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와 같은 잔잔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게 했는데 막상 그들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관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점심 메뉴에는 탕수육이 없었어요.”비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그러면 뭐가 있었는데?”“몰라요.”안시연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한 번 본 거라.”“그랬더니?”“그랬더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가득해서 버렸어요.”비서는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숨을 들이켰고 연정훈 역시 아무 말 없었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버리면 안 되나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점심은 뭐 먹었어?”“밖에서 먹었어요.”안시연은 손으로 턱을 살살 문지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 카드로 200만 넘게 썼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연 대표님께서 그 돈이 아까우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그녀를 칭찬했다.“그럴 리가. 잘 썼어. 돈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야.”비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안시연은 어깨를 으쓱했다.연정훈은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비서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비서는 도망치듯 급히 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안시연은 연정훈이 가까이 오자 자리를 내주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렸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티를 안 내고 감추었고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소파에 기대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어제 부승희와 재밌게 놀았어?”“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뭘 좀 많이 샀어요.”“뭘 샀는데?”그가 묻자 안시연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고, 그녀가
연정훈은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뒤에 있는 정교하고 작은 가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완전히 변했다. 더 예뻐지고, 더 순해졌으며, 조금 더 교활해졌다.연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더욱 완벽해졌다. ‘하지만 뭐, 괜찮아.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몰라.’ 손에 있는 담배를 다 피웠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이 전혀 가시지 않자 그는 다시 하나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터를 무심코 내던지자, 테이블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그 소음에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꺼버리고는 휴식실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몸의 물기를 미처 닦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남자에게서 뒤로 안겼다.그는 조용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피하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대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눈 위에 덮었다. 시야가 흐려지면 마음도 같이 마비될 거라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적극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었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런 일을 할 때 거의 산만해하지 않았고 모든 집중력을 두 사람 몸이 와닿는 부위에 놓곤 했다.매일 밤, 그는 벚꽃동 침실에서 자신을 그녀의 몸속에 깊이 담갔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지탱하고 있을 때,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떼고 몸을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엔 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이런 시선은 어떤 남자도 견디기 어려웠고 당장 덮쳐들었을 것이다.그런데 연정훈은 멈췄다.그는
안시연은 도대체 어떤 친척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그녀가 여러 번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보장한 후에야 외할머니는 안심했다. 오후에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지만, 그녀는 바쁜 와중에 운전 학원 예약도 하고, 성진대의 각 전업과 수업을 훑어보고 관심 있는 것들을 모두 골랐다. ‘그래, 연애보다는 일이지.’ 연정훈을 머릿속에서 지우니 효율이 세 배는 더 높아졌다. 하지만 퇴근 시간에 주차장에서 그의 차를 보자 그녀는 다시 심리적 준비가 필요했다. 연정훈은 차 안에서 거울로 그녀가 제자리에서 기도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악마야? 기도까지 해야 해?’ 안시연은 마음의 준비를 끝낸 후 차 옆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차에 앉자마자 그녀만의 향기가 잔잔한 파도처럼 그에게 밀려왔다. 향은 너무 강하지 않았고 은은하게 코를 간지럽힐 정도였으며 연정훈은 오후의 피로가 싹 가셔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병원 가려고?” “네!” 안시연은 그를 보지 않고 대답하며 지워진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집안 친척이라고 하셔서 아마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며 연정훈을 한번 쳐다보았다.“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연정훈은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빨리 끝내.”그는 분명히 그녀가 빨리 돌아오길 원하는 것 같았고 안시연은 그가 점심때의 일을 계속 이어서 할 것으로 추측했다. ‘하... 점심에 해주겠다고 할 땐 도망쳐버리고 내 소중한 저녁 시간까지 뺏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연정훈은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그녀의 언짢은 심정을 눈치채고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역시 여인의 아름다움은 성격과 비례하는 것 같았다. 그는 키보드를 누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30분.” 안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성격이 좋고 그에게 호의도 있었기에 이전에 당한 불쾌한 일들은
안시연은 엄마를 만나는 수많은 상상을 해봤지만 이렇게 뺨을 맞는 당황스러운 시작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저를 함부로 때리는 거예요?” 드디어 양지원에게 맞은 그 한 대를 그녀의 딸에게 돌려주었다는 생각에 소현정은 속이 시원했다. 그녀는 친엄마의 가면을 쓰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네 엄마니까! 네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권력 있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맡기며 자존심도 없는 거 보니, 이 정도면 때릴 법하지 않아?!” 안시연은 화가 치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눈앞의 여자가 자신의 엄마일 거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엄마, 엄마...’ 그녀는 눈시울이 한순간에 붉어졌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말했다. “절 키운 적도 없으면서 저한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어요!”소현정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 못된 년, 재수 없는 건 엄마랑 똑 닮았어.’ 그녀는 다시 한 대 더 때리려 했지만 안시연은 빠르게 몸을 피했다. “소현정 씨, 다시 손을 대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소현정은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외할머니가 안시연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그녀가 매우 착하고 말 잘 듣는 성격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안시연은 요즘 따라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또 연정훈에게 금방 상처를 받았으므로 이미 자신의 원칙과 자존심이 너무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낳아 주기만 하고 직접 길러주지도 않은 잔인한 엄마에게 결코 비굴하게 굴 수는 없었다.“나는 네 엄마니까 때리든 말든 내 맘대로 하는 거야!”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신분으로 눌러보려 했지만 안시연은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에요!”“나는 제삼자로 살고, 자식을 버린 엄마는 없어요!”그녀는 마치 그동안의 억울함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소리쳤다.그녀는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고, 어릴 때부터 아
안시연은 이전에 주지혁이 자주 외할머니로 자신을 위협하는 바람에 깊은 트라우마가 생겨 소현정의 말을 듣고 즉시 물러서며 되물었다. “외할머니께 말하려고요?” 소현정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자 안시연이 계속 말했다. “외할머니는 방금 심장 수술을 받으셨잖아요!” 소현정은 그녀가 진심으로 외할머니에게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되면 이 감정을 이용해 안시연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너무 직접적으로 나가지 않기로 했다. “시연아, 오해하지 마. 네 외할머니도 엄마의 엄마인데, 내가 어떻게 친엄마를 해칠 수 있겠니?” 안시연의 긴장된 몸이 조금 풀렸다. ‘그래... 지금 눈앞의 사람은 적어도 외할머니의 친딸인데,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를 해칠 리가 없어.’ 소현정은 안시연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보고 눈물까지 짜내며 계속 설득했다. 그러던 중, 말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너와 연정훈은...” 안시연은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소현정은 내심 초조했다. 안시연이 연정훈 옆에 있는 한, 그녀는 하루 종일 걱정과 불안에 떨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오성호는 M 국에 갔고 이런 일을 전화로 말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더 강요하지 않을게.”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고, 외할머니는 그녀들이 말이 안 통할지 걱정해서인지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안시연은 휘청거리는 외할머니를 보더니 심장이 멎는 듯했고 재빨리 어르신을 부축하여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외할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외할머니는 그녀의 억울함을 알고 두어 마디 한 후 그녀를 잡고 눈물을 흘
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변태 아니야?’이틀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얼굴을 붉힌 이 순간, 연정훈은 매우 만족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똑바로 말해.”만약 자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이 조명이 밝게 비추는 곳에서 자신의 옷을 벗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사실을 절반만 말하기로 결정했다.“엄마가 때렸어요.”연정훈은 이때까지 안시연의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 대답은 그의 예상밖에 있었다.“엄마라고?”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가족생활은 그녀를 항상 우울하고 열등하게 만들었다.“엄마는 항상 밖에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왔어요.”“왜 때렸는데?”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당신 때문이에요.”연정훈이 말이 없자 안시연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는 제가 당신 차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당신을 알아봤고 제가 당신의 애인을 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게 되었죠.”그녀는 처음으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인정했다.연정훈은 미간을 찡그렸다.“때리고 나서는?”안시연이 대답했다.“저에게 당신과 관계를 끊으라고 했어요.”연정훈은 다시 침묵했다.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래서, 네 결정은?”안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결정할 권리가 있나요?”그녀는 자신의 경지를 비웃는 듯 피식 웃었다.“저는 당신이 산 물건 아닌가요? 끊을지 계속할지, 당신이 정하는 거잖아요.”연정훈은 ‘사다’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의미는 또 그를 조금 기쁘게 했다.‘그래, 안시연은 내 것이야. 어떻게 하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든 말든, 그녀는 나를 떠날 수 없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쓸모없는 걱정뿐이야.’“이리 와.”그가
연정훈의 한 마디 도발에 안시연은 화가 나 몸을 꽉 조였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연정훈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제압당할 뻔했다.항상 말 잘 듣던 집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보냈다.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정말로 그의 얼굴을 긁어버릴지도 모른다.연정훈은 그녀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눕혔다.안시연은 비명이 끊기지 않았고 테이블 전체가 그들의 움직임에 흔들릴 정도였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좀 조용히 해, 이웃들이 네 소리에 놀라겠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가끔 숨 막히는 느낌도 들어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팔을 세게 물었다.연정훈은 낮게 신음하며 힘을 약간 줄여 그녀에게 숨 돌릴 틈을 주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안시연은 조금 더 버텨보려 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말았고 그에게 빌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하고 또 그녀의 얼굴을 돌려 상체가 크게 비틀어진 자세로 그녀와 키스했다.안시연은 이대로 그의 손아귀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세상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네 엄마 일은 내가 해결할게.”안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촉촉한 눈을 가까스로 뜨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꽉 잡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찾지 마세요...”“그럼, 네 엄마 말 듣고 나랑 헤어지려고?”안시연은 그 말속 경고의 뜻을 알아듣고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연 대표님께서 뭐든 가능하시다면, 다른 일을 도와주시면 좋겠어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역시 똑똑해졌어.’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안시연은 몸이 굳어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견디기 어려웠다.“무슨 일을 도와줄까?”안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조기 승진하고 싶어요.”연정훈은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대답했다.“다
안시연은 일어난 후 한 번도 연정훈에게 좋은 태도로 대한 적이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나쁜 사람...’전에 그를 매너 있는 신사와 연결 지은 자신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정말 꼬리를 감추고 있는 늑대와 다름이 없었다.그녀가 토라져 연정훈과 말을 걸지 않자 그는 오히려 더 안심되었다.적어도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 화가 없는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게다가,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의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탕! 탕!그녀는 면 두 그릇을 작지 않은 힘으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연정훈은 신문을 내려놓고 한 번 쳐다보더니 그저 웃고 싶었다.‘화가 단단히 났네.’그녀는 다양한 아침 메뉴 대신 평범해 보이는 면 두 그릇만 만들었고, 자신의 그릇에만 계란후라이를 하나 올렸다.‘화는 내는 방식이 왜 이따위야...’그의 동작이 잠시 멈추자 안시연은 그가 싫어하는 줄 알고 머리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침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드시기 싫으면 회사에서 드세요.”연정훈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네 몸은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내가 책임져야지. 네가 직접 만든 아침을 트집 잡을 정도로 양심이 없는 건 아니야.”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를 악물며 그가 머리를 숙여 면을 먹는 동안 그를 한 눈 노려보았다.그리고 연정훈이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깔고 계란후라이를 입에 쑤셔 넣었다.오늘의 계란후라이는 반숙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고, 노른자가 입에서 톡 터지며 담백한 맛이 입속을 꽉 채우자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연정훈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았다.그때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귀 뒤에서 떨어져 그릇 안에 닿을 것만 같았다.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그러자 안시연은 밥을 먹던 동작을 멈췄다.따스한 아침 햇살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을 뜨겁게 비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