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이 손을 떼는 순간 뒷좌석 분위기는 확연히 식어졌다.그녀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연정훈의 그 손을 못 본 듯 눈을 감은 채 자세를 가다듬고 더 이상 그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차 안은 몹시 조용했다.얼마나 지났는지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안시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휙 지나가는 동네 이름은 벚꽃동이었다.연정훈은 그녀를 강남 시티로 데려가지 않았다.‘그래도 뭐, 좋아. 오후에 그곳에서 벌어진 난처한 일 때문에 마침 당분간 강남에 가고 싶지 않았어.’차가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한 걸음 먼저 차에서 내린 후 그녀 쪽의 문을 열었다.그녀가 두 번이나 말했다.“저절로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연정훈은 못 들은 척 그녀를 껴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자는 그녀를 응대하지 않았고 한 마디도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녀를 침실 침대에 눕혔다.“어디 아픈 곳 있어?”그는 의사를 부를 작정인 듯 그녀에게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없어요.”옆에 서서 손목시계를 벗던 연정훈은 대답을 듣고 그녀의 이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안시연은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 말했다.“그냥 부딪혔을 뿐 괜찮아요.”“의사 선생님에게 보이자.”연정훈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필요 없어요!”안시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부쩍 높였다.방 밖에서 연정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졸리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오늘은 이만 잠 좀 자도 될까요? 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잠시 후에야 그는 그녀에게 답장했다.“피곤하면 쉬어.”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오며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옷을 정리했다.연정훈은 거실에 있었고 그녀는 침실에 있었는데, 한 층 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20분 후 안시연이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자, 바깥
연정훈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안시연 곁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그런 그를 잠에서 깨운 것은 주방의 미세한 움직임이었다.방문을 열자 눈부신 햇빛이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안시연은 그를 마주하지 않은 채 아침을 식탁 위에 올렸다.지난 한 달 동안 매일 이랬지만 오늘 아침은 왠지 모르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안시연은 돌아서서 그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일어나셨어요?”“응.”“아침 드실래요? 제가 다 해놨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뚝배기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입가의 곡선을 몽롱하고 부드럽게 풀어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말끔히 씻었다.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그가 셔츠를 갈아입을 때 안시연이 걸어 들어와 넥타이를 고르는 것을 도왔다.그녀의 동작은 가볍고 침착하며 심지어 어제보다 더 부드러웠다.그녀가 돌아서서 얼굴을 마주하니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고 입꼬리를 약간 움직였다.안시연은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먼저 입을 열었다.“양혁수 씨의 일을 물어보시려는 거죠?”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안시연은 혼잣말하는 셈 치고 계속 말했다.“전에 기사님이 실수로 양혁수 씨의 차와 충돌사고가 생겨서 제가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어제 부승희 씨와 놀러 갔다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나쁜 사람을 만났을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양혁수 씨에요.”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에게 말한 적이 없잖아.”“바쁘시잖아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내가 언제 너의 일에 귀찮아했어?”안시연은 넥타이를 조이고 손을 내려놓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그건 그렇다 치고, 저는 정훈 씨가 안쓰러워요. 이미 아주 바쁘신데, 저의 이런 보잘것없는 일도 처리해야 하나 싶어서요.”안쓰럽다.평상시에 그녀는 이런 말을 할 때면 틀림없이 얼굴
마침 휴일이라 안시연은 기분 전환할 시간이 충분했다.그녀는 어제 병원 방문을 놓치는 바람에 아침 일찍 외할머니를 뵈러 가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외할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걸어오셨다.“바쁘면 급하게 오지 말고 다음에 친척이 오면 그때 널 부를게.”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무슨 친척이 이렇게 자주 오는 거지?’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여러 가지 일들로 가득 차서 친척의 신분을 추리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머니의 안부를 부탁했다.부승희는 어제 그녀를 잘 챙기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인지 특별히 그녀와 놀러 가자고 했다.마침 안시연에겐 부승희 같은 가이드가 부족했고 두 사람은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만난 후 부승희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이미지를 탈바꿈시키려고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참 좋은 생각이에요. 다 갈아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안시연은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자신의 긴 생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좀 짧게 자르고 싶어요.”“저랑 같이 가요, 더 이상 청순한 스타일 말고 센 언니 컨셉으로 가보는 거예요.”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센 언니는 됐어요. 너무 오바예요.”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부씨 가문 넷째인 신분 덕에 걸림돌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안시연은 긴 머리를 쇄골에 살짝 닿는 중단발 길이로 잘랐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시에 단정하고 산뜻한 이미지였다.부승희는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여신급 비주얼... 미쳤어요.”커트 외에도 그녀들은 쇼핑몰의 7개 층을 모두 돌아보았다.옷과 여러 가지 패션 아이템 외에 인테이러가구와 장식품까지 빠짐없이 둘러보았다.가방을 살 때, 안시연은 한 글로벌 한정판 명품 가방이 마음에 들었는데 직원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승희 씨, 죄송한데 이 가방은 저희 점장님께서 다른 분을
안시연은 연정훈이 준 카드를 16억 넘게 쓰고 부승희의 차에 앉아 영수증을 체크하고 있을 때 자신도 이 거액의 지출에 충격을 받았다.‘미쳤어, 진짜.’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미친 듯이 카톡을 보내며 사실을 과장되게 보탰다.“야, 연정훈 이제 진짜 고생 많겠다.”이승우가 답장했다.“응? 뭔 고생? 얼마나 많은데? 빨리 말해 봐.”“...”부승희는 맞은편에서 무서운 스피드로 타이핑하다가 잠깐 멈춰 안시연을 부추겼다..“혹시 저녁에 시간 나면 저랑 밥 먹으러 가요, 다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고요. ”안시연은 아침에 연정훈과의 약속이 생각났다.“저 이따가 돌아가서 정훈 씨에게 저녁밥을 해줘야 해요.”부승희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산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겠어요?”안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쥐고 있던 가방을 들었다.“잊었어요? 나는 그의 여자 친구예요.”그녀는 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를 또박또박 강조하며 약간 자신을 비웃는 듯 말했다.“정훈 씨가 굶기라도 하면 죽는 건 그가 아니라 저 일걸요.”부승희는 신발 앞 끝으로 그녀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한마디만 하세요. 연정훈을 바람맞힐 수 있는지 없는지.”짧은 침묵이 흘렀다.부승희는 계속해서 부추겼다.“저녁에 꼭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남자들은 다 그래요. 아침과 저녁에 한 말만큼은 절대 믿으면 안 돼요.”안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자 틀린 말은 아니었다.아침은 침대 위에서 시작되고 저녁도 침대 위에서 끝나기 때문에 본심을 어기는 말을 꺼낼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는 두 타이밍이었다.하지만 그는 전에 확실히 매일 그녀가 만든 저녁을 먹으러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다.그녀가 끙끙대며 고민에 빠진 사이 부승희는 답답한 마음에‘쯧’하고 혀를 찼다.“용기가 없어서? 아니면 그 사람이 아까워서?”그녀에게 용기가 없다고 한 것은 그렇다 치고, 아깝다고 한 건 마침 안시연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안시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같이 가요.”부승희의 꿍꿍이가 실현되
밤 여덟 시.안시연은 룸에서 빠져나와 잠시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한숨을 돌렸다.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는 역시 말로만 큰소리를 칠 뿐 직접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부승희가 남자들을 형용하는 말이 떠올랐다.‘쓰레기 같은 X.’정말 그와 찰떡이었다.“누나?”뒤에서 어떤 남자애가 고개를 내밀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안시연은 낯선 사람의 스킨십에 당황에 얼굴을 살짝 피했다.“남자 친구예요?”그녀보다 나이가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했을 때의 호칭을 떠올렸고, 그녀는 술김에 촉촉해진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맞아, 남자 친구야.”“아, 그래요?”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말했다.“누나 노래 엄청나게 잘 부르시던데, 남친한테 알려주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로 해요.”안시연은 술김에 벽에 기대어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남자가 부축하러 가깝게 다가오자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게 룸으로 돌아가 부승희와 함께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즐겼다.한편, 벚꽃동에서.연정훈은 이미 세 번째로 서재의 문을 열어 보았지만 거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9시가 가까워도 안시연은 돌아오지 않았고 핸드폰에도 그녀의 소식이 없었다.테이블 위의 요리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아무런 감정 기복도 없는 것 같았다.다만 소파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그 잘생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면서 입꼬리를 최대한 내리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시곗바늘이 9시를 금방 지날 때 그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안시연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밤새 돌아오지 않을 리는 없을 거야.’그는 거실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오직 조명을 위한 것인지 마음이 찝찝해서인 탓인지 집 안의 불을 모두 켰다.아래층에 서 있던
안시연은 꽤 의아해했다.하지만 주변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일단 물건을 받아 갔다. 비서는 그녀가 물건을 받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연정훈은 회사에 도착하고부터 얼굴에 먹구름을 잔뜩 드리운 채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점심때쯤, 갑자기 비서를 호출하여 몇 분 동안 아무 말 안 하고 고민하다가 안시연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그녀는 연정훈과 안시연이 다투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쳇. 연 대표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다니, 시연 씨도 참 대단한 인물이야.’임무를 마친 그녀는 기분이 좋았고 가는 길에 옆 사무실을 들러 두 친구를 찾았다. 친구들과 함께 나와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곁눈질로 그 속에 처참하게 던져진 익숙한 도시락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머리를 내밀어 확인했다.‘헐, 뭐야... 진짜네.’핑크색의 3단 도시락이 통째로 쓰레기통 안에 누워있었다.친구가 물었다.“무슨 일인데?” “아냐, 아무 일도...” 그녀는 대충 대답하며 식사를 까맣게 잊은 채 급히 본사로 돌아갔다. ‘연 대표님 어떡해!’ 직원 식당에서.장가희는 안시연에게 계속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너의 보온 도시락통을 망가뜨려서...”안시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괜찮아. 그 대신 제육볶음 먹을래.”“좋아!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내가 사줄게.”CEO 사무실 내에서.연정훈은 큰 책상 앞에 서 있었는데 기분은 매우 저기압이었고 숨 막히는 정적이 사무실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그는 만년필의 잉크 카트를 교체하며 비서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물건은 잘 전달했어?”“네, 전달했습니다...”비서의 시선이 흔들렸다.대답을 들은 연정훈의 안색은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 안시연과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잘 생각해 보니 그녀도 마음껏 기분을 풀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 그녀의 행동도 홧김에 그에게 삐친 거라고 볼 수 있었다.그녀가 토라지
안시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와 같은 잔잔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게 했는데 막상 그들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관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점심 메뉴에는 탕수육이 없었어요.”비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그러면 뭐가 있었는데?”“몰라요.”안시연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한 번 본 거라.”“그랬더니?”“그랬더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가득해서 버렸어요.”비서는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숨을 들이켰고 연정훈 역시 아무 말 없었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버리면 안 되나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점심은 뭐 먹었어?”“밖에서 먹었어요.”안시연은 손으로 턱을 살살 문지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 카드로 200만 넘게 썼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연 대표님께서 그 돈이 아까우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그녀를 칭찬했다.“그럴 리가. 잘 썼어. 돈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야.”비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안시연은 어깨를 으쓱했다.연정훈은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비서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비서는 도망치듯 급히 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안시연은 연정훈이 가까이 오자 자리를 내주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렸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티를 안 내고 감추었고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소파에 기대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어제 부승희와 재밌게 놀았어?”“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뭘 좀 많이 샀어요.”“뭘 샀는데?”그가 묻자 안시연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고, 그녀가
연정훈은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뒤에 있는 정교하고 작은 가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완전히 변했다. 더 예뻐지고, 더 순해졌으며, 조금 더 교활해졌다.연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더욱 완벽해졌다. ‘하지만 뭐, 괜찮아.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몰라.’ 손에 있는 담배를 다 피웠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이 전혀 가시지 않자 그는 다시 하나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터를 무심코 내던지자, 테이블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그 소음에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꺼버리고는 휴식실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몸의 물기를 미처 닦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남자에게서 뒤로 안겼다.그는 조용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피하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대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눈 위에 덮었다. 시야가 흐려지면 마음도 같이 마비될 거라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적극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었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런 일을 할 때 거의 산만해하지 않았고 모든 집중력을 두 사람 몸이 와닿는 부위에 놓곤 했다.매일 밤, 그는 벚꽃동 침실에서 자신을 그녀의 몸속에 깊이 담갔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지탱하고 있을 때,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떼고 몸을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엔 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이런 시선은 어떤 남자도 견디기 어려웠고 당장 덮쳐들었을 것이다.그런데 연정훈은 멈췄다.그는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보고 싶었죠. 그런데...”양시연이 부드럽게 말을 하던 중 연정훈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키스했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자 양시연은 잠시 놀라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냈다.곧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서두르지 않는 그들의 키스는 부드럽고 길게 이어졌고 키스가 끝나자 양시연은 살짝 헐떡이며 촉촉해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두 볼이 붉게 물든 양시연은 발끝을 들어 연정훈의 목에 팔을 감고 손끝으로는 연정훈의 귀를 장난스럽게 간지럽히며 속삭였다.“이렇게 빨리 온 거 보면 전화 끊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여 아주머니가 반찬 준비하시는 걸 기다렸어.”양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했지만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걱정스레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요?”“비행기에서 먹었어.”“뭘 먹었는데요?”연정훈은 대답하려다 순간적으로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양시연이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거짓말하지 마요.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진수빈 씨가 정훈 씨랑 같이 왔는데 방금 막 배달을 시키더라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그가 들킨 후 민망한 듯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려 하자 양시연은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낮게 말했다.“장난치지 말고요. 우선 뭘 좀 먹고 씻고 푹 쉬어야 해요.”“안 피곤한데.”“그러면 정훈 씨...아!”양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갑작스럽게 들어 올렸고 그는 몇 걸음 만에 침대로 다가가 양시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몸을 기울였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편히 누웠지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았다.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며 장난스럽게 입을 내밀었다.“나 보고 싶었다는 게 이런 거였어요?”‘뭐야. 온통 엉큼한 생각뿐이라니.’연정훈은 전화를 받은 뒤 감정이 북받쳐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왔다.비행기에서도 그녀에 관한 생각
양시연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 옆에서 갑자기 손 하나가 뻗어와 일곱여덟 개의 포장 음식을 담은 봉투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양시연은 놀랐다.???연정훈은 반 발짝 물러서더니 진수빈에게서 봉투를 받아 들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여 아주머니께서 준비하신 거야. 아마 오리백숙도 있을 거야.”양시연의 눈이 반짝였고 늦은 밤 양지원은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작은 둥근 테이블에 앉아있었다.갑작스럽게 나타난 사위가 하나씩 음식을 꺼내 그녀 앞에 놓았고 양지원은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음. 익숙한 향이야.’마지막 음식 상자가 열리자 양시연이 고개를 쑥 내밀며 확인하더니 감탄했다.“오리백숙이다!”양시연은 얼른 오리백숙을 양지원 앞에 놓았고 양지원은 살짝 헛기침하며 어른으로서의 위엄을 세우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연정훈에게 물었다.“갑자기 여긴 왜 온 거야?”연정훈은 약과 한 조각을 양시연의 접시에 놓아주며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양시연이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보러 왔습니다.”양지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쳇.’양시연은 민망한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연정훈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만해.’하지만 연정훈은 태연한 표정으로 한쪽 손으로 양지원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원래는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는데 세운에서 공항으로 가던 길에 양창수 아저씨를 우연히 만나서 잠시 지체됐습니다.”양시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양지원은 오리백숙 다리를 잡던 손을 멈췄다.“양창수가 공항에 갔었다고?”양지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연정훈은 차분히 말했다.“양석진 씨께서 병환 중이시라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다시 병원에 들러 안부를 여쭙고 왔습니다.”그 말에 모녀는 동시에 긴장했다.“아직도 회복이 안 됐다는 거야?”양지원은 얼굴을 찌푸렸다.“가벼운 병이라며? 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데?”양시연은 연정훈의 태도를 잘 아는 터라 반신반의하며 음식을 씹으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거의 다 나아지신 상태입니다.”
양시연 자신도 하루하루가 정신없었기에 다른 사람을 설득할 여유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양지원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아빠가 너무 바빠서 병날 정도로 일했는데 엄마는 훌쩍 떠나버렸잖아요. 그것도 해외로 갔으니 쫓아갈 수도 없고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아직도 회복 못 하고 여전히 아프셨다면요? 세운에서 혼자 얼마나 외롭고 불쌍하시겠어요.”양지원은 이미 속으로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차분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석진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다만 이야기가 심혜설로 넘어가면서 질투심이 솟아오른 데다 최근 몇 년간 양석진이 자신에게 지나치게 오냐오냐하며 버릇을 잘못 들인 탓에 젊었을 때처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일도 크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양지원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내가 뭐가 아쉬워서? 난 너처럼 남자한테 마음 약해지지 않아.”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알겠어요. 엄마는 걱정 안 한다지만 저는 제 아빠니까 걱정돼요.”그러면서 그녀는 양지원 쪽으로 빠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그러면 제가 지금 아빠한테 전화해 볼까요? 엄마도 듣고 싶으세요?”양지원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나가서 통화해.”양시연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물었다.“정말요? 진짜예요?”양지원은 침묵했다.“...”양지원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자 양시연은 정말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양시연이 전화를 걸기도 전에 양지원이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챘다.“무슨 전화를 걸어. 시간이 몇 시인데 얼른 자.”양지원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양지원을 와락 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안 걱정한다면서요? 근데 사실은 아빠가 바쁘니까 방해될까 봐 걱정되는 거죠? 거긴 이제 막 오전일 텐데요.”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잠든 척했다.양시연은
“쳇. 오글거리고 의지가 연약해.”양지원은 단 세 마디로 양시연을 평가했다.양시연은 양지원이 잠든 줄 알았지만 사실 그는 자는 척하며 양시연과 연정훈의 통화를 끝까지 몰래 엿듣고 있었다.“엄마.”양시연이 살짝 투정을 부리며 말했고 양지원은 슬며시 웃더니 이불 속으로 몸을 말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연정훈 진짜 오는 거야?”양시연은 전화를 끊고 나서 대답했다.“오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 상태 나아지면 저와 같이 돌아가요.”양지원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의아해하는 양시연을 보고 중얼거렸다.“혹시 정훈 씨가 오길 바라는 거예요?”양지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오리백숙 먹고 싶어서 잠깐 사위 덕 좀 보려던 거야. 뭐야.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네.”양시연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양지원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말했다.“다행이에요. 열은 내렸어요. 빨리 나아야 같이 돌아가서 먹죠.”“너 자꾸 돌아가자고 하는데 진짜 내가 빨리 나아지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그냥 연정훈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양지원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장난스럽게 말했다.“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그래?”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양지원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갑자기 정훈 씨와... 음...”양시연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얼굴이 붉어졌고 입술을 꼭 다문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양지원은 여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 두 사람의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상황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양지원은 양시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아이고 아주 못났어. 벌써 그 연정훈한테 완전히 잡혀버렸네.”“그런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완전히 잡고 있거든요. 지금 정훈 씨는...내 말만 들어요!”양지원은 양시연의 말투를 흉내 내며 대꾸했다.“그래. 다 네 말 듣는다. 아
“아 그럼 말 안 할게요. 오빠가 말하세요.”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반대편에서 양시연은 웃으며 양혁수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히 물었지만 양혁수는 혀를 차며 아는 것이 없다는 듯 대답을 하지 않았다.양시연은 변여름을 바라보았고 변여름은 입술을 다물고 입에 지퍼를 채우는 제스처를 했다.양혁수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다가 어쩔 수 없이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한편 변백호는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눈치 좀 챙겨. 우리 집 공주가 언제 사람을 이렇게 친절하게 대했어?”양혁수는 웃으며 변여름에게 과일 주스를 건넸고 변여름은 주스를 받아 들고 고개를 약간 들어 올리며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아직 어렸고 정말 어린 애였기에 모두가 그녀를 귀여워하며 특별히 많이 챙겨주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양혁수는 그저 변여름을 어린 동생처럼 여기며 말하면서도 여전히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신혼인데 기분 어때?”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럭저럭.”‘그럭저럭?’양혁수는 테이블 위의 분위기 조명을 통해 양시연의 얼굴에 기색이 좋은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양혁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양시연 역시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 몰랐다.양시연은 그저 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뿐이었고 그가 괜찮다는 걸 보고 안심했다.마음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며 아마 연정훈이 아침 시간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고 그녀가 사진을 찍어 보내려고 하던 찰나 마치 서로 통하는 듯 먼저 사진을 보냈다.잔치국수 한 그릇이었다.양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빠르게 타자를 했다.[왜 이렇게 간단하게 먹어요?][네가 없으니까 여 아주머니가 귀찮아서 안 해줘.]양시연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사진의 오른쪽 위에 있는 접시 가장자리를 보고 즉시 그가 어린애처럼 장난치는 걸 알았다.[전체 테이블 사진을 찍어
“무사히 도착했어?”“네. 별일 없었어요.”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잠시 후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 거예요. 변씨 가문에서 저녁 먹기로 했어요.”그녀가 먼저 일정을 말했다.“그래. 나도 조금 있다가 아침 먹어야겠다.”이제야 양시연은 연정훈과 14시간의 시차가 있다는 걸 떠올렸고 지금 만약 조선시대였다면 둘은 아마 평생 얼굴도 못 봤을 것이다.“내가 밥 먹을 때 저녁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요.”양시연이 말했다.“알았어.”양시연은 침대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양지원이 문을 두드리자 자리에서 일어났다.모녀는 만나자마자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나가며 최근의 생활 이야기를 나누었다.양혁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양지원은 길게 말하지 않고 이제 많이 회복됐다고만 했지만 양시연은 그 말속에서 당시 양혁수의 부상이 절대 가볍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변씨 가문은 멕하든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가문으로 부유함이 넘쳐흘렀다.화려한 저택은 최고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앞뒤로 백 명 이상의 가정부가 있었고 사치와 즐거움이 극한까지 개발된 곳이었다.양시연이 도착했을 때 변백호는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니. 이렇게 선생님이 직접 나와주시다니 영광이네요.”양시연 말을 마치자 변백호는 곁눈질로 그녀를 힐끗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양지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꿈 깨요. 저는 큰아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양시연은 어이없었다.“...”눈치 빠른 가정부가 미소 지으며 양시연을 안으로 안내했다.몇 개의 정원을 지나자 본채가 보였고 넓은 마당 한가운데에는 긴 식탁이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이미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변백호의 형들은 모두 집을 비웠고 부모님도 외출 중이었으며 집에는 그들 남매만 있었다.양시연이 한눈에 본 것은 양혁수가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긴 식탁 옆 의자에 기대어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밤이 깊었음에도 그는 얼굴에 큰 선글라스를 쓰고 마치 잠든 듯 보였다.그의 옆
양혁수의 상태가 호전된 후 그는 변씨 가문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변씨 가문의 본거지는 멕하든에 있었고 최근에는 양지원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양시연이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양지원은 일부러 전화를 걸어왔다.“연정훈이 너 오는 걸 허락했어?”양시연은 소파에 앉아 맞은편에서 자신이 가져갈 간식을 싸고 있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전화 너머로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그가 허락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요.”양지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좋네. 이제는 꽤 당당해졌구나.”“그럼요. 내가 누구 딸인데.”양시연은 이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여 아주머니가 그러시는데 저는 아직 부족하대요. 언젠가 엄마처럼 남편을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절대 서쪽으로 가지 않게 만들 정도가 돼야 진정한 고수가 된대요.”양지원이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알겠어요. 이제 끊을게요. 공항으로 가야 하거든요.”양지원은 한 마디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조심해서 와.”한편 연정훈은 손목시계를 차며 양시연을 공항까지 데려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양시연이 ‘잘해야 한다’는 한 마디에 그는 어젯밤부터 단 한 순간도 질투하는 것을 티 내지 않았다.차 안은 조용했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혼부부처럼 평범한 분위기를 즐겼다. 한 사람은 집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출장 가는 느낌으로 말이다.사실 연정훈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온저녁 고민한 끝에 그래도 약간의 도도함을 유지하기로 했고 양시연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신경 쓰냐 싶었다.그는 양시연이 양혁수를 만나러 가는 게 단순한 질투 때문만은 아니라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양시연이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다는 것을 깨달았다.신혼부부답게 달콤한 시간에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때였고 그녀와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그녀는 먼저 멕하든으로 양혁수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쯧.’양시연 역시 조금 불편
어차피 양시연도 민지연에게 복수한 적이 있었으니까 민지연이 사과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가 민지연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가문 안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해야 앞으로 누군가 양시연을 괴롭히러 오는 일이 없을 것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표세연을 집에 남겨 식사하라고 권유했다.표세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하. 밥은 뭔 밥이야. 안 먹었는데 이미 배불러.’그런데도 신혼 부부의 좋은 관계를 보고 표세연도 기뻐한 듯했으며 집을 나설 때 양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보니까 예전에 그 점쟁이가 정말 맞춘 것 같아. 연정훈이 반지를 끼면 정혼자를 만날 거라고 했잖아. 봐 결국 널 만났네.”양시연은 그 반지를 처음 봤을 때 연정훈이 이미 결혼한 줄 의심했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표세연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연정훈이 없을 때 양시연에게 몇 마디 중요한 말을 했다.연정훈의 업무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연말 전에 임명이 될 것이라고 했으며 양시연의 귀에 어떤 기업의 이름을 귀띔해 주었다.“정인 그룹은...”“그래서 네가 회사에 자주 가서 익숙해지고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해.”표세연은 말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고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예의 바르게 그녀를 배웅했다.그날 밤 양시연은 이제 본격적인 일이 다가오므로 먼저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려고 했다.“내일 출발해서 양혁수 보러 가려고요.”그 말을 들은 연정훈은 책상 뒤에서 잠시 멈칫했고 잠시 후 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며칠 갈 거야?”“바로 돌아올게요. 양혁수가 괜찮은지 보고 올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두 번 쳐다봤고 그가 별다른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자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잠시 후 연정훈이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갔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의 뒤에서 그를 안
서재의 소파 옆에는 옷들이 흐트러져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입가에 가볍게 달라붙었다.방금 침대에서 벗어났는데 어느새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책상 위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시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는 데만 열중했다.양시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좀 받아요. 계속 울리잖아요.”연정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시간 없어.”“뭐예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툭 치며 투덜거렸다.“할 일도 없잖아요...”게으름을 피우는 게 뻔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좀 쉴래. 하던 거 마저 하자.”양시연은 당황했다!‘연정훈 씨 정말 이렇게까지 목말라 있었단 말이야?’그녀가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자 연정훈은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코를 살짝 찔렀다.“힘들어?”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고 더 이상 그를 노려보는 것도 지쳤다.여전히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녀는 결국 연정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전화선 좀 뽑아줄래요? 너무 시끄러워요.”연정훈도 괜찮다고 생각한 듯연정훈은 가볍게 양시연의 허리를 두드리더니 일어나서 전화선을 뽑아버렸다.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연히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돌아온 연정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다시 안았다.“혹시 급한 일일지도 몰라요.”“급한 일이어도 상관없어.”“하지만...”“지금은 네 옆에만 있고 싶어.”양시연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려지며 진정되었고 그녀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번졌다.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목을 감싸 안았다.사실 그녀도 원하고 있었다.어젯밤 이후 모든 것이 그녀가 예상했던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버렸으며 상황이 고요해지자 양시연의 머릿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