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이 손을 떼는 순간 뒷좌석 분위기는 확연히 식어졌다.그녀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연정훈의 그 손을 못 본 듯 눈을 감은 채 자세를 가다듬고 더 이상 그가 있는 쪽을 향하지 않았다.차 안은 몹시 조용했다.얼마나 지났는지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안시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휙 지나가는 동네 이름은 벚꽃동이었다.연정훈은 그녀를 강남 시티로 데려가지 않았다.‘그래도 뭐, 좋아. 오후에 그곳에서 벌어진 난처한 일 때문에 마침 당분간 강남에 가고 싶지 않았어.’차가 멈추자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한 걸음 먼저 차에서 내린 후 그녀 쪽의 문을 열었다.그녀가 두 번이나 말했다.“저절로 걸을 수 있어요.”하지만 연정훈은 못 들은 척 그녀를 껴안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자는 그녀를 응대하지 않았고 한 마디도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그녀를 침실 침대에 눕혔다.“어디 아픈 곳 있어?”그는 의사를 부를 작정인 듯 그녀에게 물었다.안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없어요.”옆에 서서 손목시계를 벗던 연정훈은 대답을 듣고 그녀의 이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안시연은 그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 말했다.“그냥 부딪혔을 뿐 괜찮아요.”“의사 선생님에게 보이자.”연정훈은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필요 없어요!”안시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부쩍 높였다.방 밖에서 연정훈은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졸리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오늘은 이만 잠 좀 자도 될까요? 일이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해요.”연정훈은 침묵했다.잠시 후에야 그는 그녀에게 답장했다.“피곤하면 쉬어.”안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시선을 돌려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오며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옷을 정리했다.연정훈은 거실에 있었고 그녀는 침실에 있었는데, 한 층 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20분 후 안시연이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오자, 바깥
연정훈은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안시연 곁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그런 그를 잠에서 깨운 것은 주방의 미세한 움직임이었다.방문을 열자 눈부신 햇빛이 거실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안시연은 그를 마주하지 않은 채 아침을 식탁 위에 올렸다.지난 한 달 동안 매일 이랬지만 오늘 아침은 왠지 모르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안시연은 돌아서서 그를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일어나셨어요?”“응.”“아침 드실래요? 제가 다 해놨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뚝배기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입가의 곡선을 몽롱하고 부드럽게 풀어주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말끔히 씻었다.모든 것이 어제와 다름이 없었다.그가 셔츠를 갈아입을 때 안시연이 걸어 들어와 넥타이를 고르는 것을 도왔다.그녀의 동작은 가볍고 침착하며 심지어 어제보다 더 부드러웠다.그녀가 돌아서서 얼굴을 마주하니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었고 입꼬리를 약간 움직였다.안시연은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먼저 입을 열었다.“양혁수 씨의 일을 물어보시려는 거죠?”연정훈은 말이 없었다.안시연은 혼잣말하는 셈 치고 계속 말했다.“전에 기사님이 실수로 양혁수 씨의 차와 충돌사고가 생겨서 제가 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어제 부승희 씨와 놀러 갔다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나쁜 사람을 만났을 때 저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양혁수 씨에요.”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연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나에게 말한 적이 없잖아.”“바쁘시잖아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내가 언제 너의 일에 귀찮아했어?”안시연은 넥타이를 조이고 손을 내려놓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었다.“그건 그렇다 치고, 저는 정훈 씨가 안쓰러워요. 이미 아주 바쁘신데, 저의 이런 보잘것없는 일도 처리해야 하나 싶어서요.”안쓰럽다.평상시에 그녀는 이런 말을 할 때면 틀림없이 얼굴
마침 휴일이라 안시연은 기분 전환할 시간이 충분했다.그녀는 어제 병원 방문을 놓치는 바람에 아침 일찍 외할머니를 뵈러 가려고 했지만, 뜻밖에도 외할머니께서 먼저 전화를 걸어오셨다.“바쁘면 급하게 오지 말고 다음에 친척이 오면 그때 널 부를게.”안시연은 어리둥절했다.‘무슨 친척이 이렇게 자주 오는 거지?’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여러 가지 일들로 가득 차서 친척의 신분을 추리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머니의 안부를 부탁했다.부승희는 어제 그녀를 잘 챙기지 못한 것에 죄책감이 들어서인지 특별히 그녀와 놀러 가자고 했다.마침 안시연에겐 부승희 같은 가이드가 부족했고 두 사람은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만난 후 부승희는 그녀의 제안을 듣고 흥미로운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이미지를 탈바꿈시키려고요?”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참 좋은 생각이에요. 다 갈아치우고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안시연은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자신의 긴 생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좀 짧게 자르고 싶어요.”“저랑 같이 가요, 더 이상 청순한 스타일 말고 센 언니 컨셉으로 가보는 거예요.”안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센 언니는 됐어요. 너무 오바예요.”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부씨 가문 넷째인 신분 덕에 걸림돌 없이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안시연은 긴 머리를 쇄골에 살짝 닿는 중단발 길이로 잘랐고, 차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시에 단정하고 산뜻한 이미지였다.부승희는 옆에서 연신 감탄했다.“여신급 비주얼... 미쳤어요.”커트 외에도 그녀들은 쇼핑몰의 7개 층을 모두 돌아보았다.옷과 여러 가지 패션 아이템 외에 인테이러가구와 장식품까지 빠짐없이 둘러보았다.가방을 살 때, 안시연은 한 글로벌 한정판 명품 가방이 마음에 들었는데 직원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승희 씨, 죄송한데 이 가방은 저희 점장님께서 다른 분을
안시연은 연정훈이 준 카드를 16억 넘게 쓰고 부승희의 차에 앉아 영수증을 체크하고 있을 때 자신도 이 거액의 지출에 충격을 받았다.‘미쳤어, 진짜.’부승희는 이승우에게 미친 듯이 카톡을 보내며 사실을 과장되게 보탰다.“야, 연정훈 이제 진짜 고생 많겠다.”이승우가 답장했다.“응? 뭔 고생? 얼마나 많은데? 빨리 말해 봐.”“...”부승희는 맞은편에서 무서운 스피드로 타이핑하다가 잠깐 멈춰 안시연을 부추겼다..“혹시 저녁에 시간 나면 저랑 밥 먹으러 가요, 다 먹고 마사지도 받으러 가고요. ”안시연은 아침에 연정훈과의 약속이 생각났다.“저 이따가 돌아가서 정훈 씨에게 저녁밥을 해줘야 해요.”부승희는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산 사람이 굶어 죽기라도 하겠어요?”안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쥐고 있던 가방을 들었다.“잊었어요? 나는 그의 여자 친구예요.”그녀는 여자 친구라는 네 글자를 또박또박 강조하며 약간 자신을 비웃는 듯 말했다.“정훈 씨가 굶기라도 하면 죽는 건 그가 아니라 저 일걸요.”부승희는 신발 앞 끝으로 그녀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한마디만 하세요. 연정훈을 바람맞힐 수 있는지 없는지.”짧은 침묵이 흘렀다.부승희는 계속해서 부추겼다.“저녁에 꼭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남자들은 다 그래요. 아침과 저녁에 한 말만큼은 절대 믿으면 안 돼요.”안시연이 곰곰이 생각해 보자 틀린 말은 아니었다.아침은 침대 위에서 시작되고 저녁도 침대 위에서 끝나기 때문에 본심을 어기는 말을 꺼낼 확률이 급격히 높아지는 두 타이밍이었다.하지만 그는 전에 확실히 매일 그녀가 만든 저녁을 먹으러 꼬박꼬박 집에 돌아왔다.그녀가 끙끙대며 고민에 빠진 사이 부승희는 답답한 마음에‘쯧’하고 혀를 찼다.“용기가 없어서? 아니면 그 사람이 아까워서?”그녀에게 용기가 없다고 한 것은 그렇다 치고, 아깝다고 한 건 마침 안시연의 예민한 신경을 자극했다.안시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같이 가요.”부승희의 꿍꿍이가 실현되
밤 여덟 시.안시연은 룸에서 빠져나와 잠시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한숨을 돌렸다.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도,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는 역시 말로만 큰소리를 칠 뿐 직접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부승희가 남자들을 형용하는 말이 떠올랐다.‘쓰레기 같은 X.’정말 그와 찰떡이었다.“누나?”뒤에서 어떤 남자애가 고개를 내밀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댄 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안시연은 낯선 사람의 스킨십에 당황에 얼굴을 살짝 피했다.“남자 친구예요?”그녀보다 나이가 조금 어려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했을 때의 호칭을 떠올렸고, 그녀는 술김에 촉촉해진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맞아, 남자 친구야.”“아, 그래요?”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말했다.“누나 노래 엄청나게 잘 부르시던데, 남친한테 알려주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로 해요.”안시연은 술김에 벽에 기대어 가볍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남자가 부축하러 가깝게 다가오자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렇게 룸으로 돌아가 부승희와 함께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즐겼다.한편, 벚꽃동에서.연정훈은 이미 세 번째로 서재의 문을 열어 보았지만 거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9시가 가까워도 안시연은 돌아오지 않았고 핸드폰에도 그녀의 소식이 없었다.테이블 위의 요리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여전히 아무런 감정 기복도 없는 것 같았다.다만 소파에 홀로 앉아 있을 때 그 잘생긴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면서 입꼬리를 최대한 내리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시곗바늘이 9시를 금방 지날 때 그는 눈을 조용히 감았다.그는 지금도 여전히 안시연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밤새 돌아오지 않을 리는 없을 거야.’그는 거실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오직 조명을 위한 것인지 마음이 찝찝해서인 탓인지 집 안의 불을 모두 켰다.아래층에 서 있던
안시연은 꽤 의아해했다.하지만 주변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일단 물건을 받아 갔다. 비서는 그녀가 물건을 받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오전, 연정훈은 회사에 도착하고부터 얼굴에 먹구름을 잔뜩 드리운 채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점심때쯤, 갑자기 비서를 호출하여 몇 분 동안 아무 말 안 하고 고민하다가 안시연에게 도시락을 전달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그녀는 연정훈과 안시연이 다투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쳇. 연 대표님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다니, 시연 씨도 참 대단한 인물이야.’임무를 마친 그녀는 기분이 좋았고 가는 길에 옆 사무실을 들러 두 친구를 찾았다. 친구들과 함께 나와 쓰레기통을 지나칠 때, 곁눈질로 그 속에 처참하게 던져진 익숙한 도시락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머리를 내밀어 확인했다.‘헐, 뭐야... 진짜네.’핑크색의 3단 도시락이 통째로 쓰레기통 안에 누워있었다.친구가 물었다.“무슨 일인데?” “아냐, 아무 일도...” 그녀는 대충 대답하며 식사를 까맣게 잊은 채 급히 본사로 돌아갔다. ‘연 대표님 어떡해!’ 직원 식당에서.장가희는 안시연에게 계속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너의 보온 도시락통을 망가뜨려서...”안시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괜찮아. 그 대신 제육볶음 먹을래.”“좋아!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내가 사줄게.”CEO 사무실 내에서.연정훈은 큰 책상 앞에 서 있었는데 기분은 매우 저기압이었고 숨 막히는 정적이 사무실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그는 만년필의 잉크 카트를 교체하며 비서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물건은 잘 전달했어?”“네, 전달했습니다...”비서의 시선이 흔들렸다.대답을 들은 연정훈의 안색은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 안시연과 더 따지지 않기로 했다.잘 생각해 보니 그녀도 마음껏 기분을 풀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 그녀의 행동도 홧김에 그에게 삐친 거라고 볼 수 있었다.그녀가 토라지
안시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와 같은 잔잔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게 했는데 막상 그들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관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점심 메뉴에는 탕수육이 없었어요.”비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그러면 뭐가 있었는데?”“몰라요.”안시연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한 번 본 거라.”“그랬더니?”“그랬더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가득해서 버렸어요.”비서는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숨을 들이켰고 연정훈 역시 아무 말 없었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버리면 안 되나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점심은 뭐 먹었어?”“밖에서 먹었어요.”안시연은 손으로 턱을 살살 문지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 카드로 200만 넘게 썼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연 대표님께서 그 돈이 아까우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그녀를 칭찬했다.“그럴 리가. 잘 썼어. 돈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야.”비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안시연은 어깨를 으쓱했다.연정훈은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비서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비서는 도망치듯 급히 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안시연은 연정훈이 가까이 오자 자리를 내주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렸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티를 안 내고 감추었고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소파에 기대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어제 부승희와 재밌게 놀았어?”“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뭘 좀 많이 샀어요.”“뭘 샀는데?”그가 묻자 안시연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고, 그녀가
연정훈은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뒤에 있는 정교하고 작은 가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완전히 변했다. 더 예뻐지고, 더 순해졌으며, 조금 더 교활해졌다.연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더욱 완벽해졌다. ‘하지만 뭐, 괜찮아.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몰라.’ 손에 있는 담배를 다 피웠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이 전혀 가시지 않자 그는 다시 하나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터를 무심코 내던지자, 테이블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그 소음에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꺼버리고는 휴식실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몸의 물기를 미처 닦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남자에게서 뒤로 안겼다.그는 조용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피하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대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눈 위에 덮었다. 시야가 흐려지면 마음도 같이 마비될 거라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적극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었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런 일을 할 때 거의 산만해하지 않았고 모든 집중력을 두 사람 몸이 와닿는 부위에 놓곤 했다.매일 밤, 그는 벚꽃동 침실에서 자신을 그녀의 몸속에 깊이 담갔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지탱하고 있을 때,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떼고 몸을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엔 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이런 시선은 어떤 남자도 견디기 어려웠고 당장 덮쳐들었을 것이다.그런데 연정훈은 멈췄다.그는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