소파에 앉아 계속하여 생각해보니 머릿속이 점차 맑아지는 것 같았다.머릿속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난 한 달 사이의 추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망원경, 자동차를 가득 채운 꽃, 목걸이, 옥비녀, 그 집, 그리고 천문 전시회와 수없이 많은 밤낮...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그녀의 마음을 반복적으로 고문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게다가 감정조차도 그녀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고 연정훈에게 있어 그녀는 기껏해야 물을 만난 물고기, 그리고 남녀 사이의 일시적인 욕망 해소제와도 같았을 것이다.이건 안시연이 선을 넘었다.독한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사레에 걸려 연신 기침을 했다.그러나 기침 소리에 안시연을 돌아본 부승희는 휴지를 건네주는 것이 아닌 계속하여 술잔을 기울이고 잔을 부딪쳤다.“마셔요, 푹 취하고 내일 깨서 정신 차리고 살아보자고요.”안시연은 애처롭게 웃다가 다시 눈물을 흘렸고 자신을 벌하기라도 하는 듯 한 잔 또 한 잔 술잔을 기울였다.위는 금방 뒤집혔고 위보다 더 심한 건 뇌와 마음이었다.추억은 물밀 듯 밀려오고 마음은 한없이 저리고 아파졌다.“정훈 씨...”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반복했다.그러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고 얼굴이 점점 얼룩지기 시작했다.“아, 시연 씨 곧 잠들 것 같은데 내가 내려갈게.”그때, 어디선가 부승희의 목소리가 들려 오고 누군가가 그녀의 뺨을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여기 가만히 있어요
연 씨네 저택.작은 화원 안, 많은 사람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연정훈은 부승희로부터 여러 번 전화를 받았지만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끊고 자연스럽게 연재혁 등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그런데 그때, 부승희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연정훈, 제발 전화 좀 받아. 시연 씨가 양혁수 그놈들에게 납치당했다고.]그 순간, 연정훈의 눈동자가 흠칫 떨려 났다.그리고 곁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연제혁이 찻잔을 드는 틈을 타 연정훈에게 슬쩍 물었다.“급한 일이야?”연정훈이 담담하게 대꾸했다.“혁수에게 일이 좀 생겼답니다.”그러자 연재혁이 눈살을 찌푸렸다.양씨네 이 녀석은 정말 사고뭉치가 따로 없네.“저녁 식사 후에 얘기하자.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위험합니다.”뭐?연재혁이 어리둥절해 하며 반응하기도 전에 연정훈은 이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의 안색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일듯한 기색이었다.그러나 연정훈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급한 일이 생겨서 당장 떠나야 한다며 공손히 사과를 드렸다.이는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었고 그의 행동 스타일에도 맞지 않았기에 갑작스러운 상황에 연재혁은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마냥 윙윙거렸다.다행히도 현장에 있던 모든 인원은 잘 보이기 위해 참석한 연기 천재들이었기에 흔쾌히 그의 돌발행동을 이해해주며 보내주었다.“집안에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더군요.”연재혁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거짓말을 했고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며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큰일이니 병문안을 하러 가는 게 도리이지요.”그 소리를 뒤로 한 채 연정훈은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한편, 김세연은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가지러 내려간 줄 알고 묻고 싶었지만 뜻밖에도 연정훈은 그녀에게 인사 한마디조차 하지 않은 채 바로 문을 나섰다.“정훈아!”아직 위층에 손님들이 있는지라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외쳤다.그러나 연정훈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저한테 있는데요. 왜요?”양혁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안시연은 사뭇 긴장한 모습이었다.“내가 데리러 갈게. 건드리지 마.”전화 건너편 연정훈이 한 말은 오직 이 두 마디였다.이에 양혁수가 실소를 터뜨렸다.“좋아요.”말을 마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맞은편, 안시연의 안색이 어딘가 좀 멍해 보였다.이에 양혁수는 그녀를 향해 턱을 끄덕여 보이고 물었다.“깼어?”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연정훈이 곧 이곳에 온다는 것을 깨닫고 다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양혁수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비로소 자신의 옷이 반나체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옆에 놓여있는 외투에 안시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막기 위해 외투를 끌고 오려 했으나 양혁수가 그녀보다 한발 빨랐다. 그는 대뜸 옷을 가져와 자신의 몸에 걸쳤다.안시연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뭐해? 내가 구해준 건데 이젠 옷까지 하나 더 바쳐야 해?”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어쩔 수 없이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쯧쯧.가엾어라.양혁수는 조금의 동정심도 없이 맞은편에 앉아 오히려 그녀의 낭패를 감상하기 시작했다.“아 혹시 내 목걸이 네 손에 있어?”잠시 멈칫한 안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돌려줘.”“... 지금은 없어요.”“그래?”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곧바로 양혁수가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그럼 내 목걸이는?”“집에 놔두고...”“집 어디에?” 안시연의 눈망울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물어보는 거지...“화장대요...”그러자 양혁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됐어, 아무렇게나 버리지 않았으니 뭐.”이윽고 그는 또 유유히 그녀를 훑어보기 시작하더니 보는 김에 한 번 더 훑기까지 했다.안시연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혔고 노골적인 그의 시선에 안시연은 마치 성추행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그리고 잠시 후 양혁수가 다시 물었다.“거
연정훈의 시선이 스치는 순간 안시연은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눈빛은 순간 그녀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양혁수에게 안겨있는지 상기시켜주었다.아마 다른 사람들이 이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오해할 것이다.그녀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들어 양혁수를 노려보았다.양혁수는 분명 고의로 한 것이다.그러자 양혁수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고 살짝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엔 속 시원하다는 듯 쾌활함이 가득했다.저걸 두들겨 패면 안 되나.‘화나?’‘어디 한번 물어봐.’안시연은 당연히 그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그녀는 다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뜻밖에도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만약 이번 일로 오해하고 안시연이 규칙을 어겼다고 생각하면 그녀를 버리면 된다.그들 사이는 이렇게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짧은 정적 뒤.연정훈이 다가와 조금의 분노도 느낄 수 없는 평온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손 놔.”담담한 두 글자에는 압박감이 가득했다.양혁수는 어깨를 으쓱하고 유유히 손을 떼고는 자리까지 양보해주었다.안시연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녀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 두 남자에 갈 곳도 없었다.멍하니 있는 동안 그녀의 앞에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안시연이 얼굴을 들자 곧바로 남자의 어둡고 그윽한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연정훈은 입고 있던 양복 재킷을 벗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몸에 걸쳐 주 고는 그 바람막이 재킷을 안에서 빼내어 내던져버렸다.양혁수가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윽고 안시연은 남자에게 들려지더니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겨버렸다. 과거에도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목을 감쌌다가 뒤로 돌아선 뒤 뻣뻣하게 풀어버렸다.“혼자 갈 수 있어요.”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연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안시연의 시선은 구석을 스쳐 지나가다가 문득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순간 움찔하며 입을 벌렸으나 또다시 소리를
안시연이 손을 떼는 순간 뒷좌석 분위기는 확연히 식어졌다.그녀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연정훈의 그 손을 못 본 듯 눈을 감은 채 자세를 가다듬고 더 이상 그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차 안은 몹시 조용했다.얼마나 지났는지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안시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휙 지나가는 동네 이름은 벚꽃동이었다.연정훈은 그녀를 강남 시티로 데려가지 않았다.‘그래도 뭐, 좋아. 오후에 그곳에서 벌어진 난처한 일 때문에 마침 당분간 강남에 가고 싶지 않았어.’차가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한 걸음 먼저 차에서 내린 후 그녀 쪽의 문을 열었다.그녀가 두 번이나 말했다.“저절로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연정훈은 못 들은 척 그녀를 껴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자는 그녀를 응대하지 않았고 한 마디도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녀를 침실 침대에 눕혔다.“어디 아픈 곳 있어?”그는 의사를 부를 작정인 듯 그녀에게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없어요.”옆에 서서 손목시계를 벗던 연정훈은 대답을 듣고 그녀의 이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안시연은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 말했다.“그냥 부딪혔을 뿐 괜찮아요.”“의사 선생님에게 보이자.”연정훈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필요 없어요!”안시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부쩍 높였다.방 밖에서 연정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졸리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오늘은 이만 잠 좀 자도 될까요? 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잠시 후에야 그는 그녀에게 답장했다.“피곤하면 쉬어.”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오며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옷을 정리했다.연정훈은 거실에 있었고 그녀는 침실에 있었는데, 한 층 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20분 후 안시연이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자, 바깥
연정훈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안시연 곁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그런 그를 잠에서 깨운 것은 주방의 미세한 움직임이었다.방문을 열자 눈부신 햇빛이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안시연은 그를 마주하지 않은 채 아침을 식탁 위에 올렸다.지난 한 달 동안 매일 이랬지만 오늘 아침은 왠지 모르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안시연은 돌아서서 그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일어나셨어요?”“응.”“아침 드실래요? 제가 다 해놨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뚝배기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입가의 곡선을 몽롱하고 부드럽게 풀어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말끔히 씻었다.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그가 셔츠를 갈아입을 때 안시연이 걸어 들어와 넥타이를 고르는 것을 도왔다.그녀의 동작은 가볍고 침착하며 심지어 어제보다 더 부드러웠다.그녀가 돌아서서 얼굴을 마주하니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고 입꼬리를 약간 움직였다.안시연은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먼저 입을 열었다.“양혁수 씨의 일을 물어보시려는 거죠?”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안시연은 혼잣말하는 셈 치고 계속 말했다.“전에 기사님이 실수로 양혁수 씨의 차와 충돌사고가 생겨서 제가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어제 부승희 씨와 놀러 갔다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나쁜 사람을 만났을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양혁수 씨에요.”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에게 말한 적이 없잖아.”“바쁘시잖아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내가 언제 너의 일에 귀찮아했어?”안시연은 넥타이를 조이고 손을 내려놓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그건 그렇다 치고, 저는 정훈 씨가 안쓰러워요. 이미 아주 바쁘신데, 저의 이런 보잘것없는 일도 처리해야 하나 싶어서요.”안쓰럽다.평상시에 그녀는 이런 말을 할 때면 틀림없이 얼굴
마침 휴일이라 안시연은 기분 전환할 시간이 충분했다.그녀는 어제 병원 방문을 놓치는 바람에 아침 일찍 외할머니를 뵈러 가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외할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걸어오셨다.“바쁘면 급하게 오지 말고 다음에 친척이 오면 그때 널 부를게.”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무슨 친척이 이렇게 자주 오는 거지?’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여러 가지 일들로 가득 차서 친척의 신분을 추리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머니의 안부를 부탁했다.부승희는 어제 그녀를 잘 챙기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인지 특별히 그녀와 놀러 가자고 했다.마침 안시연에겐 부승희 같은 가이드가 부족했고 두 사람은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만난 후 부승희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이미지를 탈바꿈시키려고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참 좋은 생각이에요. 다 갈아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안시연은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자신의 긴 생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좀 짧게 자르고 싶어요.”“저랑 같이 가요, 더 이상 청순한 스타일 말고 센 언니 컨셉으로 가보는 거예요.”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센 언니는 됐어요. 너무 오바예요.”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부씨 가문 넷째인 신분 덕에 걸림돌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안시연은 긴 머리를 쇄골에 살짝 닿는 중단발 길이로 잘랐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시에 단정하고 산뜻한 이미지였다.부승희는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여신급 비주얼... 미쳤어요.”커트 외에도 그녀들은 쇼핑몰의 7개 층을 모두 돌아보았다.옷과 여러 가지 패션 아이템 외에 인테이러가구와 장식품까지 빠짐없이 둘러보았다.가방을 살 때, 안시연은 한 글로벌 한정판 명품 가방이 마음에 들었는데 직원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승희 씨, 죄송한데 이 가방은 저희 점장님께서 다른 분을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